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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2)

당육선공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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頃者每年 從江西湖南浙東浙西淮南等道하여 都運米一百一十萬石하여 送至河陰할새
其中 減四十萬石하여 留貯河陰倉하고 餘七十萬石 送至陝州하여 又減三十萬石하여 留貯太原倉하고 唯餘四十萬石 送赴渭橋하여 輸納이라
詳問河陰太原等倉留貯之意하니 蓋因往年蟲旱하여 關輔荐饑일새
當崔造作相之初하여 懲元琇罷運之失하여 遂請每年 轉漕米一百萬石하여 以贍京師러니
比至中塗하여 力殫歲盡일새 所以節級停減하여 分貯諸倉이라가
每至春水初通하고 江淮所搬 未到하여 便取此米入運하여 免令停滯舟船하고
江淮新米 至倉이어든 還復留納填數하여 輪環貯運홈이 頗亦協宜注+① 食貨志 “德宗以給事中崔造敢言為能立事, 用為相. 造素嫉錢穀諸使顓利罔上, 乃奏諸道觀察使․刺史選官部送兩稅至京師, 廢諸道水陸轉運使及度支巡院․江淮轉運使, 以度支․鹽鐵歸尙書省, 宰相分判六尙書. 以戸部侍郞元琇判諸道鹽鐵榷酒, 侍郞吉中孚判度支諸道兩稅. 增江淮之運, 浙江東西歲運米七十五萬石, 復以兩稅易米百萬石, 江西․南․鄂岳․福建․嶺南米亦百二十萬石, 詔浙江東西節度使韓滉․淮南節度使杜亞運至東西渭橋倉.”하니 不必每歲 加搬하여 以增不急之費어늘
所司 但遵舊例하고 曾不詳究源由하여 邇來七年 積數滋廣일새
臣近勘河陰太原等倉見米하니 猶有三百二十餘萬石하고 河陰一縣 所貯尤多하여 倉廪充盈하여 隨便露積하니
舊者未盡하고 新者轉加하여 歲月漸深하니 耗損增甚이라
縱絶江淮輸轉이라도 且運此米入關하면 七八年間 計猶未盡이요
況江淮轉輸 搬次不停하니 但恐過多언정 不慮有闕이니이다


8-4-16 최근 매년 강서江西호남湖南절동浙東절서浙西회남淮南 등의 에서 모두 쌀 110만 석을 운송하여 하음河陰에 도달하는 동안에
그중 40만 석을 감하여 에 남겨두고 나머지 70만 석을 보내어 섬주陝州에 이르러서 다시 30만 석을 감하여 에 남겨두고, 다만 남은 40만 석을 위교渭橋로 보내어 수납輸納하고 있습니다.
이 하음창과 태원창 등에 남기는 뜻을 물었는데, 대개 지난날 충해蟲害한발旱魃로 인하여 관보關輔가 거듭 기근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매년 쌀 1백만 석을 조운漕運하여 경사京師를 넉넉하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중도에 이르러서 힘도 고갈되고 시기도 다하였기 때문에 이를 여러 창고倉庫에 나누어 저장하였다가,
매번 봄물이 처음으로 통하고 강회江淮에서 운송한 것이 도착하기 전에 바로 여러 창고에 남겨두었던 쌀을 취하여 운송해 들이도록 하여 선박을 머물러 있게 한 명령을 해제하였고,
강회江淮의 새 쌀이 창고에 도착하면 다시 남겨서 그 액수額數를 채웠습니다. 차례로 돌아가며 곡식을 저장하고 운송하는 것이 상당히 이치에 맞았습니다.注+① 當崔造作相之初……頗亦協宜:≪新唐書≫ 〈食貨志〉에 “德宗이 給事中 崔造가 바른말을 하는 것으로 능히 일을 제대로 세울 수 있을 것이라 여겨 재상으로 등용하였다. 최조는 평소 錢穀을 맡은 諸使들이 이익을 독점하여 황상을 기망하는 것을 혐오하여, 마침내 諸道의 觀察使․刺史가 관원을 선발하여 兩稅를 수송하여 京師에 이르게 하고, 諸道의 水陸轉運使․度支의 巡院․江淮轉運使를 폐지하고, 度支․鹽鐵은 尙書省으로 귀속시키고, 재상들이 여섯 尙書의 일을 분담하여 맡도록 상주하였다. 이에 戸部侍郞 元琇에게 諸道의 鹽鐵과 榷酒를 담당하게 하고, 侍郞 吉中孚에게 度支의 諸道兩稅를 담당하게 하였다. 江淮의 조운의 액수를 증대하여 浙江 동서에서 매년 쌀 75만 석을 운송하게 하였고, 다시 兩稅를 가지고 쌀 100만 석과 바꾸어서 江西․湖南․鄂岳․福建․嶺南의 쌀 120만 석을 浙江東西節度使 韓滉과 淮南節度使 杜亞에게 조칙을 내려 운송하여 東西의 渭橋倉에 이르게 하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해마다 쌀을 운반하여 불필요한 비용을 증대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담당하는 관원이 다만 옛 관례를 따르고 그 원인을 결코 상세히 구명하지 않아서 최근 7년 동안에 저축한 수량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 때문에 이 최근에 하음창과 태원창 등에서 현재 보유한 미곡을 살펴보니, 여전히 320여만 석이나 있고, 하음河陰에 저축한 것이 매우 많아서 창고가 가득하여 편의대로 노적露積을 하니,
옛것은 아직 다 쓰지 못하고 새것은 점점 더하여, 세월이 감에 따라 손실되는 곡식이 더욱 증대되고 있습니다.
비록 강회江淮의 운송을 중단하더라도 장차 여기의 쌀을 운반하여 관중에 들이면 7, 8년 동안을 쓰고도 남습니다.
하물며 강회江淮에서 운송하는 선박이 그치지 않으니, 다만 지나치게 많을까 염려되지 비는 것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역주
역주1 河陰倉 : 唐나라 開元 22년(734) 京兆尹 裴耀卿의 건의로, 동남방의 조운에 편리하게 하려고 河陰(지금의 河南 紫闻县) 북쪽 古汴河口에 하음창을 쌓고 아울러 縣을 두었다. 江淮 지역에서 조운한 양곡을 汴渠(지금의 河南省 开封市) 서쪽에서부터 운반하여 여기로 와서, 하음창에 저장했다가, 뒤에 물살을 보아 운반하여 黄河와 渭水를 거쳐 長安으로 운반하였다. 창고를 설치한 이후로, 양자강의 배는 황하로 들어가지 못하고 황하의 배는 洛口로 들어가지 못하고, 양쪽 다 河陰, 柏崖原, 永豊, 渭南 등의 창고를 거쳐 차례로 전운하였다.
역주2 太原倉 : ≪新唐書≫ 〈食貨志〉에 “開元 22년(734) 8월에 玄宗이 裴耀卿의 말을 따라 河陰縣에 河陰倉을 두고, 河淸縣에 柏崖倉을 두고, 三門 동쪽에 集津倉을 두고, 삼문 서쪽에는 鹽倉을 두고, 삼문 북쪽으로 산길 18리의 길을 열어서 소용돌이치는 물길의 험함을 피하였다. 長江과 淮河로부터 鴻溝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모두 하음창에 수송하고, 하음에서 含嘉倉으로 운송하고 또 太原倉으로 운송하였으니, 이를 ‘北運’이라고 한다. 태원창부터는 渭水로 배를 띄워 京師에 이르렀다. 모두 3년 동안 700만 석을 운송하여 陸運의 비용 40만 貫을 절약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3 崔造 : 唐나라 代宗과 德宗 때의 문신으로, 字는 玄宰이며 博陵 安平 사람이다. 建中 4년(783) 朱泚의 난이 일어났을 적에 建州刺史로 있었는데,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德宗을 도와 난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덕종이 가상히 여겨 京師로 소환하였는데, 마침 외삼촌 源休가 朱泚에게 가담하였다가 주벌을 당하자, 疏를 올려 죄를 청하고 감히 대궐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덕종이 禮를 안다고 칭찬하며 給事中의 벼슬을 내렸다가 貞元 2년(786) 마침내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최조는 韓會와 盧東美, 張正則과 서로 어울리며 王佐의 인재들로 자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四夔라고 불렀다고 한다.(≪新唐書≫ 〈崔造傳〉)
역주4 崔造가……징계하여 : ≪舊唐書≫ 〈崔造傳〉에 “崔造는 元琇와 평소 우의가 두터워, 원수가 使職에서 파직된 이후에 鹽鐵의 임무를 맡기고자 하였는데, 韓滉이 바야흐로 轉運을 맡고 있어서 朝廷에서는 그가 조운하는 데 의지하였고 한황이 조운의 직무를 오랫동안 행하였으므로 갑자기 바꿀 수가 없었다. 德宗은 다시 한황을 江淮轉運使로 삼고, 나머지는 최조가 조목조목 상주한 대로 하였다. 원수는 한황의 성품이 강직하여 제압하기 어렵다고 보아, 마침내 다시 江淮의 轉運에 대해 상주하여, 그 江南의 쌀이 長江에서부터 楊子에 이르기까지 모두 18리를 한황이 주관하고 楊子 이북은 원수가 주관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한황이 이 소식을 듣고는 노하여 원수가 염철의 일을 맡아 행한 잘못을 캐내어 論奏하니. 덕종은 부득이하여 判使에서 원수를 파직하였다.[造與元琇素厚 罷使之後 以鹽鐵之任委之 而韓滉方司轉運 朝廷仰給其漕發 滉以司務久行 不可遽改 德宗復以滉為江淮轉運使 餘如造所條奏 元琇以滉性剛難制 乃復奏江淮轉運 其江南米 自江至楊子凡十八里 請滉主之 楊子已北 琇主之 滉聞之 怒掎摭琇鹽鐵司事論奏 德宗不獲已 罷琇判使]” 하였다.
역주5 백성들의……감하여 : 원문은 ‘節級停減’이다. ≪資治通鑑≫ 권201 ‘節級遣還’의 胡三省 註에 “節級은 오늘날 사람들이 ‘節次’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節級 猶今人言節次也]”라고 하였다. 또한 ≪舊唐書≫ 〈食貨志〉에 물자를 운반하는 것과 관련하여 ‘節級’이 몇 차례 나오는데, 그중 ‘節級取便’이라 하였는데, ≪二十四史全譯 舊唐書≫에는 ‘節級’을 ‘逐級’으로 번역하였다. 또 ‘節級輸粟’이라 하였는데, ≪舊唐書 食貨志 譯註≫(渡邊信一郞, 汲古書院, 2018)에서도 次序나 等級을 이르는 말로 보았다. 본서에서도 이를 참조하여 번역하였다.
역주6 (淮)[湖] : 저본에는 ‘淮’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食貨志〉에 의거하여 ‘湖’로 바로잡았다.

당육선공주의(2)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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