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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1)

통감절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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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三十一年이라
秦孝公하고 子惠文王하니 公子虔之徒 告商君欲反이어늘 發吏捕之하다
商君 亡之魏호되 魏人 不受注+[頭註]先時 鞅爲秦將하야 伐魏한대 魏使公子卬將之하니 鞅遺卬書曰 吾始與公子相歡이러니 今俱爲兩國將하니 不忍相攻이라 欲與公子相見盟하고 樂飮而罷兵하노라 卬以爲然하야 乃與會盟한대 鞅伏甲襲卬하야 大破之하니 卬困以歸 魏人怨之故 不受納之하니라하고 復內(納)之秦한대 商君 與其徒 之商於러니
秦人 攻殺之하야 車裂以徇하고 盡滅其家하다
商君 相秦 用法嚴酷하야 嘗臨渭論囚할새 渭水盡赤하니 爲相十年 人多怨之러라
○ 趙良 見商君한대 商君 問曰 子觀我治秦컨대 孰與五羖大夫注+[原註]百里奚自賣五羖皮하야 爲人養牛하고 以是要秦이라 故號五羖大夫
趙良曰 千人之諾諾 不如一士之諤諤이라하니 請終日正言而無誅하노니 可乎
商君曰 諾 趙良曰
五羖大夫 荊之鄙人也注+[釋義]慈湖王氏曰 左傳僖五年 晉執虞大夫井伯하야 以媵秦穆姬라하고 晉世家 作虜井伯百里奚 正義曰 百里奚 (宋)[字]井伯이니 宛人也 宛屬楚하니 楚初國于荊州 故云荊이라 按春秋컨대 例稱荊이러니 僖公后稱楚 百里奚後亡走宛이러니 楚鄙人執之한대 秦穆公 以五羖羊皮贖之하야 授以國政하고 號五羖大夫 或曰 百里奚自賣五羖皮하야 爲人養牛以要秦이라 故曰擧之牛口之下
穆公 擧之牛口之下하야 而加之百姓之上하니 秦國 莫敢望焉이라
相秦六七年 而東伐鄭하고 三置晉君注+[釋義]謂立晉惠公, 懷公, 文公也하고 一救荊禍注+[釋義]索隱曰 按年表컨대 秦穆公二十八年 會晉朝周하니 此云救荊禍 未詳이라하며 其爲相也 勞不坐乘하고 暑不張蓋하니
五羖大夫死 秦國 男女流涕하고 童子不歌謠하고 舂者不相杵注+[釋義] 謂送杵聲이니 以聲音(自)[相]勤也
今君之從政也公族하고 殘傷百姓하니 公子虔 杜門不出 已八年矣 又殺祝驩而黥公孫賈하니
詩曰 得人者하고 失人者이라하니 此數者 非所以得人也
君之危若朝露어늘 而尙貪商於之富하고 寵秦國之政하야注+[頭註]以專秦國之政으로 爲寵也하야 畜百姓之怨하니 秦王 一旦 捐賓客而不立朝 秦國之所以收君者 豈其微哉注+[釋義]鞅於秦無仁恩이라 故秦之將欲收鞅者 其效甚明矣 故云豈其微哉아하니라
商君 이러니 居五月而難作하니라
蘇東坡曰
商君之法 使民務本力農하고 勇於公戰하고 怯於私鬪하야 食足兵强하야 以成帝業이라
이나 其民 見刑而不見德하고 知利而不知義하야 卒以此亡이라
帝秦者商君也 亡秦者亦商君也
其生 有南面之樂하니 旣足以報其帝秦之功矣 而死有車裂之禍하니 僅足以償其亡秦之罰이라
理勢自然이니 無足怪者니라


31년(계미 B.C.338)
나라 효공孝公이 죽고 아들 혜문왕惠文王이 즉위하니, 공자公子 의 무리가 상군商君이 배반하려 한다고 고발하므로 관리를 내어 체포하게 하였다.
상군商君나라로 도망갔으나 나라 사람들이 받아주지 않고注+[頭註]이보다 앞서 위앙衛鞅나라 장수가 되어 나라를 공격하니, 나라에서는 공자公子 을 장수로 임명하여 막게 하였다. 위앙衛鞅공자公子 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나는 처음에 공자公子와 친하게 지냈는데, 이제 모두 두 나라의 장수가 되니, 차마 서로 공격할 수가 없다. 공자公子와 서로 만나 맹약하고 즐겁게 술을 마신 다음 군대를 해산하고 싶다.” 하였다. 공자公子 이 그 말을 믿고 맹약하러 가자, 위앙衛鞅은 군대를 매복하였다가 공자公子 을 기습공격하여 대파하니, 공자公子 은 낭패하고 돌아왔다. 나라 사람들은 이 때문에 위앙衛鞅을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받아주지 않고 다시 나라로 들여보낸 것이다. 다시 나라로 들여보내니, 상군商君이 그 무리와 함께 로 갔다.
나라 사람들이 그를 공격하여 죽여서 수레에 사지를 묶어 찢어 조리돌리고 일가一家를 다 멸하였다.
처음에 상군商君나라에 정승이 되었을 적에 법을 적용하기를 엄하고 혹독하게 하여, 일찍이 위수渭水 가에 임해 죄수를 논죄論罪할 적에 피가 흘러 위수渭水가 모두 붉게 물들었으니, 정승이 된 지 10년에 백성들이 원망하는 자가 많았다.
조량趙良상군商君을 뵙자, 상군商君이 묻기를 “그대가 보기에 내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오고대부五羖大夫(百里奚)注+[原註]백리해百里奚가 다섯 마리 양가죽에 자신의 몸을 팔아서 남을 위해 소를 먹이고 이로써 나라에 등용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오고대부五羖大夫라고 이름한 것이다. 와 더불어 누가 나은가?” 하니,
조량趙良이 대답하기를 “‘천 사람이 옳다옳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 한 선비가 바른말 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제가 종일토록 바른말을 하더라도 주벌하지 말 것을 청하오니, 허락하시겠습니까?” 하였다.
상군商君이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하자, 조량趙良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고대부五羖大夫(楚)나라의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注+[釋義]자호왕씨慈湖王氏가 말하였다. “《춘추좌전春秋左傳희공僖公 5년조年條에 ‘나라가 나라 대부大夫 정백井伯(百里奚)을 잡아서 나라 목희穆姬잉신媵臣으로 삼았다.’ 하였고, 〈진세가晉世家〉에 ‘정백井伯 백리해百里奚를 사로잡았다.’ 하였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이르기를 ‘백리해百里奚정백井伯이니, 땅 사람이다.’ 하였다. 나라에 속하였으니, 나라가 처음에 형주荊州에 도읍하였으므로 이라고 이른 것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살펴보건대 처음엔 으레 이라고 칭하였는데 희공僖公 이후에 라고 칭하였다. 백리해百里奚가 나중에 도망하여 땅으로 갔는데, 나라 변방 사람들이 그를 붙잡자, 나라 목공穆公이 다섯 마리 양가죽으로 대속代贖하여 국정國政을 맡기고 오고대부五羖大夫라고 이름하였다. 혹자는 백리해百里奚가 다섯 마리 양가죽에 자신의 몸을 팔아서 남을 위해 소를 먹임으로써 나라에 등용되기를 요구했다 한다. 그러므로 ‘그를 소 먹이는 비천한 신분에서 등용했다.’고 한 것이다.”
목공穆公이 그를 소 먹이는 비천한 신분에서 등용하여 백성의 위에 올려놓으니, 나라에서 감히 그와 같기를 바라지 못하였습니다.
나라의 정승이 된 지 6, 7년 만에 동쪽으로 나라를 정벌하고 세 번 나라 군주를 세우고注+[釋義]세 번 나라 군주를 세웠다는 것은 나라 혜공惠公, 회공懷公, 문공文公을 세웠음을 이른다. 한 번 나라의 를 구원하였으며,注+[釋義]사기색은史記索隱》에 말하였다. “《사기史記》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를 살펴보건대 나라 목공穆公 28년에 나라와 모여 나라를 정벌하고 나라에 조회했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나라의 를 구원하였다는 것은 자세하지 않다. 재상이 되었을 적에 수고로워도 수레에 앉지 않고 더워도 일산을 펴지 않았습니다.
오고대부五羖大夫가 죽자 나라의 남녀들이 눈물을 흘리고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며, 방아찧는 자는 방아찧는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注+[釋義]은 방아찧을 때 내는 소리이니, 소리로써 서로 권면하고 도움을 이른다.
이제 께서 정사에 종사함에 공족公族을 능멸하고 짓밟고 백성들에게 잔혹하게 하니, 공자公子 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않은 지가 이미 8년이고, 은 또 축환祝驩을 죽이고 공손가公孫賈자자刺字하였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인심을 얻은 자는 일어나고 인심을 잃은 자는 무너진다.’ 하였으니, 이 몇 가지는 인심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의 위태로움이 아침의 이슬과 같은데도 아직 의 부유함을 탐하고 나라의 정사를 독단하는 것을 영화로 여겨서注+[頭註]나라의 정사를 독단하는 것을 영화로 여김을 이른다. 백성의 원망을 쌓고 있으니, 진왕秦王이 하루아침에 빈객을 버리고 별세하여 조정에 서지 못하신다면 나라에서 을 잡으려는 자가 어찌 적겠습니까?”注+[釋義]상앙商鞅나라에서 인덕仁德과 은혜가 없었으므로 나라에서 장차 상앙商鞅을 잡으려 하는 것이 그 징험이 매우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을 잡으려는 자가 어찌 적겠는가’라고 이른 것이다.
상앙商鞅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는데, 5개월 만에 난이 일어났다.
소동파蘇東坡가 말하였다.
상군商君은 백성들로 하여금 근본을 힘써 농사에 힘쓰며 공적인 싸움에는 용감하고 사사로운 싸움은 두려워하게 해서, 양식이 풍족하고 군대가 강하여 제왕帝王의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형벌만 보고 덕을 보지 못하였으며 이익만 알고 의리를 알지 못하여 끝내 이 때문에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나라를 황제로 만든 것도 상군商君이요, 나라를 멸망하게 한 것도 상군商君이다.
그가 살아서는 상군商君에 봉해져 군주가 되어 남면南面하는 즐거움을 누렸으니 이미 나라를 황제로 만든 공을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요, 죽어서는 수레로 사지四肢가 찢기는 화를 당하였으니 나라를 멸망하게 한 벌을 겨우 갚은 것이다.
이치와 형세가 저절로 그러한 것이니,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된다.”


역주
역주1 伐楚 : 《史記索隱》을 확인해 보면 ‘救楚’로 되어 있다. 胡三省의 《資治通鑑》 註에는 “《春秋左傳》을 살펴보면 晉나라가 楚나라를 城濮에서 패퇴시켰고, 또 秦나라를 殽山에서 패퇴시켰다. 이에 秦나라 穆公이 鬪克을 楚나라에 돌려보내어 우호관계를 맺었으니, 荊나라의 禍를 구원했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듯하다.” 하였다.
역주2 : 력
역주3 [譯註]弗從 : 趙良이 商鞅에게 급히 秦나라를 떠나가서 禍를 피하라고 권유하였는데, 이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동영상 재생
1 [계미] 31년 322
동영상 재생
2 [계미] 31년 683

통감절요(1)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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