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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5)

통감절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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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建興元年이라 〈漢嘉平三年이라
건흥建興 원년元年(계유 313) - 나라 가평嘉平 3년이다. -
春正月 漢主聰 宴群臣於光極殿注+[通鑑要解]劉淵 起光極殿於平陽이라할새 使懷帝 着靑衣行酒어늘 庾珉, 王雋等 不勝悲憤하야 因號泣하니 惡之하다
봄 정월에 한주漢主 유총劉聰광극전光極殿注+[通鑑要解]유연劉淵평양平陽광극전光極殿을 세웠다. 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 적에 회제懷帝로 하여금 청의靑衣를 입고 술잔을 돌리게 하자, 유민庾珉왕준王雋 등이 비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인하여 울부짖고 눈물을 흘리니, 유총劉聰이 이들을 미워하였다.
二月 殺珉, 雋等故晉臣十餘人하고 懷帝亦遇害
2월에 유총劉聰유민庾珉왕준王雋 등 옛 나라의 신하 10여 명을 죽였고, 회제懷帝 또한 살해당하였다.
四月 懷帝凶問 至長安하니 皇太子擧哀하고 卽皇帝位하야 以麴允으로 爲左僕射하고 으로 爲衛將軍하야 軍國之事 悉以委之하다
4월에 회제懷帝부음訃音장안長安에 이르자, 황태자皇太子발상發喪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윤麴允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삼고 색침索綝위장군衛將軍으로 삼고서 군무軍務국정國政을 모두 이들에게 자문하였다.
○ 初 中國士民避亂者 多北依王浚호되 不能存撫하고 又政法不立하니 士民 往往復去之러라
○ 처음에 중국中國에서 피난 온 선비와 백성들이 대부분 북쪽으로 가서 왕준王浚에게 의지하였으나 왕준王浚이 보호하고 안무按撫해 주지 못하고 또 정사와 법이 확립되지 못하니, 선비와 백성들이 왕왕 다시 떠나갔다.
唯慕容注+[附註]鮮卑也 後爲前燕하니라 有熊氏之裔 曾祖莫護跋 魏宣帝時 有功得封하야 始建國於棘城하니라 燕, 代多冠步搖冠하니 莫護跋 見而好之하야 乃斂髮襲冠하고 因號爲步搖러니 其後 音訛하야 遂爲慕容하니라 或云慕二儀之德하고 繼三光之容이라하야 遂以慕容爲氏라하니라 政事修明하고 愛重人物이라
오직 모용외慕容廆注+[附註]모용외慕容廆선비족鮮卑族이니 뒤에 전연前燕의 선조가 된다. 웅씨熊氏의 후손이니, 증조曾祖 막호발莫護跋나라 선제宣帝(司馬懿) 때에 이 있어 봉지封地를 얻어 비로소 극성棘城건국建國하였다. 이때 지방에서 보요관步搖冠(婦人의 )을 많이 썼는데, 막호발莫護跋이 이것을 보고 좋아하여 마침내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을 썼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인하여 그를 보요步搖라고 불렀는데, 그 뒤에 이 잘못되어 마침내 모용慕容이 되었다. 혹자는 이르기를 “이의二儀(天地)의 을 사모[慕]하고 삼광三光(日‧)의 모습[容]을 이었다 하여 마침내 모용慕容로 삼았다.” 하였다. 만이 정사가 잘 닦여지고 분명하며 인재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士民 多歸之어늘 廆擧其英俊하야 隨才授任하다
그러므로 선비와 백성들이 많이 그에게 귀의하니, 모용외慕容廆가 그중에 영특하고 준걸스러운 자를 발탁하여 재주에 따라 임무를 맡겼다.
○ 初 范陽祖 少有大志러니
○ 처음에 범양范陽조적祖逖이 젊어서 큰 뜻이 있었다.
與劉琨으로 俱爲司州主簿하야 同寢할새 中夜 聞鷄鳴하고 注+[通鑑要解] 踏也 居效切이니 寤也曰 此非惡聲也라하고 因起舞注+[附註] 蹋也 天官書 夜半鷄 謂之荒鷄라하니 荒鷄鳴이면 天下亂이라하고 晉書 史臣曰 劉琨, 祖逖 聞鷄暗舞하야 思中原之燎火하고 幸天步之多艱하니 原其素懷하면 抑爲貪亂者矣라하니라 李白詩 劉琨與祖逖 起舞鷄鳴晨하니 雖有匡濟心이나 終爲樂禍人이라하니라러니 及渡江 睿以爲軍諮祭酒하다
유곤劉琨과 함께 모두 사주司州주부主簿가 되어서 함께 잘 때에 한밤중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조적祖逖유곤劉琨을 발로 차서 깨우며注+[通鑑要解]은 발로 차는 것이요, 는 居效切(교)이니 잠에서 깨는 것이다. 말하기를 “이는 나쁜 소리가 아니다.” 하고 인하여 일어나 춤을 추었는데,注+[附註][附註]蹴琨……起舞:은 발로 참이다.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새벽이 되기 전인 한밤중에 우는 닭을 황계荒鷄라 하니, 황계荒鷄가 울면 천하가 혼란해진다.” 하였다. 《진서晉書》 〈조적전祖逖傳〉에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유곤劉琨조적祖逖이 한밤중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몰래 춤을 추어 중원中原이 불탈 것을 생각하고 천운天運다난多難한 것을 요행으로 여겼으니, 평소에 품은 뜻을 살펴보면 또한 천하를 탐낸 자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이백李白에 “유곤劉琨조적祖逖이 닭이 우는 새벽에 일어나 춤을 추었으니, 비록 세상을 바로잡아 구제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끝내 를 좋아한 사람이다.” 하였다. 강을 건너오자 사마예司馬睿가 그를 군자좨주軍諮祭酒로 삼았다.
糾合注+[頭註]繩三合曰糾 猶言交締也驍健하고 言於睿曰
조적祖逖경구京口에 있을 때에 날래고 건장한 자들을 규합注+[頭註]노끈 세 가닥을 꼰 것을 라고 하니, 규합糾合체결締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고서 사마예司馬睿에게 말하기를
晉室之亂 非上無道而下怨叛也 由宗室爭權하야 自相魚肉注+[釋義]魚肉可食하니 猶言自相呑啖也하야 遂使戎狄乘隙하야 毒流中土
나라 황실皇室의 혼란은 윗사람이 무도하여 아랫사람들이 원망하고 배반해서가 아니요, 종실宗室이 권력을 다투어 서로 도륙屠戮해서注+[釋義]어육魚肉은 먹을 수 있으니, 자기들끼리 서로 삼키고 먹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마침내 융적戎狄으로 하여금 틈을 타게 하여 해독이 중원中原에까지 미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今遺民 旣遭殘賊하야 人思自奮하니 大王 誠能命將出師하야 使如逖者統之하야 以復中原이면 郡國豪傑 必有望風響應者矣리이다
지금 유민遺民들은 이미 해를 입어서 사람마다 스스로 떨치고 일어날 것을 생각하니, 대왕大王이 진실로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내어서 저와 같은 자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여 중원中原을 수복한다면 군국郡國호걸豪傑들이 반드시 높은 명망을 듣고 호응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睿素無北伐之志 以逖爲奮威將軍, 豫州刺史하야 給千人廩, 布三千匹하고 不給注+[通鑑要解] 兵器 刀戟總名이라하고 使自召募하다
사마예司馬睿는 본래 북벌北伐할 뜻이 없었으므로 조적祖逖분위장군奮威將軍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고서 군사 천 명 분의 군량과 삼베 3천 필을 주고, 갑옷과 병기注+[通鑑要解]병기兵器이니, 칼과 창의 총칭이다. 는 주지 않고 조적祖逖으로 하여금 스스로 불러 모집하게 하였다.
將其部曲注+[頭註]大將軍營 五部 部校尉一人하고 部有曲하니 曲有軍候一人이라百餘家하야 渡江中流할새 擊楫而誓曰 祖逖 不能淸中原而復濟者 有如大江이라하다
조적祖逖이 그의 부곡部曲注+[頭註]고대古代의 군대 편제編制에〉 대장군大將軍의 진영에는 5마다 교위校尉 한 사람이 있고, 에는 이 있는 바, 에는 군후軍候 한 사람이 있었다. 100여 를 거느리고서 양자강揚子江 중류中流를 건너갈 적에 노를 치며 맹세하기를 “내가 중원中原을 깨끗이 소탕하지 않고는 다시 이 강을 건너오지 않을 것이니, 대강大江을 두고 맹세하겠다.” 하였다.
遂屯淮陰하야 起冶鑄兵하야 募得二千餘人而後하다
마침내 회음淮陰에 주둔하고서 쇠를 불려 병기를 주조하고 모집하여 2천여 명을 얻은 뒤에 진격하였다.
역주
역주1 索綝 : 삭침
역주2 : 외
역주3 : 적
역주4 : 축
역주5 : 교
역주6 逖居京(師)[口] : ‘京師’는 《資治通鑑》에 ‘京口’로 되어 있는 바, 京口는 城의 이름이다. 《資治通鑑》의 胡三省 註에 “吳나라 孫權이 吳로부터 丹徒로 옮겨 와서 이곳을 일러 京城이라 하였다. 京峴山이 동쪽에 있는데, 城이 山을 따라 보루를 만들어 아래로 강나루를 굽어보기 때문에 京口라고 한 것이다.[吳孫權 自吳徙丹徒 謂之京城 有京峴山在其東 其城因山爲壘 俯臨江津 故曰京口]” 하였다.
역주7 : 개

통감절요(5)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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