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
에 帝自將征隗囂
하니 光祿勳
注+[頭註]百官志에 勳은 猶閽也니 主殿門宮戶라郭憲
이 諫曰 東方
이 初定
하니 車駕未可遠征
이니이다하고
乃當車拔佩刀
하야 以斷車靷
注+[釋義]斷은 音短이니 截也요 靷은 音引이니 所以引軸이라 一云駕車靶니 在胸曰靷이라호되 帝不從
하고 西至漆
注+[釋義]括地志에 漆水는 源出岐州普閏縣東南岐漆山漆溪하야 東入渭하니 今豳州新平縣이 古漆縣也라하다
諸將이 多以王師之重으로 不宜遠入險阻라하야 猶豫未決이러니
帝召馬援問之한대 援이 因說호되 隗囂將帥 有土崩之勢하니 兵進에 有必破之狀이라하고
又於帝前에 聚米爲山谷하야 指畫形勢하야 開示衆軍所從道徑往來하야 分析昭然可曉라
數道上隴
할새 使王遵
으로 以書招牛邯
注+[頭註]隗囂將이라下之
하고 拜邯太中大夫
한대 於是
에 囂
의 大將十三人
과 屬縣十六
과 衆十餘萬
이 皆降
하다
囂將妻子
하고 犇西城
注+[釋義]西邑名이니 屬隴西郡이라 有嶓冢山하니 漢水所出이라이어늘 〈出囂傳〉詔告隗囂曰 若束手自詣
면 相見
이요 保無他也
니라 囂終不降
하다
潁川盜賊이 群起하야 寇沒屬縣하고 河東守兵이 亦叛하야 京師騷動이라
帝聞之
하고 曰吾悔不用郭子橫之言
注+[釋義]先是에 郭憲嘗諫曰 東方初定하니 車駕未可遠征이라하니라이로다
秋八月
에 帝自上邽
注+[釋義]地理志에 隴西郡上邽縣이라 邽는 音圭라로 晨夜東馳
할새 賜岑彭等書曰 兩城
이 若下
면 便可將兵
하야 南擊蜀虜
하리니 人苦不知足注+[通鑑要解]苦는 甚也라이로라
九月에 車駕還宮이러니 帝謂執金吾寇恂曰 潁川이 迫近京師하니 當以時定이라
惟念獨卿
이 能平之耳
니 從九卿復出
하야 以憂國
이 可也
注+[釋義]按七制(註)[解]云 時에 寇恂이 爲執金吾하니 雖非九卿이나 亦陪卿也라 可也는 猶言可乎라아
故
로 狂狡乘間
하야 相
誤耳
니 如聞乘輿南向
이면 賊必惶怖歸死
하리니 臣
은 願執銳
注+[釋義]銳는 謂利兵也라前驅
하노이다 帝從之
하다
寇恂이 竟不拜郡한대 百姓이 遮道曰 願從陛下하야 復借寇君一年하노이다
乃留恂長社
注+[釋義]地理志에 潁川郡에 有長社縣이라 括地志〈云〉 故城이 在今許州長社縣西하니 其社中에 有樹暴長하야 因名焉이라하니 라하야 鎭撫吏民
하고 受納餘降
하다
東郡, 濟陰
注+[釋義]東郡은 今東昌府是也라 濟陰은 括地志云 今曹州有濟陰縣이 是也라에 盜賊
이 亦起
어늘 帝遣李通, 王常
하야 擊之
할새 以耿純
이 嘗爲東郡太守
하야 威信
이 著於衛地
注+[通鑑要解]衛地는 亦東郡之別名이라라하야 遣使拜太中大夫
하야 使與大兵會東郡
하다
東郡이 聞純入界하고 盜賊九千餘人이 皆詣純降하니 大兵이 不戰而還이어늘 璽書復以純爲東郡太守하다
여름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외효隗囂를 정벌하니,
광록훈光祿勳注+[頭註]《후한서後漢書》 〈백관지百官志〉에 “훈勳은 혼閽(문지기)과 같으니 궁전宮殿의 문호門戶를 주관한다.” 하였다. 곽헌郭憲이 간하기를 “
동방東方이 처음 평정되었으니,
거가車駕가 멀리 정벌하러 가서는 안 됩니다.” 하고는
마침내 수레 앞을 가로막고
패도佩刀를 꺼내어 수레의 고삐를 끊었으나
注+[釋義]단斷은 음이 단이니 끊음이요, 인靷은 음이 인이니 수레의 축을 끄는 끈이다. 일설一說에는 “인靷은 멍에 하는 고삐이니, 가슴에 있는 것을 인靷이라 한다.” 하였다. 황제가 따르지 않고 서쪽으로
칠수漆水注+[釋義]《괄지지括地志》에 “칠수漆水는 근원이 기주岐州 보윤현普閏縣 동남쪽 기칠산岐漆山 칠계漆溪에서 나와 동쪽으로 위수渭水로 들어가니, 지금의 빈주豳州 신평현新平縣이 옛날 칠현漆縣이다.” 하였다. 에 이르렀다.
여러 장수들이 대부분 귀중한 왕사王師(천자의 군대)로서 험한 곳에 멀리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여 주저하고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황제가 마원馬援을 불러 물으니 마원馬援이 인하여 말하기를 “외효隗囂의 장수들이 배반하여 와해될 형세에 있으니, 우리 군대가 진격하면 반드시 격파될 상황입니다.” 하였고,
또 황제의 앞에서 쌀을 모아 산골짝 모양을 만들어 지형을 지적해 가면서 여러 군대가 따라갈 길의 오고 가며 경유할 곳을 보여 주어 분석해서 분명히 알 수 있게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오랑캐가 일목요연하게 내 눈 안에 있다.” 하고는 다음 날 마침내 진군하였다.
여러 길을 따라
농隴으로 올라갈 때에
왕준王遵으로 하여금 편지로 〈
외효隗囂의 장수인〉
우한牛邯注+[頭註]우한牛邯은 외효隗囂의 장수이다.을
초유招諭하여 항복하게
하고
우한牛邯을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하니, 이에
외효隗囂의
대장大將 13명과
속현屬縣 16
현縣과 병사 10여만 명이 모두 항복하였다.
외효隗囂가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서성西城注+[釋義]서성西城은 서쪽 고을 이름이니 농서군隴西郡에 속하였다. 파총산嶓冢山이 있으니 한수漢水가 발원하는 곳이다. 으로 달아나자, - 《
후한서後漢書 외효전隗囂傳》에 나옴 - 조서를 내려
외효隗囂에게 고하기를 “만약 손을 묶고 스스로 오면
부자父子가 서로 만나 보게 할 것이요, 딴 일이 없음을 보장하겠다.” 하였으나
외효隗囂가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영천潁川에 도적이 떼지어 일어나서 도적들이 속현屬縣을 함락하고, 하동河東의 수비병들이 또한 배반하여 경사京師가 소란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옴 -
황제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내
곽자횡郭子橫(郭憲)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뉘우친다.”
注+[釋義]이보다 앞서 곽헌郭憲이 일찍이 간하기를 “동방東方이 처음 평정되었으니, 거가車駕가 멀리 정벌하러 가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하였다.
가을 8월에 황제가
상규上邽注+[釋義]상규上邽는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농서군隴西郡 상규현上邽縣이다.” 하였다. 규邽는 음이 규이다.로부터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동쪽으로 달려갈 때에
잠팽岑彭 등에게 글을 내리기를 “두
성城이 만약 함락되면 곧바로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촉蜀 땅의 오랑캐(公孫述)를 공격할 것이니, 사람이 만족할 줄 모름이 심하도다.
注+[通鑑要解]고苦는 심함이다.
이미 농隴(隗囂)을 평정하고 또다시 촉蜀(公孫述)을 바라는구나.
한 번 군대를 일으킬 때마다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다.” 하였다.
9월에 거가車駕가 궁중으로 돌아왔는데, 황제가 집금오執金吾 구순寇恂에게 이르기를 “영천潁川 지방은 경사京師(洛陽)와 매우 가까우니, 마땅히 제때에 평정하여야 한다.
생각건대 오직
경卿만이 평정할 수 있으니
구경九卿으로부터 다시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국사國事에 매진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注+[釋義]살펴보건대 《칠제해七制解》에 이르기를 “이때 구순寇恂이 집금오執金吾가 되었으니, 집금오執金吾가 비록 구경九卿은 아니나 또한 경卿에 해당한다.” 하였다. ‘가야可也’는 ‘가호可乎’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 하였다.
구순寇恂이 대답하기를 “영천潁川의 도적들이 폐하께서 농隴과 촉蜀을 정벌하시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친 자들이 틈을 타고서 서로 속이고 그르친 것일 뿐이니, 〈굳이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지 않아도〉 만일
승여乘輿가 남쪽을 향해 오신다는 말을 들으면 도적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명령을 따를 것이니, 신은 원컨대 예리한 병기를 잡고
注+[釋義]예銳는 예리한 병기를 이른다. 선봉이 되겠습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경신일庚申日에 거가車駕가 남쪽을 정벌하니, 영천潁川의 도적이 모두 항복하였다.
구순寇恂이 끝내 군수郡守에 임명되지 않자, 백성들이 길을 가로막고 말하기를 “원컨대 폐하로부터 구군寇君을 다시 1년 동안 빌리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구순寇恂을
장사長社注+[釋義]《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영천군潁川郡에 장사현長社縣이 있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장사長社의 옛 성城이 지금 허주許州 장사현長社縣 서쪽에 있으니, 그 사社 안에 나무가 갑자기 자랐으므로 인하여 장사長社라고 이름했다.” 하였으니, 장長은 본래의 글자대로 읽는다. 에 남겨 두어 관리와 백성들을
진무鎭撫하게 하고 나머지 항복하는 자들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동군東郡과
제음濟陰注+[釋義]동군東郡은 지금 동창부東昌府가 이곳이다. 제음濟陰은 《괄지지括地志》에 “지금 조주曹州에 있는 제음현濟陰縣이 이곳이다.” 하였다. 에도 도적이 일어났으므로 황제가
이통李通과
왕상王常을 보내어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경순耿純이 일찍이
동군태수東郡太守가 되어 위엄과 신의가
위衛 지역(東郡)에 드러났다
注+[通鑑要解]위衛 지방은 또한 동군東郡의 별명別名이다. 해서
사자使者를 보내어
경순耿純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하여
대군大軍과
동군東郡에서 만나게 하였다.
동군東郡에서는 경순耿純이 경내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도적 9천여 명이 모두 경순耿純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대군大軍이 싸우지 않고 돌아오자 친서親書를 내려 다시 경순耿純을 동군태수東郡太守로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