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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2)

당육선공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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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伏以劉士寧 昏荒暴慢하여 惡貫久盈호되 聖情愛人하사 久爲含忍이러니 親離衆叛注+① 左隱四年 “衆仲對公曰 ‘阻兵無衆, 安忍無親, 衆叛親離, 難以濟矣.’”하여 自取奔亡이라
不勞師徒하고 克靖方鎭하니 恭承宣諭 欣賀實深이나
然梁宋之間 地當要害하여 鎭壓齊魯하며 控引江淮하니 得其人이면 則安則强이요 失其人이면 則危則弱하나니
今士寧見逐 雖是衆情이나 萬榮總軍 且非朝旨
此亦安危强弱之機也注+② 藩鎭傳 “劉佐, 滑州人. 以討李靈耀功爲汴宋節度使. 後爲假子樂士朝所酖. 以其子士寧為留後. 士寧忍暴, 嘗手殺人杯案間. 每畋獵, 數日乃還. 其厭苦不服. 大將李萬榮者, 得衆心, 士寧忌之, 奪其兵, 使攝州事. 九年十二月, 嘗引衆萬畋城南, 未還, 萬榮晨入府, 召所留親兵告曰 ‘天子有詔召大夫, 俾我代節度. 人賜錢三萬.’ 士皆拜. 於是分兵守諸門, 使告士寧曰 ‘詔書召大夫, 宜速去, 不然, 事急且傳首以獻.’ 士寧知衆不與, 奔京師. 詔就第, 禁出入. 萬榮斬其支黨數十人. 拜萬榮兵馬留後.” 陛下 審之愼之하소서


10-3-2 삼가 생각하건대, 유사녕이 정신이 혼란하고 흉포하고 오만하여 성상의 마음이 인민을 사랑하셔서 오래도록 참으셨는데, 유사녕의 가까운 사람이 떠나가고 그 무리들이 배반하여注+① 親離衆叛:≪春秋左氏傳≫ 隱公 4년에 도망하는 상황을 자초하였습니다.
군사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방진方鎭을 평정할 수 있었으니, 삼가 선유宣諭를 받들어 경하하는 마음이 진실로 깊습니다.
그러나 지역이 요해처要害處에 해당하여 지역을 진압鎭壓하고 지역을 제어할 수 있으니, 올바른 사람을 얻으면 편안해지고 강해질 것이고 올바른 사람을 얻지 못하면 위태로워지고 약해질 것입니다.
지금 유사녕이 쫓겨난 것이 비록 군중의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이만영이 군사를 통솔하는 것은 결코 조정의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시 안위安危강약强弱이 달린 일이니,注+② 此亦安危强弱之機也:≪新唐書≫ 〈藩鎭傳〉에 “劉玄佐는 滑州 사람이다. 李靈耀를 토벌한 공으로 汴宋節度使가 되었다. 뒤에 假子인 樂士朝가 그에게 독살되자 그 아들 劉士寧을 留後로 삼았다. 유사녕은 잔인하고 난폭하여 일찍이 술자리에서 사람을 직접 죽인 적이 있었다. 매번 사냥을 나가면 서너 날이 되어야 돌아왔다. 그 휘하의 사람들이 싫어하고 고달파하여 복종하지 않았다. 大將 李萬榮이 人心을 얻자 유사녕이 그를 미워하여 그의 군사를 빼앗고 州의 사무를 대리하게 시켰다. 貞元 9년(793) 12월에 일찍이 무리 2만을 거느리고 성 남쪽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미처 돌아오기 전에 이만영이 새벽에 官府로 들어가서, 남아 있던 親兵을 불러서 고하기를, ‘천자께서 조칙으로 大夫(유사녕)를 부르시고 나로 하여금 대신 節度하게 하셨다. 그리고 사람마다 錢 3만을 하사하셨다.’라고 하니, 장사들이 모두 절하였다. 이에 군사를 나누어 여러 문을 지키게 하고, 사람을 보내 유사녕에게 고하길, ‘詔書로 大夫를 부르셨으니 의당 빨리 떠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일이 급하여 장차 목을 베어서 바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유사녕은 군중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을 알고서 京師로 달아났다. 유사녕에게 조서를 내려 저택으로 나아가게 하고 출입을 금하였다. 이만영은 유사녕의 당여 수십 명을 베니, 이만영에게 兵馬留後를 제수하였다. 폐하께서는 살피시고 신중히 하셔야 합니다.


역주
역주1 죄악이……오래지만 : 원문은 ‘惡貫久盈’이다. ≪書經≫ 〈周書 泰誓〉에, “商나라의 죄가 貫通하여 가득하기에, 하늘이 명하여 誅伐하게 하시니, 내가 하늘의 뜻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 죄가 紂王과 같을 것이다.[商罪貫盈 天命誅之 予弗順天 厥罪惟鈞]”라고 하였다.
역주2 魯나라……하였다 : 隱公이 衆仲에게 “衛나라 州吁가 成功하겠는가?”라고 묻자 중중이 대답한 말이다. 중중은 “신은 德으로써 백성을 和合시킨다는 말은 들었으나 亂으로써 백성을 화합시킨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亂으로써 백성을 화합시키는 것은 실을 整理하려다가 엉키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주우는 兵力을 믿고 잔인한 짓을 편안히 하므로 반드시 패할 것이라 답하였다.
역주3 (元)[玄] : 저본에는 ‘元’으로 되어 있다. 宋나라는 시조의 이름인 玄朗을 피휘하여 元으로 썼는데, 여기서는 ‘玄’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不)[下] : 저본에는 ‘不’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藩鎭傳〉에 의거하여 ‘下’로 바로잡았다.
역주5 (建中)[貞元] : 저본에는 ‘建中’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藩鎭傳〉에 의거하여 ‘貞元’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一)[二] : 저본에는 ‘一’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藩鎭傳〉에 의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

당육선공주의(2)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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