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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6)

통감절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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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陳禎明二年이요 隋開皇八年이라
무신(588) - 나라 정명禎明 2년이고, 나라 개황開皇 8년이다. -
隋主問取陳之策於高熲한대 對曰 江北 地寒하야 田收差晩하고 江南 水田早熟하니
수주隋主나라를 취할 계책을 고경高熲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강북江北은 지역이 추워서 밭에 심어 수확하는 것이 다소 늦고 강남江南은 논에 심어 수확하는 것이 일찍 성숙하니,
量彼收(獲)[穫]之際하야 微徵士馬하야 聲言掩襲이면 彼必屯兵守禦하리니 足得廢其農時
저들이 수확할 시기를 헤아려서 군사와 말을 약간 징집하여 강남江南을 습격하려 한다고 소문을 내면 저들은 반드시 병력을 주둔시켜 방어할 것이니, 충분히 저들의 추수할 시기를 놓치게 할 수 있습니다.
彼旣聚兵이어든 我便解甲하야 再三若此 彼以爲常하야 後更集兵이라도 彼必不信하리니
저들이 이미 병력을 모으고 난 뒤에 우리가 곧 갑옷을 벗고 군대를 해산하여 이렇게 하기를 두세 번 하면 저들은 이것을 일상적인 일로 여겨서 이후로는 우리가 다시 병력을 모으더라도 저들은 반드시 믿지 않을 것입니다.
猶豫注+[附註] 獸名이니 性多疑하야 聞有聲則登木하야 下上不一이라 不決曰猶豫 又猶 犬子也 人將犬行 犬好豫在人前하야 待人이라가 又來迎候 故謂不決曰猶豫之頃 我乃濟師하야 登陸而戰이면 兵氣益倍하리이다
저들이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할注+[附註]는 짐승의 이름이니, 성품이 의심이 많아서 소리가 들리면 나무 위로 올라가서 오르락내리락 하기를 여러 번 한다. 그러므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유예猶豫라 한다. 또 는 개의 새끼이니, 사람이 개를 데리고 길을 갈 때에 개가 사람보다 앞서 가서 사람을 기다리다가 또다시 사람 앞으로 와서 맞이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일러 유예猶豫라 한다. 때에 우리가 마침내 군대를 도강渡江시켜 육지에 올라가 싸우게 하면 우리 병사들의 사기가 더욱 배가倍加될 것입니다.
又江南 土薄하야 舍多茅竹하고 所有儲積 皆非地注+[頭註] 地藏也
강남江南은 지대가 저습低濕해서 띠풀과 대나무로 지은 집이 많고 소유하고 있는 저축을 모두 땅의 움注+[頭註]는 땅속의 창고이다. 속에 보관하지 않으니,
密遣行人하야 因風縱火하고 待彼修立하야 復更燒之 不出數年 自可財力俱盡하리이다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저들의 곡식 창고를 불태운 다음 저들이 수리하고 다시 세우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불을 놓아 태운다면 몇 년이 못 되어 저들의 재물과 힘이 모두 고갈될 것입니다.” 하였다.
隋主用其策하니 陳人 始困이라
수주隋主가 그 계책을 따르니,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곤궁해졌다.
於是 楊素, 賀若弼及高勵, 崔仲方注+[頭註]賀若弼 吳州總管이요, 高勵 光州刺史, 崔仲方 虢州刺史 爭獻平江南之策注+[通鑑要解]晉州刺史皇甫績 言陳有三可滅하니 大可呑小 一也 以有道伐無道 二也 納反臣蕭巖하야 於我有詞 三也 陛下若命將出士인댄 臣願展絲髮之效하리이다 隋主勞而遣之也하니라이어늘
이에 양소楊素하약필賀若弼고려高勵최중방崔仲方注+[頭註]楊素……崔仲方:하약필賀若弼오주총관吳州總管이고, 고려高勵광주자사光州刺史이고, 최중방崔仲方괵주자사虢州刺史였다. 등이 다투어 강남江南을 평정할 계책注+[通鑑要解]진주자사晉州刺史 황보적皇甫績이 말하기를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세 가지 이유가 있으니, 대국大國으로서 소국小國을 병탄한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유도有道함으로써 무도無道함을 토벌한 것이 두 번째 이유이고, 나라가 우리를 배반한 소암蕭巖을 받아들여 우리에게 군대를 출동할 명분이 있는 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폐하께서 만일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출동시키신다면 은 미력이나마 바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수주隋主가 그를 위로하고 보내었다. 을 올렸다.
隋主謂高熲注+[頭註]尙書右僕射曰 我爲民父母하야 豈可限一衣帶水하야
수주隋主고경高熲注+[頭註]고경高熲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이다. 에게 이르기를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어찌 옷의 띠처럼 작은 물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강남江南의 백성들을 구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甲子 隋出師할새 命晉王廣 秦王俊注+[頭註]皆文帝子 卽煬帝 淸河公楊素하야 皆爲行軍元帥하야 與韓擒虎注+[頭註]廬州總管이라, 賀若弼等으로 率兵五十一萬하니 東接滄海하고 西距巴, 蜀하며 旌旗舟楫 橫亘注+[頭註] 竟也 又延袤也數千里러라
갑자일甲子日(10월 28일)에 나라가 군대를 출동하여 나라를 토벌할 적에 진왕晉王 양광楊廣(煬帝)과 진왕秦王 양준楊俊注+[頭註]진왕晉王 양광楊廣진왕秦王 양준楊俊은 모두 문제文帝의 아들이니, 양광楊廣은 바로 양제煬帝이다. 청하공淸河公 양소楊素을 임명하여 모두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삼아 한금호韓擒虎注+[頭註]한금호韓擒虎여주총관廬州總管이다. 하약필賀若弼 등과 함께 51만의 병력을 거느리게 하니,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닿고 서쪽으로는 에 이르렀으며 정기旌旗주즙舟楫이 수천 리에 걸쳐 뻗쳤다.注+[頭註]은 마침이요, 또 뻗어 나감이다.
○ 十二月 隋軍 臨江하니 高熲 謂薛道衡注+[頭註]行臺 吏部郎中이라曰 今玆大擧 江東 必可克乎 道衡曰 克之니라
○ 12월에 수군隋軍이 강가에 임하니 고경高熲설도형薛道衡注+[頭註]설도형薛道衡행대行臺이부낭중吏部郎中이다. 에게 이르기를 “이번에 대거 출병하여 나라를 토벌함에 강동江東을 반드시 이길 수 있겠는가?” 하니, 설도형薛道衡이 대답하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常(嘗)聞郭璞注+[頭註]東晉時善卜人이라有言호되 江東分王三百年 復與中國合이라하니 今此數將周注+[通鑑要解]晉元帝南渡하야 卽王位於建康하니 歲在丁丑이요 是年 歲戊申이니 凡二百七十二年이라하니 一也
제가 일찍이 들으니 곽박郭璞注+[頭註]곽박郭璞동진東晉 때 점을 잘 쳤던 사람이다. 이 말하기를 ‘강동江東 지방이 나뉘어 왕 노릇한 지 300년 만에 다시 중원中原과 통일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300년의 주기週期가 다 차려 하니注+[通鑑要解]나라 원제元帝가 남쪽으로 양자강揚子江을 건너 건강建康에서 에 즉위한 것이 정축년丁丑年(317)이고 이해가 무신년戊申年(588)이니, 모두 272년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主上 恭儉勤勞하고 叔寶注+[頭註]陳後主名이라 荒淫驕侈하니 二也
주상主上은 공손하고 검소하고 부지런한데 진숙보陳叔寶注+[頭註]숙보叔寶나라 후주後主의 이름이다. 는 주색에 빠져 교만하고 사치하니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고,
國之安危 在所寄任이어늘 彼以江(摠)[總]爲相하고 唯事詩酒하니 三也
국가의 안위安危는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 달려 있는데 저들은 강총江總을 재상으로 삼아 오직 시 짓고 술 마시는 것을 일삼으니 이것이 세 번째 이유이고,
有道而大하고 無德而小하며 量其甲士컨대 不過十萬하니
우리는 가 있으면서 나라가 크고 저들은 이 없으면서 나라가 작으며 저들의 갑사甲士를 헤아려 보건대 십만에 불과하여
西自巫峽으로 東至滄海 分之則勢懸而力弱하고 聚之則守此而失彼 四也
서쪽으로 무협巫峽으로부터 동쪽으로 창해滄海에 이르기까지 만약 군대를 나누어 수비하면 형세가 달리고 힘이 약하며 만약 군대를 집결시켜 수비하면 이곳을 지킬 경우 저곳을 잃을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席卷之勢 事在不疑니라
형세상 우리 나라가 석권席卷할 것이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였다.
忻然曰 得君言成敗之理하니 令人豁然이로다
고경高熲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성패의 이치를 분석한 것을 들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환히 깨닫게 한다.” 하였다.
○ 陳主從容謂侍臣曰 王氣在此注+[頭註] 去聲이니 興也하야 하고 호되 無不摧敗어늘 何爲者邪
후주後主근신近臣에게 조용히 이르기를 “흥왕興旺注+[頭註]거성去聲이니 흥왕함이다. 하는 기운이 이곳에 있어서 나라 군대가 세 번 쳐들어오고 나라 군대가 두 번 쳐들어 왔으나 꺾이고 실패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저 나라 군대는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하니,
孔範注+[頭註]都官尙書曰 長江天塹 하니 今日虜軍 豈能飛渡邪잇가 帝笑以爲然이라
공범孔範注+[頭註]공범孔範도관상서都官尙書이다. 이 말하기를 “장강長江의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참호가 예로부터 남북을 가로막고 있으니, 오늘날 적군이 어찌 장강長江을 날아서 건너오겠습니까.” 하니, 후주後主가 웃고 옳다고 여겼다.
不爲深備하고 奏伎注+[頭註] 女樂也, 縱酒, 賦詩 不輟이러라
그러므로 깊이 대비하지 않고 여악女樂진헌進獻하는 가무歌舞를 즐기며注+[頭註]여자女子 악사樂士이다. 신하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읊기를 그치지 않았다.
右陳 五主 合三十二年이라
이상 나라는 다섯 군주에 합하여 32년이다.
역주
역주1 : 교
역주2 隋主問取陳之策於高熲……不拯之乎 : 《資治通鑑》에는 이 내용이 丁未年條(587)에 보인다.
역주3 齊兵三來 : 北齊는 세 번 군대를 일으켜 남하하였다. 첫 번째는 梁나라 敬帝 紹泰 元年(555)에 徐嗣徽와 任約이 군대를 이끌고 建康을 습격하여 石頭를 점거하였고, 두 번째는 太平 元年(556)에 재차 침입하여 采石을 함락시키고 建康까지 다가왔으며, 세 번째는 陳나라 世祖 天嘉 元年(560)에 齊나라 장수 劉伯球 등이 王琳을 도와 蕪湖를 함락시켰으나 세 차례 모두 실패하였다.
역주4 周師再來 : 北周는 두 번 군대를 일으켜 남하하였다. 陳나라 世祖 天嘉 元年(560)에 周나라 장수 獨孤盛 등이 湘州를 침략하였고, 臨海王 光大 元年(567)에 宇文直 등이 華皎를 도와 싸웠으나 두 차례 모두 실패하였다.
역주5 古以爲限隔南北 : 魏나라 文帝(曹丕)가 黃初 6年(225) 10월에 廣陵의 故城에서 長江을 굽어보고 군대를 사열하였는데, 戎卒이 10여만 명이었으며 旌旗가 수백 리에까지 뻗쳤다. 文帝가 강을 건너 吳나라를 정벌하고자 했으나 長江의 파도가 세차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참으로 하늘이 남북을 한계지어 놓았도다.[固天所以限南北也]” 하고 마침내 돌아갔다.

통감절요(6)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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