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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9)

통감절요(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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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唐淸泰二年이라
을미(935) - 나라 청태淸泰 2년이다.
○ 吳天祚元年이요 閩永和元年이라
나라 천조天祚 원년元年이고, 나라 영화永和 원년元年이다.
○ 是歲 凡五國, 三鎭이라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이다. -
六月 唐河東節度使石敬瑭 旣還鎭 陰爲自全之計러라
6월에 나라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석경당石敬瑭으로 돌아간 뒤에 은밀히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세웠다.
○ 吳徐知誥 進封齊王하다
나라 서지고徐知誥를 승진시켜 제왕齊王으로 봉하였다.
歷年圖曰
역년도歷年圖》에 말하였다.
武皇注+[頭註]李克用이라 以沙陀微種으로 奄有河東하고 黃巢之亂 有大功於唐室이러니 上源之變注+[頭註]上源 驛名이라 訟於朝廷이나 而不能自直注+[頭註]克用 還晉陽하야 治兵하고 上表自陳하야 乞討全忠한대 僖宗 方務姑息하야 優詔和解之하니라 하야
무황武皇(李克用)은注+[頭註]무황武皇이극용李克用이다. 미천한 사타족沙陀族으로서 곧바로 하동河東 지방을 소유하고 황소黃巢의 난에 나라에 큰 공을 세웠는데, 상원역上源驛의 변고가注+[頭註]상원上源의 이름이다. 일어나자 조정에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나 조정에서 바로잡아주지 못하였다.注+[頭註]이극용李克用진양晉陽으로 돌아가 군대를 다스리고 표문表文을 올려 스스로 아뢰어서 주전충朱全忠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희종僖宗이 우선 당장 눈앞의 편안함을 힘써서 우대하는 조칙을 내려 화해하게 하였다.
遂與朱氏 治兵相攻하야 糾紛不解하야 流血成川하고 僵尸蔽野
그리하여 마침내 주씨朱氏(朱全忠)와 군대를 동원하여 서로 공격하여 분규紛糾가 풀리지 않아 흘린 피가 냇물을 이루고 쓰러진 시체가 들을 뒤덮었다.
至其晩節하야는 鋒銳益衰하야 窮居一隅하야 僅能自保
말년에 이르러서는 예봉이 더욱 꺾여 곤궁하게 한 귀퉁이에 거주하면서 겨우 스스로 보존하였다.
莊宗注+[頭註]存勖이라 以弱齡襲位하니 麾下諸將 皆白首行陣하야 與武皇으로 竝轡齊驅之人이어늘 乃能以恩信結其心하고 英果折其氣하야 莫不竭力致命하야
장종莊宗(李存勖)은注+[頭註]장종莊宗이존욱李存勖이다. 어린 나이로 지위를 세습하니, 휘하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항오行伍(군대) 사이에서 늙어 무황武皇과 함께 고삐를 잡고 나란히 말을 몬 사람들이었는데, 마침내 은혜와 신의로써 그 마음을 결속시키고 영명英明함과 과단함으로써 그 기운을 꺾으니, 힘을 다하고 명령을 바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頤指如意하야 遂服眞定하고 從山東하며 取漁陽, 兼魏博하며 策馬度(渡)河 而朱氏失國이라
그리하여 턱과 손가락으로 마음대로 지시하여 마침내 진정眞定을 복종시키고 산동山東을 따르게 하였으며 어양漁陽을 점령하고 위박魏博을 겸병하였으며, 말을 채찍질하여 황하黃河를 건너가자 주씨朱氏가 나라를 잃었다.
當是之時하야 天下莫不震動하니 諸侯陸梁注+[通鑑要解]猶强梁也 逃走貌이요 又跳梁也 踞(倨)肆者 皆駭愕相顧하야 莫敢保其土地
이때를 당하여 천하에 놀라서 동요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발호하여注+[通鑑要解]육량陸梁강량强梁(강포함)과 같으니, 달아나는 모습이고 또 발호하는 것이다. 오만방자한 제후들이 모두 놀라 서로 돌아보며 감히 자기의 토지를 보존하지 못하였다.
王衍 恃其險遠하고 辭禮踞(倨)慢이어늘 偏師西指 而劍閣不守하니 觀其行兵하면 可謂能矣
서촉西蜀왕연王衍이 지형이 험하고 먼 것을 믿고는 말과 가 거만하자, 일부의 군대[偏師]를 가지고 서쪽을 향함에 검각관劍閣關이 지켜지지 못하였으니, 그 군대를 운용한 것을 살펴보면 능하다고 이를 만하다.
惜其志小氣近하야 驕心易生하야 矜功自喜하고 御衆無法하며 便嬖是用하야 纔及三年 隕身亡族하니 悲夫
애석하게도 뜻이 작고 기개가 천근하여 교만한 마음이 쉽게 생겨나서 공을 과시하여 스스로 자만하였으며, 무리를 어거함에 법도가 없었고 총애하는 자들을 등용해서 즉위한 지 겨우 3년에 몸이 죽고 집안이 망하였으니, 슬프다.
明宗 無取國之心이러니 而爲衆所附하고 資性寬厚하야 克終天祿이라
명종明宗은 나라를 취할 마음이 없었는데 무리들에게 추종을 받았고 타고난 천성이 관후寬厚하여 하늘이 준 녹을 잘 마쳤다.
淸泰 於危難之中 坐受神器之重하야 得之非難이요 失之亦易
청태淸泰(潞王 이종가李從珂)는 위태롭고 어려운 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중요한 신기神器(제왕의 자리)를 받아서 얻은 것이 어렵지 않았고 잃은 것이 또한 쉬웠다.
注+[通鑑要解] 於豈切이니 狀如屛風하니 以絳爲質하고 高八尺이며 繡爲斧文이라 天子負扆하야 南面而立이라 未安하야 家爲煨燼하야 十年之中 易姓者四注+[附註]莊宗 本西突厥種朱邪氏 附唐屬籍하야 賜姓李氏하고 明宗 本北狄種이니 莊宗養子 閔帝 明宗子也 (路)[潞]王 明宗養子 本姓王氏 共三姓이어늘 而云易姓者四 未詳이라 通要云 國姓三變이라하니라 禍福相尋 何其速哉
병풍을 등지고 제왕帝王의 자리에 있는 것이注+[通鑑要解]어기절於豈切(의)이니 모양이 병풍과 같으니, 붉은 비단으로 바탕을 삼고 높이가 8척이며 도끼 문양을 수놓았다. 천자는 를 등지고서 남면하여 선다. 편안하지 못하여 집안이 잿더미가 되어서 10년 동안에 국성國姓을 바꾼 것이 네 번이었으니,注+[附註]장종莊宗은 본래 서돌궐西突厥의 종족인 주사씨朱邪氏이니 나라의 속적屬籍에 붙여 이씨성李氏姓을 하사받았고, 명종明宗은 본래 북적北狄의 종족이니 장종莊宗의 양자이다. 민제閔帝명종明宗의 아들이고 노왕潞王명종明宗의 양자이니, 본래 왕씨王氏이다. 모두 세 인데, 을 바꾼 것이 네 번이라고 한 것은 자세하지 않다. 《통감요해通鑑要解》에 “국성國姓이 모두 세 번 바뀌었다.”라고 하였다. 이 서로 이어지는 것이 어쩌면 이리도 신속하였는가.”
[史略 史評]史斷曰
[史略 사평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潞王以明宗養子 僥倖奪人之國하니 蓋至是而國姓三變焉이라
노왕潞王명종明宗양자養子로서 요행히 남의 나라를 빼앗으니, 후당後唐이 이때에 이르러 국성國姓이 세 번 바뀌었다.
方其入洛 許軍士以人賞百緡이러니 及其至洛 府庫枵然하야 金帛不盈三萬이어늘 顧乃掊剝聚斂하야 括民以給之하니 民心愁嗟하야 思亂者衆이라
노왕潞王낙양洛陽에 들어올 적에 군사들에게 사람마다 백민百緡의 돈을 으로 줄 것을 허락하였는데, 낙양洛陽에 이르자 부고府庫가 텅 비어 황금과 비단이 채 3만이 못 되었으므로 마침내 가렴주구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모아 군사들에게 을 주니, 민심이 근심하고 서글퍼하여 반란을 생각하는 자가 많았다.
其始也 戕民以買國하고 其終也 民散而國亦隨之하니 宜其不能久有其國이어든 而況奪敬瑭之節度하고 殺敬瑭之子弟하야 以自促其亡哉
처음에는 백성을 해쳐서 나라를 사고 종말에는 백성이 흩어져서 나라가 또한 뒤따라 망하였으니, 오랫동안 나라를 소유하지 못한 것이 당연한데, 더구나 석경당石敬瑭절도사節度使 지위를 빼앗고 석경당石敬瑭자제子弟를 죽여서 스스로 그 멸망을 재촉함에 있어서랴.”
右後唐 四主 共一十三年이라
이상 후당後唐은 네 군주에 모두 13년이다.
역주
역주1 上源之變 : 朱全忠이 上源驛에서 李克用을 공격하였는데, 조정에서 그의 죄를 다스리지 않으니, 李克用이 원망하였다.
역주2 : 의

통감절요(9)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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