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呂與叔이 撰橫渠先生行狀云 康定用兵之時에 先生
儒者自有名敎하니 何事於兵이리오하고 因勸讀中庸이어늘
於是에 又訪諸釋老之書하야 累年盡究其說하야 知無所得하고 反而求之六經이러시니
嘉祐
注+仁宗年號라初
에 見程伯淳正叔于京師
하야 共語道學之要
하고
先生이 渙然自信曰 吾道自足이니 何事旁求리오하시고
尹彦明云 橫渠昔在京師에 坐虎皮하야 說周易하시니 聽從甚衆이러니
次日에 橫渠撤去虎皮하고 曰 吾平日爲諸公說者 皆亂道로다
有二程近到하니 深明易道하야 吾所弗及이니 汝輩可師之라하시니라
○ 愚謂 此可以見橫渠先生勇於從善하야 無一毫私吝之意하니 非大公至明이면 孰能如是리오
25-2 晩自崇文移疾
注+按 橫渠爲崇文院校書러니 會에 弟天祺得罪한대 乃告歸하고 居於橫渠故居하며 遂移疾不起하시니라 公去朝에 築室南山下하고 弊衣蔬食으로 專精治學하야 未始須臾息하고 未始頃刻不用力하며 亦未始須臾忘也하시니라하고 西歸橫渠
하사 終日危坐一室
하고 左右簡編
하야 俯而讀
하고 仰而思
하사 有得則識之
호되 或中夜起坐
하야 取燭以書
하시니 其志道精思 未始須臾息
이요 亦未嘗須臾忘也
시니라
學者有問이어든 多告以知(智)禮成性變化氣質之道하야 學必如聖人而後已하시니 聞者莫不動心有進하니라
[張伯行 註] 此一節은 言張子之學이 全是苦心得之하야 其用功恁地親切也라
熙寧二年에 被召入對하야 除崇文院校書러니 與執政不合한대 明年移疾西歸하야 居於橫渠故地러시니 鄙陋不堪이로되 而處之怡如하야 終日危坐一室하시니 卽明道敎人靜坐之學也라
左右簡編하고 俯讀仰思하니 卽張子所云 琴瑟簡編하야 常使心在於此也요
有得則識之하고 中夜取燭以書하니 卽子夏所云 知其所亡하고 無忘其所能也라
其志道精思가 須臾不息不忘이 如此하니 卽張子自云 比他人에 自是勇處多也라
蓋其爲學이 深探遠賾하야 知日進乎高明하고 而又正容謹節하야 以禮爲據守하야 欲變化氣質以成其性하시니 其苦心極力이 多不外此라
故學者有問이면 亦多告以知崇如天하고 禮卑如地하니
成性存存이 道義之門이요 凡所以變化氣質之道는 以聖人爲必可學하고 學不至於如聖人而有不可已者로 循循善誘하시니 學者聞其言하고 莫不竦動其心하야 有所進益이라
必優游涵泳하야 求其有得於心이니 旣得之矣면 則或宣之口하고 或筆於書하야 而修之爲辭호되 必字斟句酌하야 不使有毫釐之差요 命辭無差然後에 以之應斷事物이면 知明理精하야 而妙用無方矣리니 此豫道也라
故能沛然精義入神以致用者 皆平日窮理致知之功素立이요 而非勉强擬議於應事之時也라
按氣質二字는 是張子立標以明道요 知禮二字는 是張子親切用工夫요 豫字는 是張子謹嚴眞精神이니 學者宜留心焉이니라
25-3 嘗謂門人曰 吾學이 旣得於心이면 則修其辭니 命辭無差然後에 斷事요
斷事無失
이라야 吾乃沛然
이니 精義入神者
는 豫而已矣
注+按 此與第二卷 精義入神, 事豫吾內로 其意相似하니 豫卽葉註素立之意니라라하시니라
人於義理에 其初得於心者 雖了然無疑나 及宣之於口하고 筆之於牘하야는 則或有差라
故命辭無差면 則所見已審이니 以是應酬事物이면 知明理精하야 妙用無方矣니 是皆窮理致知之功素立이요 而非勉强擬議於應事之時也니라
25-4 先生이 氣質剛毅하고 德盛貌嚴이나 然與人居에 久而日親하며 其治家接物을 大要正己以感人이요 人未之信이어든 反躬自治하고 不以語人하시며 雖有未諭라도 安行而無悔라
故識與不識이 聞風而畏하야 非其義也어든 不敢以一毫及之하니라
德貌嚴毅而中誠懇惻이라 故與人久而益親하며 躬自厚而薄責於人이라 故人心服而不敢加以非義니라
[張伯行 註] 此一節은 言張子之德性이 威而不猛하고 躬自厚而薄責於人也라
蓋其氣質剛毅면 則不屈於物欲하야 而持終如始요 其德盛이면 則充養有道하야 而氣質不足以限之요 其貌嚴이면 則正大之氣所積而發하야 自有威之可畏라
凡其入而治家하고 出而接物에 皆正己以爲感人之本하고 不責人之未信하며
反求諸身하야 安意而行之하사 人雖終有未喩나 而己不以爲悔하시니
伊川答張子書에 嘗謂其無寬裕溫厚之氣하니 更望完養思慮하야 涵泳義理하노니
25-1 여여숙呂與叔이 찬한 횡거선생橫渠先生의 행장行狀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강정康定 연간年間에 군대를 쓸 때에 선생先生의 나이가 18세였다.
선생先生은 개연慨然히(분연히) 공명功名을 이룰 것을 자부하여 글을 올려 범문정공范文正公(范仲淹)을 뵙자,
범문정공范文正公은 선생先生이 원대遠大한 기국器局임을 알고는 성취成就시키려 하여 꾸짖기를
‘유자儒者는 본래 좋은 명교名敎가 있으니, 어찌 병사兵事를 일삼을 것이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중용中庸》을 읽으라고 권고하였다.
선생先生은 이 책을 읽고는 비록 좋아하기는 하였으나 오히려 만족스럽지 못하게 여기셨다.
이에 또 불교佛敎와 노장老莊의 책에서 찾아 여러 해 동안 그 내용을 다 연구하였으나 소득所得이 없음을 아시고는 돌이켜 육경六經에서 찾았다.
가우嘉祐注+강정康定과 가우嘉祐는 모두 인종仁宗의 연호이다.초년初年에
정백순程伯淳(明道)과
정숙正叔(伊川)을
경사京師에서 만나 함께
도학道學의
요점要點을 말씀하시고 나서는
선생先生은 얼음이 풀리듯 하여 자신自信하고 말씀하시기를 ‘우리 도道가 스스로 충분하니, 어찌 옆에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시고
이에 이단異端의 학문學問을 모두 버려 순수하셨다.
윤언명尹彦明(尹焞)이 말하기를 “횡거橫渠가 옛날 경사京師에 계실 적에 호피虎皮자리에 앉아 《주역周易》을 설명하시니, 듣고 따르는 자가 매우 많았다.
하루 저녁에는 두 정선생程先生이 오시어 함께 《주역周易》을 강론하셨다.
다음날 횡거橫渠는 호피虎皮 방석을 치우며 말씀하시기를 ‘내 평소 제공諸公들에게 설명한 것은 모두 혼란한 말이었다.
두 정선생程先生이 근래에 이곳에 오셨는데, 《주역周易》의 도리道理에 매우 밝아서 내 미칠 수 없으니, 너희들은 이 분들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하셨다.”
○ 내가 생각하건대 이는 횡거선생橫渠先生이 선善을 따름에 용감하여 일호一毫도 사사롭고 인색한 뜻이 없음을 볼 수 있으니, 대공지정大公至正한 자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25-2
말년末年에
숭문원崇文院에서 신병으로 물러나
注+살펴보건대 횡거橫渠가 숭문원崇文院 교서校書가 되었는데, 마침 아우인 천기天祺가 죄를 얻자 이에 사직辭職하고 돌아와 횡거橫渠가 옛날에 살던 곳에 사셨으며, 마침내 병病을 칭탁稱託하고 나와서 벼슬하지 않으셨다. 공公은 조정朝廷을 떠나자 남산南山 아래에 집을 짓고 해진 옷을 입고 채소를 먹으며 오로지 정밀하게 학문學問을 하여 일찍이 잠시도 쉬거나 힘을 쓰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또한 일찍이 잠시도 잊은 적이 없으셨다. 서쪽
횡거橫渠로 돌아오신 다음 종일토록 한 방에 무릎꿇고 앉아
간편簡編을
좌우左右에 진열해 놓으시고는 머리를 숙여 읽고 우러러 생각해서 터득한 것이 있으시면 기록하셨는데, 혹은 밤중에 일어나 앉아서 촛불을 밝히고서 쓰시곤 하셨으니,
도道에 뜻하고 생각을 정밀하게 함을 일찍이 잠시도 쉬지 않았고 또한 일찍이 잠시도 잊지 않으셨다.
배우는 자가 질문함이 있으면, 지智와 예禮가 성性을 이룸과 기질氣質을 변화變化하는 방도를 많이 말씀하여 학문學問이 반드시 성인聖人과 같은 뒤에야 그만두게 하시니, 듣는 자들이 마음에 감동하여 진전進前됨이 있지 않은 이가 없었다.
[張伯行 註] 이 한 절節은 장자張子의 학문學問이 완전히 고심苦心하여 얻어서 공부하기를 이와 같이 친절親切히 하였음을 말씀한 것이다.
희령熙寧 2연年(1069)에 횡거橫渠가 황제皇帝의 부름을 받고 입대入對하여 숭문원崇文院 교서校書에 제수되었으나 집정대신執政大臣과 뜻이 부합하지 않자, 이듬해에 질병을 칭탁하고 서쪽으로 돌아와 횡거橫渠의 옛땅에 거주하셨는데, 누추하여 견딜 수가 없었으나 태연히 거처하여 종일토록 한 방에 무릎 꿇고 앉아 계셨으니, 이는 명도明道가 사람에게 정좌靜坐할 것을 가르치신 학문이다.
좌우左右에 간편簡編을 쌓아놓고는 머리를 숙여 읽고 우러러 생각하였으니, 이는 장자張子가 말씀한 바, ‘거문고와 비파와 간편簡編을 두어서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게 한다.’는 것이요,
터득함이 있으면 기억하고 한밤중에도 촛불을 밝히고 썼으니, 이는 자하子夏의 이른바 ‘그 없는 바를 알고 그 능한 바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道에 뜻하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잊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바로 장자張子가 스스로 말씀하기를 ‘딴 사람에 비하여 본래 용맹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그 학문學問이 깊이 탐구하고 멀리 찾아서 지식이 날로 고명高明한 데에 나아갔고, 또 용모를 바르게 하고 예절을 삼가서 예禮로써 의거하여 지킬 곳을 삼아 기질氣質을 변화시켜서 성性을 이루고자 하였으니, 고심苦心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 대부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가 질문하면 또한 지혜는 하늘과 같이 높고 예禮는 땅과 같이 낮았다.
이루어진 성性을 보존하고 보존함이 도의道義의 문門이요, 무릇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방도는 성인聖人을 반드시 배울 수 있다고 여기고 학문學問이 성인聖人과 같은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그만두지 말아야 함을 차근차근 잘 유도해주셨으니, 배우는 자가 그 말씀을 듣고 모두 그 마음을 분발하여 전진前進하고 유익有益한 바가 있었다.
또 일찍이 문인門人들에게 이르시기를 “학문學問은 돈오頓悟(갑자기 통달함)하기가 어렵다.
반드시 우유優游하고 함영涵泳해서 그 마음에 터득함이 있기를 구해야 하니, 이미 터득하였으면 혹 입으로 말하고 혹 책에 써서 편수編修하여 문장文章을 만들되 반드시 글자마다 참작하고 구句마다 참작해서 털끝만한 차이가 있지 않게 할 것이요, 명사命辭가 착오가 없은 연후에 이로써 사물에 수응酬應하고 판단하면 지식이 밝고 이치가 정밀해서 묘용妙用이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미리하는 방도이다.
만약 터득함이 있고 착오가 없지 못하면 때를 당하여 일을 판단함에 실수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환하게 알아서 의義를 정밀하게 연구하여 신묘神妙한 경지에 들어가서 씀을 지극히 하는 것은 모두 평소에 이치를 궁구하고 지식을 지극히 한 공부가 본래 확립되었기 때문이요, 억지로 일을 논하는 때에 억지로 의의擬議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기질氣質’ 두 글자는 장자張子가 표준標準을 세워서 도道를 밝힌 것이요, ‘지례知禮’ 두 글자는 장자張子가 친절히 공부하신 것이요, 예자豫字는 장자張子가 삼가고 공경하신 참다운 정신精神이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유념해야 한다.
25-3 일찍이 문인門人들에게 말씀하기를 ‘우리의 학문學問이 이미 마음에 얻어지면 말(글)을 잘 닦으니, 명사命辭(말과 글)가 잘못됨이 없은 뒤에야 일을 판단할 수 있고,
일을 판단하여 잘못됨이 없은 뒤에야 내 비로소
패연沛然(막힘이 없어 확 트임)할 수 있으니,
의리義理를 정밀하게 연구하여
신묘神妙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은 미리 〈공부하여 대비〉할 따름이다.
注+살펴보건대 이는 제2권의 ‘정의입신精義入神(義理를 정밀하게 연구하여 신묘神妙한 경지에 들어감)은 사리事理가 나의 내면內面에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과 그 뜻이 서로 비슷하니, 예豫는 바로 섭씨葉氏의 주註에 본래 세운다는 뜻이다.’
사람이 의리義理에 있어 처음 마음에 터득한 것은 비록 분명하여 의심이 없으나, 입으로 말하고 책에 쓰기에 이르러서는 혹 잘못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명사命辭가 잘못됨이 없으면 본 바가 이미 자세한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사물事物에 응수應酬하면 지식이 밝고 이치가 정밀하여 묘용妙用이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을 것이니, 이는 모두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지극히 하는 공부가 평소에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요, 일에 응할 때에 억지로 의의擬議하는 것이 아니다.
25-4 선생先生은 기질氣質이 강하고 굳세며 덕德이 높고 외모外貌가 엄숙하였으나 사람들과 거처할 적에 오랠수록 날로 친해졌으며, 집안을 다스리고 남을 대하는 것은 대체로 자기 몸을 바르게 하여 남을 감동시켰고, 남이 믿어주지 않으면 자기 몸에 돌이켜 스스로 다스리고 이것을 남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비록 상대방이 깨닫지 못하더라도 편안히 행하여 후회함이 없으셨다.
그러므로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풍모風貌만 듣고도 두려워하여 의로운 것이 아니면 감히 일호라도 미치지 못하였다.”
덕스러운 모양이 엄숙하고 굳세며 중심中心의 성의誠意가 간절하였으므로 사람과 더불 적에 오랠수록 더욱 친해졌으며, 몸소 자책自責하기를 후하게 하고 남을 책責하기를 적게 하셨으므로 인심人心이 복종하여 감히 의義가 아닌 것을 가하지 못하였다.
[張伯行 註] 이 일절一節은 장자張子의 덕성德性이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고 몸소 자책하기를 후하게 하고 남에게 책하기를 적게 함을 말한 것이다.
기질氣質이 강剛하고 굳세면 물욕物欲에 굽히지 아니하여 종終을 지키기를 시始와 같이 하고, 덕德이 성대하면 충양充養함에 방도가 있어서 기질氣質이 제한하지 못하고, 모습이 엄숙하면 정대正大한 기운이 쌓여 발로되어서 자연 두려워할 만한 위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과 거처할 적에 오래되면 날로 친해지는 것은 성심誠心이 간절하여 항상 사랑하고 항상 공경하기 때문이다.
무릇 들어가서 집안을 다스리고 나가서 사람을 접할 적에 모두 자기 몸을 바루어서 남들을 감동시키는 근본으로 삼고 남들이 믿지 않음을 책망하지 않았으며,
자기 몸에 돌이켜 구하여 마음을 편안히 하여 행하시어 남이 비록 끝내 깨닫지 못함이 있더라도 자신은 후회하지 않으셨으니,
이른바 ‘남을 책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책하면 도道를 다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 마음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의리가 아닌 것으로 미치지 못한 것이다.
이천伊川이 장자張子에게 답한 편지에 일찍이 “관유寬裕하고 온후溫厚한 기상이 없으니, 다시 사려思慮를 완전히 길러서 의리에 함영涵泳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면 타일他日에 마땅히 저절로 조리條理가 창달暢達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만약 이 절節을 가지고 논한다면 어찌 일찍이 관유하고 온후하지 않겠는가.
상상컨대 정자程子의 말씀에 얻음이 있어 더욱더 진전된 것인 듯하다.
그러하니 장자張子는 진실로 천하의 큰 용맹이라고 이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