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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3)

통감절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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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申]神爵元年注+[釋義]前年 集長樂宮이라 今故改元神爵이라 神爵 大如鶉爵하고 色有五采이라
春正月 始行幸甘泉하야 郊泰注+[原註] 音止 祭處曰畤[頭註]郊 祭名이라 祀天地하니 在國南北郊 故曰郊 祀天 南郊 祀地 北郊 止也 封土積高之所 神靈之所止也하고 幸河東하야 祠后土하야 頗修武帝故事하야 謹齋祀之禮하고 以方士言으로 增置神祠하다
〈此句文不同〉聞益州 有金馬碧鷄注+[頭註]碧鷄 說文 石之靑美者之神하야 可醮祭而致注+[釋義]金形如馬하고 碧形似鷄하니 其神祠在益州金馬坊이라 杜甫詩 時出碧鷄坊하야 西郊向草堂이라하니라라하고 於是 遣諫大夫蜀郡王褒하야 使持節求之하다
〈出郊祀志〉
[新增]尹氏曰
祠祀神仙 武帝之過擧也어늘 孝宣中興 胡爲踵而行之
이나 郊泰畤, 祠后土 猶有可諉者어니와 至遣諫大夫而求金馬碧鷄之神 則求非所求 失尤甚矣니라
聞褒有俊才하고 召見하야 使爲聖主得賢臣頌하니 其辭曰
夫賢者 國家之器用也
君人者 勤於求賢而逸於得人하나니
賢者之未遭遇也 圖事揆策則君不用其謀하고 陳見誠則上不然其信이라
是故 伊尹 勤於鼎俎하고 太公 困於鼓刀하고 百里自하고 甯子飯牛注+[頭註]鼓刀 謂屠牛於朝歌也 百里奚爲晉虜러니 秦以五羖皮贖之하니라 甯戚未逢桓公 而飯牛於齊門하니라 離此患注+[頭註]四賢 皆遭此不遇之患이라 與罹同하니 遭也러니
及其遇明君遭聖主也하야는 運籌合上意하고 諫諍卽見聽하야 進退 得關注+[通鑑要解] 猶用也 又關 白也 王褒頌 得關其忠이라하니라其忠하고 任職 得行其術이라
世必有聖知(智)之君而後 有賢明之臣이니이다
虎嘯而風冽하고 龍興而致雲하며 蟋蟀 俟秋唫(吟)注+[釋義]喩賢人待明君而仕也 詩傳曰 蟋蟀 似蝗而小하니 一名促織이요 九月在堂이라 故曰俟秋唫이라하니라하고 出以陰注+[釋義] 通作蝣하니 詩傳曰 蜉蝣 似蛣蜣이라 爾雅翼云 蜉蝣出有時 故曰出以陰이라하니라하나니이다
易曰 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하고 詩曰 思皇多士 生此王國이라하니
世平主聖이면 俊艾(乂)將自至하야 明明在朝하고 穆穆布列注+[通鑑要解]明明 察也 穆穆 美也하야 聚精會神하야 相得益章하니 雖伯牙操遞鐘注+[通鑑要解]文選註 琴名이라 音支 音忠이니 樂器也하고 逢門子彎烏號注+[通鑑要解]烏號 弓名이라 引也라도 猶未足以喩其意也
聖主 必待賢臣而弘功業하고 俊士 亦俟明主以顯其德이라
上下俱欲하야 驩然交欣이면 翼乎如鴻毛遇順風注+[頭註]君臣相合 如鴻毛遇順風하야 一擧千里하고 沛乎如巨魚縱大壑하야 休徵注+[釋義]美行之驗也 自至하고 壽考無疆하리니 何必偃仰屈伸 若彭祖注+[釋義]姓籛이요 名鏗이니 〈堯舜時人이라〉 至之時하야 已七百餘歲 王以爲大夫러니 稱疾不與政하니라[頭註]姓이요이니 帝堯封於彭城하니라하고 呼吸 如喬, 松注+[釋義] 謂王喬 謂赤松子 皆古仙人也 列仙傳云 赤松子 神農時爲雨師러니 服水玉하고 能入火自燒 至崑山上하야 常止西王母石室하고 隨風雨上下 炎帝少女追之하야 亦得仙俱去하니라 王喬 周靈王太子晉也 喬好吹笙하야 作鳳鳴이러니 遇浮丘公하야 接之仙去하니라잇가
是時 頗好神僊(仙)이라 褒對及之러라
〈出王褒傳〉
○ 京兆尹張敞 亦上疏諫曰 願明主 時忘車馬之好하고 斥遠方士之虛語하시며 游心帝王之術이면 太平 庶幾可興也리이다
由是 悉罷尙方待詔注+[頭註]此非作器物之尙方이라 主也 主方藥也 相如大人賦 詔岐伯使尙方 是也하다
〈出郊祀志〉
○ 初 趙廣漢 死後 爲京兆尹者 皆不稱職이러니 惟敞 能繼其迹하니方略注+[頭註]設法曰方이요 施謀曰略이라耳目 不及廣漢이나이나 頗以經術儒雅文之러라
○ 上 頗修飾宮室車服하야 盛於昭帝時하고 外戚許, 史, 王氏注+[附註]許皇后父廣漢弟舜及延壽 皆封侯하다 衛太子妃生皇孫하고 皇孫娶王夫人하야 生宣帝러니 及帝立 史魯, 史女等四人 舅王無故, 王武等(一)[二]人 封爲侯하니라貴寵이라
王吉 上疏曰 陛下躬聖質, 總萬方하사 惟思世務하야 將興太平하시니 詔書每下 欣然若更生하나니
伏而思之컨대 可謂至恩이나 未可謂本務也니이다
欲治之主 不世出注+[通鑑要解]有時遇之 不常値也하나니 公卿 幸得遭遇其時하야 言聽諫從이나 然未有建萬世之長策하야 擧明主於三代之隆也 其務在於期會簿書注+[釋義]期會 猶程限也 簿書 卽簿籍文書也, 斷獄聽訟而已 此非太平之基也니이다
願陛下承天心, 發大業하사 與公卿大臣으로 延及儒生 述舊禮, 明王制하야 敺一世之民하야 躋之仁壽之域注+[通鑑要解]仁者 不鄙詐 壽者 不夭折也이면
則俗何以不若成康注+[釋義]按史記周紀컨대 成, 康之際 俗有士君子之行하야 天下安寧하고 刑措四十餘年不用하니라이며 壽何以不若高宗注+[釋義]按通鑑外紀컨대 武丁 殷之賢王也 號爲高宗이라 在位五十有九年而崩이라 不具壽年이라이리잇고
以其言爲迂闊이라하야 不甚寵異也하니 謝病歸하다
〈出吉本傳〉
○ 先注+[原註] 音憐이니 羌種名이라 與諸羌으로 劫略小種하야 皆畔이라
趙充國 年七十餘 老之하야 使丙吉 問誰可將者한대 充國 對曰 無踰於老臣者矣니이다
復問 將軍羌虜何如 當用幾人 充國曰 兵難遙하니 願至金城하야 圖上方略注+[頭註]圖其地形하고 幷爲攻討方略하야 俱奏上也하리이다 乃大發兵하야 詣金城하다
充國 常以遠斥堠注+[頭註]이요 望也 所以檢行險阻하고 伺候盜賊也爲務하며 行必爲戰備하고 止必堅營壁하고 尤能持重하고 愛士卒하야 先計而後戰이러라
遂西至西部都尉府하야 日饗軍士하니 士皆欲爲用이라
虜數挑戰이로되 充國 欲以威信으로 招降䍐(罕), 注+[釋義] 俗作罕하고 音牽이니 皆西羌種이라 漢武滅之하고 置䍐幵縣하야 屬天水郡하니라及劫略者하야 解散虜謀하고 其疲劇하야 乃擊之러니 酒泉太守辛武賢 奏以七月出兵擊䍐, 幵이어늘
充國以爲 先零 首爲畔逆하니 先誅先零已 則䍐, 幵之屬 不煩兵而服矣리이다
璽書報從充國計焉이러니 䍐, 幵 竟不煩兵而下하니라
詔進擊先零하니 羌降者萬餘人矣
充國 度其必壞하고 欲罷騎兵하고 屯田以待其敝러니 作奏未上 會得進兵璽書
充國子使客으로 諫令出兵이어늘 充國 歎曰 本用吾言이런들 羌虜得至是邪
往者金城, 湟中 穀斛八錢이라
吾謂耿中丞注+[釋義]謂司農中丞耿壽昌也호되 三百萬斛穀이면 羌人 不敢動矣라한대 耿中丞 請糴百萬斛하야 乃得四十萬斛耳러니
義渠再使 且費其半하니 失此二冊(策)하야 羌人 故敢爲逆이라하고 遂上屯田奏하야
曰 臣所將吏士馬牛食所用糧穀 調度甚廣하니 徭役不息이면 恐生它(他)變이요 且羌 易以計破 難用兵碎也
臣愚以爲擊之不便이라하노이다
計度臨羌注+[釋義]按地志 金城有臨羌縣이라으로 東至注+[原註] 音告 音門이라[釋義]水出西塞外하야 東至允吾하야 入湟水 水名이라 亹者 水流峽山間하야 兩岸深若門焉이니 今俗呼閤門河 疾言訛傳耳 羌虜故田及公田 民所未墾 可二千頃以上이니 臣願罷騎兵하고 留步兵萬二百八十一人하야 分屯要害處하야 浚溝渠하고 人二十畮(畝)注+[附註] 與畝同이라 司馬法 六尺爲步 步百爲畝 經長百步爲畝 折而方之 則東西南北各十步 秦漢以降으로 二百四十步爲畝하니라 大費하리이다
帝報曰 卽如將軍計 虜當何時伏誅
熟計復奏하라
充國 上狀曰 臣聞帝王之兵 以全取勝이라
是以 貴謀而賤戰하나니 百戰而百勝 非計之善者
故先爲不可勝하야 以待敵之可勝하나니 謹條不出兵留田便宜十二事하노이다
奏每上 輒下公卿하니 議臣 是充國計者 什이요 最後이라
有詔詰前言不便者하니 皆頓首服이러라
魏相曰 臣愚不習兵事利害
後將軍 數畫軍冊 其言 常是하니 任其計可必用也하노이다
於是 報充國嘉納之하고 留屯田하다


신작神爵 원년元年(경신 B.C.61)注+[釋義]전년前年신작神爵장락궁長樂宮에 와서 앉았으므로 이제 신작神爵으로 개원改元한 것이다. 신작神爵은 크기가 순작鶉爵(작은 새)과 같고 색깔에 오채五采가 있다.
봄 정월에 이 처음으로 감천甘泉에 행차하여 태치泰畤교제郊祭를 지내고注+[原註]畤는 음이 지(치)이니, 제사 지내는 곳을 라 한다.[頭註]郊는 제사 이름이다. 하늘과 땅에 제사하니, 국도國都의 남쪽과 북쪽 교외에 있으므로 라 한다.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남교南郊에서 하고, 땅에 제사하는 것은 북교北郊에서 하였다. 는 그침이니, 흙을 봉하여 높이 쌓은 곳인데 신령神靈이 머무는 곳이다. 하동河東에 행차하여 후토后土에 제사하여, 자못 무제武帝고사故事를 닦아서 재계하고 제사하는 를 삼갔으며, 방사方士의 말에 따라 신사神祠를 더 설치하였다.
- 이 는 글이 똑같지 않음 - 익주益州금마金馬벽계碧鷄注+[頭註]벽계碧鷄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돌이 푸르고 아름다운 것이다.” 하였다. 이 있어서 초제醮祭를 지내면 오게 할 수 있다注+[釋義]益州……可醮祭而致:금마金馬벽계碧鷄는 말 모양의 과 닭 모양의 푸른 이니, 이 신사神祠익주益州금마방金馬坊에 있었다. 두보杜甫에 “때로 벽계방碧鷄坊을 나가서 서교西郊에서 초당草堂을 향한다.” 하였다. 는 말을 듣고는 이에 간대부諫大夫촉군蜀郡왕포王褒를 보내어서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찾게 하였다.
- 《한서漢書 교사지郊祀志》에 나옴 -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신사神祠에 제사하고 신선神仙을 찾음은 무제武帝의 잘못된 일인데, 효선제孝宣帝중흥中興함에 어찌 이것을 뒤따라 행한단 말인가.
그러나 태치泰畤교제郊祭를 지내고 후토后土에 제사한 것은 그래도 핑계 댈 만한 것이 있지만 간대부諫大夫를 보내어 금마金馬벽계碧鷄을 찾게 한 것은 찾지 않아야 할 것을 찾은 것이니, 잘못이 더욱 심하다.”
예전에 왕포王褒가 뛰어난 재주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불러서 만나 보고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聖主가 현신賢臣을 얻은 )을 짓게 하니, 그 글이 다음과 같다.
현자賢者는 국가의 유용한 기구입니다.
그러므로 인군人君현자賢者를 구하는 데에 수고롭고 인재를 얻음에 편안한 것입니다.
옛날에 현자賢者성주聖主를 만나지 못했을 때에는 일을 도모하고 계책을 세우면 임금이 그 계책을 쓰지 않고, 소견을 아뢰고 정성을 펴면 윗사람이 그 진실한 말을 옳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윤伊尹은 솥과 도마(요리)에 수고로웠고, 태공太公은 칼을 두드려 백정 노릇 하는 데에 곤궁하였고, 백리해百里奚는 스스로 팔려 갔고, 영자甯子(甯戚)는 소를 먹였으니,注+[頭註]고도鼓刀태공太公(呂望)이 조가朝歌에서 소를 잡은 것을 이른다. 백리해百里奚나라의 포로가 되었는데, 나라가 다섯 마리 양 가죽으로 속죄하였다. 영척甯戚나라 환공桓公을 만나기 전에 나라 성문城門에서 소를 먹였다. 이것은 이러한 환난에 걸렸기注+[頭註]현자賢者가 모두 때를 만나기 전에 어려움을 당한 것이다. 와 같으니 만남이다.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명군明君을 만나고 성주聖主를 만남에 미쳐서는 계책을 세우면 윗사람의 뜻에 합하고 간쟁하면 즉시 들어주어서 나아가고 물러감에 그 충성을 임금에게 바치고注+[通鑑要解]은 쓰임과 같다. 또 은 여쭘이니, 왕포王褒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에 “그 충성을 임금에게 사용한다.” 하였다. 직책을 맡음에 그 방법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반드시 성스럽고 지혜로운 군주가 있은 뒤에야 현명한 신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이 포효하면 바람이 거세지고 이 일어나면 구름이 일며, 귀뚜라미는 가을을 기다려 울고注+[釋義]귀뚜라미가 가을을 기다려 운다는 것은 현인賢人명군明君을 기다려 벼슬함을 비유한 것이다. 《시전詩傳》에 이르기를 “실솔蟋蟀은 메뚜기와 비슷한데 작으니 일명 촉직促織(귀뚜라미)이고 9월에 에 있다.” 하였다. 그러므로 가을을 기다려 운다고 한 것이다. 하루살이는 날이 흐릴 때에 나오는注+[釋義]로 통하니, 《시전詩傳》에 이르기를 “부유蜉蝣길강蛣蜣(말똥구리)과 비슷하다.” 하였다. 《이아익爾雅翼》에 이르기를 “하루살이가 나오는 것이 때가 있으므로 흐릴 때 나온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것입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나는 이 하늘에 있음에 대인大人을 봄이 이롭다.’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훌륭한 많은 선비가 이 왕국王國에서 태어났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태평하고 군주가 성스러우면 준걸俊傑들이 장차 스스로 이르러서, 군주는 밝고 밝게 조정에 계시고 신하들은 화목하게 조정에 나열되어 있어서注+[通鑑要解]명명明明은 살핌이요, 목목穆穆은 아름다움이다. 정신을 모아 군주와 신하가 서로 마음이 맞음이 더욱 드러나는 것이니, 비록 백아伯牙체종금遞鐘琴注+[通鑑要解]지충遞鐘은 《문선文選에 “거문고 이름이다.” 하였다. 는 음이 지(체)이고 은 음이 충(종)이니, 악기이다. 을 잡고 봉문자逢門子오호궁烏號弓을 당기더라도注+[通鑑要解]오호烏號는 활 이름이다. 은 당김이다. 오히려 그 뜻을 다 비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주聖主는 반드시 현신賢臣을 기다려 공업功業이 커지고, 준사俊士 또한 명주明主를 기다려 그 덕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상하上下가 함께 원하여 흔연欣然히 서로 즐거워하면 마치 기러기털이 순풍을 만난 듯하고注+[頭註]군주와 신하가 서로 화목함이 기러기털이 순풍順風을 만나 한 번에 천리千里를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큰 물고기가 큰 강물에서 마음대로 노는 듯하여, 아름다운 징조注+[釋義]휴징休徵은 아름다운 행실의 징험이다.가 저절로 이르고 수명이 끝이 없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엎드리고 우러러보며 굽히고 펴는 것을 팽조彭祖注+[釋義]팽조彭祖는 성이 이고 이름이 이니, 요순시대堯舜時代 사람이다. 은상殷商 때에 이르러 이미 나이가 7백여 세였다. 대부大夫로 삼았으나 병을 칭탁하고 정사에 참여하지 않았다.[頭註]彭祖는 이고 이니, 제요帝堯팽성彭城에 봉하였다. 처럼 하며,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것을 왕자王子 적송자赤松子注+[釋義]왕자王子 를 이르고 적송자赤松子를 이르니, 모두 옛날 신선이다. 《열선전列仙傳》에 이르기를 “적송자赤松子신농씨神農氏 때에 우사雨師가 되었는데, 수옥水玉(水晶)을 복용하였으며 불 속에 들어가 자신을 태울 수 있었다. 곤륜산崑崙山 위에 이르러 항상 서왕모西王母석실石室에 머물렀으며, 바람과 비를 따라 오르내렸는데, 염제炎帝의 작은딸이 그를 좇아 또한 신선술을 배워 함께 떠나갔다.” 하였다. 왕자王子 나라 영왕靈王의 태자인 이다. 왕자王子 는 생황을 불기를 좋아하여 봉황의 울음소리를 내었는데, 신선인 부구공浮丘公을 만나 함께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 처럼 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때 신선술神仙術을 상당히 좋아하였으므로 왕포王褒의 대답에 이것을 언급한 것이다.
- 《한서漢書 왕포전王褒傳》에 나옴 -
경조윤京兆尹 장창張敞이 또한 상소하여 간하기를 “바라건대 명주明主께서는 때로 거마車馬의 좋은 놀이를 잊으시고 방사方士들의 허황된 말을 물리쳐 멀리하시며 제왕帝王의 방법에 마음을 두시면 태평성대를 거의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 이로 말미암아 상방尙方(方藥을 주관)注+[頭註]여기의 상방尙方은 기물을 만드는 부서인 상방尙方이 아니다. 은 주관함이니 방약方藥을 주관하는 것이니, 사마상여司馬相如대인부大人賦에 “기백岐伯에게 명하여 방약方藥을 주관하게 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여 대조待詔한 자를 모두 해산하였다.
- 《한서漢書 교사지郊祀志》에 나옴 -
○ 처음에 조광한趙廣漢이 죽은 뒤로 경조윤京兆尹이 된 자가 모두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장창張敞만이 그 자취를 이으니, 그의 방략方略注+[頭註]을 만드는 것을 이라 하고, 꾀를 베푸는 것을 이라 한다. 이목耳目(정보를 수집함)은 조광한趙廣漢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자못 경학經學유아儒雅(학자의 고상함)로써 문식하였다.
- 《한서漢書 조광한전趙廣漢傳》에 나옴 -
이 자못 궁실과 수레와 의복을 수식하여 소제昭帝 때보다 성대하였고, 외척外戚허씨許氏사씨史氏왕씨王氏注+[附註]허황후許皇后의 아버지 광한廣漢과 아우 연수延壽가 모두 에 봉해졌다. 위태자衛太子사량제史良娣황손皇孫을 낳았고, 황손皇孫왕부인王夫人에게 장가들어 선제宣帝를 낳았는데, 선제宣帝가 즉위하자 사로史魯사녀史女 등 4인과 외삼촌 왕무고王無故, 왕무王武 등 2인이 봉해져 가 되었다. 가 귀하고 총애를 받았다.
왕길王吉이 상소하기를 “폐하께서 몸소 성인聖人의 자질로 만방萬方을 총괄하시어 오직 세무世務를 생각해서 장차 태평성대를 일으키려 하시니, 조서가 내려질 때마다 백성들이 흔연히 다시 살아나는 듯합니다.
신은 엎드려 생각건대 지극한 은혜라고 할 수는 있으나 본무本務라고 이를 수는 없습니다.
나라가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군주가 세상에 항상 나오지 않으니,注+[通鑑要解]불세출不世出은 때때로 만나고, 항상 만나지는 못하는 것이다.공경公卿이 다행히 그런 때를 만나서 말을 들어주고 간언을 따라주나 만대萬代의 장구한 계책을 세워 명주明主삼대三代의 융숭함에 들게 함이 있지 못하고, 힘쓰는 것이 기한과 부서簿書注+[釋義]기회期會는 기한과 같고, 부서簿書는 장부와 문서이다. 옥사獄事를 결단하고 송사訟事를 다스림에 있을 뿐이니, 이는 태평의 기본이 아닙니다.
신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천심天心을 받들고 대업大業을 분발하시어 공경公卿대신大臣들과 유생儒生에 이르기까지 옛 를 전술하고 왕의 제도를 밝혀서 한 세상의 백성들을 몰아 인수仁壽의 경지注+[通鑑要解]은 비루하고 속이지 않는 것이고, 는 요절하지 않는 것이다. 에 오르게 한다면
풍속이 어찌 성왕成王강왕康王 때만 못하며注+[釋義]사기史記》 〈주기周紀〉를 살펴보건대 성왕成王강왕康王 때에 풍속에 사군자士君子의 행실이 있어서 천하가 편안하였으며 〈죄를 짓는 사람이 없어〉 형벌을 40여 년 동안 버리고 쓰지 않았다. 수명이 어찌 고종高宗만 못하겠습니까?注+[釋義]통감외기通鑑外紀》를 살펴보건대 무정武丁나라의 어진 왕이니, 고종高宗이라 하였다. 재위한 지 59년에 별세하였다. 향년享年은 나와 있지 않다. ” 하였다.
이 그의 말을 우활迂闊하다 하여 그다지 총애하거나 특별하게 여기지 않으니, 왕길王吉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갔다.
- 《한서漢書 왕길전王吉傳》에 나옴 -
선령先零注+[原註]은 음이 련이니, 강족羌族의 이름이다. 이 여러 강족羌族과 함께 작은 종족들을 위협하여 모두 배반하였다.
이때 조충국趙充國의 나이가 70여 세였는데, 이 그를 늙었다고 생각하여, 병길丙吉로 하여금 “누가 장수로 삼을 만한 자인가?” 하고 묻게 하자, 조충국趙充國이 대답하기를 “노신老臣보다 나은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장군이 생각하기에 오랑캐가 어떠하며, 마땅히 몇 명을 동원해야 하겠는가?” 하자, 조충국趙充國이 대답하기를 “군대는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바라건대 금성金城에 이르러서 방략方略(방책)을 그려 올리겠습니다.注+[頭註]지형을 그리고 토벌할 방략方略을 아울러 만들어 함께 올린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군대를 크게 징발하여 금성金城으로 갔다.
조충국趙充國은 항상 멀리 척후병斥堠兵을 보내어 정탐하는注+[頭註]은 헤아림이고 는 망보는 것이니, 험한 곳을 다니는 사람을 조사하고 도적을 살피는 것이다. 것을 힘쓰고, 행군할 때에는 반드시 전투할 대비를 하고, 멈출 때에는 반드시 진영의 성벽을 견고히 하였으며, 더욱이 신중하고 사졸들을 아껴서 계책을 먼저 세운 뒤에 싸우곤 하였다.
마침내 서쪽으로 서부도위부西部都尉府에 이르러서 날마다 군사들에게 연향을 베푸니, 군사들이 모두 싸움에 쓰여지기를 바랐다.
오랑캐가 자주 도전하였으나 조충국趙充國은 위엄과 신의로써 䍐‧과 기타 선령先零에게 겁박당한 자들을 불러 항복시켜서 오랑캐의 계략을 와해시키고 그들이 피폐한 틈을 타서 비로소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주천태수酒泉太守 신무현辛武賢이 7월에 출병하여 䍐‧注+[釋義]䍐은 세속에 으로 쓰기도 하고 은 음이 견이니, 모두 서강西羌의 종족이다. 나라 무제武帝가 이들을 멸망시키고 䍐幵縣을 두어 천수군天水郡에 소속시켰다. 을 공격할 것을 아뢰었다.
조충국趙充國은 말하기를 “선령先零이 첫 번째로 반역을 하였으니, 먼저 선령先零을 토벌하면 䍐‧의 무리는 번거롭게 군대를 동원하지 않아도 복종할 것입니다.” 하였다.
새서璽書조충국趙充國의 계책을 따른다고 답하였는데, 뒤에 䍐‧이 마침내 군대를 번거롭게 동원하지 않았는데도 항복하였다.
이 명하여 선령先零을 진격하게 하니, 이때 강족羌族으로 항복한 자가 만여 명이었다.
조충국趙充國은 그들이 반드시 무너질 것을 헤아리고는 기병騎兵을 해산시키고 둔전屯田을 하면서 그들이 피폐해지기를 기다리고자 하였는데, 상주上奏하는 글을 써서 올리기 전에 마침 진군進軍하라는 새서璽書를 받았다.
조충국趙充國의 아들이 문객으로 하여금 간하여 출병하게 하려 하자, 조충국趙充國이 한탄하기를 “본래 내 말을 따랐더라면 강로羌虜들이 여기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지난번 금성金城황중湟中에 〈곡식이 흔하여〉 곡식 1이 8이었다.
내가 경중승耿中丞(耿壽昌)注+[釋義]경중승耿中丞사농중승司農中丞경수창耿壽昌을 이른다.에게 ‘300만 의 곡식을 사들이면 강족羌族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경중승耿中丞이 100만 을 사들일 것을 요청하여 마침내 40만 을 얻었을 뿐이다.
그런데 의거義渠에 두 번 사신 보낼 적에 또 그 절반을 소비하였으니, 이 두 가지 계책을 잘못하여 강인羌人들이 이 때문에 감히 반역하는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둔전屯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주上奏하였다.
“신이 거느리고 있는 관리와 군사와 우마牛馬의 먹이로 써야 할 양곡과 꼴과 짚을 조달함이 매우 많으니, 요역徭役이 그치지 않으면 다른 변란이 생길까 두렵고, 또 강족羌族은 계책을 써서 격파하기는 쉽고 군사를 동원하여 깨뜨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신은 공격하는 것이 편리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헤아려 보건대 임강현臨羌縣注+[釋義]살펴보건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금성金城임강현臨羌縣이 있다.” 하였다. 에서 동쪽으로 호미浩亹(고문)注+[原註]浩는 음이 고이고, 은 음이 문이다.[釋義]물이 서새西塞의 밖에서 나와 동쪽으로 윤오允吾에 이르러 황수湟水로 들어간다. 는 물 이름이다. 은 물이 산골짜기 사이로 흘러서 양쪽 기슭이 깊어 문과 같은 것이니, 지금 세속에서는 합문하閤門河라고 부르니, 빨리 말하여 와전訛傳된 것이다. 에 이르기까지 오랑캐들이 옛날 농사짓던 밭과 공전公田을 백성들이 아직 개간하지 않고 있는 것이 2천경千頃 이상이 되니, 신은 원컨대 기병騎兵을 해산하고 보병步兵 1만 281명을 남겨 두어서, 요해처에 나누어 주둔시켜 도랑을 깊이 파 수로水路를 내고 사람마다 20注+[附註]와 같다. 사마법司馬法에 “6을 1라 하고, 100를 1라 한다.” 하였으니, 지름의 길이가 100인 것을 라 하니, 꺾어서 네모지게 하면 동서남북이 각각 10이다. 이후로는 240를 1라 하였다. 씩 경작하게 하면 큰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답하기를 “만일 장군의 계획대로 한다면 오랑캐를 어느 때에 정벌하겠는가?
자세히 헤아려 다시 아뢰라.” 하였다.
조충국趙充國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제왕의 군대는 완전함으로써 승리를 취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계책을 귀하게 여기고 싸우는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니,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적이 이길 수 없게 만들고서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군대를 출동하지 않고 둔전을 하는 것이 편리한 열두 가지 일을 삼가 조목조목 아룁니다.” 하였다.
상주上奏할 때마다 번번이 공경公卿들에게 내리니, 의논하는 신하들이 처음에는 조충국趙充國의 계책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 열 명 중에 셋이었고, 중간에는 열 명 중에 다섯이었고, 최후에는 열 명 중에 여덟이었다.
조서를 내려서 전에 불편하다고 말한 자를 힐책하자,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굴복하였다.
위상魏相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신은 군사軍事이해利害를 잘 알지 못합니다.
후장군後將軍(趙充國)이 자주 군대의 계책을 세움에 그 말이 항상 옳았으니, 신은 그 계책이 반드시 쓸 수 있음을 보장합니다.” 하였다.
은 이에 조충국趙充國에게 ‘가상히 여겨 받아들인다.’고 답하고, 남아서 둔전屯田하게 하였다.


역주
역주1 神爵 : 爵은 雀과 통하는 바, 神爵은 새의 일종인데, 상서로운 새로 알려져 있으며, 혹은 봉황의 일종인 난새라고도 한다.
역주2 : 치
역주3 金馬碧鷄 : 金馬와 碧鷄는 후대에 상서로운 물건으로 알려졌다.
역주4 : 곤
역주5 : 육
역주6 蜉蝤 : 부유
역주7 殷商 : 商나라가 국호를 殷이라 고친 것은 盤庚 때부터 시작되었다. 국호를 殷으로 고쳤으나 옛 이름을 그대로 칭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殷商이라 합쳐 일컫기도 하였다.
역주8 呴噓 : 후허
역주9 尙方待詔 : 尙方은 方藥을 주관하는 것으로, 方藥은 方術과 藥物을 이르는 바, 당시 신선이 되는 약을 만들기 위하여 황제의 詔命을 기다리고 있던 자를 이른다.
역주10 出本傳 : 이 내용은 〈趙廣漢傳〉에 보이지 않고 《前漢記》 卷19 〈宣帝本紀〉에 나온다.
역주11 史良娣 : 史는 周나라 史佚의 후손이다. 良娣는 부인의 관직 이름이니, 顔師古가 말하기를 “太子는 妃가 있고 良娣가 있고 孺子가 있으니, 모두 세 등급이다.” 하였다.
역주12 : 련
역주13 : 탁
역주14 : 탁
역주15 : 견
역주16 : 교
역주17 : 적
역주18 茭藁 : 교고
역주19 浩亹 : 고문
역주20 :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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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신] 신작원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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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신] 신작원년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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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신] 신작원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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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신] 신작원년 325

통감절요(3)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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