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道先生
이 嘗被旨赴中堂議事
注+按 名臣言行錄에 熙寧二年에 呂申公이 薦授太子中允權御史裏行한대 神宗이 素知先生名하고 召對할새 從容訪問이라 每對退에 必曰 頻求對來하라 欲常相見이라하다 常被旨하야 赴中書議事하니라러시니 荊公
이 方怒言者
하야 厲色待之
注+按 厲色以待先生也라어늘
先生이 徐曰 天下之事는 非一家私議니 願公은 平氣以聽하라하시니
熙寧初에 王荊公安石이 參知政事하야 創制新法하니 中外皆言其不便이어늘
荊公獨憤然不顧
러니 明道先生
이 하사 被旨赴中堂議事
하실새 從容一言之間
에 荊公
이 乃爲之愧屈
하니 蓋有以破其私己之見而消其忿厲之氣也
니라
58. 유안례劉安禮(劉立之)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형공王荊公(王安石)이 집정執政하여 정권政權을 잡고 있으면서 법령法令을 의논하여 고치니, 말하는 자들이 공격하기를 매우 강력하게 하였다.
명도선생明道先生이 일찍이 부름을 받고
중당中堂에 달려가 일을 의논하셨는데,
注+살펴보건대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에 “희령熙寧 2년(1069)에 여신공呂申公(呂公著)이 선생先生을 천거하여 태자중윤太子中允과 권어사이행權御史裏行을 제수하였다. 신종神宗이 평소 선생의 명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소대召對할 적에 종용從容히 물었다. 선생이 매번 대답하고 물러나오면 신종神宗은 반드시 말씀하기를 ‘자주 면대面對하기를 청하여 오라. 항상 서로 만나보고자 한다.’ 하였다. 그리하여 항상 황명皇命을 받고 중서성中書省에 달려가 일을 의논하였다.” 하였다.형공荊公이 막 말하는 자들에게 노하여 험악한 얼굴빛으로 상대하였다.
注+살펴보건대 여색대지厲色待之는 얼굴빛을 엄하게 하고 선생을 대한 것이다.
선생은 천천히 말씀하기를 ‘천하天下의 일은 한 집안의 사사로운 의론議論이 아니니, 부디 공公은 기운을 화평히 하고서 들으라.’ 하였다.
유입지劉立之의 자字가 안례安禮이니, 정자程子의 문인門人이다.
희령熙寧 초년初年에 왕형공王荊公 안석安石이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어 신법新法을 창제創制하니, 중외中外에서 모두 그 불편함을 말하였다.
형공荊公은 홀로 분연憤然히 돌아보지 않았는데, 명도선생明道先生이 권감찰어사이행權監察御史裏行이 되시어 부르는 명령을 받고 중당中堂에 달려가 일을 의논하실 적에 종용從容히 한 번 말씀하시는 사이에 형공荊公이 마침내 부끄러워하여 굴복하였으니, 이는 사사로운 소견을 설파說破하여 분해 하고 사나운 기운을 사라지게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