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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5)

통감절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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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五年이라 〈漢嘉平元年이요 成玉衡元年이라
영가永嘉 5년(신미 311) - 나라 가평嘉平 원년元年이고, 나라 옥형玉衡 원년元年이다. -
東海王越커늘 王衍等 奉越喪하야 還葬東海할새 石勒 輕騎追之注+[通鑑要解]勒率輕騎하고 追越喪於苦縣하야 大敗晉兵하다 執太尉衍等하야 排墻殺之하며 剖越柩하야 燒其尸하고 曰 亂天下者 此人也 吾爲天下報之하노라하니 無一人得免者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죽자, 왕연王衍 등이 사마월司馬越을 받들어 동해東海로 돌아가 장례할 때에 석륵石勒이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니,注+[通鑑要解]석륵石勒이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사마월司馬越을 추격하여 고현苦縣에서 따라잡아 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 태위太尉 왕연王衍 등을 사로잡아 담장을 밀어 무너뜨려 압사시켰으며, 사마월司馬越의 관을 꺼내어 그 시신을 불태우고 말하기를 “천하天下를 어지럽힌 자가 바로 이 사람이니, 나는 천하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준 것이다.” 하였다. 한 사람도 빠져나간 자가 없었다.
執太尉衍等하야 坐之幕下하고 問以晉故한대 具陳禍敗之由하고計不在己라하고
석륵石勒태위太尉 왕연王衍 등을 사로잡아 막하幕下에 앉히고 나라가 실패하게 된 이유를 묻자, 왕연王衍화패禍敗(재앙과 실패)를 당한 이유를 자세히 말하고 국가의 계책이 자신에게 있지 않았음을 말하였으며,
且自言少無宦情하야 不豫世事라하고 因勸勒稱尊號하야 冀以自免이라
또 스스로 말하기를 “젊어서부터 벼슬할 마음이 없어서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고, 인하여 석륵石勒에게 존호尊號를 칭할 것을 권하여 스스로 화를 면하기를 바랐다.
勒曰 君 少壯登朝하야 名蓋四海하고 身居重任이어늘 何得言無宦情邪
석륵石勒이 말하기를 “이 젊고 건장한 시절에 조정에 올라 명성이 사해四海를 뒤덮고 몸이 중임重任을 맡았는데, 어찌 벼슬할 마음이 없었다고 말하는가.
破壞天下 非君而誰
천하를 파괴한 것은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였다.
○ 漢主聰 使前軍大將軍呼延晏으로 將兵二萬七千하야 寇洛陽이러니 比及河南하야 晉兵 前後十二敗 死者三萬餘人이라
한주漢主 유총劉聰전군대장군前軍大將軍 호연안呼延晏으로 하여금 2만 7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낙양洛陽을 침략하게 하였는데, 하남河南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나라 군대가 전후로 열두 차례 패전하여 죽은 자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始安王曜, 王彌, 石勒注+[頭註]始安王曜 劉淵族子 王彌石勒 皆漢將이라 惤縣令柏根反이어늘 王浚討斬之하니 其長史王彌 遂盜하야 寇靑, 徐러니 降漢이라 石勒誘殺之하니라 音弦이라 皆引兵會之러니 未至 先至洛陽하야 以外繼不至라하야 俘掠而去할새
시안왕始安王 유요劉曜왕미王彌석륵石勒注+[頭註]시안왕始安王 유요劉曜유연劉淵의 조카이고, 왕미王彌석륵石勒은 모두 나라 장수이다. 현현령惤縣令 유백근劉柏根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준王浚이 토벌하여 베어 죽이니, 그 장사長史왕미王彌가 마침내 도적이 되어 청주靑州서주徐州를 침략하였는데, 뒤에 나라에 항복하였다. 뒤에 석륵石勒이 유인하여 죽였다. 이 현이다. 이 모두 군대를 이끌고 가서 회합하기로 하였는데, 이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호연안呼延晏이 먼저 낙양洛陽에 이르러서 외부에서 오기로 한 군대가 이르지 않았다 하여 노략질하고 떠나갔다.
帝具舟於洛水하야 將東走러니 盡焚之하다
이때에 황제가 낙수洛水에 배를 준비해 두었다가 장차 동쪽으로 달아나려 하였는데, 호연안呼延晏이 이것을 모두 불태웠다.
王彌, 始安王曜繼至 呼延晏 克宣陽門入이어늘 帝出華林園門하야 欲奔長安이러니 漢兵 追執之하다
왕미王彌시안왕始安王 유요劉曜가 잇따라 이르자 호연안呼延晏선양문宣陽門을 점령하고 들어오니, 황제가 화림원華林園의 문으로 나가서 장안長安으로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나라 군대가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 時 海內大亂호되 獨江東 差安하니 中國士民避亂者 多南渡江이라
○ 이때에 해내海內가 크게 혼란하되 유독 강동江東만은 다소 평안하니, 중원中原에서 피난 온 선비와 백성들이 대부분 남쪽으로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갔다.
鎭東司馬王導 說琅琊王睿하야 收其賢俊하야 與之共事한대 睿從之하야 辟掾屬百餘人하니 時人 謂之百六注+[釋義] 官屬也 言置掾屬一百六人이라이라
진동사마鎭東司馬 왕도王導낭야왕琅琊王 사마예司馬睿를 설득하여 이들 중 어진 이와 준걸스러운 이를 수용하여 이들과 정사를 함께하도록 하였는데, 사마예司馬睿가 그의 말을 따라서 연속掾屬(官屬) 백여 명을 부르니, 당시 사람들이 백육연百六掾注+[釋義]관속官屬이니, 백육연百六掾관속官屬 106명을 두었음을 말한 것이다. 이라고 불렀다.
刁恊, 卞壼, 陳, 庾亮, 甘卓, 周訪, 陶侃 皆與焉하다
조협刁恊변곤卞壼진군陳頵유량庾亮감탁甘卓주방周訪도간陶侃이 모두 여기에 참여하였다.
○ 八月 漢主聰 遣始安王曜等하야 攻長安克之하고 以曜爲車騎大將軍하야 鎭長安하다
○ 8월에 한주漢主 유총劉聰시안왕始安王 유요劉曜 등을 보내어 장안長安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유요劉曜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삼아 장안長安진주鎭駐하게 하였다.
○ 安定太守賈疋(雅)注+[釋義] 古文雅字與馮翊太守注+[釋義]姓名이라으로 謀興復晉室하야 乃共帥衆向長安하다
안정태수安定太守 가필賈疋注+[釋義]고자古字이다. 풍익태수馮翊太守 색침索綝注+[釋義]색침索綝은 성명이다. 나라 왕실을 부흥할 것을 모의하여 마침내 함께 병력을 거느리고 장안長安으로 향하였다.
劉曜與疋等으로 戰於黃丘라가 曜衆 大敗하니 於是 疋等 兵勢大振이라
유요劉曜가필賈疋 등과 황구黃丘에서 싸우다가 유요劉曜의 군대가 대패하니, 이에 가필賈疋 등의 군세가 크게 떨쳐졌다.
迎秦王業注+[頭註]愍帝也 武帝炎孫이요 吳王晏子也하야 入於雍城하다
가필賈疋진왕秦王 사마업司馬業注+[頭註]진왕秦王 사마업司馬業민제愍帝이니,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의 손자이고 오왕吳王 사마안司馬晏의 아들이다. 을 맞이하여 옹성雍城으로 들어왔다.
○ 周奔琅琊王睿하니 睿以顗爲軍諮祭酒하다
주의周顗낭야왕琅琊王 사마예司馬睿에게 망명해 오니 사마예司馬睿주의周顗군자좨주軍諮祭酒로 삼았다.
前騎都尉桓彛 亦避亂過江이라가 見睿微弱하고 謂顗曰 我以中州多故 來此求全이러니 而單弱 如此하니 將何以濟리오
전기도위前騎都尉 환이桓彛도 난리를 피하여 양자강揚子江을 지나다가 사마예司馬睿의 세력이 미약한 것을 보고 주의周顗에게 이르기를 “나는 중원中原다난多難하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온전하기를 바랐는데, 고단하고 미약함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중원中原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旣而 見王導하야 共論世事하고 退謂顗曰 向見管夷吾注+[釋義]春秋 齊管仲 (字)[名]夷吾 相桓公霸諸侯러니 今以王導比之하니라하니 無復憂矣라하니라
이윽고 왕도王導를 만나 함께 세상일을 논하고 물러나와 주의周顗에게 이르기를 “방금 관이오管夷吾注+[釋義]춘추시대春秋時代나라 관중管仲은 이름이 이오夷吾로, 환공桓公을 도와 제후諸侯들 중에 패자霸者가 되게 하였는데, 이제 왕도王導관중管仲에게 견준 것이다. 를 만났으니 다시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諸名士相與登游宴할새 周顗中坐歎曰 風景 不殊하나 擧目 有江河之異注+[通鑑要解]言洛都遊宴 多在河濱이러니 而新亭臨江者也라하고 因相視流涕하다
여러 명사名士들이 함께 신정新亭에 올라가 놀고 잔치할 때에 주의周顗가 잔치 자리에서 한탄하기를 “풍경은 옛날과 다르지 않으나, 눈을 들어 바라보니 산하山河의 차이가 있다(山河는 옛 산하가 아니다).注+[通鑑要解]낙도洛都에서 놀고 잔치할 때에 대부분 황하黃河 가에서 하였는데, 지금 신정新亭양자강揚子江 가에 임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 하고, 인하여 서로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다.
王導注+[原註]變色也變色曰 當共(戮)力王室하야 克復神州注+[釋義]王氏曰 中國 名曰赤縣神州 赤縣神州內 自有九州하니 禹之序九州是也 杜氏通典曰 神州 謂王者所〈卜〉居吉土 五千里內地名이라 崑崙東南地方五千里 名曰神州어늘 何至作楚囚注+[頭註]晉侯見鍾儀하고 曰 南冠而縶者 誰也 有司對曰 鄭人所獻楚囚也니이다하니 南冠 楚冠也對泣耶아하니 衆皆收淚謝之하니라
왕도王導초연愀然注+[原註]초연愀然은 얼굴빛이 변하는 것이다.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함께 왕실을 위해 힘을 합쳐 중원中原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기를 “중국中國적현신주赤縣神州라 이름한다. 적현신주赤縣神州 안에 본래 구주九州가 있었으니, 임금이 구주九州를 차서한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두씨杜氏(杜佑)의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신주神州왕자王者가 거주하는 길한 곳을 이르니, 5천 리 안에 있는 지역을 이른다.” 하였는데, 그 에 “곤륜산崑崙山 동남쪽으로 사방 5천 리 이내의 지역을 신주神州라 이름한다.” 하였다. 을 회복할 생각을 해야 할 때에 어쩌자고 나라 죄수注+[頭註]춘추좌전春秋左傳성공成公 9년조年條에 “진후晉侯종의鍾儀를 보고 말하기를 ‘남방南方을 쓰고 묶여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니, 유사有司가 대답하기를 ‘정인鄭人이 바친 나라 죄수입니다.’ 했다.” 하였다. 남관南冠나라 이다. 처럼 서로들 울기만 하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거두고 사과하였다.
○ 賈疋等 圍長安數月하니 漢中山王曜 連戰皆敗
가필賈疋 등이 장안長安을 수개월 동안 포위하니, 나라 중산왕中山王 유요劉曜가 연달아 싸워 모두 패하였다.
驅掠士女하고 奔于平陽이어늘 秦王業 自雍入于長安하다
유요劉曜가 남녀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평양平陽으로 달아나자, 진왕秦王 사마업司馬業옹성雍城으로부터 장안長安으로 들어갔다.
○ 九月 賈疋等 奉秦王業하야 爲皇太子하고 建行臺注+[附註]自魏, 晉有之 晉文帝討諸葛誕할새 裴秀等 以行臺從하니 別置官屬하니라 其官置令僕射하고 其尙書丞郞 皆隨時權置하니 謂之行臺省하야 以行尙書事하니라於長安하다
○ 9월에 가필賈疋 등이 진왕秦王 사마업司馬業을 받들어 황태자皇太子로 삼고 행대行臺(임시 조정)注+[附註]행대行臺 시대부터 있었다. 나라 문제文帝(司馬昭)가 제갈탄諸葛誕을 토벌할 적에 배수裴秀 등이 행대行臺를 가지고 따라가니, 별도로 관속을 두었다. 관원은 복야僕射를 두고 상서승尙書丞을 모두 때에 따라 임시로 설치하였으니, 이를 일러 행대성行臺省이라 하고 상서尙書의 일을 행하게 하였다. 장안長安에 세웠다.
○ 南安赤亭羌注+[頭註]弋仲六世祖遷郡하야 內附東漢하니 處南安之赤亭이라 東徙楡眉하니 戎, 夏襁負從之者 數萬이러라
남안군南安郡 적정赤亭강족羌族注+[頭註]요익중姚弋仲의 6세조가 고을을 옮겨 동한東漢내응內應하니, 남안군南安郡적정赤亭에 살게 하였다. 요익중姚弋仲이 〈부족을 이끌고〉 동쪽 유미현楡眉縣으로 옮겨 가니, 융족戎族한족漢族 중에서 포대기로 자식을 업고 따르는 자가 수만 명이었다.
○ 鎭東將軍顧榮 前太子洗馬衛玠皆卒하다
진동장군鎭東將軍 고영顧榮 태자세마太子洗馬 위개衛玠가 모두 별세하였다.
美風神하고 善淸談이라
위개衛玠풍신風神이 아름답고 청담淸談을 잘하였다.
常以爲人有不及이면 可以情恕 非意相干이면 可以理遣이라
항상 말하기를 “남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실정實情을 살펴 용서할 수 있고, 나쁜 뜻으로 침범하는 것이 아니면 이치로 따져서 떨쳐 버릴 수 있다.” 하였다.
終身不喜怒之色하니라
그러므로 종신토록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史略 史評]史斷曰
[史略 사평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懷帝 天資淸邵하야 過惡不彰이로되 而爲胡漢所擒하야 俾着靑衣하고 侍宴行酒하니 識者謂足以報齊王奪璽之忿焉이라하니라
회제懷帝천자天資가 깨끗하고 높아서 과실과 악행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오랑캐인 나라에게 사로잡혀 한주漢主회제懷帝로 하여금 천한 자가 입는 청의靑衣를 입고 연향 때 옆에 모시고서 술을 따라 돌리게 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르기를 ‘제왕齊王 조방曹芳사마사司馬師에게 옥새玉璽를 빼앗긴 분노를 갚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역주
역주1 : 솔
역주2 : 연
역주3 : 군
역주4 索綝 : 삭침
역주5 : 의
역주6 新亭 : 胡三省의 註에 “《金陵覽古》에 이르기를 ‘新亭은 江寧縣에서 10리 되는 곳에 있으니, 강가에 가까이 임하였다.’ 하였으니, 살펴보건대 新亭은 勞勞亭에서 가깝다.[新亭 在江寧縣十里 近臨江渚 按新亭蓋近勞勞亭]” 하였다.
역주7 : 추
역주8 姚弋仲 : 永嘉의 난리 때 前趙의 劉曜에게 귀의하였다가 뒤에 다시 後趙의 石虎에게 갔다. 後趙가 망하자 東晉에 항복하였다. 뒤에 아들 姚萇이 後秦을 건립하고 그를 景元皇帝로 追諡하였다.
역주9 : 현

통감절요(5)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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