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內積忠信
은 所以進德也
요 擇言篤志
는 所以居業也
注+易乾九三文言曰 君子進德修業하나니 忠信은 所以進德也요 修辭立其誠은 所以居業也라 知至至之라 可與幾也며 知終終之라 可與存義也라하니라라
忠信者는 如惡惡臭하고 如好好色하야 表裏에 無一毫之不實이라
擇言은 謂修辭요 篤志는 謂立誠이니 立誠은 卽上文忠信이라
德要日新又新
이라 故曰進
이요 業要存而不失
이라 故曰居
니 進
은 如日知其所亡
요 居
는 如月無忘其所能
注+論語本註에 亡는 無也니 謂己之所未有라 新安陳氏曰 爲學에 當日有所進而知其所未得이요 月有所守而不忘其所已得이니 知其所無면 則識愈長而日新이요 保其所有면 則得愈堅而不失이니라이니 進德修業
은 只是一事
니라
知之在先
이라 故可與幾
니 所謂始條理者智之事也
注+孟子萬章下曰 集大成也者는 金聲而玉振之也라 金聲也者는 始條理也요 玉振之也者는 終條理也니 始條理者는 智之事也요 終條理者는 聖之事也라한대 朱註曰 條理는 猶言脈絡이니 指衆音而言也라 智者는 知之所及이요 聖者는 德之所就也라하니라라
至는 謂至善之地也니 求知至善之地而後에 至其所知라
所重者在知라 故曰可與幾니 蓋幾者는 動之微, 事之先見者也라
致知以正其始
注+按 至善之至는 至極之至也요 知至之至는 乃至處也어늘 葉註語欠曲折이라 若曰 至는 至處니 卽至善之地云이라하면 則似勝이라 所重者在知故로 曰可與幾者도 亦未瑩하니 必若朱子所謂未做到那裏에 先知得如此라 所以說可與幾者니 然後에 語意痛快니라 且正其始, 成其終云者도 下語種種有病하니라면 則能得乎事之幾微矣
리라
6-3 知終終之는力行也니 旣知所終이면 則力進而終之라
守之在後
라故可與存義
니 所謂終條理者聖之事也
니 此學之始終也
注+朱子曰 知至至之는 主知요 知終終之는 主行이니 蓋上句則以知〔至〕爲重而至之二字爲輕이요 下句則以知終爲輕而終之二字爲重이라 又曰 知至知終이면 則又詳其始終工夫之序如此라 忠信은 心也요 修業은 事也라 然蘊於心者는 所以見於事요 修於事者는 所以養其心이니 此聖人之學이 所以爲內外兩進하야 而非判然二事也니라라注+易乾卦文言에 子曰 君子進德修業하나니 忠信은 所以進德也요 修辭立其誠은 所以居業也라 知至至之라 可與幾也며 知終終之라 可與存義也라한대 程子曰 知至至之는 主知요 知終終之는 主終이라 知至至之는 如今學者且先知有至處라야 便從此至之니 是可與幾也라 非知幾면 安能先識至處리오 知終終之는 知學之終處而終之니 然後에 可以守義니라 ○ 孟子本註에 始는 始之也요 終은 終之也라 條理는 猶言脈絡이니 指衆音而言也라 知者는 知之所及이요 聖者는 德之所就也라 知는 本文作智하니라
蓋義者는 當然之則이요 存者는 守而勿失也니 力行以成其終이면 斯能立乎事之則義矣리라
6-1 〈
이천선생伊川先生이 말씀하였다.〉
“안에
충신忠信을 쌓음은
덕德을 진전하는 것이요, 말을 가려서 하고 뜻을 독실히 함은
업業을 쌓는 것이다.
注+《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삼효九三爻 〈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덕德을 진전시키고 업業을 닦나니, 충신忠信은 덕德을 진전시키는 것이요 말을 닦고 성실함을 세움은 업業을 쌓는 것이다. 이를 데를 알아 이르므로 더불어 기미幾微를 알 수 있으며, 종終을 알아 끝마치므로 더불어 의義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건괘乾卦 구삼효九三爻 〈문언전文言傳〉의 전傳(伊川先生의 《역전易傳》)이다.
“안에 충신忠信을 쌓음은 진실한 마음이요, 말을 가려서 하고 뜻을 독실히 함은 진실한 일이다.”
“충신忠信이란 악취惡臭를 미워하듯이 하고 호색好色을 좋아하듯이 하여 겉과 속에 털끝만큼이라도 진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말을 가려서 한다는 것은 수사修辭(말을 진실하게 함)를 이르고, 뜻을 독실히 한다는 것은 성실함을 세움을 이르니, 성실함을 세운다는 것은 곧 윗글의 충신忠信이다.”
“안에 충신忠信이 있어야 비로소 말을 진실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덕德은 마음으로 말하였고, 업業은 덕德의 일이다.
덕德은 날로 새롭고 또 새로워져야 하므로
진進이라 말하였고,
업業은 보존하고 잃지 않아야 하므로
거居라 말하였으니,
진進은 ‘날마다 없는 바를 안다’는 것과 같고,
거居는 ‘달마다 능한 바를 잊지 말라’는 것과 같으니,
注+《논어論語》 본주本註에 “망亡는 없음이니 자신이 아직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이른다.” 하였다. 신안진씨新安陳氏가 말하였다. “학문을 할 적에 마땅히 날마다 진전하는 바가 있어서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아야 하고, 달마다 지키는 바가 있어서 이미 안 것을 잊지 않아야 하니, 없던 것을 새로 알면 지식이 점점 자라서 날마다 새로워지고, 알고 있는 것을 지키면 그 앎이 더욱 견고해져서 잃지 않는다.”덕德을 진전하고
업業을 쌓음은 다만 한 가지 일이다.”
6-2 이를 데를 알아 이름은 치지致知이니, 이를 데를 알기를 구한 뒤에 이른다.
아는 것이 앞에 있으므로
기미幾微를 알 수 있는 것이니, 이른바 ‘
조리條理를 시작함은
지智의 일’이라는 것이다.
注+《맹자孟子》 〈만장萬章 하下〉에 이르기를 “집대성集大成이란 〈음악을 연주할 적에〉 금金으로 소리를 퍼뜨리고 옥玉으로 거두는 것이다. 금金으로 소리를 퍼뜨린다는 것은 조리條理를 시작함이요 옥玉으로 거둔다는 것은 조리條理를 끝마치는 것이니, 조리條理를 시작하는 것은 지智의 일이요 조리條理를 끝마치는 것은 성聖의 일이다.” 하였다. 주자朱子의 주註에 이르기를 “조리條理는 맥락脈絡이란 말과 같으니, 여러 음音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지智는 앎이 미치는 것이요, 성聖은 덕德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였다.
지至는 지선至善의 곳에 이름을 이르니, 지선至善의 곳을 알기를 구한 뒤에 아는 바에 그친다.
중히 여기는 바가 앎에 있으므로 더불어 기미幾微를 안다고 말하였으니, 기幾는 동함의 은미함으로 일에 먼저 나타나는 것이다.
지식을 지극히 하여 시작을 바르게 하면
注+살펴보건대 지선至善의 지至는 지극至極의 지至이고 지지知至의 지至는 바로 지극한 곳인데, 섭씨葉氏의 주註는 이러한 곡절曲折이 부족하다. 만약 ‘지至는 지극한 곳이니 바로 지선至善의 자리’ 라고 말한다면 좋을 듯하다. ‘중히 여기는 바가 앎에 있으므로 더불어 기미幾微를 안다’고 말했다는 것도 분명치 못하니, 반드시 주자朱子의 이른바 ‘이 속에 이르지 않았을 적에 먼저 이와 같음을 안다. 이 때문에 더불어 기미幾微를 안다고 말한 것이다’ 라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하니, 이렇게 한 뒤에야 말뜻이 통쾌하다. 또 ‘그 시작을 바루고 그 종終을 이룬다’고 한 것도 말에 종종 병통이 있다. 일의 기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6-3 마칠 데를 알아 마치는 것은 역행力行이니, 이미 마칠 데를 알았으면 힘써 나아가 마치는 것이다.
지킴은 뒤에 있으므로 더불어
의義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른바
조리條理를 끝냄은
성聖의 일이라는 것으로, 이는
학문學問의 시작과 끝이다.”
注+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지지지지知至至之는 지공부知工夫를 주장하였고 지종종지知終終之는 행공부行工夫를 주장하였으니, 윗구는 지지知至를 중하게 여겨 지지至之 두 글자가 가벼움이 되고, 아랫구는 지종知終을 가볍게 여겨 종지終之 두 글자가 중함이 된다.” 또 말씀하였다. “이를 데를 알고 마침을 알면 또 그 시종始終 공부工夫의 순서를 자세히 앎이 이와 같은 것이다. 충신忠信은 마음이요 수업修業은 일이다. 그러나 마음에 쌓는 것은 일에 드러내기 위한 것이요, 일을 닦는 것은 그 마음을 기르기 위한 것이니, 이는 성인聖人의 학문이 내외內外가 모두 진전되어 판연判然히 두 가지 일이 아닌 것이다.”注+《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군자君子가 덕德을 진전하고 업業을 닦으니, 충신忠信은 덕德을 진전시키는 것이고 말을 잘하여 성실함을 세움은 업業을 쌓는 것이다. 이를 데를 알아 이르기 때문에 더불어 기미幾微를 알 수 있으며, 그칠 데를 알아 그치기 때문에 의義를 보존할 수 있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이를 데를 알아 이름은 앎을 위주로 하고, 마칠 데를 알아 마침은 마침을 위주로 한 것이다. 이를 데를 알아 이른다는 것은 지금 배우는 자가 우선 먼저 이를 곳이 있음을 알아야 곧 이로부터 이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기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기미幾微를 아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먼저 지극한 곳을 알겠는가. 마칠 데를 알아 마침은 학문의 마칠 곳을 알아 마치는 것이니, 이렇게 한 뒤에야 의義를 지킬 수 있다.”
○ 《맹자孟子》의 본주本註에 “시始는 시작함이요 종終은 끝마침이다. 조리條理는 맥락脈絡이란 말과 같으니, 여러 음音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지知는 지혜가 미치는 것이요, 성聖은 덕德이 성취된 것이다.” 하였다. 지知는 본문本文에 지智로 되어 있다.
종終은 바로 지선至善의 극진한 곳이니, 이미 마칠 데를 알았으면 힘써 행하여 마치는 것이다.
중한 바가 행行에 있으므로 더불어 의義를 보존한다고 말한 것이다.
의義는 당연한 법칙이요 존存은 지키고 잃지 않는 것이니, 힘써 행하여 끝마침을 이루면 일의 법칙法則과 의義를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조리條理를 시작하고 끝마침은 《맹자孟子》에 자세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