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伯行 註]此는 周子欲人全盡天理而先指未發之體하야 使人知本然之至善也라
誠者는 眞實無妄之謂요 無爲者는 實理自然하야 不涉人爲也라
寂然不動之中에 但覺渾然至善하니 能守最初之靜正이 便是天地之全人이니 此卽太極也라
2-2 幾
는 善惡
注+欄外書曰 幾善惡이라하니 幾者는 情之發端이니 人心道心之介也라 圖說所云 五性感動而善惡分하고 萬事出矣가 是也니라이니
幾者
는 動之微
注+朱子曰 極力說箇幾字하니 儘有警發人處라 近則公私邪正이요 遠則廢興存亡이니 只於此處看破하면 便斡轉了니 此日用第一親切功夫라 精粗隱顯을 一時穿透니 堯舜所謂惟精惟一이요 孔子所謂克己復禮 便是此事니라니 善惡之所由分也
라
蓋動於人心之微
면 則天理固當發
이요 而人欲亦已萌乎其間矣
니 此
는 陰陽之象也
라
幾者는 動之微也니 自然之發이면 則爲善이요 一有所雜이면 卽爲惡이라
蓋人心이 不能無動하니라 一有所動이면 則天理自此呈露요 人欲亦自此潛萌이니 所謂道心惟微, 人心惟危者也니
2-3 德은 愛曰仁이요 宜曰義요 理曰禮요 通曰智요 守曰信이니
道之得於身者를 謂之德이니 其別이 有是五者之用하야 而因以名其體焉하니 卽五行之性也라
性者
는 獨得於天
注+問如何言獨得이닛고 朱子曰 此는 言聖人이 合下淸明完具하야 無所虧欠이니 此是人所獨得者라 此는 對了復字說이니 復者는 已失而反其初라 便與聖人獨得處로 不同이라 安字는 對了執字說이니 執은 是執持요 安은 是自然이라 性此理而安焉者는 聖人也요 復此理而執焉者는 賢人也라이요 安者
는 本全於己
요 聖者
는 大而化之之稱
이니 此
는 不待學問强勉而誠無不立, 幾無不明, 德無不備者也
라
2-5 復焉執焉之謂賢
注+欄外書曰 四焉字는 指德性이니라이요
復者
는 反而至之
요 執者
는 保而持之
요 賢者
는 才德過人之稱
이니 此
는 思誠硏幾
注+은 孟子註에 欲此理之在我者를 皆實而無僞라하니라 硏幾는 繫辭라 本義에 硏은 猶審也라하야 以成其德而有以守之者也
라
2-6 發微不可見
하고 充周不可窮之謂神
注+朱子曰 誠은 實理也요 無爲는 猶寂然不動也라 實理該貫動靜이나 而其本體則無爲也요 幾者는 動之微니 動則有爲而善惡形矣라 誠은 無爲하니 則善而已요 動而有爲면 則有善有惡이라 誠은 是實理니 無所作爲라 便是天命之謂性이요 喜怒哀樂未發之謂中이며 幾者는 動之微니 微動之初에 是非善惡을 於此可見이니라 ○ 德者는 人之得於身에 有此五者而已라 仁義禮智信者는 德之體요 愛宜理通守者는 德之用이니 理는 謂有條理요 通은 謂通達이요 守는 謂確實이라 此三句는 就人身而言하니 誠은 性也요 幾는 情也요 德은 兼性情而言也라 元來誠幾德은 便是太極二五니라 ○ 神은 只是聖之事요 非聖外에 又有一箇神하야 別是箇地位也라 性焉安焉之謂聖은 是就聖人性分上說이요 發微不可見, 充周不可窮之謂神은 是他人見其不可測耳니라注+孟子曰 聖而不可知之之謂神이라하니라이니라 〈通書〉
發之微妙而不可見하고 充之周徧而不可窮하니 則聖人之妙用而不可知者也라
○ 愚謂 性焉復焉
은 以誠而言也
요 安焉執焉
은 以幾而言也
요 發微充周
는 則幾之動而神也
니 卽通書次章誠幾神之義
注+按 性焉復焉은 以誠而言也니 此與朱子性也復也發微也主性而言之說로 似矣라 但主字之意는 則若分而言之하니 是乃主此云云耳라 況此章本註에 釋之曰 不待勉强而誠無不立하고 幾無不明하고 德無不備하며 思誠硏幾하야 以成其德하야 有以守之云云하니 則性安, 復執은 通誠幾德而言之也라 然則葉氏之分屬이 似未洽當이라 至於次章誠神幾하야는 乃聖人之事也라 故朱子曰 幾善惡者는 言衆人也요 動而未形有無之間者는 言聖人毫釐發動處에 此理無不見이라하시니 然則通書此章幾字는 與動而未形有無之間者幾也之幾로 不同이며 而且充周不可窮之謂神은 與感而遂通之神으로 其意亦異하니 葉氏之說은 恐失於牽合也로라注+通書聖第四曰 寂然不動者는 誠也요 感而遂通者는 神也며 動而未形有無之間者는 幾也니라니라
2-1 〈염계선생濂溪先生이 말씀하였다.〉
“성誠은 무위無爲이고
“진실한 이치가 저절로 그러한 것이니, 억지로 함이 어찌 있겠는가.
이는 주자周子가 사람들이 천리天理를 온전히 다하게 하고자 하면서 먼저 미발未發의 체體를 가리켜 사람들로 하여금 본연本然의 지선至善을 알게 한 것이다.
성誠은 진실무망眞實無妄(진실하고 사녕邪佞이 없음)을 이르고 무위無爲는 진실한 이치가 저절로 그러하여 인위人爲에 간여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 정靜함에 이 이치가 진실무망眞實無妄하니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적연부동寂然不動한 가운데에 다만 혼연渾然히 지선至善함을 깨달을 뿐이니, 최초最初의 정정靜正을 지킴이 바로 천지天地의 전인全人인 바, 이것이 바로 태극太極이다.
2-2
기幾는
선악善惡이 나누어지니
注+《난외서欄外書》에 말하였다. “‘기幾는 선악善惡이 나누어진다.’ 하였으니, 기幾는 정情이 처음 나오는 것이니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분기점이다. 〈태극도설太極圖說〉에 이른바 ‘오성五性이 감동하여 선악善惡이 나누어지고 만사萬事가 나온다.’ 는 것이 이것이다.”
“
기幾는
동動함이 은미한 것이니,
注+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힘을 다하여 이 기자幾字를 말씀하였으니, 참으로 사람을 경계하여 깨우치는 부분이다. 가까이는 공사公私와 사정邪正, 멀리는 흥폐興廢와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바, 다만 이 곳에서 간파看破한다면 곧 전환할 수가 있으니, 이는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제일 친절親切한 공부이다. 정조精粗와 은현隱顯을 일시에 통투通透할 수 있으니, 요순堯舜이 말씀한 유정유일惟精惟一과 공자孔子가 말씀한 극기복례克己復禮가 바로 이 일이다.”선악善惡이 이로 말미암아 나누어진다.
인심人心의 은미한 것에 동하면 천리天理가 진실로 드러나고 인욕人欲 또한 이미 그 사이에 싹트니, 이는 음양陰陽의 상象이다.”
기幾는 동함이 은미한 것이니, 자연히 발하면 선善이 되고 한 번이라도 섞임이 있으면 악惡이 된다.
그 단서가 매우 미미하여 이것을 분변하기를 일찍 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동함이 없을 수 없으니, 한번이라도 동하는 바가 있으면 천리天理가 이로부터 드러나고 인욕人欲이 또한 이로부터 잠복되어 싹트니, 이른바 ‘도심道心은 미미하고 인심人心은 위태롭다.’는 것이다.
2-3 덕德은 사랑함을 인仁이라 하고 마땅함을 의義라 하고 다스림(조리에 맞음)을 예禮라 하고 통함을 지智라 하고 지킴을 신信이라 하니,
“도道를 몸에 얻은 것을 덕德이라 이르니, 그 분별이 이 다섯 가지의 용用이 있어서 인하여 그 체體를 이름하였으니, 바로 오행五行의 성性이다.”
2-4 성性대로 하고 편안히 함을 성인聖人이라 이르고
“
성性은 홀로 하늘에서 얻은 것이요,
注+“어찌하여 홀로 얻었다고 말하였습니까?”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이것은 성인聖人이 본래 청명淸明하고 완전히 구비하여 이지러진 바가 없으니, 이는 사람이 홀로 얻은 것임을 말한 것이다. 이는 복자復字와 상대하여 말한 것이니, 복復은 이미 잃었다가 그 처음을 회복하는 것인 바, 성인聖人이 홀로 얻은 것과는 똑같지 않다. 안자安字는 집자執字와 상대하여 말하였으니, 집執은 잡아 지키는 것이고 안安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이치를 성性대로 하고 편안히 하는 것은 성인聖人이고 이 이치를 회복하여 지키는 것은 현인賢人이다.”안安은 본래 자기에게 온전한 것이요,
성聖은
대인大人이면서
화化함(저절로 됨)을 일컬으니, 이는 배우고 묻고 억지로 힘쓰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성誠이 서지 않음이 없고
기幾가 밝지 않음이 없고
덕德이 구비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2-5 회복하고 잡음(지킴)을
현인賢人이라 이르고
注+《난외서欄外書》에 말하였다. “네 언자焉字는 덕성德性을 가리킨 것이다.”
“
복復은 돌아와 이르는 것이요,
집執은 보전하여 지킴이요,
현賢은 재주와 덕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남을 일컬으니, 이는 성실히 할 것을 생각하고 기미를 연구하여
注+사성思誠은 《맹자孟子》의 주註에 “나에게 있는 이 이치를 모두 성실하게 하여 거짓됨이 없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연기硏幾는 〈계사전繫辭傳〉에 보인다. 《본의本義》에 “연硏은 심審과 같다.” 하였다. 그
덕德을 이루고 지키는 자이다.”
2-6 발함이 은미하여 볼 수 없고 채움이 두루하여 다할 수 없음을
신神이라 이른다.”
注+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성誠은 실리實理이고 무위無爲는 적연부동寂然不動과 같다. 실리實理는 동動과 정靜을 포함하여 관통하나 그 본체本體는 무위無爲이며, 기幾는 동動함의 은미함이니 동動하면 함이 있어서 선악善惡이 나타난다. 성誠은 무위無爲이니 선善뿐이요, 동動하여 함이 있으면 선善이 있고 악惡이 있는 것이다. 성誠은 바로 실리實理이니 작위하는 바가 없다. 그리하여 곧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하고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하지 않음을 중中이라 한다는 것이며, 기幾는 동動함의 은미함이니 은미하게 동하는 초기에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이 때에 볼 수 있는 것이다.”
○ 덕德이란 사람이 몸에서 얻은 것으로 이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다섯 가지가 있을 뿐이다.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은 덕德의 체體이고 애愛‧의宜‧이理‧통通‧수守는 덕德의 용用이니, 이理는 조리條理가 있음을 이르고 통通은 통달함을 이르고 수守는 확실함을 이른다. 이 세 구句는 사람의 몸을 가지고 말하였으니, 성誠은 성性이고 기幾는 정情이고 덕德은 성정性情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원래 성誠‧기幾‧덕德은 곧 태극太極과 이오二五(陰陽과 오행五行)이다.
○ 신神은 다만 성인聖人의 일이요, 성인聖人 외에 또 한 개의 신인神人이 있어서 별도로 이러한 지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性대로 하고 편안히 함을 성인聖人이라 이른다는 것은 바로 성인聖人의 성분性分 상上에 나아가 말한 것이며, 발함이 은미하여 볼 수 없고 채움이 두루하여 다할 수 없음을 신神이라 이른다는 것은 바로 저 사람들이 측량할 수 없음을 본 것일 뿐이다.注+맹자孟子가 말씀하기를 “성인聖人이면서 측량하여 알 수 없는 것을 신인神人이라 이른다” 하였다. 〈《
통서通書》에 보인다.〉
“발함이 미묘하여 볼 수 없고 채움이 두루하여 다할 수 없으니, 이는 성인聖人의 묘용妙用으로 측량하여 알 수 없는 것이다.”
○ 내가 생각하건대
성언性焉과
복언復焉은
성誠으로써 말하였고
안언安焉과
집언執焉은
기幾로써 말하였고
발미發微와
충주充周는
기幾가 동하여 신묘한 것이니, 바로 《
통서通書》의 다음
장章에 나오는
성誠‧
기幾‧
신神의 뜻이다.
注+살펴보건대 성性대로 하고 회복한다는 것은 성誠을 가지고 말한 것이니, 이는 주자朱子의 ‘성性과 복復과 발미發微는 성性을 주장하여 말한 것’이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다만 주자主字의 뜻은 나누어 말씀한 듯하니, 이것을 주장했다고 말씀한 것이다. 더구나 이 장章의 본주本註에 해석하기를 “면강勉强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성誠이 서지 않음이 없고 기幾가 밝지 않음이 없고 덕德이 구비되지 않음이 없으며, 성실히 할 것을 생각하고 기미幾微를 연구하여 그 덕德을 이루어서 지킴이 있다.” 하였다. 그렇다면 성안性安과 복집復執은 성誠‧기幾‧덕德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섭씨葉氏가 이것을 나누어 소속시킨 것은 지극히 합당하지 못할 듯하다. 그리고 다음 장章의 성신기誠神幾에 이르러서는 바로 성인聖人의 일이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말씀하기를 “기선악幾善惡이라는 것은 중인衆人을 말한 것이고, 동動하였으나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유有‧무無의 사이에 있다는 것은 성인聖人이 털끝만큼 발동하는 곳에도 이 이치가 나타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통서通書》의 이 장章의 기자幾字는 ‘동動하였으나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유有‧무無의 사이에 있는 것이 기幾’라는 기자幾字와 같지 않으며, 또 ‘채움이 두루하여 다할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고 이른다.’는 것은 ‘감동하여 마침내 통함을 신神’이라고 하는 것과 그 뜻이 또한 다르다. 그러하니 섭씨葉氏의 말은 억지로 끌어다 꿰어맞춘 잘못이 있는 듯하다.注+《통서通書》 〈성聖〉 제第4卷에 이르기를 “고요하여 동動하지 않음은 성誠이요, 감동感動하여 마침내 통함은 신神이며, 동動하였으나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유有‧무無의 사이에 있는 것은 기幾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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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은 무위요 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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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은 무위요 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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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은 무위요 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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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은 무위요 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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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은 무위요 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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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은 무위요 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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