顔淵이 問克己復禮之目한대 夫子曰 非禮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라하시니 四者는 身之用也라
由乎中而應乎外는 謂視聽言動이니 乃此心之形見處요 制乎外所以養其中은 謂就視聽言動上克治也라
3-2 顔淵
이 事斯語
注+論語顔淵篇曰 回雖不敏이나 請事斯語矣라하니라하니 所以進於聖人
이니 後之學聖人者
는 宜服膺而勿失也
니라
或問 明知其不當視而自接乎目하고 明知其不當聽而自接乎耳면 則將如何잇고 朱子曰
하니 非禮之色
이 雖過乎目
이나 在我
에 不可有視之之心
이며 非禮之聲
이 雖過乎耳
나 在我
에 不可有聽之之心
이니라
3-3 視箴
注+沙溪曰 心之無形하야 難以操之라 惟視之發於非禮處에 從而操之니 是謂有要也니라曰
蔽交於前하면 其中則遷하나니 制之於外하야 以安其內니라
人心虛靈하야 應感出入에 無迹可執하니 操存之要 莫先謹視라
苟物欲之蔽 交乎吾前하야 惑於所見이면 中必移矣리니
惟能制之於外하야 目不妄視하면 則神識泰定하야 內斯以安이니 久而誠이면 則實理流行하야 動容周旋이 中禮矣리라
人有秉彛
는 本乎天性
이언마는 注+按 樂記曰 知誘於外하야 人化物也라하니 伊川說이 蓋本此니라 ○ 胡氏曰 不言聽而言知者는 聽者는 知之初요 知者는 聽之後라 因知而此心爲之動故로 以知言하니 其實은 一也니라하야 遂亡其正
하나니라
人秉五常之性하야 本無不善이로되 惟知識이 誘於外而忘返하고 物欲이 化其內而莫覺이라
知止者
는 知其所當止也
요 有定者
는 得其所當止也
注+按 有定은 謂心有所定이니 恐不可遽謂得所止也니라라
故程子之箴에 以爲人生之初에秉執五常之德하니 是皆原之於天하야 所性皆善者也라
情感意紛하야 知誘其外하야 漸而忘返하야 如響斯應하고 聲入心動하야 物化其內하면 久而神移하야 有聽斯受라
於是에 天理之正이 日就梏亡하나니 常人皆然이요 賢者不免이라
惟卓然精明之先覺은 知心所當止而有定하야 不爲知誘하고 不爲物化하야 外閑其邪하야 內誠斯存이라
聽德惟聰하고 非理勿聽하니 則秉彝全乎天而克復盡乎人矣라
人心之動이 因言以宣하나니 發禁躁妄이라야 內斯靜專하나니라
矧是樞機
라 興戎出好
注+易繫辭曰 言行은 君子之樞機니 樞機之發이 榮辱之主라하니라 ○ 書大禹謨曰 唯口는 出好興戎하나니 朕言不再라하니라注+書曰 惟口出好興戎 蔡傳曰 好는 善也요 戎은 兵也니 言發於口면 則有二者之分이라하나니 吉凶榮辱
이 惟其所召
니라
傷易則誕
이요 傷煩則支
하며 己肆物忤
하고 出悖來違
하나니 非法不道
注+孝經曰 非先王之法言이어든 不敢道라하니라하야 欽哉訓辭
하라
躁는 輕肆也요 妄은 虛繆也니 言語之發에 禁其輕肆하면 則內靜定矣요 禁其虛繆면 則內專一矣라
戶之闔闢과 射之中否 皆由之하나니 發言은 乃吾身之樞機라
故一言之惡이 或至於興師하고 一言之善이 或可以合好하며 得則有吉有榮하고 失則有凶有辱하며 躁而傷於易則誕肆而不審하고 妄而傷於煩則支離而遠實이니라
肆
는 縱情也
니 肆己者
는 必忤物
이니 躁之致也
요 悖
는 乖理也
니 悖而出者
는 必悖而反
이니 妄之致也
注+按 雲峯胡氏曰 易는 是輕言이요 煩은 是多言이요 肆는 是放言이요 悖則純乎不善矣라하고 朱子는 以爲是四項病이어늘 而諸家只解에 歸躁妄二字하니 非矣라하시니 胡說은 正中葉氏之病이요 況以靜專二字로 分屬躁妄하니 尤爲破碎니라니라
3-6 動箴
注+白雲許氏曰 視聽言은 各指一事요 動則擧一身而言이라 故動箴에 兼心說이라 謂內而心之動과 外而身之動이 皆出於正하야 表裏如一이면 則天理流行이어니와 若强制於外하야 而動於中者 或未盡善이면 則病根不除하야 未爲得也니 此卽愼獨工夫니라曰
哲人은 知幾하야 誠之於思하고 志士는 厲(勵)行하야 守之於爲하나니 順理則裕요 從欲惟危니
造次克念
하야 戰兢自持
注+按 上句는 言誠之於思요 下句는 言守之於爲니 如此看이 如何오하라
習與性成
하면 聖賢同歸
注+沙溪曰 按覺軒蔡氏曰 聖은 性之也는 謂哲人이요 賢은 習之也니 謂志士니 及其成功則一也라 故曰同歸라하고 陳氏曰 習之久而與氣質之性俱化면 則賢亦聖矣라하니 二說이 皆非라 蓋我之習熟하야 與性俱成이면 則我與聖賢同歸矣니 及其成功則一之意也니라 又按 習與性成之性을 葉註에 以爲本然하고 新安陳氏는 則引書玆乃不義, 習與性成하야 以爲氣質하니 以何爲正고 栗谷曰 陳說長이니라하리라 〈文集〉
思是動之微요 爲是動之著니 思是動於內요 爲是動於外니라
○ 明哲之人은 知其幾微라 故於所思而誠之하야 一念之動을 不敢妄也요 立志之士는 勉勵其行이라 故於所爲而守之하야 一事之動을 不敢忽也니라
順理而動則安裕하고 從欲而動則危殆는 守於爲也요 造次俄頃而克念不忘하고 戰兢恐懼而自持不失은 誠於思也라
習
은 謂修於己
요 性
은 謂得於天
이니 習與性合
注+按 以合字로 解成字하니 恐未穩이라이면 則全其本然之善而與聖賢一矣
리라
“안연顔淵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조목條目을 묻자, 부자夫子(孔子)는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禮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禮가 아니면 동動하지 마는 것이다.’ 하셨으니, 〈보고 듣고 말하고 동動하는〉 네 가지는 몸의 쓰임이다.
중심中心으로 말미암아 밖에 응하니, 밖에서 재제裁制함은 중심中心을 기르는 것이다.”
“중심中心으로 말미암아 밖에 응한다는 것은 보고 듣고 말하고 동함을 이르니 바로 이 마음이 나타나는 곳이요, 밖에 재제裁制하여 중심中心을 기른다는 것은 보고 듣고 말하고 동함의 위에 나아가 이겨 다스림을 이른다.
위의 두 구句는 자연의 이치를 말하였고, 아래의 두 구句는 공부이다.”
3-2
안연顔淵이 이 말씀에 종사하였으니,
注+《논어論語》〈안연편顔淵篇〉에 “제가 비록 불민不敏하나 청컨대 이 말씀에 종사하겠습니다.” 하였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에 나아갔던 것이니,
후세後世에
성인聖人을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가슴속에 새겨 두고 잃지 말아야 한다.
혹자가 “마땅히 보아서는 안 됨을 분명히 알면서도 저절로 눈에 접하고, 마땅히 들어서는 안 됨을 분명히 알면서도 저절로 귀에 접하게 되면 장차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주자朱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시視는 견見과 다르고 청聽은 문聞과 다르니, 예禮가 아닌 색色이 비록 눈앞을 지나가더라도 나에게 있어 그것을 보려는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되며, 예禮가 아닌 소리가 비록 귓가를 지나가더라도 나에게 있어 그것을 들으려는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3-3
시잠視箴注+사계沙溪가 말씀하였다. “마음이 형체가 없어서 잡기가 어렵다. 오직 보는 것이 예禮가 아닌 곳에 나타날 적에 따라서 잡아야 하니, 이것을 일러 요점이 있다고 한 것이다.”에 말하였다.
‘마음이여! 본래 허虛하니, 사물에 응함에 자취가 없다.
마음을 잡음에 요점이 있으니, 보는 것이 그 법칙法則(절도)이 된다.
사물이 눈앞에서 가리워 사귀면 마음이 옮겨가니, 밖에서 제재하여 안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
사욕私慾을 이겨 예禮로 돌아가면, 오래되면 성실誠實해져 저절로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비고 신령스러워서 감응感應하여 출입出入함에 잡을 만한 자취가 없으니, 이를 잡아서 보존하는 요점은 보는 것을 삼가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
만일 물욕物慾의 가리움이 내 앞에 사귀어 보는 바에 혹하면 중심中心이 반드시 옮겨갈 것이다.
오직 밖에서 재제裁制하여 눈이 함부로 보지 않으면 정신精神과 지식知識이 태연하고 안정되어 안(마음)이 편안할 것이니, 오래하여 성실誠實해지면 진실한 이치가 유행하여 동용動容하고 주선周旋함이 저절로 예禮에 맞을 것이다.
‘사람이
병이秉彛의
양심良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천성天性에 근본하였지만 앎(욕심의
지각知覺)이 물건에 유인되어 동화해서
注+살펴보건대 〈악기樂記〉에 “앎이 밖에서 유인하여 사람이 물건과 화한다.” 하였으니, 이천伊川의 말씀은 여기에 근본한 것이다.
○ 호씨胡氏가 말하였다. “들음〔聽〕을 말하지 않고 앎〔知〕을 말한 것은, 들음은 앎의 처음이고 앎은 들음의 뒤이다. 앎을 인하여 이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앎으로 말하였으니, 그 실제는 똑같은 것이다.” 마침내 올바름을 잃게 된다.
드높은 저 선각자先覺者들은 그칠 곳을 알아 안정함이 있다.
사邪를 막아 성誠을 보존해서 예禮가 아니면 듣지 않는다.’
사람이 오상五常의 성性을 간직하고 있어 본래 불선不善함이 없으나 오직 지식知識이 밖에서 유혹하여 돌아올 줄 모르고 물욕物慾이 마음을 화化(동화)하여 깨닫지 못한다.
이 때문에 품부稟賦받은 바의 올바름이 날로 상실喪失되는 것이다.
유誘는 화化의 시초이고 화化는 유誘의 극極이다.
지지知止는 마땅히 그쳐야 할 바를 아는 것이고
유정有定은 마땅히 그쳐야 할 바를 얻는 것이다.
注+살펴보건대 유정有定은 마음이 안정됨이 있음을 이르니, 대번에 그칠 바를 얻었다고 말할 수 없을 듯하다.
밖에서 사邪를 막음은 마음속에 성誠을 보존하는 것이다.
[張伯行 註] 이는 예禮가 아니면 듣지 않는 요지要旨를 발명한 것이다.
청聽과 문聞은 다르니, 소리가 갑자기 귀에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듣지〔聞〕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내가 그것을 듣고자〔聽〕 하는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程子의 잠箴에 이르기를 “사람이 태어난 초기에 오상五常의 덕德을 간직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 하늘에 근원하여 성품으로 삼아서 다 선善한 것이다.
그런데 정情이 느끼고 뜻(생각)이 분분紛紛하여 지식이 그 밖을 유인誘引하면 점점 돌아오기를 잊어서 마치 메아리가 응하듯이 하고, 소리가 들어오면 마음이 동하여 물건이 그 안을 화化하면 오래됨에 정신이 옮겨가서 들음이 있으면 바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에 천리天理의 바름이 날로 없어지는 데로 나아가니, 상인常人은 모두 그렇고 어진 자도 면치 못한다.
오직 탁연卓然히 정명精明한 선각자先覺者들은 마음이 멈추어야 할 곳을 알아서 정定함이 있어 지각(욕심)에게 유혹당하지 않고 물건에게 화化함을 당하지 않아서 밖으로 간사함을 막아 안의 성실함이 이에 보존된다.
그리하여 덕德을 들으면 귀가 밝고 이치가 아닌 것은 듣지 않으니, 이렇게 하면 병이秉彝가 하늘에 온전하고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사람에게 다한다.
보는 것을 이어서 일삼아야 할 것은 이것이 그 다음이 된다.”고 한 것이다.
‘인심人心의 동함은 말로 인하여 나타나니, 발설發說할 때에 조급함과 경망함을 금하여야 안에 있는 마음이 고요하고 전일해진다.
하물며 이 말은 중요한
추기樞機여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우호友好를 내기도 하니,
注+《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에 “말과 행실은 군자君子의 추기樞機이니, 추기樞機의 발함이 영예와 치욕의 주체이다.” 하였다.
○ 《서경書經》〈大禹謨〉에 “입은 우호友好를 내고 전쟁을 일으키나니, 짐朕은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겠다.” 하였다.注+《서경書經》에 “입은 우호를 내기도 하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였는데, 채침蔡沈의 《집전集傳》에 “호好는 선善이요 융戎은 병兵(戰爭)이니, 말이 입에서 나오면 이 두 가지의 구분이 있다.” 하였다.길흉吉凶과
영욕榮辱이 오직 말이 부르는 것이다.
말을 너무 쉽게 함에 잘못되면 허탄해지고 너무 번잡하게 함에 잘못되면 지루해지며, 자신이 말을 함부로 하면 남도 거슬리고 나가는 말이
도리道理에 어그러지면 오는 말도 이치에 위배되니,
예법禮法이 아니면 말하지 말아서
注+《효경孝經》에 “선왕先王의 법언法言(禮法에 맞는 말)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 않는다.” 하였다.훈계訓戒 말씀을 공경히 받들지어다.’
조躁는 가볍고 함부로 하는 것이요, 망妄은 허황하고 그릇된 것이니, 언어言語를 할 적에 가볍고 함부로 하는 것을 금하면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되며, 허황하고 그릇됨을 금하면 마음이 전일專一해진다.
추樞는 문의 지도리이고 기機는 쇠뇌의 기아이다.
문이 닫히고 열리는 것과 활쏘기의 맞고 맞지 않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으니, 말을 함은 바로 내몸의 추기樞機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마디 나쁜 말이 혹 군대(전쟁)를 일으킴에 이르고 한 마디 좋은 말이 혹 우호友好를 만들어내기도 하며, 잘하면 길吉함이 있고 영화로움이 있고, 잘못하면 흉凶함이 있고 욕됨이 있으며, 조급하여 함부로 함에 잘못되면 허탄하고 방사하여 살피지 못하며, 함부로 하여 번거로움에 잘못되면 지리하여 실제와 거리가 멀어진다.
사肆는 마음대로 하는 것이니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는 반드시 남을 거스르게 되니 이는 조급함이 초래한 것이요,
패悖는 이치에 어그러짐이니 어그러져 나간 말은 반드시 어그러져 돌아오니 이는 경망함이 부른 것이다.
注+살펴보건대 운봉호씨雲峯胡氏(胡炳文)가 말하기를 “이易는 말을 가볍게 하는 것이고 번煩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이고 사肆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고 패悖는 완전히 선善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으며, 주자朱子는 “이것은 네 가지 병통인데 제가諸家들은 다만 해석할 때에 조躁와 망妄 두 글자에 돌리니, 옳지 않다.” 하였으니, 호씨胡氏의 말은 바로 섭씨葉氏의 병통을 맞춘 것이요, 더구나 정靜과 전專 두 글자를 가지고 조躁와 망妄에 나누어 소속시켰으니, 더욱 파쇄破碎함이 된다.
3-6
동잠動箴注+백운허씨白雲許氏(許謙)가 말하였다. “시視, 청聽, 언言은 각각 한 일을 가리켰고 동動은 온몸을 들어 말하였다. 그러므로 동잠動箴에는 마음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안으로는 마음의 동動함과 밖으로는 몸의 동動함이 모두 바름에서 나와 표리表裏가 한결같으면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할 수 있으나 만일 억지로 밖을 제재하여 안에서 동動하는 것이 혹 다 선善하지 못하면 병근病根이 제거되지 않아 얻음이 되지 못하니, 〈마음에 동함을 잘하는〉 이것이 바로 신독공부愼獨工夫이다.”에 말하였다.
‘철인哲人은 기미幾微를 알아 생각함에 성실히 하고 지사志士는 행실行實을 힘써 하는 일에 지키니, 이치를 순히 하면 여유가 있고 욕심을 따르면 위태롭다.
조차造次라도 능히 생각해서
전전긍긍戰戰兢兢하여 스스로 잡아 지켜라.
注+살펴보건대 윗구는 생각을 성실히 함을 말하였고 아랫구는 행위를 지킴을 말하였으니, 이와 같이 보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
습관習慣이
성性과 함께 이루어지면
성현聖賢과 함께 돌아갈 것이다.
注+사계沙溪가 말씀하였다. “살펴보건대 각헌채씨覺軒蔡氏(蔡模)는 ‘성인聖人은 성性대로 하니 〈성性은〉 철인哲人을 이르고, 현인賢人은 익히니 〈습習은〉 지사志士를 이르니, 성공에 이르면 똑같다. 그러므로 성현聖賢과 함께 돌아간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고, 진씨陳氏는 ‘익히기를 오래하여 기질지성氣質之性과 함께 변화하면 현인賢人 또한 성인聖人이 된다.’ 하였는데, 이 두 말은 모두 잘못되었다. 나의 익힘이 익숙해져서 성性과 함께 이루어지면 내가 성현聖賢과 함께 돌아가는 것이니, 그 성공에 이르면 똑같다는 뜻이다.” 또 살펴보건대 “습여성성習與性成의 성性을 섭씨葉氏의 주註에는 본연本然이라 하였고, 신안진씨新安陳氏(陳櫟)는 《서경書經》의 ‘이 의롭지 못함은 익힘이 성性과 이루어졌다.’는 말을 인용하여 기질氣質이라 하였으니, 무엇을 바른 것으로 삼아야 합니까?” 하고 묻자, 율곡栗谷은 “진씨陳氏의 말이 낫다.” 하였다.’” 〈《
이천선생문집伊川先生文集》에 보인다.〉
“사思는 동함의 은미함이요 위爲는 동함의 드러남이니, 사思는 안에서 동하고 위爲는 밖에서 동한다.”
○ 명철明哲한 사람은 기미幾微를 알므로 생각하는 바에 성실히 하여 한 생각이 동함을 감히 함부로 하지 않으며, 뜻을 세운 선비는 행실을 힘쓰므로 하는 일에 지켜서 한 일의 동함을 감히 함부로 하지 않는다.
이치를 순히 하여 동하면 편안하고 여유가 있으며 욕심을 따라 동하면 위태로우니, 이것은 하는 일에 지키는 것이요, 조차造次와 아경俄頃(잠깐 동안)이라도 잘 생각하여 잊지 않으며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지키고 잃지 않음은 생각함에 성실히 한 것이다.
습習은 자기 몸에 닦음을 이르고
성性은 하늘에서 얻음을 이르니,
습관習慣이
천성天性과 합하면
注+살펴보건대 합자合字를 가지고 성자成字를 해석하였으니, 온당치 못할 듯하다.본연本然의
성性을 온전히 하여
성현聖賢과 똑같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