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沖漠無朕에 萬象이 森然已具하니 未應이 不是先이요 已應이 不是後니라
未應者
는 寂然不動之時也
요 已應者
는 感而遂通
注+易繫辭上傳曰 感而通天下之故하니 非天下之至神이면 其孰能與於此리오之時也
니 已應之理
가 悉具於未應之時故
로 未應
이 非先
이며 已應
이 非後
니 蓋卽體而用在其中
이라 不可以先後分也
니라
未有事物之時에 此理已具하니 少間應處가 亦只是此理니라
32-2 如百尺之木이 自根本至枝葉히 皆是一貫이라
不可道上面一段事가 無形無兆라가 却待人旋安排引入來하야 敎入塗轍이니
道有體用이나 而非兩端이니 猶木有根本이면 是生枝葉하야 上下一貫하야 未嘗間斷하니
豈可謂未應之時에 空虛無有라가 已應之際에 旋待安排하야 引入塗轍이리오
32-3
注+欄外書曰 塗轍은 猶言道理니 旣是塗轍은 謂應前旣具天然道理요 只是一箇塗轍은 謂應後道理不外此理라 朱子嘗疑末二句하야 謂記者欠了字라하니 愚案程子語每簡하야 遽讀之하면 往往似索解하니 其實은 非有闕字니라注+問未應不是先一條한대 曰 未應은 如未有此物而此理已具니 到有此物하야도 亦只是這箇道理니라 塗轍은 是車行處니 且如未有塗轍而車行에 必有塗轍之理니라이니라
[張伯行 註]此는 言寂之與感이 分體用이요 不分先後라
泉之未發曰沖이요 沙地曠遠曰漠이요 物之始生曰朕이니 沖漠無朕은 總以形容本體之渾然耳라
渾然之中에 而森然者已具하니 蓋無其象이나 有其理하야 卽體而用在其中이라
所以應之之用이 無加於未應之體하니 如何分得先後리오
夫所謂未應者는 寂然不動之時也니 靜也요 所謂已應者는 感而遂通之時也니 動也라
動靜非兩端이니 猶木之根本枝葉하야 上下非兩物이라
枝葉是自根本中來者요 根本是自能生枝葉者니 皆是一貫也라
豈可謂未應上面一段事 空虛無有라가 及至已應之時에 待卻安排引入하야 敎人去尋塗轍乎아
若以塗轍待人安排引入이면 則已應之時에 千條萬緖도 亦必有千萬塗轍矣리라
如塗轍之出於一이면 則未應已應이 一以貫之하야 而不可分先後也明甚이니라
32-1 〈이천선생伊川先生이 말씀하였다.〉
“충막沖漠하여 조짐兆朕(조짐)이 없을 적에 만상萬象이 삼연森然히 이미 갖추어져 있으니, 미응未應(응하지 않았을 때)이 먼저가 아니고 이응已應(이미 응했을 때)이 뒤가 아니다.
충막沖漠하여 나타나지 않았으나 만리萬理가 다 갖추어져 있으니, 곧 이른바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란 것이다.
미응未應은 고요하여 동하지 않는 때이고
이응已應은 감동하여 마침내 통하는 때이니,
注+《주역周易》 〈계사繫辭 상전上傳〉에 말하였다. “감동하여 마침내 천하天下의 고故(所以然)를 통하니, 천하의 지극히 신묘神妙한 자가 아니면 그 누가 이에 참여하겠는가.” 이응已應의 이치가
미응未應의 때에 모두 갖추어져 있으므로
미응未應이 먼저가 아니고
이응已應이 뒤가 아닌 것이니,
체體에 나아가면
용用이 이 안에 들어 있으므로
선후先後를 가지고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사물이 아직 있지 않았을 때에 이 이치가 이미 갖추어져 있으니, 잠시 응하는 곳도 또한 다만 이 이치이다.”
32-2 백척百尺의 나무가 뿌리(根本)로부터 지엽枝葉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관一貫된 것과 같다.
상면上面에 한 가지 일이 형체도 없고 조짐도 없다가 사람이 곧바로 안배하여 끌어들이기를 기다려서 도철塗轍로 들어오게 하는 것은 아니니,
철轍은 수레바퀴 자국이니, 도철塗轍은 노맥路脈이란 말과 같다.
도道는 체體와 용用이 있으나 두 가지가 아니니, 마치 나무에 뿌리가 있으면 지엽枝葉이 생겨서 상하上下가 일관一貫되어 일찍이 간단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어찌 미응未應의 때에 공허空虛하여 아무것도 없다가 이응已應의 즈음에 곧바로 안배하기를 기다려서 도철塗轍로 이끌어 들어오게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이치가 기형氣形과 사위事爲의 이전에 이미 갖추어져 있어서 본래 일관一貫됨을 말한 것이다.
32-3 이미
도철塗轍이면 다만 하나의
도철塗轍일 뿐이다.”
注+《난외서欄外書》에 말하였다. “도철塗轍은 도리道理라는 말과 같으니, 기시도철旣是塗轍은 응하기 전에 이미 천연天然의 도리道理를 갖추고 있음을 말한 것이요, 지시일개도철只是一箇塗轍은 응한 뒤에 도리가 이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주자朱子가 일찍이 끝의 두 구句를 의심하여 ‘기록한 자가 요자了字를 빠뜨렸다.’ 하였는데, 내가 살펴보건대 정자程子의 말씀이 언제나 간략하여 갑자기 읽으면 왕왕 난해한 듯하니, 실제는 빠진 글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注+‘미응불시선未應不是先’의 한 조목을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미응未應은 아직 이러한 물건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이러한 이치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물건이 있음에 이르러서도 또한 단지 이 도리일 뿐이다. 도철塗轍은 수레가 다니는 곳이니, 예컨대 아직 도철塗轍이 있지 않으나 수레가 다닐 때에는 반드시 도철塗轍의 이치가 있는 것과 같다.”
이 이치가 기형氣形과 사위事爲의 가운데에 유행하여 일찍이 두 이치가 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부모가 사랑하고 자식이 효도하는 것과 같이 다만 하나의 길이 원두源頭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이는 적寂과 감感이 체體‧용用으로 나뉘고 선先‧후後로 나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체體는 바로 용用이 보존되는 것이고 용用은 바로 체體가 발하는 것이니, 두 가지 이치가 없다.
샘물이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을 충沖이라 하고 모래땅이 아득히 먼 것을 막漠이라 하고 물건이 처음 나오는 것을 짐朕이라 하니, 충막무짐沖漠無朕은 모두 본체本體의 혼연渾然함을 형용한 것이다.
혼연渾然한 가운데에 삼연森然한 것(萬象萬化)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그 상象은 없으나 그 이치는 있어서 체體에 나아가면 용用이 이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응應하는 용用이 미응未應의 체體보다 더한 것이 없는 것이니, 어떻게 선후先後를 나눌 수 있겠는가.
이른바 ‘미응未應’이라는 것은 적연寂然히 동動하지 않는 때이니 정靜이고, 이른바 ‘이응已應’이라는 것은 감동하여 마침내 통通하는 때이니 동動이다.
동動과 정靜이 두 단서가 아니니, 나무의 근본根本과 지엽枝葉과 같아서 상하上下가 두 물건이 아니다.
지엽枝葉은 바로 근본根本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고 근본根本은 스스로 지엽枝葉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니, 모두 일관된 것이다.
어찌 미응未應의 상면上面에 한 가지 일이 공허하여 아무것도 없다가 이응已應의 때에 이르러 안배安排하여 이끌어 들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가서 도철塗轍을 찾게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철轍은 수레바퀴 자국이니 도철塗轍은 노맥路脈이라는 말과 같다.
“부모父母의 사랑과 자식의 효도와 같은 것은 다만 한 가지 길이다.
근원으로부터 왔으니, 바로 이천伊川이 말씀한 ‘다만 하나의 도철塗轍’이란 것이다.
만약 도철塗轍을 가지고 사람이 안배하여 끌어들이기를 기다린다고 말한다면 이미 응할 때에 천 가지 만 가지의 단서 또한 반드시 천만 가지의 도철塗轍이 있을 것이다.
도철塗轍이 하나에서 나온다면 미응未應과 이응已應이 일이관지一以貫之여서 선후先後를 나눌 수 없음이 매우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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