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主下詔曰 犬羊陵縱
하야 侵竊郊畿
하야 하니 宜時掃定
이라하고 以蕭摩訶, 樊毅, 魯廣達
注+[頭註]蕭摩訶는 驃騎將軍이요 樊毅는 護軍將軍이요 魯廣達은 中領軍이라로 竝爲都督
하다
於是에 賀若弼은 自北道하고 韓擒虎는 自南道竝進하니 緣江諸戍望風盡走러라
任忠
注+[頭註]陳鎭東大將軍이라이 帥數騎迎降
하고 引擒虎
하야 直入朱雀門
하니 陳主惶遽
하야 自投于井
이어늘
武帝
注+[頭註]陳霸先이라與王僧辯
으로 同事梁室
하야 誅夷侯景
注+[頭註]見三十二卷壬申年이라 景이 本東魏定州刺史니 與高澄으로 有隙하야 叛附于梁하야 遂簒位라하고 乘時伺間
하야 卒成大功
하야 奄有江南
하니 斯亦難矣
라
文帝
注+[頭註]蒨이니 武帝의 兄子라는 恭勤政事
하야 足爲良主
요 孝宣
注+[頭註]頊이니 文帝之弟라은 値齊之衰而啓土
하고 逢周之興而喪師
하니 豈非不恃內而恃外者耶
아
夫以陳國區區
로 不能居天下五分之一
하니 慄慄危懼
라도 猶不能保其社稷
이어든 況後主
注+[頭註]叔寶이니 孝宣子라荒淫無度
하야 以趣(促)之
注+[頭註]趣은 讀曰促이라하니 納身眢井
注+[釋義]井無水曰眢이라[頭註]眢은 音鴛이라이 不亦宜乎
아
진주陳主가 조서를 내리기를 “오랑캐들이 능멸하고 방종하여 우리 도성 근교에까지 침략하여 독침을 쏘는 벌과 같으니, 마땅히 때를 봐서 소탕하여 평정해야 한다.” 하고,
소마가蕭摩訶‧
번의樊毅‧
노광달魯廣達注+[頭註]소마가蕭摩訶는 표기장군驃騎將軍이고, 번의樊毅는 호군장군護軍將軍이고, 노광달魯廣達은 중령군中領軍이었다. 을 모두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이때에 하약필賀若弼은 북도北道에서 출발하고 한금호韓擒虎는 남도南道에서 출발하여 함께 전진하니, 강가에 있던 진陳나라의 여러 수비군들이 소문만 듣고도 모두 도망하였다.
임충任忠注+[頭註]임충任忠은 진陳나라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이다. 이 몇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수隋나라 군대를 맞이하여 항복하고는
한금호韓擒虎를 인도하여 곧바로
주작문朱雀門으로 들어오니,
진주陳主가 두렵고 황급하여 스스로 우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군사들이 우물을 엿보고는 진주陳主를 밧줄로 끌어올려서 사로잡아 장안長安으로 보냈다.
“
진陳나라
무제武帝注+[頭註]무제武帝는 진패선陳霸先이다. 는
왕승변王僧辯과 함께
양梁나라 황실을 섬겨서
후경侯景을 죽이고는
注+[頭註]진패선陳霸先이 후경侯景을 토벌하여 평정한 것은 32권 임신년조壬申年條(552)에 보인다. 후경侯景은 본래 동위東魏의 정주자사定州刺史였는데, 고징高澄과 틈이 있어서 동위東魏를 배반하고 양梁나라에 귀부歸附하였다가 마침내 제위帝位를 찬탈하였다. 때를 타고 틈을 엿보아 마침내 큰 공을 이루어서 곧바로
강남江南 지방을 소유하였으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다.
문제文帝注+[頭註]문제文帝는 진천陳蒨이니, 무제武帝의 형兄의 아들이다. 는 공손하고 정사에 부지런하여 충분히 훌륭한 군주가 될 만하였고,
효선제孝宣帝注+[頭註]효선제孝宣帝는 진욱陳頊이니, 문제文帝의 아우이다. 는
제齊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영토를 확장하였고
주周나라가 일어날 때를 만나 무리를 잃었으니, 어찌 안을 믿지 않고 밖을 믿은 자가 아니겠는가.
구구한
진陳나라로서
천하天下의 5분의 1도 차지하지 못하였으니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위태롭게 여겼어도
사직社稷을 보존하지 못했을 터인데, 더구나
후주後主注+[頭註]후주後主는 진숙보陳叔寶이니, 효선제孝宣帝의 아들이다. 가
주색酒色에 빠져 한도가 없어서
진陳나라의 멸망을 재촉
注+[頭註]취趣은 촉促으로 읽는다. 하였으니, 마른 우물
注+[釋義]眢(원)井:[釋義]우물에 물이 없는 것을 원眢이라 한다.[頭註]眢은 음이 원이다. 에 몸을 던진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