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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3)

통감절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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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八年이라
帝自將征隗囂하니 光祿勳注+[頭註]百官志 猶閽也 主殿門宮戶郭憲 諫曰 東方 初定하니 車駕未可遠征이니이다하고
乃當車拔佩刀하야 以斷車靷注+[釋義] 音短이니 截也 音引이니 所以引軸이라 一云駕車靶 在胸曰靷이라호되 帝不從하고 西至漆注+[釋義]括地志 漆水 源出岐州普閏縣東南岐漆山漆溪하야 東入渭하니 今豳州新平縣 古漆縣也하다
諸將 多以王師之重으로 不宜遠入險阻라하야 猶豫未決이러니
帝召馬援問之한대 因說호되 隗囂將帥 有土崩之勢하니 兵進 有必破之狀이라하고
又於帝前 聚米爲山谷하야 指畫形勢하야 開示衆軍所從道徑往來하야 分析昭然可曉
帝曰 虜在吾目中矣라하고 明旦 遂進軍하다
〈出馬援傳〉
數道上隴할새 使王遵으로 以書招牛邯注+[頭註]隗囂將이라下之하고 拜邯太中大夫한대 於是 大將十三人 屬縣十六 衆十餘萬 皆降하다
囂將妻子하고 犇西城注+[釋義]西邑名이니 屬隴西郡이라 有嶓冢山하니 漢水所出이라이어늘 〈出囂傳〉詔告隗囂曰 若束手自詣 相見이요 保無他也니라 囂終不降하다
潁川盜賊 群起하야 寇沒屬縣하고 河東守兵 亦叛하야 京師騷動이라
〈出本紀〉
帝聞之하고 曰吾悔不用郭子橫之言注+[釋義]先是 郭憲嘗諫曰 東方初定하니 車駕未可遠征이라하니라이로다
秋八月 帝自上邽注+[釋義]地理志 隴西郡上邽縣이라 音圭 晨夜東馳할새 賜岑彭等書曰 兩城 若下 便可將兵하야 南擊蜀虜하리니 人苦不知足注+[通鑑要解] 甚也이로라
旣平隴 復望蜀이온여
每一發兵 頭須(鬚)爲白이로라
九月 車駕還宮이러니 帝謂執金吾寇恂曰 潁川 迫近京師하니 當以時定이라
惟念獨卿 能平之耳 從九卿復出하야 以憂國 可也注+[釋義]按七制(註)[解]云 時 寇恂 爲執金吾하니 雖非九卿이나 亦陪卿也 可也 猶言可乎
對曰 潁川 聞陛下有事隴, 蜀이라
狂狡乘間하야誤耳 如聞乘輿南向이면 賊必惶怖歸死하리니 願執銳注+[釋義] 謂利兵也前驅하노이다 帝從之하다
庚申 車駕南征하니 潁川盜賊 悉降이라
寇恂 竟不拜郡한대 百姓 遮道曰 願從陛下하야 復借寇君一年하노이다
乃留恂長社注+[釋義]地理志 潁川郡 有長社縣이라 括地志〈云〉 故城 在今許州長社縣西하니 其社中 有樹暴長하야 因名焉이라하니 하야 鎭撫吏民하고 受納餘降하다
〈出恂傳〉
東郡, 濟陰注+[釋義]東郡 今東昌府是也 濟陰 括地志云 今曹州有濟陰縣 是也 盜賊 亦起어늘 帝遣李通, 王常하야 擊之할새 以耿純 嘗爲東郡太守하야 威信 著於衛地注+[通鑑要解]衛地 亦東郡之別名이라라하야 遣使拜太中大夫하야 使與大兵會東郡하다
東郡 聞純入界하고 盜賊九千餘人 皆詣純降하니 大兵 不戰而還이어늘 璽書復以純爲東郡太守하다
〈出純傳〉


건무建武 8년(임진 32)
여름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외효隗囂를 정벌하니, 광록훈光祿勳注+[頭註]후한서後漢書》 〈백관지百官志〉에 “(문지기)과 같으니 궁전宮殿문호門戶를 주관한다.” 하였다. 곽헌郭憲이 간하기를 “동방東方이 처음 평정되었으니, 거가車駕가 멀리 정벌하러 가서는 안 됩니다.” 하고는
마침내 수레 앞을 가로막고 패도佩刀를 꺼내어 수레의 고삐를 끊었으나注+[釋義]은 음이 단이니 끊음이요, 은 음이 인이니 수레의 축을 끄는 끈이다. 일설一說에는 “은 멍에 하는 고삐이니, 가슴에 있는 것을 이라 한다.” 하였다. 황제가 따르지 않고 서쪽으로 칠수漆水注+[釋義]괄지지括地志》에 “칠수漆水는 근원이 기주岐州 보윤현普閏縣 동남쪽 기칠산岐漆山 칠계漆溪에서 나와 동쪽으로 위수渭水로 들어가니, 지금의 빈주豳州 신평현新平縣이 옛날 칠현漆縣이다.” 하였다. 에 이르렀다.
여러 장수들이 대부분 귀중한 왕사王師(천자의 군대)로서 험한 곳에 멀리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여 주저하고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황제가 마원馬援을 불러 물으니 마원馬援이 인하여 말하기를 “외효隗囂의 장수들이 배반하여 와해될 형세에 있으니, 우리 군대가 진격하면 반드시 격파될 상황입니다.” 하였고,
또 황제의 앞에서 쌀을 모아 산골짝 모양을 만들어 지형을 지적해 가면서 여러 군대가 따라갈 길의 오고 가며 경유할 곳을 보여 주어 분석해서 분명히 알 수 있게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오랑캐가 일목요연하게 내 눈 안에 있다.” 하고는 다음 날 마침내 진군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 나옴 -
여러 길을 따라 으로 올라갈 때에 왕준王遵으로 하여금 편지로 〈외효隗囂의 장수인〉 우한牛邯注+[頭註]우한牛邯외효隗囂의 장수이다.초유招諭하여 항복하게
하고 우한牛邯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하니, 이에 외효隗囂대장大將 13명과 속현屬縣 16과 병사 10여만 명이 모두 항복하였다. 외효隗囂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서성西城注+[釋義]서성西城은 서쪽 고을 이름이니 농서군隴西郡에 속하였다. 파총산嶓冢山이 있으니 한수漢水가 발원하는 곳이다. 으로 달아나자, - 《후한서後漢書 외효전隗囂傳》에 나옴 - 조서를 내려 외효隗囂에게 고하기를 “만약 손을 묶고 스스로 오면 부자父子가 서로 만나 보게 할 것이요, 딴 일이 없음을 보장하겠다.” 하였으나 외효隗囂가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영천潁川에 도적이 떼지어 일어나서 도적들이 속현屬縣을 함락하고, 하동河東의 수비병들이 또한 배반하여 경사京師가 소란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옴 -
황제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내 곽자횡郭子橫(郭憲)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뉘우친다.”注+[釋義]이보다 앞서 곽헌郭憲이 일찍이 간하기를 “동방東方이 처음 평정되었으니, 거가車駕가 멀리 정벌하러 가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하였다.
가을 8월에 황제가 상규上邽注+[釋義]상규上邽는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농서군隴西郡 상규현上邽縣이다.” 하였다. 는 음이 규이다.로부터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동쪽으로 달려갈 때에 잠팽岑彭 등에게 글을 내리기를 “두 이 만약 함락되면 곧바로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땅의 오랑캐(公孫述)를 공격할 것이니, 사람이 만족할 줄 모름이 심하도다.注+[通鑑要解]는 심함이다.
이미 (隗囂)을 평정하고 또다시 (公孫述)을 바라는구나.
한 번 군대를 일으킬 때마다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다.” 하였다.
9월에 거가車駕가 궁중으로 돌아왔는데, 황제가 집금오執金吾 구순寇恂에게 이르기를 “영천潁川 지방은 경사京師(洛陽)와 매우 가까우니, 마땅히 제때에 평정하여야 한다.
생각건대 오직 만이 평정할 수 있으니 구경九卿으로부터 다시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국사國事에 매진하는 것이 가하겠는가?注+[釋義]살펴보건대 《칠제해七制解》에 이르기를 “이때 구순寇恂집금오執金吾가 되었으니, 집금오執金吾가 비록 구경九卿은 아니나 또한 에 해당한다.” 하였다. ‘가야可也’는 ‘가호可乎’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 하였다.
구순寇恂이 대답하기를 “영천潁川의 도적들이 폐하께서 을 정벌하시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친 자들이 틈을 타고서 서로 속이고 그르친 것일 뿐이니, 〈굳이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지 않아도〉 만일 승여乘輿가 남쪽을 향해 오신다는 말을 들으면 도적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명령을 따를 것이니, 신은 원컨대 예리한 병기를 잡고注+[釋義]는 예리한 병기를 이른다. 선봉이 되겠습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경신일庚申日거가車駕가 남쪽을 정벌하니, 영천潁川의 도적이 모두 항복하였다.
구순寇恂이 끝내 군수郡守에 임명되지 않자, 백성들이 길을 가로막고 말하기를 “원컨대 폐하로부터 구군寇君을 다시 1년 동안 빌리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구순寇恂장사長社注+[釋義]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영천군潁川郡장사현長社縣이 있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장사長社의 옛 이 지금 허주許州 장사현長社縣 서쪽에 있으니, 그 안에 나무가 갑자기 자랐으므로 인하여 장사長社라고 이름했다.” 하였으니, 은 본래의 글자대로 읽는다. 에 남겨 두어 관리와 백성들을 진무鎭撫하게 하고 나머지 항복하는 자들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구순전寇恂傳》에 나옴 -
동군東郡제음濟陰注+[釋義]동군東郡은 지금 동창부東昌府가 이곳이다. 제음濟陰은 《괄지지括地志》에 “지금 조주曹州에 있는 제음현濟陰縣이 이곳이다.” 하였다. 에도 도적이 일어났으므로 황제가 이통李通왕상王常을 보내어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경순耿純이 일찍이 동군태수東郡太守가 되어 위엄과 신의가 지역(東郡)에 드러났다注+[通鑑要解] 지방은 또한 동군東郡별명別名이다. 해서 사자使者를 보내어 경순耿純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하여 대군大軍동군東郡에서 만나게 하였다.
동군東郡에서는 경순耿純이 경내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도적 9천여 명이 모두 경순耿純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대군大軍이 싸우지 않고 돌아오자 친서親書를 내려 다시 경순耿純동군태수東郡太守로 임명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경순전耿純傳》에 나옴 -


역주
역주1 父子 : 隗囂와 그 아들인 隗純을 가리킨다.
역주2 郭子橫 : 子橫은 郭憲의 字이다.
역주3 詿 : 괘
역주4 長如字 : 長을 平聲으로 읽음을 이르는 바, 長短, 長久, 長盛이 이에 해당된다.

통감절요(3)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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