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 蘇季明
注+退溪曰 武功人이니 始學於橫渠而事二程하야 卒業하니라이 問 喜怒哀樂未發之前
注+按 前字를 心經及通書에 皆作時하니 退溪曰 是라하니라에 求中
注+西山眞氏曰 朱子於呂氏求中之說과 楊氏體所謂中之說에 皆深非之로되 及爲延平行狀하야는 謂其危坐終日하야 驗未發時氣象하야 而求其所謂中이라하시니 則亦呂氏之說也라 又云 先生敎人에 於靜中에 體認大本未發時氣象이라하시고 其後에 與學者書에 又謂 大本達道를 二先生〔二程也〕 蓋屢言之而龜山所謂未發之際에 能體所謂中하고 已發之際에 能得所謂和라하니 此語爲近之라하야 其說又不同하시니 將何所適從耶아 蓋嘗思之컨대 未發之前에 但當敬以存養이요 而不可有心求나 然思慮未形而知覺不昧하야 性之體段이 自有不可掩者니 程子所謂靜中有物者 蓋謂此也라 學者深味而實驗之하면 自當有見하리니 未可專以言語求也니라 ○ 問 某觀延平도 亦謂驗喜怒哀樂未發之前이라하야 似與季明同하니이다 朱子曰 但欲見其如此耳라 然亦有病이니라 ○ 問 程朱皆以求中爲非어늘 而楊羅李는 皆以得之者하니 如何오 退溪曰 所疑果然이라 然楊羅李三先生은 皆性本沈靜而以不求求之故로 無病而有得이요 他人은 性多鬧躁而强探力求면 則徒爲病而卒無得耳니라이 可否
잇가
旣思於喜怒哀樂未發之前求之면 又却是思也니 旣思면 卽是已發이니라
53-2 纔發
이면 便謂之和
注+按 此恐記錄有誤라 發而中節을 謂之和니 豈可以纔發에 不論中節, 不中節하고 皆謂之和乎아 葉註에 便屬已發之和라하니 屬字足以補程子之語意니라니 不可謂之中也
니라
喜怒哀樂未發을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 方其未發에 此心湛然하야 無所偏倚라 故謂之中이요 一念纔生이면 便屬已發之和矣니라
53-3 又問 呂學士言 當求於喜怒哀樂未發之前이라하니 如何잇가 曰
若言存養於喜怒哀樂未發之前이면 則可커니와 若言求中於喜怒哀樂未發之前이면 則不可하니라
喜怒哀樂未發之前에 可以涵養是中이어니와 若有意於求之면 則不得謂之未發이니라
53-4 又問 學者於喜怒哀樂發時에 固當勉强裁抑이어니와 於未發之前엔 當如何用功이닛고 曰
只平日涵養이 便是니 涵養久면 則喜怒哀樂이 發自中節이니라
未發之前에 不容著力用功이요 但有操存涵養而已니라
53-5 曰 當中之時하야 耳無聞하고 目無見否잇가 曰
雖耳無聞하고 目無見이나 然見聞之理在라야 始得이니라
喜怒哀樂未發之時에 雖是耳無聞, 目無見이나 然須是常有箇主宰操持底在這裏라야 始得이니 不是一向空寂了니라
53-6 賢且說靜時如何오 曰 謂之無[有]物則不可어니와 然自有知覺處니이다
人說復其見天地之心
注+復卦彖傳曰 復에 其見天地之心乎인저하니라 ○ 程傳曰 一陽復於下는 乃天地生物之心也라 先儒皆以靜爲見天地之心也라하니 非知道者면 孰能識之리오 ○ 朱子本義曰 積陰之下에 一陽復生하니 天地生物之心이 幾於滅息이라가 而至此乃復을 可見이니라 ○ 朱子語類曰 未發之前에 須常恁地醒이요 不是瞑然不省이니 若瞑然不省이면 則道理何在하야 成甚麽大本이리오 曰 常醒은 便是知覺否잇가 曰 固是知覺이니라 曰 知覺은 便是動否잇가 曰 固是動이니라 曰 何以謂之未發이닛고 曰 未發之前에 不瞑然不省이니 怎生說做靜得이리오 然知覺이 雖是動이나 不害其爲未動이니 若喜怒哀樂則又別也니라 曰 恐此處는 知覺雖動이나 而喜怒哀樂이 却未發否잇가 先生首肯曰 是下面說復見天地之心이 說得好라 復은 一陽生이니 豈不是動이리오 曰 一陽雖動이나 然未發生萬物하니 便是喜怒哀樂未發否잇가 曰是니라 又曰 大抵心은 本是箇活物이라 無間已發未發하고 常恁地活이라 伊川所謂動字는 只似活字라 其曰怎生言靜이리오하시고 而以復說證之하시니 只是明靜中不是瞑然不省故爾니라호되 皆以謂至靜
에 能見天地之心
이라하니 非也
라
釋氏는 多言定이어늘 聖人은 便言止하시니 如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之類 是也라
易之艮에 言止之義曰 艮其止는 止其所也라하니 人多不能止는 蓋人은 萬物皆備하니 遇事時에 各因其心之所重者하야 更互而出이라
纔見得這事重이면 便有這事出하나니 若能物各付物이면 便自不出來也니라
此段問答
은 皆論喜怒哀樂未發之中
이로되 此條問者
는 乃轉就動處言
注+按 此卽中庸或問所謂至於動上求靜之云이니 則問者又轉而之它之意也라也
라
止其所者는 動中其則而不遷也니 若心有所重이면 則因重而遷하나니
物各付物而我無預焉이면 則止其所止하야 而心不外馳矣리라
53-9 或曰 先生이 於喜怒哀樂未發之前에 下動字잇가
或問 伊川云 纔有知覺이면 便是動이라하시니이다 曰
若云知寒覺暖이면 便是知覺已動이어니와 今未曾著於事物이요 但有知覺在면 何妨其爲靜이리오
53-10 或曰 敬을 何以用功이닛고 曰 莫若主一이니라
昞이 嘗患思慮不定하야 或思一事未了에 他事如麻又生하니 如何잇고 曰 不可하다
習能專一時에 便好니 不拘思慮與應事하고 皆要求一이니라
心不專一
이면 則言動皆無實
이라 故曰不誠之本
이라하시니 猶學奕者一心
에 以爲鴻鵠將至
라하면 則非誠于學奕也
注+孟子告子上篇曰 今夫奕之爲數小數也나 不專心致志면 不得也라 奕秋는 通國之善奕者也라 使奕秋로 誨二人奕이어든 其一人은 專心致志하야 惟奕秋之爲聽하고 一人은 雖聽之나 一心에 以爲有鴻鵠將至어든 思援弓繳而射之라하니라라
思慮者는 動於心이요 應事者는 見於言行이니 皆不可不主於一이니라
53-1
소계명蘇季明(蘇昞)
注+퇴계退溪가 말씀하였다. “소계명蘇季明은 무공武功 사람이니, 처음 횡거橫渠에게 배웠으며 이정선생二程先生에게 배워 학업을 끝마쳤다.”이 “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이 발하기 전
注+살펴보건대 전자前字를 《심경心經》과 《통서通書》에는 모두 시時로 썼는데, 퇴계退溪는 “이것이 옳다.” 하였다.에
중中을 구하는 것
注+서산진씨西山眞氏가 말하였다. “주자朱子는 여씨呂氏(呂大臨)의 중中을 구한다는 말씀과 양씨楊氏(楊時)의 이른바 중中을 체인體認한다는 말에 대해 모두 크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연평延平(李侗)의 행장行狀에는 ‘종일토록 무릎꿇고 앉아서 미발未發했을 때의 기상氣象을 징험하여 이른바 중中이라는 것을 구하였다.’ 하셨으니, 그렇다면 이 또한 여씨呂氏의 말이다. 그리고 주자朱子는 또 ‘연평선생延平先生이 사람을 가르칠 적에 정靜 가운데에서 대본大本이 미발未發했을 때의 기상氣象을 체인體認했다.’ 하셨고, 그 후에 배우는 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또 이르기를 ‘대본大本과 달도達道를 두 정선생程先生이 여러 번 말씀하였는 바, 귀산龜山(楊時)의 이른바 「未發했을 때에 이른바 중中을 체인體認하고 이발已發했을 때에 이른바 화和를 얻었다.」 하였으니, 이 말씀이 가깝다.’ 하시어 그 말씀이 또 똑같지 않으니, 장차 어느 것을 주장하여 따라야 하겠는가. 내 일찍이 생각해보니, 미발未發했을 때에 다만 경敬하여 존양存養할 것이요 마음을 두어 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려思慮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 지각知覺이 어둡지 않아서 성性의 체단體段이 자연 가리울 수 없으니, 정자程子의 이른바 ‘정靜 가운데에 사물이 있다.’는 것은 이것을 말씀한 것이다. 배우는 자가 깊이 음미하여 실제로 체험한다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니, 오로지 언어로만 구해서는 안 된다.”
○ “제가 보건대 연평延平께서도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하기 이전에 징험한다 하여 소계명蘇季明과 같은 듯합니다.” 하고 묻자, 주자朱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다만 이와 같음을 보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나 또한 병통이 있다.”
○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모두 중中을 구하는 것을 비난하였는데, 양구산楊龜山, 나예장羅豫章(羅從彦), 이연평李延平은 모두 이로써 얻었다 하였으니,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퇴계退溪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의심한 바가 과연 옳다. 그러나 양구산楊龜山, 나예장羅豫章, 이연평李延平 세 선생은 모두 성품이 본래 침착하고 고요하여 구하지 않음으로써 구하였기 때문에 병통이 없어 얻음이 있었던 것이요, 타인他人은 성품이 대부분 시끄럽고 조급한데 억지로 찾고 힘써 구하면 한갓 병폐만 되고 끝내 얻음이 없는 것이다.”이 가합니까?” 하고 묻자,
〈이천선생伊川先生이 말씀하였다.〉
“불가不可하다.
이미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하기 전에 찾을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도 생각함이니, 이미 생각하면 바로 이발已發이다.
본주本註에 “생각함은 희喜‧노怒‧애哀‧락樂과 똑같다.” 하였다.
53-2 조금이라도 발하면 곧
화和라 이르니,
注+살펴보건대 이는 기록에 잘못이 있는 듯하다. 발發하여 절도에 맞음을 화和라 이르니, 어찌 막 발했을 때에 절도에 맞음과 절도에 맞지 않음을 논하지 않고 모두 화和라 할 수 있겠는가. 섭씨葉氏의 주註에 “곧 이발已發의 화和에 속한다.” 하였으니, 속자屬字가 정자程子가 말씀한 뜻을 충분히 보완할 만하다.중中이라 이를 수가 없다.”
소병蘇昞의 자字가 계명季明이니, 장자張子와 정자程子의 문인門人이다.
희喜‧노怒‧애哀‧락樂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니, 발하지 않았을 때에 이 마음이 담연湛然(깨끗하고 조용함)하여 편벽되거나 치우친 바가 없으므로 중中이라 이르고, 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나오면 곧 이발已發의 화和에 속한다.
53-3 또 “여학사呂學士가 말하기를 ‘마땅히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하기 전에 구해야 한다.’ 하였는데,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만약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하기 전에 존양存養한다고 말한다면 가可하지만 만약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하기 전에 중中을 구한다고 말한다면 불가不可하다.”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하기 전에는 이 중中을 함양涵養할 수 있으나 만약 구함에 뜻을 둔다면 미발未發이라고 이를 수가 없다.
53-4 또 “배우는 자가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했을 때에는 진실로 힘써 재억裁抑(抑制)해야 하지만, 발하기 전에는 마땅히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하기 전에 다시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는가?
다만 평소에 함양涵養하는 것이 곧 옳으니, 함양涵養하기를 오래하면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함에 저절로 절도節度에 맞는다.”
발하기 전에는 힘을 들이거나 공력功力을 써서는 안 되고 다만 조존操存과 함양涵養이 있을 뿐이다.
53-5 “중中의 때를 당하여 귀에 들음이 없고 눈에 봄이 없어야 합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비록 귀에 들음이 없고 눈에 봄이 없으나 보고 듣는 이치가 있어야 비로소 된다.”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하지 않았을 때에는 비록 귀에 들음이 없고 눈에 봄이 없으나 모름지기 항상 주재主宰하고 잡아 지키는 것이 이 속에 있어야 비로소 되니, 한결같이 공적空寂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53-6 “그대는 또 정靜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한다고 여기는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사물이 있다고 이르는 것은 불가하지만 자연 지각知覺하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무물無物이란 글자는 마땅히 유물有物이란 글자가 되어야 할 듯하다.”
“이미 지각知覺이 있다면 곧 동動함이니, 어떻게 정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
복復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볼 수 있다.’
注+복괘復卦 〈단전彖傳〉에 “복復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하였다.
○ 정자程子의 《역전易傳》에 이르기를 “한 양陽이 아래에서 돌아옴은 바로 천지天地가 만물萬物을 낳는 마음이다. 선유先儒들은 모두 ‘정靜을 가지고 천지天地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하였으니, 도道를 아는 자가 아니면 누가 이것을 알겠는가.” 하였다.
○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에 이르기를 “쌓인 음陰의 아래에 다시 한 양陽이 생겨나니, 천지天地가 만물萬物을 낳는 마음이 거의 멸식滅息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마침내 회복回復됨을 볼 수 있다.” 하였다.
○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발未發의 전에 모름지기 항상 이처럼 깨어 있는 것이요, 명연瞑然히(어두워) 살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명연瞑然히 살피지 못한다면 도리道理가 어디에 있어 무슨 큰 근본根本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항상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지각知覺하는 것입니까?’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진실로 지각하는 것이다.’ 하였다. ‘지각하는 것은 곧 동動하는 것입니까?’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진실로 동動하는 것이다.’ 하였다. ‘어찌하여 이것을 미발未發이라고 합니까?’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미발未發의 전에 명연瞑然히 살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니, 어떻게 이것을 정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각知覺이 비록 동動하였더라도 동動하지 않음이 됨에 무방하니, 희喜‧노怒‧애哀‧락樂으로 말하면 또 다르다.’ 하였다. ‘이 부분은 지각知覺은 비록 동動하였으나 희喜‧노怒‧애哀‧락樂은 도리어 미발未發한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묻자, 주선생朱先生은 수긍하며 말씀하기를 ‘이 하면下面에 복괘復卦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말하였으니, 이 말이 매우 좋다. 복復은 한 양陽이 생겨나는 것이니, 어찌 동動함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한 양陽이 비록 동動하였으나 아직 만물萬物을 발생하지 않았으니, 이는 곧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미발未發한 것입니까?’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옳다.’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대저 마음은 본래 활동하는 물건이다. 이발已發과 미발未發에 관계없이 항상 이처럼 활동하는 것이다. 이천伊川이 말씀한 동자動字는 다만 활자活字와 같다. 이천伊川이 「어떻게 정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시고 복괘復卦의 말로 증명하셨는 바, 이는 다만 정靜한 가운데 명연瞑然히 살피지 않는 것이 아님을 밝히려고 하신 것이다.’ 하였다.”는 것을 해설하면서 모두 ‘지극히 고요함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말하니, 이것은 잘못이다.
복괘復卦의 하면下面에 한 획이 곧 동動함이니, 어떻게 고요하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복復은 동動의 단서이므로 천지天地의 마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53-8 혹자가 말하기를 “동動의 위에서 정靜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그 말이 진실로 옳으나 가장 하기가 어렵다.
석씨釋氏는 정定을 많이 말하였는데 성인聖人은 곧 지止를 말씀하였으니,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그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그치는 것과 같은 따위가 이것이다.
《주역周易》의 간괘艮卦에 그치는 뜻을 말하여 ‘그칠 곳에 그침은 제자리에 멈추는 것이다.’ 하였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그치지 못함은, 사람은 만물萬物의 이치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일을 만났을 때에 각각 자기 마음에 중히 여기는 바를 따라 번갈아 서로 나오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이 일이 중함을 보게 되면 곧 이 일이 나오니, 만약 사물을 각기 사물에 맡겨두면 곧 저절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단락의
문답問答은 모두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이 발하기 이전의
중中을 논한 것이나 이 조항의 물음은 돌려서
동動하는 곳에 나아가 말하였다.
注+살펴보건대 이는 《중용혹문中庸或問》에 이른바 ‘동상動上에서 정靜을 구한다.’는 말이니, 그렇다면 묻는 자가 돌려서 또 딴 데로 간 뜻이다.
제자리에 멈춘다는 것은 동動함이 법칙에 맞아 이리저리 옮겨가지 않는 것이니, 만약 마음에 중히 여기는 바가 있으면 중히 여기는 것을 따라 옮겨간다.
사물을 각기 사물에 맡겨두고 자신이 관여함이 없으면 그칠 곳에 그쳐 마음이 밖으로 달려가지 않을 것이다.
53-9 혹자가 “선생은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하기 이전에 동자動字를 놓습니까?
정자靜字를 놓습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정靜이라고 이르는 것이 가하나 정靜한 가운데에 모름지기 사물이 있어야 비로소 되니, 이곳이 곧 어려운 부분이다.
배우는 자는 우선 먼저 경敬을 이해하는 것만 못하니, 경敬하면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靜한 가운데에 사물이 있다는 것은 다만 경敬하기만 하면 마음이 항상 깨어 있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정靜한 가운데에 사물이 있다는 것은 다만 지각知覺이 어둡지 않은 것이다.”
혹자가 “이천伊川은 조금만 지각知覺이 있으면 곧 동動이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만약 추운 것을 알고 따뜻한 것을 깨닫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지각知覺이 이미 동動한 것이지만, 이제 일찍이 사물에 관계하지 않고 다만 지각知覺이 있다면 정靜이 됨에 어찌 해롭겠는가.
정좌靜坐가 단지 눈을 감고 조는 것이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53-10 혹자가 “경敬을 어떻게 공부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말씀하기를 “주일主一(한 가지를 주장함)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저는 일찍이 사려思慮가 안정되지 못해서 혹 한 가지 일을 생각하여 마치기 전에 다른 일이 삼대처럼 또 생겨나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이천선생伊川先生이 말씀하기를 ‘불가不可하다.
익힘이 전일專一해질 때에 곧 좋으니, 사려思慮와 응사應事(일에 응함)에 상관없이 모두 전일專一하려고 해야 한다.’ 하였다.”
마음이
전일專一하지 못하면 말과 행동이 모두 진실함이 없으므로 성실하지 못함의 근본이라 한 것이니, 바둑을 배우는 자가 마음 한편에 기러기와 고니가 장차 이르거든 〈활을 당겨 쏠 것을 생각한다면〉 바둑을 배움에 성실함이 아닌 것과 같다.
注+《맹자孟子》〈고자告子 상편上篇〉에 “지금 바둑의 수數(技藝)가 작은 수數이나 마음을 오로지 하고 뜻을 다하지 않으면 터득하지 못한다. 혁추奕秋는 전국에서 바둑을 잘 둔 자인데 혁추奕秋로 하여금 두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치게 하거든 그 중 한 사람은 마음을 오로지 하고 뜻을 다하여 오직 혁추奕秋의 말을 듣고, 한 사람은 비록 듣기는 하나 마음 한 편에 기러기와 고니가 장차 이르거든 주살달린 활을 당겨서 쏠 것을 생각한다.” 하였다.
사려思慮는 마음에 동動하는 것이요, 응사應事는 말과 행실에 나타나는 것이니, 모두 한 가지를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