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義訓宜, 禮訓別, 智訓知어니와 仁當何訓고
當合孔孟言仁處
하야 大槪硏窮之
니 二三歲
에 得之
라도 未晩也
注+欄外書曰 仁者人也와 義者宜也를 中庸孟子에 並言之하고 禮者履也와 智者知也도 亦古書往往見之하니 凡訓詁는 不過姑借其近似者釋之라 況於一字同音者에 豈能盡其意乎아 程子固不欲學者拘牽字義라 故但曰 二三歲得之라도 未晩也라하시니 其意可見矣니라니라
訓者는 以其字義難明故로 又假一字하야 以訓解之라
義者
는 天理之當然
이니 所以裁制乎事物之宜
라 故訓宜
요 禮者
는 天理之節文
이니 所以別親疎上下之分
이라 故訓別
이요 智者
는 天理之明睿
注+按 洪範에 思曰睿라한대 註에 睿者는 通乎微也라하니 睿當屬思라 訓智는 恐不穩이로다니 所以知事物之是非
라 故訓知
요 仁道至大
하야 包乎三者
라 故爲難訓
이니
說者謂訓覺者는 言不爲物欲所蔽하야 痒痾疾痛에 觸之卽覺이니
訓人者는 言天地生人에 均氣同理하니 以人體之면 則惻怛慈愛之意 自然無所間斷이니
仁은 是愛之體요 覺은 自是智之用이니 仁統四德이라 故仁則無不覺이나 然便以覺爲仁이면 則不可니라
或謂 仁은 只是人心之生理니 以生字訓之 何如닛고 朱子曰
〈이천선생伊川先生이 말씀하였다.〉
“의義는 의宜(마땅함)라고 훈訓하고 예禮는 분별이라고 훈하고 지智는 아는 것이라고 훈할 수 있으나 인仁은 마땅히 무엇이라고 훈해야하는가?
해설하는 자들이 각覺(깨달음)으로 훈하고 인人으로 훈해야 한다고 하는데, 모두 잘못이다.
마땅히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인仁을 말씀한 곳을 합하여
대개大槪를 연구하여야 하니, 2, 3년이 지난 뒤에 터득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注+《난외서欄外書》에 말하였다. “인仁은 사람이고 의義는 마땅함이라는 것을 《중용中庸》과 《맹자孟子》에서 모두 말하였고, 예禮는 이행함이고 지智는 아는 것이라는 것도 옛책에 왕왕 보이니, 모든 훈고訓詁는 우선 근사近似한 것을 빌어 해석함에 불과하다. 더구나 음音이 같은 한 글자에서 어찌 그 뜻을 다할 수 있겠는가. 정자程子는 진실로 배우는 자들이 글자의 뜻에 구애받지 않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다만 말씀하기를 ‘2, 3년이 지난 뒤에 알더라도 늦지 않다.’고 한 것이니 그 뜻을 볼 수 있다.”
훈訓은 글자의 뜻을 밝히기 어려우므로 또 한 글자를 빌어서 해석하는 것이다.
의義는
천리天理에 당연함이니 사물의 마땅함을
재제裁制하는 것이므로
의宜라
훈訓하고,
예禮는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니
친소親疎와
상하上下의 구분을 통달하는 것이므로
별別이라
훈訓하고,
지智는
천리天理의 밝은 지혜이니
注+살펴보건대 〈홍범洪範〉에 “생각함을 예睿라 한다.” 하였는데, 주註에 “예睿는 은미함을 통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예睿는 마땅히 사思에 속하여야 한다. 지智라고 훈訓한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 사물의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므로
지知라
훈訓하고,
인仁의
도道는 지극히 커서 세 가지를 포괄하므로
훈訓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해설하는 자들이 각覺이라고 훈訓하는 것은 물욕物慾에 가리워지지 않아서 옴이 올라 가렵고 병이 들어 아픔에 닿으면 즉시 깨달음을 말한 것이다.
인자仁者는 진실로 깨닫지 않는 바가 없으나 깨달음으로는 인仁에 내포된 많은 뜻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인人으로 훈訓하는 자는 천지天地가 사람을 낳을 적에 똑같은 기운과 이치를 부여하였으니, 사람을 체體로 삼으면 측달惻怛하고 자애慈愛하는 뜻이 자연 간단間斷하는 바가 없을 것임을 말한 것이다.
인자仁者는 진실로 사람을 체體로 삼으나 이것을 가지고 인仁을 훈訓할 수는 없다.
“인仁은 사랑의 체體이고 각覺은 본래 지智의 용用이니, 인仁은 사덕四德(仁‧의義‧예禮‧지智)을 통합하므로 인仁하면 깨닫지 않음이 없으나 곧 각覺을 인仁이라고 한다면 불가하다.”
혹자가 말하기를 “인仁은 다만 인심人心의 생리生理(낳는 이치)이니, 생자生字로 훈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다만 대의大意를 알기를 통투通透하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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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의훈의, 예훈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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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7. 의훈의, 예훈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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