隗囂與援共臥起하야 問以東方事한대 曰 前到朝廷호니 上이 引見數十하사 每接燕語하사되 自夕至旦하시니
才明勇略
이 非人敵也
요 且開心見誠
하야 無所隱伏
하니 闊達多大節
은 略與高帝同
하고 經學博覽
과 政事文辨
注+[頭註]文華辨別也라은 前世無比
러이다
援曰 不如也
니 高帝
는 어니와 今上
은 好吏事
하야 動如節度
하고 又不喜飮酒
러이다
無可無不可는 孔子自謂之言也니 以五字成文은 當渾全以會其意요 不當分析以求其義라
設有人焉이 和光同塵하야 無一不可者면 有是理乎아
後世
에 有狀人之通儻
注+[頭註]通은 達也요 儻은 倜儻이니 卓異也라不泥者
면 必曰無可無不可
라하나니 窮究要歸
하면 則纔足謂之無不可爾
니라
馬武, 王霸
가 擊蘇茂, 周建
하야 破之
한대 建
은 於道死
하고 茂
는 犇下邳
注+[釋義]邳는 東海邑이니 本在薛이러니 其後徙此라 有上邳라 故曰下邳라하야 與董憲合
하고 劉紆
는 犇佼彊
注+[釋義]佼는 姓也니 或作姣라[頭註]佼彊은 梁王永之將이라하다
○ 彭寵
의 蒼頭
注+[釋義]漢名奴爲蒼頭者하니 (服)[非]純黑以別於良人也라子密等三人
이 殺寵以降
이어늘 帝封子密
하야 爲不義侯
하다
伯通之叛命과 子密之戕君은 同歸於亂하니 罪不相蔽라
宜各置於法
하야 昭示王度
어늘 反乃爵於五等
注+[釋義]謂公侯伯子男이라하고 又以不義爲名
이라
且擧以不義면 莫可侯也어늘 此而可侯하니 漢爵이 爲不足勸矣니라
吳漢
이 率耿弇等
하고 擊富平獲索
注+[釋義]地理志에 平原에 有富平縣이라 獲索은 賊名이라於平原
하야 大破之
어늘 上
이 因詔弇
하야 進討張步
注+[頭註]齊王也라하다
伋이 承離亂之後하야 養民訓兵하야 開示威信하니 盜賊이 銷散하고 匈奴遠迹하야 在職五年에 戶口增倍러라
○ 平敵將軍龐萌
의 爲人
이 遜順
하니 帝信愛之
하야 常稱曰
者
는 龐萌
이 是也
라하다
使與蓋延共擊董憲이러니 時에 詔書獨下延하고 而不及萌이라
萌以爲延譖己라하야 自疑遂反하야 襲延軍破之하고 與董憲連和하야 自號東平王하다
之大怒하야 自將討萌할새 與諸將書曰 吾常以龐萌爲社稷臣이러니 將軍이 得無笑其言乎아
○ 隗囂問於班彪曰 往者周亡에 戰國이 竝爭하야 數世然後定하니 意者컨대 從橫之事 復起於今乎아
昔에 周爵五等하야 諸侯從政하야 本根旣微에 枝葉彊大라
至於成帝
하야 假借外家
注+[釋義]外家는 王氏也니 謂以權勢로 假貸與諸舅라하며 이라
故로 王氏擅朝하야 能竊號位하니 危自上起요 傷不及下라
是以로 卽眞之後에 天下引領而歎이러니 十餘年間에 中外騷擾하고 遠近俱發하야 假號雲合에 咸稱劉氏하야 不謀同辭라
方今에 雄桀(傑)帶州域者 皆無六國世業之資하고 百姓이 謳吟思仰하니 漢必復興을 已可知矣니이다
囂曰 生言周, 漢之勢는 可也어니와 至於但見愚人의 習識劉氏姓號之故로 而謂漢復興은 疎矣로다
昔
에 秦失其鹿
에 劉季逐而
之
注+[釋義]按淮陰傳에 秦失其鹿에 天下共逐之하니 於是에 高材疾足者先得焉이라한대 註云 以鹿喩帝位也라 劉季는 高帝也니 諱邦이요 字季라 又左傳에 譬如捕鹿에 諸戎掎之라한대 註에 從後牽曰掎라하니라하니 時民
이 復知漢乎
아
昔堯之禪舜
注+[頭註]禪은 去聲이니 除地爲禪하야 告天而傳位를 後因謂之禪이라 改墠曰禪은 神之也라에 曰 天之曆數
注+[頭註]帝王相繼之次第가 猶歲時氣節之先後라在爾躬
이라하시고 舜亦以命禹
하시며 러니 至湯, 武而有天下
라
劉氏
는 承堯之祚
하니 堯據火德
이어늘 而漢紹之
하야 有
라
俗見高祖興於布衣하고 不達其故하야 至比天下於逐鹿하야 幸捷而得之라하고 不知神器有命하야 不可以智力求也하니 悲夫라
夫饑饉流隷
注+[釋義]蔬不熟曰饉이라 流隷는 謂流離之人과 之徒也라 飢寒道路
에 所願
이 不過一金
이나 然終轉死溝壑
은 何則
고
貧窮亦有命也일새니 況乎天子之貴와 四海之富와 神明之祚를 可得而妄處哉아
故
로 雖遭離阨會
하야 竊其權柄
하야 勇如信, 布
注+[釋義]謂韓信, 黥布라하고 强如梁, 籍
注+[釋義]謂項梁, 項籍이라하고 成如王莽
注+[釋義]謂王莽簒位하야 其勢已成也라이라도 然卒潤
伏質
注+[釋義]質은 鍼也니 伏於鍼上而斬之라[頭註]質은 本作櫍하니 椹也라 古者 斬人에 伏於椹上而斫之라하야 烹醢分裂
이어든 又況
注+[釋義]皆微少之稱이라不及數子
요 而欲闇奸
注+[釋義]闇은 隱晦貌요 奸은 犯非禮也라天位者虖(乎)
아
昔
에 하고 하니 夫以匹婦之明
으로도 猶能推事理之致
하고 探禍福之機
하야 而全宗祀於無窮
하고 어든 而況大丈夫之事乎
아
嬰母는 知廢하고 陵母는 知興하니 審此二者면 帝王之分이 決矣라
當食吐哺하야 納子房之策하고 拔足揮洗하야 揖酈生之說하며 擧韓信於行陳하고 收陳平於亡命하야 英雄陳力하고 群策畢擧라
英雄
이 誠知覺寤
하야 超然遠覽
하고 淵然深識
하야 收陵, 嬰之明分
하고 絶信, 布之覬覦
注+[釋義]覬는 音冀요 覦는 音踰니 覬는 幸也요 覦는 欲也니 謂幸得其所欲이라하면
囂不聽이어늘 彪遂避地河西한대 竇融이 以爲從事하야 甚禮重之라
○ 初
에 竇融
이 自守河西
러니 聞帝威德
하고 心欲東向
이나 以河西隔遠
하야 未能自通
이라하야 乃從隗囂
하야 한대 囂皆
하다
囂外順人望이나 內懷異心하야 使辯士張玄으로 說融等曰 更始事已成이라가 尋復亡滅하니 此는 一姓不再興之效라
當各據土宇
하야 與隴, 蜀合從
注+[釋義]隴은 謂隗囂요 蜀은 謂公孫述이라 以和合爲從이요 以威勢相脅爲橫이라이면 高可爲六國注+[釋義]戰國時 韓, 魏, 趙, 燕, 楚, 齊니 戰國之世에 各據其地하니라이요 下不失尉佗
注+[釋義]佗는 名也니 姓趙라 秦二世時에 南海尉任囂 病且死에 召龍川令趙佗하야 語曰 聞項羽, 劉季等이 各起兵하야 中國擾亂이라하니 吾欲興兵自備러니 會病甚이라 且南海는 東西數千里니 可以立國이라하고 卽以佗行南海尉事하니라 囂死에 佗卽自立爲南粤(越)武王하니라니라
融等
이 召豪傑議之
하니 其中識者皆曰 今皇帝姓名
이 見於圖書
하니 漢有
之符
라하다
融
이 遂決策東向
하고 遣長史劉鈞等
注+[通鑑要解]時에 衆推融爲大將軍이라 故로 置長史也라하야 奉書詣洛陽
한대
帝見鈞懽甚하야 禮饗畢에 乃遣還할새 賜融璽書曰 今益州에 有公孫子陽하고 天水에 有隗將軍하니 方蜀, 漢相攻에 權在將軍이라
擧足左右
에 便有輕重
注+[通鑑要解]言左投則蜀重하고 右投則漢重也라하니 以此言之
컨대 欲相厚豈有量哉
아
欲遂立桓, 文
하야 輔微國
注+[釋義]齊桓公, 晉文公이 春秋時號爲賢君이라 能糾合諸侯하야 尊周室, 治强楚하니 諸侯皆尊之하야 以爲霸主하니라인대 當勉卒功業
이요 欲
三分鼎足하야 連衡合從
注+[釋義]註見周安王十五年이라인대 亦宜以時定
注+[頭註]衡은 橫通이라 時定은 開兩說以觀融去就라하라
今之議者 必有任囂敎尉佗制七郡之計
注+[釋義]秦二世時에 南海尉任囂病에 敎趙佗以制七郡之謀하다 按七郡은 南海, 鬱林, 蒼梧, 合浦, 交趾, 九眞, 日南이 是也라하리니 王者
는 有分土
하고 無分民
注+[釋義]凡裂土以封諸侯하니 其受封者 各有分也라 地志註에 有分土者는 謂立封疆也요 無分民者는 謂通往來하야 不常厥居라하니 自適己事
注+[釋義]謂宜自謀順適己身之事라而已
라하고 因授融爲凉州牧
하다
璽書至河西하니 河西皆驚하야 以爲天子明見萬里之外라하더라
○ 張步聞耿弇至
하고 使其將軍歷下
注+[釋義]地理志에 歷下古城이 枕泰山之麓하야 極爲雄壯하고 又襟帶濟水라하고 又分兵屯祝阿
注+[原註]註見周烈王六年이라하고 別於泰山, 鍾城
에 列營數十
하야 以待之
어늘 弇
이 渡河
하야 先擊祝阿拔之
하다
弇이 至臨淄城하야 出不意하야 半日에 拔之하고 入據其城하야 以激怒步러니
步兵二十萬이 至臨淄大城東하야 將攻弇이어늘 弇이 大破之하다
是時
에 帝在魯
注+[釋義]今州曲阜縣이 古魯國也라 括地志에 故〈魯〉城은 今兗州許昌縣南四十里니 本魯之이라러니 聞弇爲步所攻
하고 自往救之
할새
未至
에 陳俊
이 謂弇曰 劇虜
注+[釋義]時에 張步都劇이라 故로 呼爲劇虜라 括地志에 菑川劇縣故城이 在靑州壽光南三十里라兵盛
하니 可且閉營休士
하야 以須上來
니이다
弇曰 乘輿且到
하시니 臣子當擊牛
酒
注+[釋義]謂以筐篚𣿍(漉)酒也라하야 以待百官
이어늘 反欲以賊虜遺君父耶
아하고
乃出兵大戰하야 自旦至昏에 復大破之하니 殺傷이 無數하야 溝塹이 皆滿이라
弇
이 知步困將退
하고 豫置左右翼
注+[釋義]旁引其騎하야 若鳥翼之爲也라하야 爲伏以待之
러니 人定
注+[通鑑要解]日入而群動息故로 를 謂之人定이라時
에 步果引去
어늘 復起兵縱擊
하야 追至鉅昧水
注+[釋義]鉅昧는 水名이니 一名巨洋이라 按洋水는 在靑州樂安國이라上
하니 八九十里
에 僵尸相屬하고 收得輜重二千餘兩
하다
步還劇後數日에 車駕至臨淄하야 自勞軍할새 群臣이 大會라
帝謂弇曰 昔에 韓信이 破歷下以開基러니 今將軍이 攻祝阿以發迹하니 此는 皆齊之西界라
功足相方
이요 而
이어늘 將軍
은 獨拔勍敵
하니 其功
이 又難於信也
로다
又田橫
이 烹酈生
이러니 及
하니 하리니 又事尤相類也
로다
將軍
이 前在南陽
에 建此
하니 常以爲落落
注+[釋義]猶疎闊也니 一云言不相入也라難合
이러니 有志者事竟成也
로다
蘇茂將萬餘人하야 來救之어늘 帝遣使하야 告步, 茂호되 能相斬降者면 封爲列侯라하니 步遂斬茂하고 詣弇軍門降하다
弇
이 入據其城
注+[通鑑要解]其城은 卽平壽城也라하니 衆
이 尙十餘萬
이요 輜重
이 七(十)[千]餘兩
이라
皆罷遣歸鄕里
하고 封步爲安丘
注+[釋義]北海郡安丘縣이니 屬靑州라侯
하다
弇
이 復引兵至城陽
注+[釋義]地理志에 濟陰郡南에 有泰山城陽이라 括地志에 本濮州雷澤縣이 是라하야 降五校餘黨
하니 齊地悉平
이어늘 振旅還京師
하다
弇이 爲將에 凡所平郡이 四十六이요 屠城이 三百이라 未嘗挫折焉이러라
○ 初起太學
하고 車駕還宮
注+[頭註]還은 音旋이니 幸魯하여 祀孔子而還宮也라幸太學
하야 稽式古典
하고 修明禮樂
하니 煥然文物이 可觀矣
러라
帝方被甲躍馬하야 以平寇亂이어늘 乃首建學校하야 以復三代之盛하니 可謂得致治之本矣라
終漢之衰
토록 學校修設
하야 儒士半天下
하야 獨以淸議
로 扶持王室
하야 姦夫大盜
가 環視九鼎
注+[附註]禹收九州貢金하야 鑄九鼎하야 以象九州之物하니 乃三代傳國之寶라 後에 秦昭王取之하니 一은 飛入泗水하고 餘八은 入秦中이러니 始皇幷天下而蔑聞焉하니라而不敢動者
는 蓋權輿
注+[頭註]始也니 造衡自權始요 造車自輿始故也라於此歟
인저
自漢以來로 則爲之幸矣러니 朱子特書曰 初起太學하고 帝還(旋)視之라하니 蓋亦推原古制也라
然則崇師重道之意가 特嚴於一字之間하니 亦豈無所本歟아
馮異治關中
하야 出入三歲
에 上林
이 成都
注+[頭註]時異屯軍上林苑中이라 成都는 言歸附者衆也라 史記曰 三年成都라라
人有上章言호되 異威權至重하니 百姓歸心하야 號爲咸陽王이라하야늘
帝以章示異한대 異皇(惶)懼하야 上書陳謝어늘 詔報曰 將軍之於國家에 義爲君臣이요 恩猶父子하니 何嫌何疑완대 而有懼意리오
其將王元이 說囂曰 天水完富하고 士馬最强하니 元이 請以一丸泥로 爲大王하야 東封函谷關하리니 圖王不成이라도 其敝猶足以霸라
要之컨대 魚不可脫於淵이니 神龍失勢면 與蚯蚓同이니이다
囂心然元計
하야 雖遣子入侍
注+[通鑑要解]囂聞劉永, 彭寵皆已破滅하고 乃遣長子恂하야 隨歙詣闕하니 帝以爲胡騎校尉하고 封鐫羌侯하니라나 然負其險阨
하야 欲專制方面
이러라
○ 是歲
에 詔徵處士太原周黨
과 會稽嚴光
注+[頭註]本姓莊이니 避明帝諱하야 改姓이라 이라等
하야 至京師
하니 黨
이 入見
할새 하고 自陳願守所志
라
博士范升
이 奏曰 伏見太原周黨
과 東海王良
과 山陽王成等
이 蒙受厚恩
하야 使者三聘
에 乃肯就車
하고 及陛見帝庭
에 黨
이 不以禮屈
하고 伏而不謁
하며 偃蹇驕悍
注+[釋義]偃蹇은 驕傲貌라 悍은 猛也라하야 同時俱逝
하니이다
黨等
이 文不能演義하고 武不能死君注+[釋義]言其武勇이 不能爲君盡死節이라하고 釣采華名
하야 庶幾三公之位
하니
臣
은 願
坐雲臺之下
注+[釋義]與는 讀作預라 雲臺는 在南宮하니 明帝永平三年에 圖建武中名臣列將於其中하니라하야 考試圖國之道
하야 不如臣言
이어든 伏虛妄之罪
요
伯夷, 叔齊
注+[附註]孤竹君之二子니 夷, 齊는 諡也라 姓은 黙氏요 或曰墨氏라 孤竹君은 是殷湯所封이니 夷, 齊父니 名은 初요 字子朝라 伯夷는 名元이니 或曰允이요 字公信이며 叔齊는 名致니 或曰智요 字公達이라 伯叔은 少長之字也라는 不食周粟
하고 太原周黨
은 不受朕祿
하니 亦各有志焉
이라
帝少與嚴光同遊學
이러니 及卽位
에 以
物色訪之注+[釋義]畫象其人物顔色以訪求之라하야 得於齊國
하야 累徵乃至
어늘
拜諫議大夫
한대 不肯受
하고 去
하야 耕釣於富春山
注+[釋義]新安志云 漢富春縣西에 有富春山하니 이라 按嚴光傳컨대 耕於富春山이라하니 圖經에 不載此山하고 但云 今名嚴陵山者 是其所耕處라 嚴光은 富陽人이요 耕於富春山하니 則嚴陵山〈卽富春山〉이 是無疑矣라中
하야 以壽終於家
하니라
王良은 後歷沛郡太守, 大司徒, 司直하니 在位恭儉하야 布被瓦器하고 妻子를 不入官舍라
至滎陽
하야 疾篤
하야 不任進道
注+[釋義]任은 音壬이니 堪也니 不堪登途也라일새 過其友人
한대 友人
이 不肯見曰
不有忠言奇謀하고 而取大位하야 何其往來屑屑不憚煩也오하고 遂拒之한대
非光武면 不能遂子陵之高요 非子陵이면 不能成光武之大也니라
光은 字子陵이니 少與光武로 同遊學이러니 及光武卽位에 光이 乃變姓名하고 隱身不見하다
帝思其賢하야 乃令以物色訪之러니 後에 齊國上言호되 有一男子被羊裘하고 釣澤中이라하야늘
帝疑其光
하야 乃備安車玄纁
注+[頭註]纁은 淺絳色也라 玄纁은 天地之正色이니 幣帛之色이라하야 遣使聘之
러니 三反而後
에 至
라
不可相助爲理耶아 光乃張目熟視曰 昔에 唐堯著德에 巢父洗耳하니 士故有志라
帝曰 子陵아 我竟不能下汝耶아하고 於是에 升輿歎息而去러니
復引光入하야 論道舊故하야 相對累日하고 因共偃臥할새 光以足加帝腹上이라
明日에 太史奏호되 客星이 犯御座甚急이러이다 帝笑曰 朕이 故人嚴子陵으로 共臥爾로라
除爲諫議大夫한대 不屈하고 乃耕於富春山하니 後人이 名其釣處하야 爲嚴陵瀨焉이라하니라
曰 光武於是時
에 當屯之初九
하야 陽剛方亨
이어늘 而能以貴下賤
注+[頭註]屯之爲卦 震下坎上이라 當屯難時하야 以陽下陰하야 爲民所歸하니 侯之象也라하고
子陵於是時
에 當蠱之上九
하야 衆方有爲
어늘 而獨不事王侯
注+[頭註]蠱之爲卦 巽下艮上이라 蠱는 事也니 上九는 以剛明之才로 無應援而處事之外하야 無所事之地니 是는 賢人君子不遇於時而高潔自守하여 不累於世務者也라하니
非光武면 不能遂子陵之高요 非子陵이면 不能成光武之大也라하니라
有言曰 創業垂統與增光前烈之君
이 待遇臣下
에 其(體)[禮]雖一
이나
然嚴威儼恪을 常施於爪牙介冑之士하야 以折其驕悍難使之氣하고
柔巽謙裕를 常施於林壑退藏之人하야 以厲其廉靖無求之節이라
漢高祖能立召田橫於海島之中이로되 而終身不能致四皓하고 世宗이 踞見大將軍靑이로되 而不冠則不見汲黯하고 光武制御功臣에 不少假借로되 而詔徵處士嚴光等하야 或陛見帝廷할새 伏而不謁하고 或使者再聘호되 不肯就車라
雖博士范升이 有誇上求高之奏로되 帝亦不以爲然하야 各從所志하니라
夫三君者는 內平四海하고 外讋百蠻하니 可謂英雄豪傑之主矣라
然
이나 高祖之威 能行於暴秦强楚
로되 而不能行於四皓
하고 世宗之威 能行於匈奴西域
이로되 而不行於汲黯
하고 光武之威 行於尋邑王郞
注+[頭註]王尋王邑은 竝見十五卷癸未年이라이로되 而不行於嚴光周黨
은 何也
오
威有所當加하고 勢有所當屈하니 加於所當加以立威則强이요 屈於所當屈以忘勢則昌이라
嚴光之節이 奮乎百世之上하니 下聞者莫不興起而見之어늘 乃與周黨王良竝召하니 觀范升之毁黨과 與友人之誚良하면 則二人은 非光之比 明矣니 宜光之愈不屈也라
且光은 乃帝握手故人이어늘 帝不以手書招致하고 乃以詔書從事는 何哉오
嘗卽光傳考之
컨대 見其譏切侯霸之語
注+[附註]本傳에 光이 三聘而後至하니 司徒侯霸 與光素舊라 遣使奉書하고 使人因謂光曰 公聞先生至하고 區區欲卽詣造로되 迫於典司하야 是以不獲이로라 光乃投札하고 與之口授曰 君房이 位至鼎足하니 甚善이라 懷仁輔義天下悅이요 阿諛順旨要領絶이라하다 霸得書하고 封奏之한대 帝笑曰 狂奴古態也라하니라 君房은 霸字也라하면 則光
은 固非碌碌隱者
라
況光은 少有高名하고 帝旣與之同學하니 必知其才智果有大過人者라
是以로 始焉에 帝思其賢하고 而終焉에 帝傷惜之하니 向使帝不屈光以官爵하고 而惟以故人待之하야 從容訪問이면 必有興治致化之方하야 補益中興이어늘 惜乎라 帝不及此爾라
按中元二年丁巳歲에 帝聖壽六十二니 則是今年己丑은 蓋三十有四矣라
光以建武十七年으로 再召不屈이라가 至年八十終이어늘 帝猶詔郡縣하야 賜錢穀하니
至帝君臨大寶하야 召至闕下하야는 光是時에 蓋亦年踰耳順矣라
以年尊德邵之人으로 帝不能待以賓師之禮하고 乃欲臣而用之하니 宜乎光之不應也라
後之論者 但知光之不屈爲高하고 而不知光之所以不屈者 其意固自有在하야 特其識量素高라하니 此意渾然하야 不露圭角이라
황제가 내흡來歙으로 하여금 절節을 가지고 마원馬援을 전송하여 농우隴右로 돌아가게 하였다.
외효隗囂가 마원馬援과 함께 기거하면서 동방東方(洛陽)의 일을 묻자, 말하기를 “지난번 조정에 이르니, 상上이 수십 번 접견하여 접견할 때마다 사사로이 말씀하시되 저녁부터 아침까지 하였습니다.
재명才明(재주와 지혜)과
용략勇略은 보통 사람이 대적할 바가 아니고 또 마음을 열어 진심을 보여서 숨기는 바가 없으니, 활달하여
대절大節에 치중함은 대략
고제高帝와 같고
경학經學과
박람博覽,
정사政事와
문변文辨注+[頭註]문장이 아름답고 화려하며, 사물에 대한 분별이 있는 것이다.은
전대前代에 비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외효隗囂가 말하기를 “경卿이 생각하기에 고제高帝에 비하여 어떠한가?” 하니,
마원馬援이 대답하기를 “고제高帝만 못하니 고제高帝는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거니와, 금상今上은 관리의 일을 처리하기를 좋아하여 번번이 절도節度대로 하고 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니,
외효隗囂가 마음에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경卿의 말과 같다면 금상今上이 고제高帝보다 도리어 더 낫단 말인가?” 하였다.
“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다.[無可無不可]’는 것은 공자孔子께서 자신을 두고 스스로 하신 말씀이니, 다섯 글자를 가지고 문장을 이룸은 완전히 한 덩어리로 그 뜻을 이해해야 하고 분석해서 그 뜻을 찾아서는 안 된다.
설령 어떤 사람이 세속을 끊고 떠나가서 한 가지라도 가可한 것이 없다면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이것을 행하여 선善하더라도 또한 홀로 절개를 지켜 세속을 따르지 않는 협소한 선비일 뿐이다.
그리고 설령 어떤 사람이 광채(德)를 감추고 진세塵世에 섞여 있어서 한 가지라도 불가不可한 것이 없다면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이것을 행하여 선善하더라도 또한 나약하고 무능하여 구차히 영합하는 사람일 뿐이다.
성인聖人은 저절로 도道에 맞아서 치우치거나 의지함이 없는 자이다.
후세에 통달하고 초탈하여
注+[頭註][通은 통달함이요, 당儻은 뜻이 크고 기개가 뛰어난 것이니 탁이卓異한 것이다. 어느 한쪽에 빠지지 않는 자를 형용할 때에 반드시 ‘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라 하니, 그 귀결을 궁구해 보면 겨우 ‘불가함이 없다[無不可]’고 이르기에 충분할 뿐이다.”
마무馬武와
왕패王霸가
소무蘇茂와
주건周建을 공격하여 격파하자,
주건周建은 길에서 죽고,
소무蘇茂는
하비下邳注+[釋義]비邳는 동해東海의 읍邑이니, 본래 설薛에 있었는데 그 후 이곳으로 옮겼다. 상비上邳가 있기 때문에 하비下邳라 한 것이다. 로 도망하여
동헌董憲과 연합하고,
유우劉紆는
교강佼彊注+[釋義]佼는 성姓이니 혹은 교姣로도 쓴다.[頭註]佼彊은 양왕梁王 유영劉永의 장수이다.에게로 달려갔다.
○
팽총彭寵의
창두蒼頭(노예)
注+[釋義]한漢나라는 노예를 창두蒼頭라 이름하였으니, 순흑색이 아닌 것으로 양인良人과 구별하였다. 인
자밀子密 등 세 사람이
팽총彭寵을 죽이고 항복하자, 황제가
자밀子密을 봉하여
불의후不義侯로 삼았다.
“백통伯通(彭寵의 자字)이 황제의 명령을 배반한 것과 자밀子密이 군주를 해침은 똑같이 난亂에 돌아가니, 죄가 서로 가릴 수 없다.
마땅히 각각 법대로 처치하여 왕의
법도法度를 밝게 보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다섯 등급
注+[釋義]다섯 등급은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을 이른다. 의 작위를 내리고 또
불의不義를
후侯의 이름으로 삼았다.
또 불의不義한 짓을 거행하였으면 후侯를 시켜서는 안 되는데 이런 사람에게 후侯를 시켰으니, 한漢나라의 관작官爵이 족히 선善을 권할 수 없게 되었다.”
오한吳漢이
경엄耿弇 등을 거느리고
부평富平의
획색獲索注+[釋義]《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평원군平原郡에 부평현富平縣이 있다.” 하였다. 획색獲索은 적賊의 이름이다.을
평원군平原郡에서 공격하여
대파大破하자,
상上이 인하여
경엄耿弇에게 명해서 나아가
제齊나라
왕王 장보張步注+[頭註]장보張步는 제齊나라 왕王이다. 를 토벌하게 하였다.
○ 황제가 곽급郭伋을 어양태수漁陽太守로 삼았다.
곽급郭伋은 난리를 치른 뒤를 이어서 백성들을 기르고 군사들을 훈련시켜 위엄과 신의를 열어서 보여 주니, 도적들이 사라지고 흉노가 멀리 도망하여 재직在職한 지 5년에 호구戶口가 배로 증가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곽급열전郭伋列傳》에 나옴 -
○ 평적장군平敵將軍 방맹龐萌의 사람됨이 겸양하고 공손하니, 황제가 믿고 사랑하여 항상 칭찬하기를 “육척六尺의 어린 군주를 맡길 수 있고, 백리百里(諸侯國)의 명령命令(國政)을 부탁할 수 있는 자는 방맹龐萌 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개연蓋延과 함께 동헌董憲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조서가 개연蓋延에게만 내려지고 방맹龐萌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방맹龐萌은 개연蓋延이 자신을 참소한 것이라고 여겨 스스로 의심하고는 마침내 배반하여 개연蓋延의 군대를 기습 격파하고 동헌董憲과 연합하여 동평왕東平王이라 자칭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방맹龐萌을 토벌할 적에 제장諸將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내가 항상 방맹龐萌을 사직社稷의 신하라고 하였는데, 장군들이 어찌 나의 말을 비웃지 않겠는가.
노적老賊을 마땅히 멸족滅族해야 할 것이니, 각기 병기와 말을 정돈하여 수양睢陽으로 모이도록 하라.” 하였다.
○ 외효隗囂가 반표班彪에게 묻기를 “예전에 주周나라가 멸망할 때에 전국戰國의 군웅群雄들이 함께 다투어서 몇 대가 지난 뒤에야 천하天下가 정해졌으니, 생각건대 합종合從과 연횡連橫의 일이 오늘날에 다시 일어나겠는가?
아니면 〈한漢나라가 망하고〉 천명天命을 받아 한漢나라를 대신하여 일어나는 것이 한 사람에게 있겠는가?” 하니, 반표班彪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주周나라가 망하고 흥함은 한漢나라와는 크게 다릅니다.
옛날에 주周나라는 다섯 등급의 관작을 두어서 제후들이 정사에 종사하여 근본根本(天子國)이 이미 미약해지자 지엽枝葉(제후국)이 강대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말류末流에 합종合從과 연횡連橫의 일이 있었으니, 이는 형세와 운수가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漢나라는 진秦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아 봉건제도封建制度를 고쳐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세우니, 군주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위엄이 있고 신하는 백년百年의 장구한 권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제成帝 때에 이르러
외척外戚에게 권력을 빌려 주었으며
注+[釋義]외가外家는 왕씨王氏이니, 권세를 여러 외삼촌들에게 빌려 주었음을 이른다. 애제哀帝와
평제平帝가 제위를 누린 것이 짧고
국통國統이 세 번이나 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왕씨王氏(王莽)가 조정을 제멋대로 차지하여 천자天子의 칭호와 지위를 도둑질하였으니, 위태로움이 위에서부터 일어났고 상해傷害가 아래의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왕망王莽이 진짜 황제皇帝에 즉위한 뒤에 천하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고 한탄하였는데, 10여년 사이에 중외中外가 소란하고 원근遠近이 함께 일어나서 명호名號를 빌려 무리들을 구름처럼 모을 적에 모두 유씨劉氏라고 칭하여 상의하지 않고도 똑같이 말하였습니다.
지금 영웅호걸로서 주州의 경계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육국六國처럼 대대로 기업基業을 이어 내려오는 바탕이 없고, 백성들은 한漢나라를 노래하고 그리워하니, 한漢나라가 반드시 부흥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 수 있습니다.”
외효隗囂가 말하기를 “생生이 주周나라와 한漢나라의 형세를 말한 것은 가可하지만 다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유씨劉氏의 성姓과 이름을 익숙히 아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한漢나라가 다시 부흥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고루하다.
옛날
진秦나라가 사슴(帝位)을 잃자
유계劉季(劉邦)가 쫓아가서 잡았으니,
注+[釋義]秦失其鹿 유계축이기지劉季逐而掎之:살펴보건대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진秦나라가 그 사슴을 잃자 천하가 함께 쫓으니, 이에 재주가 뛰어나고 발이 빠른 자가 먼저 얻었다.” 하였는데, 주註에 이르기를 “사슴을 가지고 황제의 지위를 비유한 것이다.” 하였다. 유계劉季는 고제高帝이니, 휘諱가 방邦이고 자字가 계季이다. 또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비유하건대 사슴을 잡을 때에 여러 오랑캐들이 뒷다리를 잡는 것과 같다.” 하였는데, 주註에 “뒤에서 잡아끄는 것을 기掎라 한다.” 하였다. 그 당시 백성들이 다시
한漢나라를 알았겠는가?” 하였다.
반표班彪가 이에 외효隗囂를 위하여 〈왕명론王命論〉을 지어서 풍자하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후한서後漢書 반표전班彪傳》에 나오는데, 말구末句가 같지 않음 -
“옛날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선양禪讓注+[頭註]선禪은 거성去聲이니, 천자天子가 교외郊外에 나가 땅을 소제하여 선禪을 만들어 하늘에 고하고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을 후세에 인하여 선禪이라 하였다. 선墠을 고쳐 선禪이라 한 것은 신神으로 여긴 것이다. 할 때에 말씀하기를 ‘하늘의
역수曆數(天運)
注+[頭註]제왕帝王이 서로 계승하는 차례가 세시歲時에 절기節氣의 〈변화가 철에 따라 돌아가는〉 순서와 같은 것이다. 가 네 몸에 있다.’ 하였고,
순舜임금 또한 이로써
우禹임금에게 명하셨으며,
직稷과
설契에 이르러는 모두
당唐‧
우虞를 도왔는데,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천하를 소유하였다.
유씨劉氏는 요堯임금의 옛 국통國統을 이으니, 요堯임금은 화덕火德에 의거하였는데 한漢나라가 이것을 이어서 적제赤帝의 부서符瑞가 있었다.
속인俗人들은 고조高祖가 포의布衣로 일어난 것을 보고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해서 심지어 사슴을 쫓는 데에 천하를 견주어서 다행히 발이 빨라 얻었다 하고, 신기神器(황제의 지위)가 천명天命이 있어서 지혜와 힘으로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 슬프다.
이 때문에 세상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많은 것이다.
기근饑饉이 들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노예들
注+[釋義]채소가 성숙하지 않은 것을 근饉이라 한다. 유예流隷는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사람과 노예의 무리이다. 이 길에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 적에 원하는 것이 1
금金에 지나지 않으나 끝내 전전하다가 도랑과 구덩이에서 죽는 것은 어째서인가?
빈궁貧窮도 천명天命이 있기 때문이니, 하물며 천자天子의 존귀함과 사해四海의 부유함과 신명神明이 복을 내리는 것을 망령되이 차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곤궁한 때를 만나 권력을 도둑질하여 용맹함이
한신韓信과
경포黥布注+[釋義]信, 포布:신信, 포布는 한신韓信과 경포黥布를 이른다. 와 같고 강함이
항량項梁과
항적項籍注+[釋義]梁, 적籍:양梁, 적籍은 항량項梁과 항적項籍을 이른다. 과 같고 형세가 이루어짐이
왕망王莽과 같다
注+[釋義]왕망王莽이 천자의 지위를 찬탈하여 그 형세가 이미 이루어짐을 이른다. 하더라도 끝내 가마솥에 들어가고 도끼 모탕에 엎드려서
注+[釋義]質은 도끼 모탕(나무를 패거나 자를 때에 받쳐 놓는 나무토막)이니, 도끼 모탕 위에 엎드려 베어지는 것이다.[頭註]質은 본래 질櫍로 쓰니 도끼 모탕이다. 옛날에 사람을 베어 죽일 때에 죄인을 모탕 위에 엎드리게 하고서 베었다. 삶겨지고 젓 담가져 육신이 나뉘고 찢기는데, 더구나 저 하찮은 자들
注+[釋義]요么와 마麽는 모두 매우 작음을 비유하는 칭호이다. 은 위의 몇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면서 천자의 지위를 남몰래 범하고자
注+[釋義]암闇은 숨기는 모양이고, 간奸은 예禮가 아닌 것을 범하는 것이다. 한단 말인가.
옛날 진영陳嬰의 어머니는 진영陳嬰의 가문이 대대로 빈천하였으니 갑자기 부귀해지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진영陳嬰을 만류해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고, 왕릉王陵의 어머니는 한漢나라가 반드시 천하를 얻을 것을 알고 칼에 엎드려 죽어 왕릉王陵을 굳게 권면하였으니, 필부匹婦의 밝음으로도 오히려 사리事理의 이치를 추측하고 화복禍福의 기미를 살펴서 종사宗祀를 무궁한 후세에 보전하고 책서策書를 춘추春秋(역사책)에 전했는데, 하물며 대장부大丈夫의 일이겠는가.
이 때문에 곤궁하고 영달함은 천명天命이 있고, 길하고 흉함은 사람에게 말미암는 것이다.
진영陳嬰의 어머니는 〈진영陳嬰이 왕王이 되면〉 망할 줄을 알았고 왕릉王陵의 어머니는 한漢나라가 흥할 줄을 알았으니, 이 두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제왕帝王의 구분이 결정될 것이다.
더구나 고조高祖는 활달하고 밝고 어질고 너그러우며 사람을 잘 알아보아 맡겼다.
밥을 먹다가 먹던 밥을 뱉고서 자방子房(張良)의 계책을 받아들이고, 발을 씻다가 씻던 발을 빼고서 역생酈生(酈食其)의 말을 읍하고 받아들이며, 한신韓信을 항오行伍에서 들어 쓰고 진평陳平을 망명한 데에서 거두어 써서 영웅들이 힘을 바치고 여러 계책이 모두 거행되었다.
이는 고제高帝의 큰 지략智略이 제업帝業을 이룬 것이다.
상서祥瑞와 부응符應으로 말하면 그 일이 매우 많다.
그러므로 회음淮陰(韓信)과 유후留侯(張良)가 이르기를 ‘하늘이 준 것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니,
영웅이 진실로 알고 깨달아서
초연超然히 멀리 보고
연연淵然히 깊이 알아서
왕릉王陵과
진영陳嬰의 명확한 구분을 받아들이고,
한신韓信과
경포黥布의
제위帝位를 엿봄
注+[釋義]기覬는 음音이 기이고 유覦는 음音이 유이니, 기覬는 요행이고 유覦는 하고자 하는 것인 바, 요행으로 그 하고자 하는 바를 얻음을 이른다. 을 끊어 버린다면
복조福祚가 자손에게 전해져 천록天祿이 영원할 것이다.”
외효隗囂가 듣지 않자 반표班彪가 마침내 하서河西 지방으로 몸을 피하였는데, 두융竇融이 그를 종사관으로 삼아서 매우 예우하고 존중하였다.
반표班彪가 마침내 두융竇融을 위하여 계책을 세워 두융竇融으로 하여금 오직 일념一念으로 한漢나라를 섬기게 하였다.
○ 처음에 두융竇融이 스스로 하서河西 지방을 지키고 있었는데, 황제의 위엄과 덕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광무제光武帝에게 귀의하고자 하였으나 하서河西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 통할 수가 없다 하여 마침내 외효隗囂를 따라 건무建武의 정삭正朔을 받으니, 외효隗囂가 장군將軍의 인수印綬를 임시로 맡겨 주어 그 지방을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외효隗囂가 겉으로는 사람들의 바람을 따랐으나 속으로는 딴 마음을 품어 변사辯士인 장현張玄으로 하여금 두융竇融 등을 설득하기를 “경시更始가 일이 이미 이루어졌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멸망하였으니, 이는 한 성姓(劉氏)이 다시 흥왕興旺하지 않을 징험이다.
마땅히 각각
토우土宇(영토)를 점거하여
농隴‧
촉蜀과 합종
注+[釋義]농隴은 외효隗囂를 이르고 촉蜀은 공손술公孫述을 이른다. 화합하는 것을 종從이라 하고, 위엄과 형세로 서로 위협하는 것을 횡橫이라 한다. 한다면 높게는
육국六國注+[釋義]육국六國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한韓, 위魏, 조趙, 연燕, 초楚, 제齊이니, 전국戰國시대에 각각 그 지역을 점거하였다. 처럼 될 수 있고 낮아도
남해위南海尉 조타趙佗注+[釋義]〈위尉는 관명官名이고〉 타佗는 이름이니, 성姓이 조씨趙氏이다. 진秦나라 이세황제二世皇帝 때에 남해위南海尉 임효任囂가 병들어 죽으려 할 때에 용천령龍川令 조타趙佗를 불러 이르기를 “내 들으니, 항우項羽와 유계劉季 등이 각각 군대를 일으켜서 중국中國이 소란하다 한다. 내가 군대를 일으켜 스스로 방비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병이 심하다. 또 남해南海는 동서 지방이 수천 리이니, 나라를 세울 수 있다.” 하고는, 즉시 조타趙佗로 남해위南海尉의 일을 행하게 하였다. 임효任囂가 죽자, 조타趙佗가 즉시 스스로 서서 남월무왕南粤武王이라 하였다.를 잃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두융竇融 등이 호걸을 불러 의논하니, 그 가운데 유식한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 황제皇帝의 성명姓名이 도참서圖讖書에 보이니, 한漢나라가 다시 천명天命을 받을 부서符瑞가 있다.” 하였다.
두융竇融이 마침내
광무제光武帝에게 귀의하기로 계책을 결단하고
장사長史 유균劉鈞 등을 보내어
注+[通鑑要解]이때에 무리들이 두융竇融을 추대하여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장사長史를 둔 것이다. 글을 받들어
낙양洛陽에 이르렀다.
황제가 유균劉鈞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예禮로 연향하기를 마친 다음 마침내 돌려보낼 때에 두융竇融에게 내린 새서璽書에 이르기를 “지금 익주益州에는 공손자양公孫子陽이 있고 천수天水에는 외장군隗將軍이 있으니, 촉蜀과 한漢이 서로 공격함에 권세(결정권)가 장군에게 달려 있다.
발을 들어 왼쪽으로 향하느냐 오른쪽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곧
경중輕重이 그쪽으로 쏠리게 되니,
注+[通鑑要解]왼쪽으로 향하면 촉蜀이 중해지고, 오른쪽으로 향하면 한漢이 중해짐을 말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두 사람이 서로
후대厚待하고자 함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마침내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처럼 이름난
맹주盟主를 세워 미약한 나라를 돕고자 한다면
注+[釋義]欲遂立桓文 보미국輔微國: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은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어진 임금으로 일컬어졌다. 이들은 제후들을 규합하여 미약한 주周나라 왕실을 높이고 강한 초楚나라를 다스리니, 제후들이 모두 높여서 패주霸主로 삼았다. 마땅히 힘써
공업功業을 끝마쳐야 할 것이요, 셋으로 나누어 솥발처럼 서서
합종合從하고
연횡連橫注+[釋義]주註가 주周 안왕安王 15년조年條(B.C.387)에 보인다. 하고자 한다면 또한 이때에 결정하라.
注+[頭註]連衡合從 역의이시정亦宜以時定:형衡은 횡橫과 통通한다. 이때에 결정하라는 것은 합종合從과 연횡連橫 두 가지 설說을 말하여 두융竇融의 거취去就를 살피고자 한 것이다.
천하가 아직 통일되지 못하였으니, 나와 그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병탄할 나라가 아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 중에는 반드시 옛날
임효任囂가
위타尉佗에게 7
군郡을 제압하는 것을 가르쳐 준 계책
注+[釋義]진秦나라 이세황제二世皇帝 때에 남해위南海尉 임효任囂가 병들자, 조타趙佗에게 7군郡을 제압하는 계책을 가르쳐 주었다. 7군郡은 남해南海, 울림鬱林, 창오蒼梧, 합포合浦, 교지交趾, 구진九眞, 일남日南이 바로 이곳이다. 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니,
왕자王者는 땅을 나누어
분봉分封해 줌은 있고 백성을 나누어 줌은 없으니,
注+[釋義]王者……無分民:무릇 땅을 나누어 제후를 봉해 주니, 봉지封地를 받은 자가 각각 땅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주註에 “땅을 나누어 줌이 있다는 것은 봉강封疆(국경)을 세움을 이르고, 백성을 나누어 줌이 없다는 것은 마음대로 왕래해서 그 거처가 일정하지 않음을 이른다.” 하였다. 스스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注+[釋義]자적기사自適己事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순하고 맞는 일을 도모해야 함을 이른다. 뿐이다.” 하고는 인하여
두융竇融을
양주목凉州牧에 제수하였다.
새서璽書가 하서河西에 이르니, 하서河西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이르기를 “천자天子가 만리萬里 밖까지 밝게 내다본다.” 하였다.
○
장보張步는
경엄耿弇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장수로 하여금
역하歷下注+[釋義]《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역하歷下의 옛 성이 태산泰山 기슭을 베고 있어서 지극히 웅장하고, 또 제수濟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다.” 하였다. 에 주둔하게 하고, 또 군대를 나누어
축아祝阿注+[原註]축아祝阿는 주註가 주周 열왕烈王 6년조年條(B.C.370)에 보인다. 에 주둔한 다음 별도로
태산泰山의
종성鍾城에 수십 개의
진영陣營을 나열하여 대기하게 하였는데,
경엄耿弇이
황하黃河를 건너 먼저
축아祝阿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경엄耿弇은 임치성臨淄城에 이르러 적敵이 예상치 못했을 때에 출격하여 반나절 만에 함락하고, 들어가 그 성城을 점거하여 장보張步를 격노케 하였다.
장보張步의 군사 20만이 임치臨淄의 큰 성城 동쪽에 이르러 경엄耿弇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경엄耿弇이 이들을 대파大破하였다.
이때 황제가
노魯注+[釋義]지금 연주兗州의 곡부현曲阜縣이 옛날 노국魯國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옛 노성魯城은 지금 연주兗州의 허창현許昌縣 남쪽 40리 지점이니, 본래 노魯나라의 조숙읍朝宿邑이다.” 하였다. 지방에 있었는데,
경엄耿弇이
장보張步에게 공격당한다는 말을 듣고는 직접 가서 구원하려 하였다.
황제가 도착하기 전에
진준陳俊이
경엄耿弇에게 이르기를 “
극현劇縣의 오랑캐
注+[釋義]이때 장보張步가 극劇에 도읍하였으므로 그를 불러 극劇 땅의 오랑캐라 한 것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치천菑川 극현劇縣의 옛 성이 청주靑州 수광현壽光縣 남쪽 30리에 있다.” 하였다. 군대가 강성하니, 우선
영문營門을 닫고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상上이 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였다.
경엄耿弇이 말하기를 “
대가大駕가 장차 이르실 것이니, 신하들은 마땅히 소를 잡고 술을 걸러
注+[釋義]시주釃酒는 소쿠리(용수)를 가지고 술을 거름을 이른다. 백관百官을 대접하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저 오랑캐를
군부君父에게 남겨 드리고자 하는가?” 하고는
마침내 출병하여 크게 싸워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하여 다시 대파하니, 장보張步의 군사 중에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도랑에 모두 시신이 가득하였다.
경엄耿弇은
장보張步가 곤궁하여 장차 후퇴하려 할 줄을 알고는 미리
좌익左翼과
우익右翼注+[釋義]좌우익左右翼은 곁에 기병들을 배치하여 새의 날개처럼 하는 것이다. 을 설치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는데,
인정人定(오후 10시경)
注+[通鑑要解]해가 지면 모든 움직임이 그친다. 그러므로 갑야甲夜를 일러 인정人定이라고 한다. 때에
장보張步가 과연 군대를 이끌고 떠나가자,
경엄耿弇은 다시 매복했던 군대를 일으켜 크게 공격해서 추격하여
거매수鉅昧水注+[釋義]거매鉅昧는 물 이름이니, 일명 거양巨洋이다. 살펴보건대 양수洋水는 청주靑州 악안국樂安國에 있다. 가에 이르니, 8, 90리에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졌으며,
치중거輜重車 2천여 대를 거두어 얻었다.
장보張步가 극현劇縣으로 돌아간 뒤 며칠 만에 거가車駕가 임치臨淄에 이르러서 직접 군사들을 위로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크게 모였다.
황제가 경엄耿弇에게 이르기를 “옛날 한신韓信이 역하歷下를 격파하여 기반을 닦았는데, 지금 장군이 축아祝阿를 공격하여 자취를 드러냈으니, 이는 모두 제齊나라의 서쪽 지역이다.
공功이 충분히 서로 비견할 만하고, 한신韓信은 이미 항복한 제齊나라를 습격하였는데 장군은 홀로 강한 적敵을 함락시켰으니, 그 공功이 한신韓信보다 더 어렵다.
또 옛날 전횡田橫이 역생酈生(酈食其)을 삶아 죽였는데, 전횡田橫이 항복하자 고제高帝는 위위衛尉(酈食其의 아우 역상酈商)에게 명하여 원수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장보張步가 전에 복륭伏隆을 죽였으나 만약 장보張步가 귀순해 온다면 내 마땅히 대사도大司徒(伏隆의 아들 복담伏湛)에게 명하여 그 원한을 풀게 할 것이니, 또 일이 더욱 서로 비슷하다.
장군이 지난번
남양南陽에 있을 때에 이 큰 계책을 세웠는데 나는 항상 소활
注+[釋義]낙락落落은 소활疎闊과 같은 뜻이니, 일설一說에는 “말이 서로 먹혀들지 않는 것이다.” 한다.하여 부합하기 어렵다고 여겼으나 뜻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일이 끝내 이루어지는군요.” 하였다.
황제가 전진하여 극劇에 행차할 때에 경엄耿弇이 다시 장보張步를 추격하니, 장보張步가 평수平壽로 도망하였다.
소무蘇茂가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자, 황제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장보張步와 소무蘇茂에게 고하기를 “상대방을 베고 항복하면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겠다.” 하니, 장보張步가 마침내 소무蘇茂를 목 베고 경엄耿弇의 군문軍門에 나와 항복하였다.
경엄耿弇이 들어가 그
성城注+[通鑑要解]그 성은 곧 평수성平壽城이다. 을 점거하니, 병력이 아직 10여 만이고
치중거輜重車가 7천여 대였다.
모두 파하여
향리鄕里로 돌려보내고
장보張步를 봉하여
안구安丘注+[釋義]안구安丘는 북해군北海郡 안구현安丘縣이니 청주靑州에 속하였다. 侯로 삼았다.
경엄耿弇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성양城陽注+[釋義]《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제음군濟陰郡 남쪽에 태산泰山 성양城陽이 있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본래 복주濮州의 뇌택현雷澤縣이 이곳이다.” 하였다. 에 이르러서
오교五校의 잔당을 항복시키니,
제齊나라 땅이 모두 평정되었으므로 군대를 거두어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경엄耿弇은 장수가 되어서 평정한 군郡이 모두 46개이고 도륙한 성城이 300개였는데, 일찍이 전투에 패한 적이 없었다.
- 《후한서後漢書 경엄전耿弇傳, 장보전張步傳》에 나옴 -
○ 처음으로
태학太學을 일으키고
거가車駕(天子)가 궁중으로 돌아와
注+[頭註]환還은 음音이 선이니, 노魯 지방에 거둥하여 공자孔子를 제사하고 궁중으로 돌아온 것이다.태학太學에 행차해서 옛날 법식을 상고하고
예악禮樂을 닦고 밝히니, 찬란하여
문물文物이 볼 만하였다.
“황제가 막 갑옷을 입고 말에 뛰어올라서 구란寇亂을 평정하였는데 마침내 먼저 학교를 세워서 삼대三代의 거룩함을 회복하였으니,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는 근본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한漢나라가 쇠하기까지 학교가 닦여지고 잘 베풀어져
유사儒士들이 천하의 반을 차지해서 홀로
청의淸議로써
왕실王室을 유지하여 간사한 지아비와 큰 도둑들이
구정九鼎(황제의 자리)
注+[附註]우禹임금이 구주九州에서 바친 쇠를 거두어 아홉 개의 솥[九鼎]을 만들어서 구주九州의 물건을 형상하니, 바로 삼대시대三代時代에 나라를 물려주는 보배였다. 뒤에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이것을 취하니, 하나는 사수泗水로 날아 들어가고 나머지 여덟 개는 진중秦中으로 들여왔는데, 시황始皇이 천하를 겸병한 뒤로 알려진 것이 없다. 을 둘러보면서도 감히 동요하지 못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을
注+[頭註]권여權輿는 시초이니, 저울을 만들 때에는 저울대[權]부터 만들고, 수레를 만들 때에는 수레 바탕[輿]부터 만들기 때문이다. 것이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왕이 직접 학교를 시찰한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학교를 시찰한다고 말한 지가 오래되었다.
한漢나라 이래로 이것을 ‘행幸’이라 말하였는데 주자朱子가 특별히 쓰기를 ‘처음 태학太學을 일으키고 황제가 환궁還宮하여 시찰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옛 제도를 미루어 근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스승을 높이고 도道를 소중히 하는 뜻이 특별히 한 글자의 사이에서 엄격한 것이니, 또한 어찌 근본한 바가 없겠는가.”
풍이馮異가
관중關中을 다스려서 출입한 지 3년 만에
상림원上林苑이 도읍을 이루었다.
注+[頭註]이때 풍이馮異가 상림원上林苑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도읍을 이루었다는 것은 귀부歸附한 자가 많음을 말한 것이다.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순舜임금이 머무는 곳은〉 3년 만에 도읍을 이루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풍이馮異의 위엄과 권세가 지극히 중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함양왕咸陽王이라고 부릅니다.” 하였다.
황제가 이 글을 풍이馮異에게 보이자, 풍이馮異가 두려워하여 글을 올려 사례하니, 조서로 답하기를 “장군은 우리 국가에 있어서 의리는 군신간이요 은혜는 부자간과 같으니, 어찌 의심하고 혐의하여 두려워하는 뜻이 있는가?” 하였다.
○ 외효隗囂가 자신을 자랑하고 지혜가 있는 것처럼 꾸며서 언제나 자신을 서백西伯(文王)에게 견주곤 하였다.
그 장수 왕원王元이 외효隗囂를 설득하기를 “천수군天水郡은 완전하고 풍부하며 군사와 말이 가장 강하니, 제가 청컨대 한 줌의 진흙(소수의 병력)을 가지고 대왕大王을 위해서 동쪽으로 함곡관函谷關을 봉함할 것이니, 왕천하王天下를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종말에는 오히려 패자霸者가 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물고기는 깊은 못을 벗어나서는 안 되니, 신묘한 용이 형세를 잃으면 지렁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외효隗囂가 마음속으로
왕원王元의 계책을 옳게 여겨서 비록 아들을 보내어
입시入侍하게 하였으나
注+[通鑑要解]외효隗囂가 유영劉永과 팽총彭寵이 모두 이미 파멸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장자長子 순恂을 보내어 내흡來歙을 따라 대궐에 나오니, 황제가 호기교위胡騎校尉로 삼고 전강후鐫羌侯에 봉하였다. 지형의 험함을 믿고서 오로지 한 방면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 이 해에 명하여
처사處士인
태원太原의
주당周黨과
회계會稽의
엄광嚴光注+[頭註]엄광嚴光은 본래의 성姓이 장莊이니 명제明帝의 휘諱를 피하여 성姓을 고친 것이다. 엄광嚴光은 일명一名 준遵이다. 등을 불러
경사京師에 이르게 하니,
주당周黨이 들어와 뵐 적에 엎드리기만 하고
배알拜謁하지 않고는 스스로 뜻한 바를 지키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박사博士 범승范升이 아뢰기를 “삼가 보니,
태원太原의
주당周黨과
동해東海의
왕량王良과
산양山陽의
왕성王成 등이 국가의 후한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사자使者가 세 번이나 초빙한 뒤에야 비로소 수레에 오르고, 섬돌에 미쳐 조정에서 뵐 적에
주당周黨은
예禮로 자신을 굽히지 않고 엎드리기만 하고
배알拜謁하지 않았으며, 교만하고 사나워
注+[釋義]언건偃蹇은 교만한 모양이다. 한悍은 사나움이다. 동시에 함께 가버렸습니다.
주당周黨 등은
문文은
의리義理를 부연하지 못하고
무武는 군주를 위하여 죽지 못하면서
注+[釋義]그 무용武勇이 군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절개를 다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화려한 명예를 낚아 취하여 거의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랐으니,
신은 원컨대 그들과
운대雲臺의 아래에 앉아서
注+[釋義]여與는 예預로 읽는다. 운대雲臺는 남궁南宮에 있으니, 명제明帝 영평永平 3년에 건무建武 연간의 명신名臣들과 여러 장수들의 초상을 여기에 그렸다. 국가를 도모하는 방도를
고시考試해서 신의 말대로 저들이 형편없는 무리가 아니면 신이 허망한 죄를 받을 것이요,
만일 제 말대로 저들이 감히 헛된 이름을 사사로이 도둑질하여 상上에게 과시하고 높아지기를 구한 것이라면 저들은 모두 크게 불경不敬한 것입니다.” 하였다.
글을 아뢰자 조서를 내리기를 “예로부터 명왕明王과 성주聖主는 반드시 빈객이 되지 않는 선비가 있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注+[附註]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이니, 이夷와 제齊는 시호이다. 성姓은 묵씨黙氏요 혹은 묵씨墨氏(墨胎氏)라고 한다. 고죽국孤竹國은 바로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봉한 것으로 고죽군孤竹君은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아버지이니, 이름은 초初이고 자字는 자조子朝이다. 백이伯夷는 이름이 원元이니 혹은 윤允이라 하고 자字가 공신公信이며, 숙제叔齊는 이름이 치致이니 혹은 지智라 하고 자字가 공달公達이다. 백伯과 숙叔은 소장少長(연소한 자와 연장자)의 자字이다. 는
주周나라의 녹을 먹지 않았고
태원太原의
주당周黨은
짐朕의 녹을 받지 않았으니, 또한 각기 뜻이 있는 것이다.
그에게 비단 40필을 하사하여 돌려보내라.” 하였다.
황제가 젊었을 때
엄광嚴光과 함께
유학遊學하였는데, 즉위하게 되자
엄광嚴光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제齊나라에서 찾아내어
注+[釋義]물색物色은 그 생김새와 얼굴 모습을 그려서 찾아 구한 것이다. 여러 번 부르니,
엄광嚴光이 비로소 왔다.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임명하였으나 받으려 하지 않고 떠나가
부춘산富春山注+[釋義]《신안지新安志》에 “한漢나라 부춘현富春縣 서쪽에 부춘산富春山이 있으니, 뒤에 부양富陽으로 이름을 고쳤다.”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엄광전嚴光傳〉을 살펴보면 “부춘산富春山에서 밭을 갈았다.” 하였는데, 《도경圖經》에 이 산山의 이름이 실려 있지 않고 다만 이르기를 “지금 엄릉산嚴陵山이라고 이름한 것이 그가 밭 갈았던 곳이다.” 하였다. 엄광嚴光은 부양富陽 사람이고 부춘산富春山에서 밭을 갈았으니, 그렇다면 엄릉산嚴陵山이 바로 부춘산富春山임이 의심할 나위가 없다. 가운데에서 밭 갈고 낚시질하여
천수天壽를 누리고 집에서 죽었다.
왕량王良은 뒤에 패군태수沛郡太守와 대사도大司徒, 사직司直을 지냈는데, 지위에 있을 때에 공손하고 검소하여 삼베 이불을 덮고 질그릇을 사용하였으며 처자妻子들을 관사官舍에 들이지 않았다.
뒤에 병 때문에 돌아갔는데, 같은 해에 다시 부름을 받았다.
왕량王良이
상경차上京次 형양滎陽에 이르러 병이 심해져서 길에 오를 수가 없으므로
注+[釋義]임任은 음音이 임으로 감당한다는 뜻이니, 길에 오름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친구를 방문하였는데, 친구가 만나려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충성스러운 말과 뛰어난 계책이 있지 않으면서 높은 지위를 취하고서 어찌 그리도 자주 왕래하여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는가?” 하고 마침내 거절하니,
왕량王良이 부끄러워하여 이후로는 연이어 불러도 응하지 않고 집에서 죽었다.
[史略 사평史評]高平范氏(范仲淹)가 말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아니었다면 자릉子陵의 높은 절개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요, 자릉子陵이 아니었다면 광무제光武帝의 큰 도량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엄광嚴光은 자字가 자릉子陵이니, 젊어서 광무제光武帝와 함께 유학遊學하였는데, 광무제光武帝가 즉위卽位하자 엄광嚴光이 마침내 성명姓名을 바꾸고 몸을 숨겨 나타나지 않았다.
황제는 그의 어짊을 생각하여 마침내 물색해서 찾게 하였는데, 뒤에 제齊나라에서 상언上言하기를 ‘한 남자가 양가죽 갖옷을 입고 못 가운데에서 낚시질을 한다.’ 하였다.
황제는 그가
엄광嚴光인가 의심하여 마침내
안거安車와
현훈玄纁注+[頭註]훈纁은 옅은 붉은색이다. 현훈玄纁은 천지天地의 정색正色이니 폐백幣帛의 색깔이다. 의 폐백을 갖추어서
사자使者를 보내 초빙하였는데, 세 번 갔다 돌아온 뒤에야
엄광嚴光이 이르렀다.
거가車駕가 당일로 그가 머무는 관사館舍에 행차하니, 엄광嚴光이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황제는 그가 누워 있는 곳으로 나아가 엄광嚴光의 배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아, 자릉子陵아.
서로 도와 정치를 할 수 없는가?’ 하니, 엄광嚴光이 마침내 눈을 크게 뜨고 한동안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말하기를 ‘옛날에 당요唐堯가 덕德을 드러냄에 소보巢父가 귀를 씻었으니, 선비는 본래 뜻이 있는 법입니다.
어찌 내버려 두지 않고 서로 핍박함에 이르신단 말입니까.’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자릉子陵아, 내가 끝내 너를 굴복시킬 수 없단 말인가?’ 하고는 이에 수레를 타고 탄식하며 돌아갔다.
뒤에 다시 엄광嚴光을 불러 궐 안에 들어오게 해서 옛날 일을 논하고 말하여 여러 날 동안 상대하고, 인하여 함께 누워 잘 적에 엄광嚴光이 발을 황제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 날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객성客星이 어좌성御座星를 침범하여 몹시 급박하였습니다.’ 하니,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짐朕이 옛 친구인 엄자릉嚴子陵과 함께 잤기 때문이다.’ 하였다.
엄광嚴光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부춘산富春山에서 밭을 가니, 후세 사람들이 그가 낚시질하던 곳을 이름하여 엄릉뢰嚴陵瀨라 하였다.”
치당致堂(胡寅)의 《독사관견讀史管見》에 말하였다.
고평高平의
범중엄范仲淹이 논하기를 ‘
광무제光武帝는 이때에
둔괘屯卦의
초구효初九爻를 당하여
양강陽剛이 막 형통하였는데 귀한 사람으로서 천한 사람에게 낮추었고,
注+[頭註]둔괘屯卦는 진震이 아래에 있고 감坎이 위에 있다. 어려운 때를 당하여 양陽으로 음陰에게 낮추어 백성들이 귀의歸依하는 바가 되었으니, 왕후王侯의 상象이다.
자릉子陵은 이때에
고괘蠱卦의
상구효上九爻를 당하여 여러 사람들이 막 훌륭한 일을 하였는데 홀로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았으니,
注+[頭註]고괘蠱卦는 손巽이 아래에 있고 간艮이 위에 있다. 고蠱는 일이니, 상구上九는 강명剛明한 재질才質로 응원應援이 없고 일의 밖에 처하여 일하는 바가 없는 자리이니, 이는 현인賢人과 군자君子가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 고결함으로 스스로 지켜서 세상의 일에 얽매이지 않는 자이다.
광무제光武帝가 아니었다면 자릉子陵의 높은 절개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자릉子陵이 아니었다면 광무제光武帝의 큰 도량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선군자先君子(先親, 호안국胡安國을 가리킴)께서 말씀하기를 ‘창업하여 전통을 드리우고 전열前烈을 빛내는 군주가 신하를 대우할 적에 그 예禮가 비록 똑같으나
위엄 있고 엄숙하고 삼감을 항상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는 조아爪牙의 용사에게 베풀어서 그 교만하고 사나워 부리기 어려운 기운을 꺾었고,
유순하고 겸손하고 굽힘을 항상 임학林壑에 물러가 은둔하는 사람에게 베풀어서 청렴하고 안정하여 바람이 없는 절개를 장려하였다.
그러므로 능히 인재人才를 마음대로 부리고 풍속을 바로잡은 것이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전횡田橫을 해도海島의 가운데에서 불렀으나 종신토록 사호四皓를 데려오지 못하였고, 세종世宗(武帝)이 걸터앉아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를 만나 보았으나 관冠을 쓰지 않고서는 급암汲黯을 만나 보지 못하였고, 광무제光武帝가 공신功臣들을 제어할 때에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으나 처사處士 엄광嚴光 등을 조서詔書로 불러서 혹은 뜰에서 황제를 뵐 때에 엎드리기만 하고 배알하지 않았으며 혹은 사자使者가 두 번 빙문聘問하였으나 수레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박사博士 범승范升이 윗사람에게 과시하고 높은 것을 구한다는 아룀이 있었으나 황제는 또한 그 말을 옳게 여기지 않고 각각 뜻한 바를 따르게 하였다.
세 군주들은 안으로 사해四海를 평정하고 밖으로 여러 오랑캐들을 두렵게 하였으니, 영웅호걸의 군주라고 이를 만하였다.
그러나
고조高祖의 위엄이 사나운
진秦나라와 강한
초楚나라에 행해졌으나
사호四皓에게는 행해지지 못하였고,
세종世宗의 위엄이
흉노匈奴와
서역西域에 행해졌으나
급암汲黯에게는 행해지지 못하였고,
광무제光武帝의 위엄이
왕심王尋‧
왕읍王邑‧
왕랑王郞注+[頭註]왕심王尋과 왕읍王邑에 대한 내용은 모두 15권卷 계미년조癸未年條(23 경시원년更始元年)에 보인다. 에게 행해졌으나
엄광嚴光과
주당周黨에게 행해지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위엄은 마땅히 가해야 할 상대가 있고 세력은 마땅히 굽혀야 할 상대가 있으니, 마땅히 가해야 할 상대에게 가하여 위엄을 세우면 강해지고, 마땅히 굽혀야 할 상대에게 굽혀서 권세를 잊으면 창성해진다.
이 도道를 반대로 하는 자는 난망亂亡의 화禍를 면하기 어렵다.’ 하였다.”
“엄광嚴光의 절개가 백세百世의 위에서 떨치니 아래(뒤)에서 듣는 자들이 흥기하여 보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마침내 주당周黨과 왕량王良과 함께 불렀으니, 범승范升이 주당周黨을 훼방한 것과 친구가 왕량王良을 꾸짖은 것을 보면 이들 두 사람은 엄광嚴光의 비교 대상이 아님이 분명한 바, 엄광嚴光이 더욱 굽히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또 엄광嚴光은 황제와 손을 잡는 친구였는데 황제가 수서手書(親書)로써 초치하지 않고 마침내 조서詔書로써 불러 종사함은 어째서인가?
일찍이 《
후한서後漢書》 〈
엄광전嚴光傳〉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후패侯霸를 기롱한 말
注+[附註]《후한서後漢書》 〈엄광전嚴光傳〉에 엄광嚴光이 세 번 초빙한 뒤에 이르니, 사도司徒 후패侯霸는 엄광嚴光과 평소 친구였다. 사자를 보내어 편지를 올리고, 사람을 시켜 엄광嚴光에게 이르기를 “후공侯公은 선생이 왔다는 말씀을 듣고 구구히 즉시 찾아가고자 하나 맡은 사무에 급하여 이 때문에 오실 수 없습니다.” 하니, 엄광嚴光이 마침내 편지를 던져 버리고 그에게 입으로 전하기를 “군방君房이 지위가 정족鼎足(정승)에 이르렀으니 매우 좋다. 인仁을 품고 의義로 도우면 천하가 기뻐할 것이요, 아첨하여 군주의 뜻에 순종하면 허리와 목이 끊어질 것이다.” 하였다. 후패侯霸가 이 편지를 받고는 봉함하여 아뢰자,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미친 종의 옛 태도이다.” 하였다. 군방君房은 후패侯霸의 자字이다. 을 보면
엄광嚴光은 진실로 녹록한 은자가 아니다.
더구나 엄광嚴光은 젊어서부터 높은 명망이 있었고 황제가 이미 그와 함께 배웠으니, 반드시 그의 재주와 지혜가 과연 보통 사람들보다 크게 뛰어남을 알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처음에 황제皇帝가 그의 어짊을 생각하였고 나중에 황제皇帝가 그가 떠나는 것을 서글퍼하고 애석히 여긴 것이니, 그때 만일 황제가 엄광嚴光에게 관작으로써 굽히지 말고 오직 친구로만 대우해서 조용히 계책을 물었더라면 반드시 다스림을 일으키고 교화를 이루는 방법이 있어서 중흥中興에 보탬이 되었을 터인데 황제가 이에 미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살펴보면 중원中元 2년 정사년에 황제의 성수聖壽가 62세였으니, 그렇다면 올해 기축년은 34세이다.
엄광嚴光이 건무建武 17년에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은둔한 뜻을 굽히지 않다가 나이 80세에 죽었는데, 황제는 오히려 군현郡縣에 명해서 돈과 곡식을 하사하게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엄광嚴光이 황제와 함께 배울 때를 당하여 진실로 이미 나이가 황제보다 많았을 것이다.
황제가 보위寶位에 군림해서 엄광嚴光을 불러 궐하闕下에 이르렀을 때에는 엄광嚴光이 이때 또한 나이가 이순耳順(60세)을 넘었다.
나이가 많고 덕德이 높은 사람을 황제가 손님과 스승의 예禮로 대우하지 못하고 도리어 신하로 삼아 등용하고자 하였으니, 엄광嚴光이 응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후세에 논하는 자들은 다만 엄광嚴光이 굽히지 않은 것이 높은 줄만 알고 엄광嚴光이 굽히지 않은 까닭이 그 뜻이 진실로 다른 데에 있는 줄을 알지 못하여, 다만 그 지식과 도량이 평소 높았다고 하니, 이 뜻이 모나지 않고 혼연渾然하여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천하와 후세가 측량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자세히 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