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橫渠先生
이 問於明道先生曰
이 未能不動
하야 猶累於外物
하니 何如
오 明道先生曰
注+游酢題行狀後曰 先生은 聞道甚早라 年逾冠에 張子厚友而師之러니 逮先生之官에 以定性未能不動으로 致問한대 先生이 爲破其疑하야 使內外動靜으로 道通爲一이라 其後에 子厚學成德尊하니 識者謂與孟子比하니라
所謂定者는 動亦定하고 靜亦定하야 無將迎하고 無內外하니
蓋萬物不同而無理外之物하고 萬理不同而無性外之理하니 凡天下之物理酬酢萬端이 皆吾性之所具也라
將은 送也니 事之往也에 無將하고 事之來也에 無迎이라
寂然不動者는 存於內也요 感而遂通者는 應於外也라
[張伯行 註] 此見程子知性之學이니 卽周子所謂靜而無靜, 動而無動之理也라
通篇이 就累於外物上析辨이로되 而此先與論定性之義니
蓋橫渠亦知吾所得於天之理 本自寧一無累나 而此中이 究不能不動心이요 一動而外物卽有紛擾之病矣라
故問如何而使之無累하니 亦是其刻苦意多하야 於性之自然上에 少理會也라
不知性卽理也니 天下無不定之理면 則無不定之性이니 纔說求定이면 便已不是性이라
程子所以先與之論性之定也니 所謂定者는 非能使之不動이요 亦非必離動而後定이라
順理而動이면 動亦定也요 卽靜時不過是此理라 故로 靜亦定也라
天下無性外之物하니 何所送於事之往이며 吾心非無物之性이니 何所迎於事之來리오
吾性이 卽是外物之理니 何所分爲在內之性이며 凡物이 卽是性內之理니 何所分爲在外之物이리오
4-2 苟以外物爲外하야 牽己而從之면 是는 以己性爲有內外也라
旣以內外爲二本
注+西山眞氏曰 理自內出而周於事요 事自外來而以應理하니 理卽事也요 事卽理也라 故曰 無內外라 夫能定能應하고 有寂有感이 皆心之妙也니 若以定與寂爲是하고 而應與感爲非면 則是以性爲有內外也라 事物之來에 以理應之는 猶鑑懸於此而形不能遁也라 鑑未嘗隨物而照하니 性其可謂隨物而在外乎아 故事物未接에 如鑑之本空者는 性也요 事物旣接에 如鑑之有形者도 亦性也니 內外曷嘗有二本哉아이면 則又烏可遽語定哉
리오
苟以外物爲外하야 凡應物者 必牽己而從之면 是는 以性爲有內外니 如是則方其逐物在外之時에 在內已無此性矣니 其可乎아
旣分內外爲兩端
이면 則人在天地間
에 不能不與物接
이니 是
는 無時而能定也
注+按 勉齋曰 若以心有內外라하면 則不唯未可語定이라 亦且不識心矣라하니라 蓋旣以內外爲二本이면 則是不知心之無內外니 何可遽語定哉아 葉氏所謂人在天地間에 不能不與物接者는 於本文意에 不襯이니라라
[張伯行 註] 姑以己性與外物交接時言之하면 苟以在外之物로 止屬爲外應之者는 必牽己性以從乎物이니 是는 以己性爲有內外하야 必在內라야 方謂之性이요 外此면 卽非性이리니 而天下無是性也라
且以應物之性으로 卽將隨物而之於外면 則當其在外應物時에 性必不在內矣리라
今必專就內以求定이면 是有意於絶外誘之物하야 而不知性與物理通一無二하야 原無內外也라
今旣以內爲性하고 外爲物하야 不相管攝이면 是性在內爲一本이요 物在外爲一本이니 則感應之際에 便有之彼之此之紛이리니
4-3 夫天地之常은 以其心普萬物而無心이요 聖人之常은 以其情順萬事而無情이라
故君子之學
은 莫若廓然而大公
하야 物來而順應
注+問所謂普萬物順萬事者는 卽廓然而大公之謂요 無心無情者는 卽物來而順應之謂라 自私則不能廓然而大公하니 所以不能以有爲爲應迹이요 用智則不能物來而順應하니 所以不能以明覺爲自然이닛고 朱子曰 然하다 應迹은 爲應事物之迹이니 若心則未嘗動也니라 問自私則不能以有爲爲應迹하고 用智則不能以明覺爲自然이니이다 曰 此書首尾 只此兩項이니라 ○ 廓然而大公은 是寂然不動이요 物來而順應은 是感而遂通이니라이니라
天地之心은 運用主宰者是也나 然而普徧萬物호되 實未嘗有心焉이요 聖人之情은 應酬發動者是也나 然而隨順萬事호되 亦未嘗容情焉이라
故君子之學은 廓然大公하니 何嫌於外物이며 物來順應하니 何往而不定哉리오
4-4 易曰 貞
하면 吉
하야 悔亡
하리니 憧憧往來
하면 朋從爾思
注+問此以私感하고 彼以私應이 所謂朋從爾思이닛가 曰 然하다라하니
苟規規於外誘之除
注+按 規規는 莊子註에 蹇淺也라하니 此는 指橫渠絶外物之意而言이라 憧憧往來는 與貞相反者也라하면 將見滅於東而生於西也
니
非惟日之不足이라 顧其端無窮하야 不可得而除也니라
憧憧
은 往來不絶貌
니 各以朋類
로 從其所思
注+按 此釋朋從爾思也나 然文勢不相屬이라라
蓋人之一心이 應感無窮하니 苟惡外物之誘而欲除滅之하면 將見滅於彼而生於此하리니 非惟日見其用力之不足이라 而亦有不可得而除滅者矣리라
4-5 人之情이 各有所蔽라 故不能適道하나니 大率患在於自私而用智라
自私則不能以有爲爲應迹
이요 用智則不能以明覺爲自然
이니 今以惡外物之心
注+按 亦指橫渠之欲絶外物也라으로 而求照無物之地
면 是
는 反鑑而索照也
注+按 應物者心이요 照物者鑑也어늘 今惡外物이면 則是反鑑也라注+欄外書曰 惡外物之心은 旣是自私라 本體受蔽하니 以此欲逞明覺於無物之地하면 是反鑑而索照也니 言私意不除면 明無所照也라니라
蓋不能廓然而大公이라 故自私요 不能物來而順應이라 故用智라
自私者는 則樂於無爲하야 而不知以有爲爲應迹之當然이요 用智者는 則作意於有爲하야 而不知以明覺爲循理之自然이라
今惡外物之累己면 是自私之心也요 而求照無物之地면 是亦用智之過也니 猶反鑑以索照하니
○ 或問 自私用智之語는 恐卽是佛氏之自私이니이다 朱子曰
常人之私意 與佛氏之自私로 皆一私也로되 但明道說得闊하야 非專指佛之自私也니라
然其自私類於釋而用智則又類於老하니 要之컨대 二氏用意 皆欲不累於外物而已니라
4-6 易曰 艮其背
면 不獲其身
하야 行其庭
하야도 不見其人
注+本義曰 蓋身은 動物也나 唯背爲止하니 艮其背면 則止於所當止也라 止於所當止면 則不隨身而動矣리니 是不有其身也라 如是면 則雖行於庭除有人之地나 而亦不見其人矣리라 蓋艮其背而不獲其身者는 止而止也요 行其庭而不見其人者는 行而止也라 不獲其身은 如君止於仁, 臣止於忠하야 但見得事之當止하고 不見得此身之爲利爲害라 纔將此身하야 預其間이면 則道理便壞了라 古人所以捨生取義者는 只爲不見此身이라야 方能如此니라이라하고 孟氏〔子〕亦曰 所惡於智者
는 爲其鑿也
注+孟子本註에 天下之理 本皆利順이어늘 小智之人은 務爲穿鑿하니 所以失之니라 陳氏曰 所惡者는 小智也라注+艮卦彖辭曰 艮其背면 不獲其身하여 行其庭하야도 不見其人하야 無咎라하니라 ○ 孟子離婁下篇에 朱注曰 小智之人은 務爲穿鑿하니 所以失之也라하니라라하시니라
不獲其身, 不見其人은 此說廓然而大公이요 所惡於智爲其鑿也는 此說物來而順應이니라
4-7 與其非外而是內
注+按 亦指橫渠而言也라론 不若內外之兩忘
注+問是內不自私하고 外應不鑿否닛가 朱子曰 是라也
니 兩忘則澄然無事矣
리라
自私用智之患은 其根이 在於分內外爲二하야 以在外者爲非하고 在內者爲是라
然在外者
를 終不容以寂滅
注+按 寂滅은 恐不可以在外者言이니 外字는 恐當作內字라이라
故常爲外物所撓
하나니 惟能知性無內外而兩忘之
면 則動靜
이 莫非自然
注+按 是定明以後事니 下語亦恐失序라하야 澄然無事矣
리니 所謂廓然大公者也
라
無事則心無所累라 故能明하고 明則物來順應이니 尙何外物之累哉아
內外兩忘은 非忘也라 一循乎理하야 不是內而非外也니라
4-8 聖人之喜는 以物之當喜요 聖人之怒는 以物之當怒니 是는 聖人之喜怒 不繫於心而繫於物也라
烏得以從外者爲非하고 而更求在內者하야 爲是也리오
今以自私用智之喜怒
로 而視聖人喜怒之正
이면 爲如何哉
注+欄外書曰 不繫於心而繫於物은 謂不繫於私而繫於公也라아
以自私用智之喜怒로 其視聖人之喜怒一循乎天理之正者하면 豈不大相戾哉아
4-9 夫人之情
이 易發而難制者
는 惟怒爲甚
하니 第能於怒時
에 遽忘其怒
하고 而觀理之是非
하면 亦可見外誘之不足惡
요 而於道
에 亦思過半矣
注+欄外書曰 忿懥恐懼好樂憂患得其正者는 正心也니 正心은 卽定性也라 此借怒一件하야 以例其餘耳니라 又同書云 施璜虹〈玉〉曰 此篇은 乃明道先生得統於濂溪先生處니 所以反覆辨明 性無內外動靜之分하야 而大公順應이 爲定性主宰也라 濂溪謂 聖人은 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하야 立人極焉이라하니 定之以中正仁義는 性之所以定也요 主於無欲而靜이면 則是大公順應之全體니 尙何應物之爲累哉아리라
4-1
횡거선생橫渠先生이
명도선생明道先生에게 “
성性을
정定할 적에
동動하지 않을 수 없어 아직도
외물外物에 얽매이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명도선생明道先生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注+유작游酢이 명도明道의 행장行狀 뒤에 다음과 같이 썼다. “선생(明道)은 매우 일찍 도道를 들었다. 나이가 20세를 넘자 장자후張子厚(橫渠)가 벗하여 스승으로 섬겼는데, 선생이 벼슬하자 정성定性이 동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을 가지고 질문하니, 선생은 그 의혹을 깨뜨려서 내외內外와 동정動靜이 도道와 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였다. 그 후 자후子厚가 학문學問이 이루어지고 덕德이 높아지자, 아는 자들은 〈자후子厚의 학문學問이〉 맹자孟子와 같다고 말하였다.”
“이른바 정定이라는 것은 동動하여도 정定하고 정靜하여도 정定하여 보내고 맞이함이 없고 내외內外가 없는 것이니,
이 장章은 아직도 외물外物에 얽매인다는 한 구句를 가지고 반복하여 분변해서 밝혔다.
만물萬物이 똑같지 않으나 이치 밖의 물건이 없고 만 가지 이치가 똑같지 않으나 성性 밖의 이치가 없으니, 무릇 천하天下의 물物‧이理가 만 가지로 수작酬酌함이 모두 나의 성性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른바 정성定性이란 일정一定하여 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발發하여 절도節度에 맞음은 동動하여도 정定한 것이요, 공경하여 잃음이 없음은 정靜하여도 정定한 것이다.
장將은 보냄이니, 일이 지나갈 적에 보냄이 없고 일이 올 적에 맞이함이 없는 것이다.
동動과 정靜이 일정一定하니, 어찌 보내고 맞이함이 있겠는가.
고요하여 동動하지 않음은 안에 보존하는 것이요, 감동하여 마침내 통함은 밖에 응하는 것이다.
체體와 용用이 일관되니, 어찌 내외內外에 간격이 있겠는가.
[張伯行 註] 여기에서 정자程子의 학문이 성性을 알았음을 볼 수 있으니, 주자周子의 이른바 ‘정靜하면서도 정靜함이 없고 동動하면서도 동動함이 없다’ 는 이치이다.
편篇 전체를 통들어 외물外物에 얽매이는 것을 가지고 변론하였는데, 여기서는 먼저 정성定性의 뜻을 논한 것이다.
횡거橫渠 역시 자신이 하늘에서 얻은 이치가 본래 편안하고 한결같아서 얽매임이 없음을 알았으나 이 가운데에 끝내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고 한 번 동하면 외물外物이 곧 분요紛擾하는 병통이 있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마음을 얽매임이 없는가’ 하고 물었으니, 이 또한 각고刻苦한 뜻이 많아서 성性의 자연스러움에 있어 이해함이 부족한 것이다.
이는 성性이 곧 이理임을 알지 못한 것이니, 천하에 정定하지 않은 이치가 없으면 정定하지 않은 성性이 없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정定을 구한다고 말하면 곧 이미 성性이 아니다.
정자程子가 이 때문에 먼저 횡거橫渠와 더불어 성性의 정定함을 논한 것이니, 이른바 정定이라는 것은 동動하지 않게 하는 것도 아니요, 또한 반드시 동動을 떠난 뒤에 정定한 것도 아니다.
이치를 따라 동하면 동動하는 것도 정定이요, 정靜할 때에도 이 이理에 불과하므로 정靜한 것도 정定인 것이다.
천하에 성性 밖의 물건이 없으니 어찌 가는 일을 보낼 것이 있겠으며, 내 마음이 사물의 성性 아님이 없으니 어찌 오는 일을 맞이할 것이 있겠는가.
나의 성性이 바로 외물外物의 이치이니 어찌하여 안에 있는 성性을 나눌 것이 있겠으며, 모든 사물이 바로 성性 안의 이치이니 어찌하여 밖에 있는 물건을 나눌 것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하여야 비로소 정定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2 만일 외물外物을 밖이라고 여겨서 자기를 끌고 따라간다면 이는 자기의 성性에 내內‧외外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또 성性을 가지고 밖에 있는 물物을 따른다면 밖에 있을 때에 어느 것이 안에 있는 것이 되겠는가.
이는 외물外物의 유혹을 끊는 데에 마음을 두어서 성性에 내內‧외外가 없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내內‧
외外를 두
근본根本이라 한다면
注+서산진씨西山眞氏가 말하였다. “이치는 안에서 나와 일에 두루하고 일(사물)은 밖에서 와서 이치에 응하니, 이치가 바로 일이고 일이 바로 이치이다. 그러므로 내內‧외外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능히 정定하고 능히 응應하며 적寂이 있고 감感이 있는 것이 모두 마음의 묘妙이니, 만약 정定과 적寂을 옳다 하고 응應과 감感을 그르다고 한다면 이는 성性에 내內‧외外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물이 올 적에 이치로써 응함은 거울이 여기에 매달려 있으면 형체形體가 도망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거울이 일찍이 물건을 따라가 비추지 않으니, 성性이 물건을 따라가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물을 접하기 전에 거울이 원래 비어 있는 것 같은 것은 성性이고, 사물을 접한 뒤에 거울속에 형체가 있는 것과 같은 것도 성性이니, 내內‧외外가 어찌 일찍이 두 근본이 있겠는가.” 또 어찌 대번에
정定함을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외물外物을 밖이라고 여겨서 무릇 사물에 응하는 자가 반드시 자기 몸을 끌고 따라간다면 이는 성性에 내內‧외外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니, 이와 같다면 마음이 사물을 좇아 밖에 있을 때에는 이미 이 성性이 없는 것이니, 되겠는가.
이는 외물外物의 유혹을 끊는 데에 마음을 두어서 성性이 본래 내內‧외外의 구분이 없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미
내內‧
외外를 나누어 두 가지라고 여긴다면 사람이
천지간天地間에 있을 적에 사물과 접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이는
정定할 수 있는 때가 없다는 것이다.
注+살펴보건대 면재勉齋가 말하기를 “만약 마음에 내內‧외外가 있다고 한다면 정定을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이미 내內‧외外를 두 근본이라고 한다면 이는 마음에 내內‧외外가 없음을 알지 못한 것이니, 어찌 대번에 정定을 말할 수 있겠는가. 섭씨葉氏가 ‘사람이 천지天地 사이에 있으매 물건과 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본문本文의 뜻에 적절하지 않다.
[張伯行 註] 우선 자신의 성性이 외물外物과 교접할 때를 가지고 말한다면 만일 밖에 있는 물건을 단지 밖에서 응하는 데에 소속시키는 자는 반드시 자신의 성性을 끌고 가서 물건을 따를 것이니, 이는 자신의 성性에 내內‧외外가 있다고 여겨서 반드시 안에 있어야 비로소 이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이것을 벗어나면 곧 성性이 아니라고 할 것이니, 천하天下에 이러한 성性은 없다.
또 사물에 응하는 성性을 가지고 물건을 따라 밖에 간다고 하면 밖에 있어 사물에 응할 때에는 성性이 반드시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일찍이 안에 있는 성性이 없으며, 또 어찌 일찍이 따로 안에 있는 성性이 있겠는가.
이제 반드시 오로지 내면에만 나아가 정定을 구한다면 이는 밖에서 유혹하는 외물外物을 끊으려는 데에 뜻이 있어, 성性과 사물의 이치가 하나로 통하여 둘이 없어서 원래 내內‧외外의 구분이 없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제 이미 안을 성性이라 하고 밖을 사물이라 하여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면 이는 안에 있는 성性이 한 근본이 되고 밖에 있는 물건이 한 근본이 될 것이니, 감응感應하는 즈음에 곧 저리로 가고 이리로 가는 분분함이 있을 것이다.
또 어찌 대번에 이것을 정定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성性으로 말하면 일찍이 정定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4-3 천지天地의 떳떳함은 그 마음이 만물萬物에 두루하되 마음이 없기 때문이요, 성인聖人의 떳떳함은 그 정情이 만물萬物에 순응하되 정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의
학문學問은 확연히 크게
공정公正하여 사물이 오면
순응順應하는 것보다 더 좋음이 없는 것이다.
注+“이른바 만물萬物에 두루하고 만사萬事에 순응한다는 것은 바로 확연하여 크게 공정함을 말하고, 마음이 없고 정情이 없다는 것은 바로 사물이 오면 순히 응함을 이른다. 스스로 사사로이 하면 확연하여 크게 공정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유위有爲로써 자취에 응하지 못하고, 지혜를 쓰면 사물이 올 적에 순히 응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명각明覺으로써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그렇다. 자취에 응한다는 것은 사물의 자취에 응하는 것이니, 마음으로 말하면 일찍이 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사사로이 하면 유위有爲로써 자취에 응하지 못하고 지혜를 쓰면 명각明覺으로써 자연스럽게 하지 못합니다.”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이 책은 시종始終 다만 이 두 조항 뿐이다.”
○ 곽연이대공廓然而大公은 바로 고요하여 동하지 않는 것이고, 물래이순응物來而順應은 바로 감동하여 마침내 통하는 것이다.
천지天地의 마음은 운용運用하고 주재主宰하는 것이 이것이나 만물萬物에 두루하되 실로 일찍이 마음이 있지 않으며, 성인聖人의 정情은 응수應酬하고 발동發動하는 것이 이것이나 만사萬事에 순응順應하되 또한 일찍이 정情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君子의 학문學問은 확연히 크게 공정公正하니 어찌 외물外物을 혐의하며, 사물이 오면 순히 응하니 어디 간들 정定하지 않겠는가.
4-4 《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
정貞하면
길吉하여 후회가 없을 것이니, 끊임없이〔憧憧〕 왕래하면 벗만 네 생각을 따른다.”
注+“이쪽에서 사私로써 감동하면 저쪽에서 사私로써 응하는 것이 이른바 붕종이사朋從爾思라는 것입니까?”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하였으니,
만일
외물外物의 유혹을 제거하는 데에 급급〔規規〕하면
注+살펴보건대 규규規規는 《장자莊子》의 주註에 “절뚝거리고 천박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횡거橫渠가 외물外物을 끊는다는 뜻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동동왕래憧憧往來는 정貞과 상반되는 것이다. 장차 동쪽에서 없어졌다가 서쪽에서 다시 생김을 보게 될 것이니,
날짜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단서가 무궁해서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동동憧憧은 끊임없이 왕래하는 모양이니, 각각
붕류朋類로써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다.
注+살펴보건대 이는 붕종이사朋從爾思를 해석한 것이나 문세文勢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사람의 한 마음은 감응함이 무궁하니, 만일 외물外物의 유혹을 싫어해서 제거하여 없애려고 한다면 장차 저기에서 없어졌다가 여기에서 다시 생기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그 힘씀이 부족함을 날로 볼 뿐만 아니라 또한 제거하여 없앨 수 없을 것이다.
4-5 사람의 정情은 각각 가리운 바가 있기 때문에 도道에 나아가지 못하니, 대체로 병통이 스스로 사사로이 하고 지혜를 쓰는 데에 있다.
스스로 사사로이 하면
유위有爲로써 자취에 응하지 못하고 지혜를 쓰면
명각明覺으로써 자연스럽지 못하니, 이제
외물外物을 싫어하는 마음
注+살펴보건대 이 또한 횡거橫渠가 외물外物을 끊고자 함을 가리킨 것이다.으로 사물이 없는 자리를 비추려고 한다면 이는 거울을 뒤집어 놓고 비추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注+살펴보건대 사물에 응하는 것은 마음이고 물건을 비추는 것은 거울인데, 이제 외물外物을 싫어한다면 이는 거울을 뒤집어 놓는 것과 같다.注+《난외서欄外書》에 말하였다. “외물外物을 싫어하는 마음은 이미 본래 사사로운 것이어서 본체本體가 가리움을 당하니, 이것을 가지고 사물이 없는 곳에 명각明覺을 부리고자 한다면 이는 거울을 뒤집어 놓고 비추기를 구하는 격이니, 사사로운 뜻을 제거하지 않으면 밝음이 비출 곳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각각 가리운 바가 있으나 대개는 스스로 사사로이 함과 지혜를 씀의 두 가지에 있다.
확연히 크게 공정하게 하지 못하므로 스스로 사사롭게 되고, 사물이 오면 순히 응하지 못하므로 지혜를 쓰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사사로이 하는 자는 무위無爲를 좋아하여 유위有爲로써 자취(사물)의 당연함에 응할 줄을 알지 못하고, 지혜를 쓰는 자는 유위有爲에 뜻을 두어 명각明覺으로써 이치의 자연함을 따를 줄 모른다.
이제 외물外物이 자기를 얽매임을 싫어한다면 이는 스스로 사사로이 하는 마음이요, 사물이 없는 곳을 비추려고 한다면 이 또한 지혜를 쓰는 잘못이니, 거울을 뒤집어 놓고 비추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스스로 사사로이 함과 지혜를 씀은 비록 두 가지 병통인 것 같으나 실은 전전展轉하여 서로 연관된다.
○ 혹자가 “스스로 사사로이 하고 지혜를 쓴다는 말은 바로 불씨佛氏의 스스로 사사로이 한다는 뜻인 듯합니다.” 하고 묻자, 주자朱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상인常人의 사사로운 마음과 불씨佛氏의 스스로 사사로이 하는 것이 모두 똑같은 사私이나 다만 명도明道의 말씀이 넓어서 오로지 불씨佛氏의 스스로 사사로이 한다는 것만을 가리킨 것은 아니다.”
내(葉采)가 생각하건대 횡거橫渠는 외물外物의 얽매임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니, 곧 이미 불씨佛氏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께서 그 병통의 근원을 미루어 자연 석씨釋氏와 서로 같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사사로이 함은 석씨釋氏와 유사하고 지혜를 쓰는 것은 또 노자老子와 유사하니, 요컨대 석씨釋氏와 노자老子 두 사람의 용심用心이 모두 외물外物에 얽매이지 않고자 했을 뿐이다.
4-6 《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등에 그치면 자기 몸을 보지 못하여 뜰을 거닐어도 사람(남)을 보지 못한다.”
注+《본의本義》에 말하였다. “몸은 움직이는 물건이나 오직 등은 멈추니, 그 등에 멈추면 마땅히 그칠 바에 그친 것이다. 마땅히 그칠 바에 그치면 몸을 따라 동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불유기신不有其身이다. 이와 같이 하면 비록 사람이 있는 뜰에 다니더라도 또한 그 사람을 보지 못할 것이다. 등에 멈추어 자기 몸을 보지 못하는 것은 멈추어 있으면서 그치는 것이고, 뜰을 가면서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은 가면서 그치는 것이다. 자기 몸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군주는 인仁에 그치고 신하는 충忠에 그치는 것과 같아서 다만 일에 있어서 마땅히 그쳐야 함만 보고, 이 몸에 이로운가 해로운가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 몸을 가져다가 그 사이에 간여하면 도리道理가 곧 파괴된다. 옛사람이 생명生命을 버리고 의리義理를 취한 까닭은 다만 이 몸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이와 같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였고,
맹자孟子 또한 말씀하기를 “지혜를 미워하는 까닭은
천착穿鑿하기 때문이다.”
注+《맹자孟子》의 본주本註에 “천하天下의 이치가 본래 모두 순한데 작은 지혜를 쓰는 사람은 힘써 천착穿鑿하니, 이 때문에 잃는다.” 하였다.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싫어하는 것은 작은 지혜이다.” 하였다.注+간괘艮卦 〈단사彖辭〉에 이르기를 “등에 그치면 자기 몸을 보지 못하여 뜰을 거닐어도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다.” 하였다.
○ 《맹자孟子》〈離婁 하편下篇〉의 주자주朱子注에 이르기를 “작은 지혜를 가진 사람은 천착穿鑿하기를 힘쓰니, 이 때문에 잃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자기 몸을 보지 못하고 그 사람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확연히 크게 공정公正함을 말한 것이요, 지혜를 미워하는 까닭은 천착穿鑿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사물이 오면 순히 응함을 말한 것이다.”
4-7 밖을 그르다 하고 안을 옳다고
注+살펴보건대 밖을 그르다 하고 안을 옳다고 한다는 것은 이 또한 횡거橫渠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하기보다는
내외內外를 모두 잊는 것이 나으니,
注+“이것이 안으로 스스로 사사로이 하지 않고 밖으로 응함에 천착穿鑿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자, 주자朱子가 말씀하기를 “옳다.” 하였다.내외內外를 모두 잊으면 마음이 깨끗하여 일이 없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하여 일이 없으면 정定해지고, 정定해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어찌 사물事物에 응함에 얽매이겠는가.
스스로 사사로이 함과 지혜를 쓰는 병통은 그 뿌리가 내內‧외外를 나누어 두 가지로 여겨서 밖에 있는 것을 그르다 하고 안에 있는 것을 옳다고 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밖에 있는 것을 끝내 없앨 수 없다.
注+살펴보건대 적멸寂滅은 밖에 있다고 말할 수가 없으니, 외자外字는 마땅히 내자內字가 되어야 할 듯하다.
그러므로 항상
외물外物에게 동요당하는 것이니, 오직
성性이
내외內外가 없음을 알아서 모두 잊는다면
동정動靜이 모두 자연스러워서
注+살펴보건대 이는 정명定明 이후의 일이니, 글을 쓴 순서가 잘못된 듯하다. 마음이 깨끗하여 일이 없을 것이니, 이른바 ‘확연하여 크게
공정公正하다’는 것이다.
일이 없으면 마음에 얽매이는 바가 없으므로 밝을 수 있고 밝으면 사물事物이 옴에 순히 응하니, 이러고도 외물外物의 얽매임이 되겠는가.
내외內外를 모두 잊는다면 스스로 사사로이 하는 것이 아니요, 정定하여 밝다면 지혜를 쓰는 것이 아니다.
“내외內外를 모두 잊는다는 것은 참으로 잊는다는 것이 아니요, 한결같이 이치를 따라서 안을 옳다 하고 밖을 그르다 하지 않는 것이다.”
4-8 성인聖人의 기뻐함은 사물事物이 당연히 기뻐해야 하기 때문이요, 성인聖人이 노여워함은 사물이 당연히 노여워해야 하기 때문이니, 이는 성인聖人의 노여워하고 기뻐함이 마음에 달려 있지 않고 사물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聖人이 어찌 사물事物에 응하지 않겠는가.
어찌 밖에서 오는 것을 그르다 하고 다시 안에 있는 것을 구하여 옳다 하겠는가.
이제 스스로 사사로이 하고 지혜를 쓰는
희로喜怒를 가지고
성인聖人의 올바른
희로喜怒에 비교한다면 어떠하겠는가.
注+《난외서欄外書》에 말하였다. “마음에 달려 있지 않고 사물에 달려 있다는 것은 사사로움에 달려 있지 않고 공정함에 달려 있음을 이른다.”
성인聖人은 일찍이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없지 않으시니, 이는 일찍이 스스로 사사로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저 사물(사람)에 달려 있고 여기(자신)에 달려 있지 않으니, 이는 일찍이 지혜를 쓰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사사로이 하고 지혜를 쓰는 희로喜怒를 가지고 한결같이 천리天理의 바름을 따르는 성인聖人의 희로喜怒에 견준다면 어찌 크게 서로 어긋나지 않겠는가.
4-9 사람의
정情이 쉽게
발發하여 제재하기 어려운 것은 오직 노여워함이 심하니, 다만 노여울 때에 급히 노여운 마음을 잊고 이치의 옳고 그름을 관찰한다면
외물外物의 유혹이 미워할 것이 못됨을 알 것이요
도道에 있어서도 생각이 절반을 넘을 것이다.
注+《난외서欄外書》에 말하였다. “분치忿懥와 공구恐懼와 호요好樂와 우환憂患이 그 바름을 얻는 것은 정심正心이니, 정심正心은 바로 정성定性이다. 이는 노여워하는 한 가지 일을 빌어서 그 나머지를 예例로 삼았을 뿐이다.” 또 같은 책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황홍옥施璜虹玉이 이르기를 ‘이 편은 바로 명도선생明道先生이 주렴계선생周濂溪先生에게 도통道統을 얻은 부분이니, 이 때문에 성性이 내외內外와 동정動靜의 구분이 없어서 크게 공정하고 순히 응함이 성性을 정하는 주재主宰가 됨을 반복하여 밝힌 것이다. 염계濂溪가 이르기를 「聖人은 중정인의中正仁義로 정定하여 정靜을 주장해서 인극人極을 세운다」 하였으니, 중정인의中正仁義로 정定함은 성性이 정定해지는 것이요, 욕심이 없음을 주장하여 정靜해지면 이는 크게 공정하고 순히 응하는 전체이니, 오히려 어찌 사물에 응함에 얽매이겠는가.’ 하였다.”
“노여움을 잊으면 공정公正해지고 이치를 살펴보면 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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