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己卯]〈秦二十五, 燕三十三, 齊四十三, 代六年이라
燕丹
이 不勝一朝之忿
하야 以犯虎狼之秦
하야 輕慮淺謀
로 挑怨速禍
하야 使召公之廟
로 不祀忽諸
注+[頭註]言忽然而亡也라하니 罪孰大焉
이리오
夫爲國家者는 任官以才하고 立政以禮하고 懷民以仁하고 交隣以信이라
是以로 官得其人하고 政得其節하고 百姓懷其德하고 四隣親其義하나니
夫如是
면 則國家安如磐石
하고 熾如
火
하야 觸之者碎
하고 犯之者焦
하나니 雖有彊暴之國
이나 尙何足畏哉
리오
丹
이 釋此不爲
하고 顧以萬乘之國
으로 決匹夫之怒
하고 逞盜賊之謀
라가 功
身僇
하고 社稷爲墟
하니 不亦悲哉
아
夫其膝行蒲伏(匍匐)
이 非恭也
요 言重諾
이 非信也
요 糜金散玉
이 非惠也
요 刎頸決腹
이 非勇也
니 要之
컨대 謀不遠而動不義
면 其楚白公勝
注+[頭註]楚太子建이 遇讒在鄭이러니 鄭人殺之한대 其子勝이 在吳라 子西欲召之한대 葉公曰 吾聞勝也好復言而期死라하니 復言은 非信也요 期死는 非勇也니 子必悔之리라 子西不從하고 召之爲白公하다 請伐鄭이어늘 子西許之러니 未起師에 晉人伐鄭한대 楚救之하니 勝怒하야 厲劍하고 遂作亂하야 殺子西, 子期, 子朝하고 劫惠王이러니 後奔山自縊하니라之流乎
인저
荊軻懷其豢養
注+[頭註]草食曰芻요 穀食曰豢이라 又牛馬曰芻요 犬豕曰豢이라之私
하야 不顧七族
注+[頭註]父之姓一이요 姑之娣[子]二요 妹之子三이요 女之子四요 母之姓五요 從子六이요 妻父母七이라하고 欲以尺八匕首
로 彊燕而弱秦
하니 不亦愚乎
아
初에 齊事秦謹하고 與諸侯信하며 齊亦東邊海上이라
後
에 齊相及賓客
이 多受秦
하고 勸王朝秦
하고 不修攻戰之備
하며 不助五國攻秦
이라
不悟姦人賓客之受間金하고 聽勸朝秦하야 不修攻戰之備하고 不助五國攻秦이라
秦以故로 得滅五國하니 殊不知五國滅矣면 齊其能獨存乎아
迨王賁猝入
에 民莫敢格
이로되 猶信五百里之約封
하야 竟以餓死
하니 觀
하면 至今可爲於邑(嗚唈)也
니라
기묘(B.C.222) - 진秦나라 25년, 연燕나라 33년, 제齊나라 43년, 대代나라 6년이다.
王賁이 遼東을 공격하여 燕王 희喜를 사로잡았다.
“燕나라 丹이 하루아침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호랑이와 같은 秦나라를 범해서 짧은 생각과 얕은 꾀로 원망을 돋우고 화를 불러서 召公의 사당으로 하여금 갑자기 제사가 끊어지게 만들었으니,
注+[頭註]홀저忽諸는 갑자기 망함을 말한 것이다. 죄가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그런데도 논하는 자들은 혹 어질다고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재주에 따라 관직을 맡기고 예禮로써 정사를 세우고 인仁으로써 백성을 품어주고 신信으로써 이웃 나라와 사귄다.
이 때문에 관원은 그 적임자를 얻고 정사는 그 절도를 얻고 백성은 그 덕을 그리워하고 사방의 이웃 나라는 그 의리(신의)로 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국가가 반석처럼 편안하고 타오르는 불꽃처럼 치성하여 대드는 자는 부서지고 범하는 자는 타버리니, 비록 강폭彊暴한 나라가 있으나 오히려 어찌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
丹이 이것을 버리고 하지 않고는 도리어 만승萬乘의 나라를 가지고 필부匹夫의 분노를 터뜨리고 도적(자객)을 보내어 사람을 죽이는 꾀를 부리다가 공功이 무너지고 몸이 죽었으며 사직社稷이 빈터가 되었으니, 슬프지 않은가.
무릎으로 기어가고 포복하는 것이 공손함이 아니요, 말을 실천하고 승낙을 중히 하는 것이
신信이 아니요,
금金을 쓰고
옥玉을 흩어주는 것이 은혜가 아니요, 목을 찌르고 배를 가르는 것이 용맹이 아니니, 요컨대 계책이 원대하지 못하고 행동이 의롭지 못하면 楚나라 白公
승勝의
注+[頭註]초楚나라 태자太子 건建이 참소당하여 망명해서 정鄭나라에 있었는데, 정鄭나라 사람이 그를 죽였다. 그 아들 승勝이 오吳나라에 있으므로 자서子西가 부르고자 하였는데, 섭공葉公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승勝은 말을 실천하고 죽기를 기약한다 하니, 말을 실천함은 신信이 아니고 죽기를 기약함은 용맹이 아니니, 그대는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서子西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불러와 백공白公으로 삼았다. 백공白公 승勝이 정鄭나라를 칠 것을 청하자 자서子西가 이를 허락하였는데,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 진晉나라 사람이 정鄭나라를 정벌하자 초楚나라가 이를 구원하니, 승勝이 노하여 검을 갈고 마침내 난을 일으켜 자서子西와 자기子期, 자조子朝를 죽이고 혜왕惠王을 위협하였는데, 뒤에 산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부류인 것이다.
荊軻는 길러주는 사사로운 은혜를 고마워하여
注+[頭註]풀을 먹여 키운 동물을 추芻라 하고 곡식을 먹여 키운 동물을 환豢이라 하며, 또 소와 말을 추芻라 하고 개와 돼지를 환豢이라 한다.칠족七族을 돌아보지 않고
注+[頭註]칠족七族은 아버지의 성姓이 첫 번째이고, 고모의 아들이 두 번째이고, 자매姊妹의 아들이 세 번째이고, 딸의 아들이 네 번째이고, 어머니의 성姓(外族)이 다섯 번째이고, 종자從子가 여섯 번째이고, 처부모妻父母가 일곱 번째이다. 한 자 여덟 치의
비수匕首를 가지고 燕나라를 강하게 하고 秦나라를 약하게 만들고자 하였으니, 어리석지 않은가.”
처음에 齊나라는 삼가 秦나라를 섬기고 제후諸侯와 더불어 약속을 잘 지키며 齊나라는 또한 동쪽 변방 해상海上에 있었다.
그리하여 秦나라가 밤낮으로 三晉과 燕‧楚를 공격하니, 다섯 나라가 각각 스스로 구원하였다.
이 때문에 齊王 건建이 즉위한 지 40여 년에 병란을 입지 않았다.
그 후 齊나라의 재상과 빈객들이 秦나라의 반간反間(첩자)의 돈을 많이 받고는 왕에게 秦나라에 조회하도록 권하고 공전攻戰의 대비를 닦지 않았으며, 다섯 나라를 도와 秦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秦나라가 이 때문에 다섯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육국六國이 멸망함에 오직 齊나라가 가장 어리석었다.
간사한 자들과 빈객들이 반간反間의 돈을 받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는 秦나라에 조회하도록 권하는 말을 따라서 공격과 전투의 대비를 닦지 않았으며 다섯 나라를 도와 秦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秦나라가 이 때문에 다섯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다섯 나라가 멸망하면 齊나라가 홀로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王賁이 갑자기 臨淄로 들어가니 백성들이 감히 대항하는 자가 없었는데 오히려 5백 리를 봉해주겠다는 약속을 믿고서 항복했다가 끝내 굶어 죽었으니, ‘소나무여, 측백나무여’ 하는 노래를 보면 지금까지도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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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 진25, 연33, 제43, 대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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