伏以劉士寧
이 昏荒暴慢
하여 惡貫久盈
호되 聖情愛人
하사 久爲含忍
이러니 親離衆叛
注+① 左隱四年 “衆仲對公曰 ‘阻兵無衆, 安忍無親, 衆叛親離, 難以濟矣.’”하여 自取奔亡
이라
不勞師徒하고 克靖方鎭하니 恭承宣諭에 欣賀實深이나
然梁宋之間이 地當要害하여 鎭壓齊魯하며 控引江淮하니 得其人이면 則安則强이요 失其人이면 則危則弱하나니
今士寧見逐이 雖是衆情이나 萬榮總軍이 且非朝旨라
此亦安危强弱之機也
注+② 藩鎭傳 “劉佐, 滑州人. 以討李靈耀功爲汴宋節度使. 後爲假子樂士朝所酖. 以其子士寧為留後. 士寧忍暴, 嘗手殺人杯案間. 每畋獵, 數日乃還. 其厭苦不服. 大將李萬榮者, 得衆心, 士寧忌之, 奪其兵, 使攝州事. 九年十二月, 嘗引衆萬畋城南, 未還, 萬榮晨入府, 召所留親兵告曰 ‘天子有詔召大夫, 俾我代節度. 人賜錢三萬.’ 士皆拜. 於是分兵守諸門, 使告士寧曰 ‘詔書召大夫, 宜速去, 不然, 事急且傳首以獻.’ 士寧知衆不與, 奔京師. 詔就第, 禁出入. 萬榮斬其支黨數十人. 拜萬榮兵馬留後.”니 陛下
는 審之愼之
하소서
10-3-2 삼가 생각하건대, 유사녕이 정신이 혼란하고 흉포하고 오만하여
성상의 마음이 인민을 사랑하셔서 오래도록 참으셨는데, 유사녕의 가까운 사람이 떠나가고 그 무리들이 배반하여
注+① 親離衆叛:≪春秋左氏傳≫ 隱公 4년에 도망하는 상황을 자초하였습니다.
군사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방진方鎭을 평정할 수 있었으니, 삼가 선유宣諭를 받들어 경하하는 마음이 진실로 깊습니다.
그러나 양梁․송宋 지역이 요해처要害處에 해당하여 제齊․노魯 지역을 진압鎭壓하고 강江․회淮 지역을 제어할 수 있으니, 올바른 사람을 얻으면 편안해지고 강해질 것이고 올바른 사람을 얻지 못하면 위태로워지고 약해질 것입니다.
지금 유사녕이 쫓겨난 것이 비록 군중의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이만영이 군사를 통솔하는 것은 결코 조정의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시
안위安危와
강약强弱이 달린 일이니,
注+② 此亦安危强弱之機也:≪新唐書≫ 〈藩鎭傳〉에 “劉玄佐는 滑州 사람이다. 李靈耀를 토벌한 공으로 汴宋節度使가 되었다. 뒤에 假子인 樂士朝가 그에게 독살되자 그 아들 劉士寧을 留後로 삼았다. 유사녕은 잔인하고 난폭하여 일찍이 술자리에서 사람을 직접 죽인 적이 있었다. 매번 사냥을 나가면 서너 날이 되어야 돌아왔다. 그 휘하의 사람들이 싫어하고 고달파하여 복종하지 않았다. 大將 李萬榮이 人心을 얻자 유사녕이 그를 미워하여 그의 군사를 빼앗고 州의 사무를 대리하게 시켰다. 貞元 9년(793) 12월에 일찍이 무리 2만을 거느리고 성 남쪽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미처 돌아오기 전에 이만영이 새벽에 官府로 들어가서, 남아 있던 親兵을 불러서 고하기를, ‘천자께서 조칙으로 大夫(유사녕)를 부르시고 나로 하여금 대신 節度하게 하셨다. 그리고 사람마다 錢 3만을 하사하셨다.’라고 하니, 장사들이 모두 절하였다. 이에 군사를 나누어 여러 문을 지키게 하고, 사람을 보내 유사녕에게 고하길, ‘詔書로 大夫를 부르셨으니 의당 빨리 떠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일이 급하여 장차 목을 베어서 바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유사녕은 군중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을 알고서 京師로 달아났다. 유사녕에게 조서를 내려 저택으로 나아가게 하고 출입을 금하였다. 이만영은 유사녕의 당여 수십 명을 베니, 이만영에게 兵馬留後를 제수하였다. 폐하께서는 살피시고 신중히 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