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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3)

통감절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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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更始元年〉
계미(23) - 경시更始 원년元年 -
正月 漢兵 圍宛하다
정월에 나라 군대가 완읍宛邑을 포위하였다.
舂陵戴侯注+[頭註]節侯生戴侯熊渠하니라曾孫玄 在平林兵中하야 始將軍이라하니 漢兵 已十餘萬이라
용릉舂陵 대후戴侯注+[頭註]용릉절후舂陵節侯(劉買)가 대후戴侯 유웅거劉熊渠를 낳았다. 증손曾孫 유현劉玄평림平林의 군중에 있으면서 이름을 경시장군更始將軍이라 하니, 이때 나라 군대가 이미 10여 만이었다.
欲立劉氏하야 以從人望할새 南陽豪傑 及王常等 皆欲立劉縯이로되 而新市, 平林將帥 樂放縱하야 憚縯威明하고 貪玄懦弱하야 先共定策立之하다
유씨劉氏를 세워 사람들의 기대를 따르고자 하였는데, 남양南陽의 호걸들과 왕상王常 등은 모두 유연劉縯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신시新市평림平林의 장수들은 방종한 것을 좋아하여, 유연劉縯의 위엄과 명철함을 두려워하고 유현劉玄의 나약함을 탐해서 먼저 함께 계책을 정하여 유현劉玄을 세웠다.
卽皇帝位하야 朝群臣할새 羞愧流汗하고 擧手不能言하니 由是 豪傑失望하야 多不服이러라
유현劉玄이 황제에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조회 받을 때에 부끄러워 땀이 흘렀으며 손을 들어 올리고 말을 하지 못하니, 이로 말미암아 호걸들이 실망하여 대부분 복종하지 않았다.
〈出齊武王縯傳〉
- 《후한서後漢書 제무왕연전齊武王縯傳》에 나옴 -
三月 偏將軍劉秀等 徇昆陽, 定陵, 郾하야 皆下之하다
3월에 편장군偏將軍 유수劉秀 등이 곤양昆陽, 정릉定陵, 을 순행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遣王邑, 王尋하야 發兵平定山東하고 又驅諸猛獸虎豹犀象之屬하야 以助威武하고 百萬이라하야 縱兵圍昆陽하다
왕망王莽왕읍王邑왕심王尋을 보내서 군대를 징발하여 산동山東 지방을 평정하게 하고, 또 여러 맹수인 호랑이‧표범‧무소‧코끼리 등속을 몰고 가서 군대의 위무威武를 돕게 하고는 이름을 백만대군百萬大軍이라 하여 군대를 풀어 곤양昆陽을 포위하였다.
이러니 漢兵 攻之數月 乃擧城降이어늘 更始入都之하다
잠팽岑彭완읍宛邑을 지키고 있었는데, 나라 군대가 공격한 지 수개월 만에 마침내 온 이 항복하므로 경시更始가 들어가 도읍하였다.
○ 劉秀至郾, 定陵하야 悉發諸營兵俱進할새 自將步騎千餘하야 爲前鋒하니 尋, 邑 亦遣兵數千하야 合戰할새
유수劉秀정릉定陵에 이르러 여러 진영의 군대를 모두 징발하여 함께 진격할 때에 스스로 보병步兵기병騎兵 천여 명을 인솔하여 선봉이 되니, 왕심王尋왕읍王邑 또한 수천 명의 군대를 보내어 회전會戰하였다.
秀犇之하야 斬首數千級한대 諸將 喜曰 劉將軍 平生 見小敵怯이러니見大敵勇하니 甚可怪也라하더라
이때 유수劉秀가 적진으로 달려가 수천 명의 수급首級을 베니,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유장군劉將軍이 평소에 대수롭지 않은 을 보고는 겁을 먹더니, 이제 강한 적을 보고는 용감하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秀復進한대 尋, 邑兵이어늘
유수劉秀가 다시 진격하자, 왕심王尋왕읍王邑의 군대가 퇴각하였다.
諸部共乘之하야 斬首數百千級注+[通鑑要解]八九百或千人也하고 連勝遂前하야 乘銳崩之하니 諸將 膽氣益壯하야 無不一當百이라
여러 부대가 함께 이 틈을 타서 8, 9백 명에서 천 명에 이르는 적의 수급首級注+[通鑑要解]수백천數百千은 8, 9백 명 혹은 천 명이다. 을 베고 연전연승連戰連勝하여 마침내 전진해서 예기銳氣를 타고 적을 무너뜨리니, 여러 장수들의 담력이 더욱 커져서 일당백一當百의 기세로 싸우지 않는 자가 없었다.
遂殺王尋하고 城中 亦鼓譟而出하야 中外合勢하니 震呼動天地 莽兵 大潰하다
마침내 왕심王尋을 죽였으며, 곤양성昆陽城 안에서 또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나와 성의 안팎이 합세하니,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왕망王莽의 군대가 크게 무너졌다.
大雷風하야 屋瓦皆飛하고 雨下如注하야 滍川注+[釋義]滍水 出南陽魯陽縣하야 東北入汝 盛溢하니 虎豹皆股戰하고 士卒 赴水溺死者以萬數 水爲不流러라
마침 천둥이 크게 치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지붕의 기왓장이 모두 날아가고 비가 쏟아 붓듯이 내려서 치천滍川注+[釋義]치수滍水남양南陽 노양현魯陽縣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여수汝水로 들어간다. 이 가득 넘치니, 호랑이와 표범이 모두 무서워서 벌벌 떨고 사졸士卒들이 물에 뛰어들어 익사한 자가 만 명으로 헤아려져서 물이 이 때문에 흐르지 않았다.
王邑, 嚴尤 輕騎 乘死人하고 度(渡)水逃去어늘 盡獲其軍實輜重注+[釋義]軍實 謂車徒器械芻糧之類 輜重 註見前하니라하니
왕읍王邑엄우嚴尤가 날랜 기병으로 죽은 사람을 타고 물을 건너 도망가자, 그 군실軍實치중輜重注+[釋義]군실軍實병거兵車보졸步卒기계器械‧꼴‧양식糧食 따위를 이르고, 치중輜重가 앞에 보인다. 을 모두 노획하였다.
於是 海內豪傑 翕然響應하야 皆殺其牧守하고 自稱將軍하야 用漢年號하고 以待詔命이러라
이에 해내海內의 호걸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모두 왕망王莽목사牧使수령守令들을 죽이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여 나라의 연호年號를 따르고 조명詔命을 기다렸다.
○ 莽聞漢兵 言莽鴆殺平帝하고 乃會公卿하야 開所爲平帝請命金縢之策하야 泣以示群臣하다
왕망王莽나라 군사들이 자신이 평제平帝를 독살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마침내 공경公卿들을 모아 놓고 평제平帝를 위해서 태치泰畤에 명을 청하여 자신이 대신 죽기를 원하고 금등金縢에 보관한 그 책문策文을 꺼내어 울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出莽傳〉
-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나옴 -
○ 新市, 平林諸將 以劉縯兄弟威名益盛이라하야 陰勸更始除之호되 更始不敢發이러니
신시新市평림平林의 여러 장수들이 유연劉縯 형제의 위엄과 명성이 더욱 성대하다 하여 은밀히 경시更始(劉玄)에게 그들을 제거하도록 권하였으나 경시更始가 감히 거사擧事하지 못하였는데,
部將劉稷 聞更始立하고 怒曰 本起圖大事者 伯升兄弟也어늘 今更始 何爲者耶
부장部將 유직劉稷경시更始가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는 노하여 말하기를 “본래 대사大事를 일으켜 도모한 것은 유백승劉伯升(劉縯) 형제인데, 지금 경시更始는 무엇하는 자인가?” 하였다.
更始收稷將誅之어늘 固爭한대 李軼, 朱 勸更始幷執縯하야 卽日 殺之하다
경시更始유직劉稷을 잡아 죽이려 하자 유연劉縯이 굳이 간쟁하였는데, 이일李軼주유朱鮪경시更始에게 유연劉縯까지 아울러 잡을 것을 권하여 그날로 두 사람을 살해하였다.
〈出齊武縯傳〉
- 《후한서後漢書 제무왕연전齊武王縯傳》에 나옴 -
○ 官屬 迎弔秀어늘 秀不與交私語하고 惟深引過而已 未嘗自伐昆陽之功하며 又不敢爲縯服喪하고 飮食言笑 如平常하니 更始以是慙하야 拜秀爲破虜大將軍하고 封武信侯하니라
관속官屬들이 유수劉秀를 맞이하여 조문하자, 유수劉秀는 이들과 사사로운 말을 나누지 않고 오직 깊이 자신에게 책임을 돌릴 뿐이었고, 일찍이 스스로 곤양昆陽을 정벌한 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또 감히 유연劉縯을 위하여 상복喪服을 입지 않고 평상시처럼 마시고 먹고 말하고 웃으니, 경시更始가 이 때문에 부끄러워하여 유수劉秀를 임명하여 파로대장군破虜大將軍으로 삼고 무신후武信侯에 봉하였다.
〈光武紀〉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옴 -
○ 莽 憂懣不能食하고 但飮酒鰒魚注+[釋義] 海魚名이라 無鱗有殼하니 一面附石하고 細孔雜雜하야 或七或九하고 讀軍書라가이면 因馮(憑)几寐하고 不復就枕矣러라
왕망王莽이 근심하고 고민하여 밥을 먹지 못하고 다만 술만 마시고 전복注+[釋義]은 바다 어물의 이름이다. 은 비늘은 없고 껍질이 있으니, 한 은 돌에 붙어 있고 작은 구멍이 여러 개 있는데, 혹은 일곱 개이고 혹은 아홉 개이다. 을 먹었으며 병서兵書를 읽다가 피곤해지면 그대로 책상에 기대어 자고 다시는 잠자리에 들어 잠을 자지 않았다.
〈出莽傳〉
-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나옴 -
○ 成紀注+[釋義]王氏曰 天水郡 有成紀縣하니 今秦州是也 與周宗等으로 起兵以應漢하야 移檄郡國하고 勒兵十萬하야 攻隴西, 武都하야 皆下之하다
성기成紀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기를 “천수군天水郡성기현成紀縣이 있으니, 지금의 진주秦州가 이곳이다.” 하였다. 사람 외효隗囂주종周宗 등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나라에 호응하여 군국郡國격문檄文을 돌리고 10만 명의 군대를 무장시켜 농서隴西무도武都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 茂陵公孫述 起兵成都하야 自稱輔漢將軍兼益州牧이라하다
무릉茂陵공손술公孫述성도成都에서 군대를 일으켜 스스로 보한장군輔漢將軍 익주목益州牧이라 칭하였다.
○ 更始遣將攻武關한대 三輔鄧, 于匡 起兵應漢하야 開武關迎漢兵하고 諸縣大姓 亦各起兵하야 稱漢將하고 而長安旁兵 四會城下하다
경시更始가 장수를 보내어 무관武關을 공격하게 하자, 삼보三輔등엽鄧曄우광于匡이 군대를 일으켜 나라에 호응해서 무관武關을 열어 나라 군대를 맞이하고, 여러 대성大姓들이 또한 각각 군대를 일으켜 나라 장군이라 칭하였으며, 장안長安 부근에 있던 군사들이 사방에서 장안성長安城 아래로 모여들었다.
九月戊申 兵從宣平門入하니 火及掖庭注+[頭註]掖宮 傍舍也 如人之有臂掖也承明이라
9월 무신戊申에 군대가 선평문宣平門을 따라 들어가니, 불길이 액정掖庭注+[頭註]액궁掖宮은 곁에 딸린 집이니, 사람에게 팔과 겨드랑이가 있는 것과 같다.승명전承明殿에까지 미쳤다.
避火宣室하야 旋席隨斗柄而坐注+[附註]銅爲之하니 若北斗 長一尺五寸이니 欲以厭(壓)勝衆兵이라 令司命負之하고 莽出在前, 入在旁하니라 云 順者吉하고 逆罡者凶이라하니 卽斗柄也 正月 戌時建寅하니 至寅時라야 方指午하고 二月 亥時建卯하니 至卯時라야 方指未 餘月倣此하야 晝夜循環하니 斗罡杓所指之處 必敗리오하다
왕망王莽이 불길을 피하여 선실宣室로 달아나서 자리를 돌려 북두성北斗星 자루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앉으며注+[附註]두병斗柄은 5의 구리로 만드니 모양이 북두칠성과 같고 길이가 1 5인 바, 여러 군대를 눌러 이기고자 한 것이다. 사명司命에게 명하여 이것을 지게 하고 왕망王莽이 나갈 때에는 앞에 있고 들어올 때에는 곁에 있게 하였다. 삼기길문三奇吉門에 이르기를 “을 순히 하는 자는 길하고 을 거스르는 자는 흉하다.” 하였으니, 은 바로 북두성 자루이다. 정월正月술시戌時에 북두성 자루가 인방寅方을 가리키니 인시寅時에 이르러야 비로소 오방午方을 가리키고, 2월은 해시亥時묘방卯方을 가리키니 묘시卯時에 이르러야 비로소 미방未方을 가리킨다. 나머지 달도 이와 같아서 주야晝夜가 순환하니, 북두성 자루가 가리키는 곳에는 반드시 패한다.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을 내려 주셨으니, 나라 군대가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庚戌旦明 群臣 扶莽之漸臺注+[釋義] 浸也 臺在池中하야 爲水所浸이라 故名漸臺러니 晡時注+[釋義]說文曰 申時食也 衆兵 上臺하야 斬莽注+[通鑑要解]商縣人杜吳殺莽하고 校尉公賓 斬莽首하니라하고 分莽身하야 節解하니 爭相殺者數十人이라
경술일庚戌日 아침에 여러 신하들이 왕망王莽을 부축하여 점대漸臺注+[釋義]은 침몰함이다. 가 못 안에 있어서 물속에 잠기므로 이름을 점대漸臺라 한 것이다. 로 갔는데, 신시申時注+[釋義]포시晡時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신시申時(오후 3시~5시)에 밥을 먹는 것이다.” 하였다. 에 여러 군사들이 점대漸臺에 올라가 왕망王莽의 머리를 베고注+[通鑑要解]상현商縣 사람 두오杜吳왕망王莽을 죽이고 교위校尉 공빈公賓왕망王莽의 목을 베었다. 왕망王莽의 몸을 분해하여 마디마다 해체하고 살점을 나누니, 다투어 서로 죽인 자가 수십 명이었다.
傳莽首詣宛注+[釋義]詣宛句絶이니 音鴛이라 括地志云 南陽郡邑 古(仲)[申]伯國이니 城在宛大城南이라 其西南二縣 皆故宛城也이어늘 縣(懸)於市하니 百姓 共提擊之하고 或切食其舌하니라
왕망王莽의 머리를 파발마로 전달하여 완읍宛邑에 이르자注+[釋義]예완詣宛에서 를 떼니, 은 음이 원이다. 《괄지지括地志》에 “남양군읍南陽郡邑은 옛날 신백申伯의 나라이니, 완읍宛邑의 큰 성 남쪽에 있다. 그 서남쪽의 두 이 모두 옛날 완성宛城이다.” 하였다. 시장에 매다니, 백성들이 함께 때리고 혹은 그 혀를 잘라 먹었다.
〈以上 出莽傳〉
- 이상은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나옴 -
[新增]尹氏曰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甚矣
“심하다.
亂臣賊子之欺世也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세상을 속임이여.
禮施於國 宋鮑之所以弑其君注+[附註]左文十六年 宋公子鮑禮於國人하고 宋飢 竭其粟而貸之러니 昭公無道한대 國人 奉鮑而殺之하고 鮑卽位하니 是爲文公이니 昭公庶弟也이요 이니 自古姦僞之徒 往往若此
가 나라에 시행됨은 송포宋鮑가 군주를 시해한 이유이고,注+[附註][附註]禮施於國 송포지소이시기군宋鮑之所以弑其君:《춘추좌전春秋左傳문공文公 16년조年條나라 공자公子 가 나라 사람들을 예우하였고 나라가 흉년이 들었을 적에 곡식을 다 내어 백성들에게 꾸어 주었는데, 소공昭公무도無道하자 나라 사람들이 를 받들어 소공昭公을 죽이고 가 즉위하니, 이가 문공文公인 바 소공昭公서제庶弟이다. 백성들에게 후하게 은혜를 베푼 것은 전씨田氏가 그 나라를 겸병한 이유이니, 예로부터 간사하고 속이는 무리들이 왕왕 이와 같았다.
方莽未簒之前 折節下士하고 輕財好施하여 虛譽隆洽하니 元后爲其所惑하고 爲之宗主注+[頭註]元后詔莽하야 稱假皇帝하여
왕망王莽이 황제의 지위를 찬탈하기 전에는 몸을 낮추어 선비들에게 겸손하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해서 헛된 명예가 융숭하니, 원후元后가 그에게 현혹당하고 그를 종주宗主로 삼았다.注+[頭註]원후元后왕망王莽에게 명하여 가황제假皇帝를 칭하도록 한 일을 가리킨다.
浸淫注+[頭註]隨其脈理而浸漬也至於盜國하여 毒流四海 然後 大兵四合하여 克殄元惡하여 雖漢祚復還이나 而其禍亦慘矣
그리하여 점점注+[頭註]침음浸淫은 그 결을 따라서 젖어드는 것이다. 국권國權을 도둑질함에 이르러서 해독이 온 천하에 퍼지게 되니, 그런 뒤에야 많은 군대가 사방에서 모여들어 원악元惡왕망王莽을 죽여서 비록 나라의 국통國統이 다시 돌아왔으나 그 가 또한 참혹하였다.
朱子綱目 書衆共誅莽者 明莽之極惡 人人皆得而討 衆所共誅之者也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여러 사람이 왕망王莽을 함께 죽였다.’고 쓴 것은 극악무도極惡無道왕망王莽을 사람마다 누구나 토벌할 수 있으니, 여러 사람이 함께 죽일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自莽之敗 出於劉氏之復興이라
왕망王莽의 실패는 유씨劉氏가 다시 일어난 데에서 연유하였다.
由是 後世簒國之人 往往殄滅前代種族하여 至無遺育하니 莽不獨貽禍當時 亦且貽禍萬世 其爲害也大矣
이 때문에 후세에 나라를 찬탈하는 자들은 왕왕 전대前代황족皇族들을 모조리 죽여 남은 자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왕망王莽이 당시에 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만세萬世에 화를 끼친 것이니, 그 폐해가 크다.
玆故 因而及之하노라
이 때문에 인하여 여기에 언급하는 것이다.”
[史略 史評]班固曰
[史略 사평史評]班固의 〈왕망전王莽傳에 말하였다.
王莽 始起外戚하여 折節力行하여 以要名譽하고 及居位輔政 勤勞國家하야 直道而行하니 豈所謂者耶
왕망王莽이 처음에 외척外戚으로 일어나 몸을 낮추고 행실을 힘써 명예를 구하였고, 높은 지위에 올라 정사를 보필함에 미쳐서는 국가의 일에 힘을 다하여 정직한 로 행하였으니, 어찌 이른바 ‘얼굴빛은 을 취하나 행실은 위배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莽旣不仁而有佞邪之材하고 又乘四父歷世之權하며 遭漢中微하야 하고 而太后壽考하야 爲之宗主
왕망王莽은 이미 불인不仁하면서 간사한 재주가 있었고, 또 네 숙부叔父가 대대로 이어 온 권세를 탔으며, 나라가 중간에 미약해져서 국통國統이 세 번 끊어지고 태후太后가 장수하여 종주宗主가 됨을 만났다.
得肆其奸慝하야 以成簒盜之禍
그러므로 그 간악한 꾀를 부려서 찬탈하고 도둑질하는 를 이룬 것이다.
及其竊位南面 顚覆之勢 險於桀紂어늘 而莽 晏然自謂라하야
황제皇帝의 지위를 도둑질하여 남면南面하자, 전복顚覆할 형세가 보다도 심하였으나 왕망王莽은 태연하게 스스로 생각하기를 황제黃帝우순虞舜이 다시 나왔다고 여겼다.
乃始恣睢하고 奮其威詐하여 毒流諸夏하고 亂延蠻貊호되 猶未足以逞其欲焉이라
그리하여 마침내 함부로 행동하고, 위엄과 속임수를 부려 해독이 중하中夏에 퍼지고 혼란이 만맥蠻貊에게까지 뻗쳤으나 오히려 그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是以 四海囂然 遠近俱發하야 城池不守하고 支體分裂하니 自書傳所載亂臣賊子 考其禍敗하면 未有如莽之甚者也
이 때문에 사해四海가 시끄러워지자 원근遠近이 함께 일어나서 해자垓子가 지켜지지 못하고 사지四肢가 분해되고 찢겼으니, 서책에 기재된 난신적자亂臣賊子 중에 그 화패禍敗를 상고해 보면 왕망王莽같이 심한 자가 있지 않다.
秦燔詩書하야 以立私議하고 莽誦六籍하야 以文姦言하니 同歸殊途하여 俱用滅亡이라
옛날 나라는 를 불태워서 사사로운 의논을 세웠고 왕망王莽육경六經을 외워서 간사한 말을 문식하였으니, 길은 다르나 귀결되는 곳은 같아서 한결같이 멸망하였다.
皆聖王之驅除云爾로다
그러니 이는 모두 성왕聖王(光武帝)을 위하여 환란을 제거해 준 것이다.”
更始將都洛陽할새 以劉秀 行司隷校尉하고 使前整修宮府어늘 秀乃置僚屬하고 作文移注+[釋義] 箋表之類也 官曹公府 不相臨敬이면 則爲移也하고 從事注+[釋義]官名이라 漢舊儀 司隷校尉置從事(吏)[史]十二人하야 以主察擧하니라司察 一如舊章하다
경시更始가 장차 낙양洛陽에 도읍하려 할 적에 유수劉秀로써 사례교위司隷校尉의 임무를 행하게 하고 미리 가서 궁부宮府를 정돈하고 수리하게 하니, 유수劉秀가 마침내 관속官屬을 두고 이문移文을 만들어 주현州縣에 돌리고注+[釋義]전문箋文표문表文의 종류이다. 관조官曹공부公府에서 서로 임하여 직접 상대할 수 없으면 이문移文을 만들어 돌린다. 종사관從事官注+[釋義]종사從事관명官名이다. 나라 옛 의식에 사례교위司隷校尉종사從事의 관리 12명을 두어서 찰거察擧를 주관하게 하였다. 을 두어 사무를 맡아 다스리기를 한결같이 옛 법대로 하였다.
三輔吏士 東迎更始할새 見諸將過 皆冠注+[釋義] 弁冕之總名也 巾也 古有冠無幘하니 幘者 卑賤執事者所服이러니 其後 貴賤皆服之하고 稍稍作顔題하야 有赤幘, 靑幘, 素幘, 布幘하니라而服婦人衣하고 莫不笑之러니
이때 삼보三輔 지방의 관리와 군사들이 동쪽으로 낙양洛陽에 이르러서 경시更始를 맞이할 때에 여러 장수들이 지나감에 모두 관책冠幘注+[釋義]변면弁冕의 총칭이고 두건頭巾이다. 옛날에는 은 있고 은 없었으니 은 비천한 집사執事들이 쓰는 것이었는데, 그 뒤에 귀한 자와 천한 자가 모두 썼고, 차츰 안제顔題(두건의 이마를 덮는 테두리 부분)를 만들어서 적책赤幘, 청책靑幘, 소책素幘, 포책布幘이 있었다. 을 쓰고 부인婦人의 의복을 입은 것을 보고는 비웃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及見司隷僚屬하야는 皆歡喜不自勝하고 老吏或垂涕曰 不圖今日 復見漢官威儀라하니
사례교위司隷校尉관속官屬들을 보자 모두 기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고 늙은 관리는 혹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오늘날에 다시 나라 관리官吏위의威儀를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니,
由是 識者皆屬心焉이러라
이로 말미암아 유식한 자들이 모두 유수劉秀에게 마음을 두었다.
〈出光武紀〉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옴 -
○ 更始拜劉秀行大司馬事하야 持節北度河하야 鎭慰州郡이라
경시更始유수劉秀를 임명하여 대사마大司馬의 일을 행하게 해서 을 가지고 북쪽으로 황하黃河를 건너 주군州郡을 진정하고 위무慰撫하게 하였다.
秀至河北하야 所過郡縣 考察官吏하야 黜陟能否하고 〈上句文不同〉平遣囚徒注+[釋義] 音病이니 平其不平也 縱放也 囚徒 械繫服役者하며 除王莽苛政하고 復漢官名하니 吏民 悅喜하야 爭持牛酒迎勞어늘 秀皆不受하다
유수劉秀하북河北에 이르러 지나가는 곳의 군현郡縣에 관리들을 고찰하여, 능력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고 능력이 없는 자를 내치고 - 위의 는 글이 똑같지 않음 - 죄수들을 공평히 다스려 석방하며注+[釋義]은 음이 병(평)이니 공평하지 못함을 공평하게 하는 것이고, 은 석방하는 것이다. 수도囚徒는 형틀에 매여 복역服役하는 자이다. 왕망王莽의 가혹한 정사를 제거하고 나라의 관명官名을 회복시키니 관리와 백성들이 기뻐하여 다투어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맞이하여 위로하였으나 유수劉秀는 모두 받지 않았다.
〈出光武紀 無末句〉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오는데, 말구末句가 없음 -
[新增]尹氏曰
[新增]尹氏(尹起莘)가 말하였다.
帝王之興 其施爲氣象 必有大過人者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에 시행施行하는 것과 기상氣象이 반드시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있다.
觀漢祖入關之始 除秦苛法 與世祖徇河北之日 除莽苛政하면 則區區逐鹿爭雄之徒 豈可同日而語리오
고조高祖관중關中에 들어간 초기에 나라의 가혹한 을 제거한 것과 세조世祖(光武帝)가 하북河北을 순행하는 날에 왕망王莽의 가혹한 정사를 제거한 것을 보면 구구하게 사슴(帝位)을 쫓아 자웅雌雄(우열)을 겨룬 무리들과 어찌 똑같이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然則祀夏配天注+[頭註]祀夏祖宗以配天帝하야 不失禹治天下之舊事 引以爲喩하야 不失舊物 亦豈偶然之故哉리오
그렇다면 나라 조종祖宗을 제사하여 천제天帝에게 짝해서注+[頭註]나라 조종祖宗을 제사하여 천제天帝에게 짝해서 우왕禹王천하天下를 다스린 옛일을 잃지 않은 것을 인용하여 비유한 것이다. 옛일을 잃지 않은 것이 또한 어찌 우연이겠는가.”
南陽鄧禹 杖策追秀하야 及於鄴注+[釋義] 地理志 魏郡 有鄴縣이라 括地志 故鄴都城 在漳河北西南하니 去(漳)[彰]德府二十里[通鑑要解]禹年十三 誦詩하고 受業長安하니 時光武亦遊學京師 禹雖年少 而光武知非常하야 遂相親附하니라이어늘 秀曰 我得專封拜注+[釋義]言封侯拜將 我得專擅此權이라하니 遠來 寧欲仕乎
남양南陽등우鄧禹가 지팡이를 짚고 유수劉秀를 따라 업현鄴縣에 이르자,注+[釋義]鄴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위군魏郡업현鄴縣이 있다.” 하였고, 《괄지지括地志》에 “옛날 업도鄴都장하漳河 북쪽의 서남쪽에 있으니, 창덕부彰德府에서 20리쯤 떨어져 있다.” 하였다. [通鑑要解]禹가 나이 13세에 를 외우고 장안長安에서 수업하니, 이때 광무光武경사京師(長安)에서 유학遊學하였는데, 등우鄧禹가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광무光武는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알아보고는 마침내 서로 가까이하고 따랐다. 유수劉秀가 말하기를 “내가 마음대로 하고 장수로 임명할 수 있으니,注+[釋義]에 봉하고 장수로 임명함에 자신이 이러한 권한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대가 멀리서 찾아 온 것은 벼슬을 원해서가 아니겠는가?” 하니,
禹曰 不願也 但願明公威德 加於四海어든 禹得効其尺寸하야 垂功名於竹帛로이다
등우鄧禹가 대답하기를 “벼슬하기를 원치 않고 다만 명공明公위엄威嚴사해四海에 가해지면 제가 얼마 안 되는 작은 을 바쳐서 공명功名죽백竹帛(역사책)에 남기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였다.
秀笑하고 因留宿이러니 禹進說曰
유수劉秀가 웃고는 인하여 유숙하였는데, 등우鄧禹가 나아가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今山東 未安하야 赤眉, 靑犢之屬注+[釋義]赤眉與靑犢 皆賊之號 動以萬數 更始旣是常才而不自聽斷하고 諸將庸人屈(崛)起注+[釋義] 或作(掘)[崛]하니 說文曰 勃起曰(掘)[崛]起 志在財幣하야 爭用威力하야 朝夕自快而已 非有忠良明智深慮遠圖하야 欲尊主安民也
“지금 산동山東 지방이 편안하지 못해서 적미赤眉청독靑犢의 무리들注+[釋義]적미赤眉청독靑犢은 모두 의 이름이다. 이 모두 만으로 헤아려지고, 경시更始는 이미 보통의 평범한 인물에 불과하여 스스로 다스리고 결단하지 못하며, 제장諸將들은 모두 용렬한 사람들이 흥기注+[釋義]은 혹 로도 쓰니,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발기勃起한 것을 굴기崛起라 한다.” 하였다. 하였으므로 그 뜻이 재물과 폐백에 있어서 다투어 위엄과 무력을 사용하여 당장 스스로 만족하게 할 뿐이요, 충성스럽고 어질고 밝고 지혜로워 깊이 생각하고 멀리 도모해서 군주를 높이고 백성을 편안히 하려는 자가 있지 않습니다.
明公 素有盛德大功하야 爲天下所嚮服이라
명공明公은 본래 성대한 과 큰 이 있어서 천하 사람들이 향하고 복종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軍政 齊肅하고 賞罰 明信하니 〈本傳 無明公素有盛德以下四句〉
군정軍政정제整齊되고 엄숙하며 상벌賞罰이 분명하고 신실信實하니 - 《후한서後漢書》 〈등우전鄧禹傳〉에는 ‘명공소유성덕明公素有盛德’ 이하의 네 가 없다. -
爲今之計컨대 莫如延攬英雄하고 務悅民心하야 立高祖之業하고 救萬民之命이니
지금을 위한 계책으로는 영웅을 맞이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힘써서 고조高祖당년當年에 이룩한 공업功業을 세우고 만백성의 목숨을 구하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以公而慮注+[釋義] 稱劉秀也 說文云 慮 謀思也컨대 天下 不足定니이다
을 가지고 생각해 보건대注+[釋義]유수劉秀를 이른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는 도모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였다. 천하는 굳이 평정할 것이 못 됩니다.(천하를 평정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秀大悅하고 因令禹常宿止於中注+[釋義]謂幕府中이라하야 與定計議하고 每任使諸將 多訪於禹하니 皆當其才러라
유수劉秀가 크게 기뻐하고, 인하여 등우鄧禹를 항상 군막 안注+[釋義]막부幕府의 가운데를 이른다. 에 머물게 하여 그와 함께 계책과 의논을 결정하고, 매번 여러 장수들에게 임무를 맡기고 부릴 때에 등우鄧禹에게 많이 물었는데, 모두 그 재주에 합당하게 하였다.
〈出禹本傳〉
- 《후한서後漢書 등우전鄧禹傳》에 나옴 -
[新增]胡氏曰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蕭王之至鄴 禹杖策追及하야 從容 不如子房이요 險難出奇 不如陳平이요 餉食補卒 不如蕭何 攻城略地 不如曹參이요 纔一將兵出關 又爲赤眉所敗어늘
소왕蕭王(光武帝)이 업현鄴縣에 이르렀을 때에 등우鄧禹가 지팡이를 짚고 쫓아와서 조용히 계책을 세운 것은 자방子房(張良)만 못하였고, 험난할 때에 기이한 계책을 낸 것은 진평陳平만 못하였고, 양식을 보급하고 병졸을 보충한 것은 소하蕭何만 못하였고, 성을 공격하고 땅을 경략한 것은 조참曹參만 못하였으며, 겨우 한 번 군대를 거느리고 관문關門을 나가자 또 적미赤眉에게 패하였다.
而二十八將 禹顧居首로되 當時無異議하고 後世無貶辭하니 光武何取於禹 而禹何以致之也
그런데도 28명의 장수 중에 등우鄧禹가 맨 앞에 있었으나 당시에 이론異論이 없었고 후세에 폄하하는 말이 없었으니, 광무제光武帝는 어찌하여 등우鄧禹를 취하였으며 등우鄧禹는 무엇으로 이것을 이루었는가?
禹初見帝 觀其延攬英雄하고 務悅民心하야 立高祖之業하고 救萬民之命이라하니
등우鄧禹가 처음 광무제光武帝를 뵈었을 때에 ‘영웅을 맞이하고 민심을 기쁘게 하여 고조高祖공업功業을 세우고 만민萬民의 목숨을 구하라.’고 말하였으니,
此數語 自李通耿弇賈復吳漢으로 皆未之嘗言이요 且任使諸將 各當其才하니 此固高出諸將之上이라
이 몇 마디 말은 이통李通경엄耿弇가복賈復오한吳漢이 모두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 것이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임무를 맡기고 부릴 때에 각각 재능에 합당하게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여러 장수들보다 높이 빼어난 것이다.
一日 帝披輿地圖曰 天下郡國如是어늘 今始得其一하니 如何오한대 禹曰 古之興者 在德厚薄이요 不以小大라하니 是又非諸臣所能及이라
하루는 광무제光武帝여지도輿地圖를 펴놓고 ‘천하의 군국郡國이 이와 같이 많은데 이제 비로소 그 하나를 얻었으니, 어떠한가?’ 하고 묻자, 등우鄧禹는 대답하기를 ‘옛날에 흥왕興旺했던 자들은 후박厚薄에 달려 있었고, 영토의 크기에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또 여러 신하들이 능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雖伊周之徒 啓告其君者라도 不過如此하니 嗚呼 此光武之所深知 而禹之所以自許者乎인저
비록 이윤伊尹주공周公의 무리가 군주에게 아뢴다 해도 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아, 이는 광무제光武帝가 깊이 인정한 바이고 등우鄧禹가 스스로 자신한 바일 것이다.
以此而圖形雲臺하고 藏名太室注+[頭註]淸廟中央之室이라하야 爲東京元功 眞無愧矣로다
이 때문에 얼굴을 운대雲臺에 그리고 이름을 태실太室注+[頭註]청묘淸廟 중앙에 있는 묘실廟室이다. 에 보관하여 동경東京(東漢)의 원훈元勳이 됨에 진실로 부끄러움이 없었던 것이다.”
秀自兄縯之死注+[原註]更始殺縯이라 每獨居注+[釋義]無人傍侍 故曰獨居 輒不御酒肉하고 枕席 有涕泣處
유수劉秀는 형 유연劉縯이 죽은 뒤로注+[原註]경시更始유연劉縯을 죽였다. 언제나 홀로 거처注+[釋義]옆에서 모시는 사람이 없으므로 홀로 거처한다고 한 것이다. 할 때에는 번번이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고, 베개와 자리에는 눈물을 흘린 자국이 있었다.
主簿異 獨寬譬之注+[釋義]이요 匹也 緩爲辭說하야 匹而諭之한대 秀止之曰 卿勿妄言하라
주부主簿 풍이馮異가 홀로 너그럽게 위안하고 타이르자,注+[釋義]은 관대함이고 는 비유함이니, 관대하게 말해서 딴 일을 비유하여 타이르는 것이다. 유수劉秀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하기를 “은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였다.
異因進說曰 更始政亂 百姓 無所依戴
풍이馮異가 인하여 나아가 설득하기를 “경시更始의 정사가 혼란하여 백성들이 의지하고 추대할 곳이 없습니다.
夫人久飢渴이면 易爲充飽하나니
사람이 오랫동안 굶주리고 목마르면 배 채우는 물건이 되기가 쉬운 법입니다.
今公 專命方面하시니 宜分遣官屬하야 循行郡縣注+[釋義] 謂撫徇之徇이니 徇其人民也하야 宣布惠澤하소서 〈本傳無宣字〉秀納之하다
이제 께서 한 방면方面의 임무를 마음대로 명령할 수 있으니, 관속官屬들을 나누어 보내서 군현郡縣을 순행하여注+[釋義]무순撫徇(어루만져 따르게 함)의 을 이르니, 인민人民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혜택을 펴게 하소서.” 하니, - 《한서漢書 풍이전馮異傳》에는 선자宣字가 없음 - 유수劉秀가 이 말을 받아들였다.
〈出馮異傳〉
- 《한서漢書 풍이전馮異傳》에 나옴 -
○ 騎都尉耿純 謁秀於이러니 退見官屬將兵法度不與他將同하고 遂自結納하니라
기도위騎都尉 경순耿純유수劉秀한단邯鄲에서 뵈었는데, 물러 나와서 관속官屬장병將兵들의 법도가 다른 장수들과는 다른 것을 보고 마침내 스스로 교분을 맺었다.
〈出純本傳〉
- 《후한서後漢書 경순전耿純傳》에 나옴 -
○ 王莽時 長安中 有自稱成帝子子輿者어늘 殺之러니 邯鄲卜者王郞注+[釋義]姓名이요 又名昌이라 緣是하야 詐稱眞子輿라한대 百姓 多信之하야 立郞爲天子하니 趙國以北 遼東以西 皆望風響應이러라
왕망王莽 때에 장안長安성제成帝의 아들 자여子輿라고 자칭하는 자가 있으므로 왕망王莽이 그를 죽였는데, 한단邯鄲의 점치는 자인 왕랑王郞注+[釋義]왕랑王郞은 성명이고, 또 이름은 이다. 이 이로 인하여 자신이 진짜 자여子輿라고 사칭하자 백성들이 이를 많이 믿고서 왕랑王郞을 세워 천자로 삼으니, 나라 이북以北요동遼東 이서以西 지방이 모두 풍성風聲만 듣고도 호응하였다.
역주
역주1 : 경
역주2 : 잠
역주3 : 원
역주4 : 유
역주5 : 담
역주6 隗囂 : 외효
역주7 : 엽
역주8 五石 : 1石은 120斤이니, 5석은 600근이다.
역주9 三奇吉門 : 術數의 일종으로 三奇는 六甲의 十干 중에 乙‧丙‧丁을 天上三奇라 하고, 甲‧戊‧庚을 地下三奇라 하고, 辛‧壬‧癸를 人間三奇라 한다. 吉門은 休‧生‧傷‧杜‧景‧死‧驚‧開를 일러 八門이라고 하는데, 그중 三門은 吉하고 나머지 五門은 凶한 바, 그중에 길한 문(開‧休‧生)을 가리킨 것이다. 奇門遁甲術 등은 모두 이러한 말을 따른다.
역주10 : 강
역주11 天生德於予 漢兵其如予何 : 漢兵其如予何는 漢나라 군사가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뜻으로 《論語》 〈述而〉에 “하늘이 나에게 德을 내려 주셨으니, 桓魋가 나를 어찌하겠는가.[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라고 한 孔子의 말씀을 흉내 낸 것이다.
역주12 : 련
역주13 厚施於民 田氏之所以倂其國 : 田氏는 春秋時代 齊나라의 大夫였던 陳恒 一族을 가리킨다. 국가의 재물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다음 簡公을 시해하고 國權을 독차지하였으며, 曾孫인 和에 이르러 제나라를 차지하고 王이 되었다. 陳氏는 뒤에 姓을 田으로 고쳤으며, 恒은 文帝의 諱이므로 《史記》에는 田常으로 기록되어 있다. 《春秋左傳》 哀公 14年條에 보인다.
역주14 色取仁而行違 : 외모는 仁한 것처럼 꾸미나 실제 행실은 그렇지 못한 것으로, 《論語》 〈顔淵〉에 보이는 바, 孔子가 子張에게 대답한 말이다.
역주15 國統三絶 : 成帝, 哀帝, 平帝가 모두 후손이 없음을 이른다.
역주16 黃虞復出 : 王莽이 古代의 聖君인 黃帝와 虞舜으로 자처함을 말한 것이다.
역주17 : 책
역주18 祀夏配天 : 옛날 夏나라가 過나라의 澆에게 멸망당하였다가 小康이 중흥하여 옛 천하를 다시 되찾고 禹王을 제사하였으므로 이로써 光武帝가 新나라를 평정하고 다시 漢나라 皇室을 수복하였음을 비유한 것이다.
역주19 : 획
역주20 : 풍
역주21 邯鄲 : 한단

통감절요(3)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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