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
에 劉昆
이 爲江陵令
이러니 縣有火災
어늘 昆
이 向火叩頭
하니 火尋滅
하고 後爲弘農太守
러니 라
帝聞而異之
하야 徵昆爲光祿勳
注+[釋義]百官表에 郞中令은 秦官이니 漢武改名光祿勳하니라하고
帝問昆曰 前在江陵에 反風滅火하고 後守弘農에 虎北渡河하니 行何德政而致是事오 對曰 偶然耳니이다
左右皆笑
하니 帝嘆曰 此
는 長者之言也
라하고 顧命書諸策
注+[釋義]回視曰顧요 竹簡曰策이니 回顧史官하야 令寫入史策이라하다
○ 西域諸國侍子 久留敦煌
注+[附註]都護不出而侍子皆還하니 大憂하야 乃與敦煌太守謀하야 留侍子하야 以示莎車하고 言 侍子見留하니 都護尋至라하야 冀且息其兵變이라한대 遵以聞하니 帝許之하니라하니 皆愁思亡歸
라
莎車王賢
이 知都護不至
하고 擊破鄯善
하고 攻殺
玆
注+[釋義]西域小國이니 在大宛國西天竺國東이라王
하니 鄯善王 安
이 上書
하야 願復遣子入侍
하고 更請都護
호되 都護不出
이면 誠迫於匈奴
라하야늘
帝報曰 今使者大兵
이 未能得出
이니 如諸國
이 이면 東西南北이 自在注+[頭註]任其所從이라也
니라
孝武之世
에 圖制匈奴
할새 患其兼從
注+[釋義]兼은 幷也요 從은 親也니 謂與西域諸國으로 兼幷合從也라西國
하고 結黨南羌
하야
乃表河曲, 列四郡
注+[釋義]河西九曲은 本西戎地니 在河關縣西라 公羊傳云 河千里而一曲이라하니 按曲은 言其隈地也라 四郡은 謂酒泉, 武威, 張掖, 敦煌이라하고 開玉門, 通西域
하야 以斷匈奴右臂
하고 隔絶南羌月
하니 單于失援
이라
由是遠遁
하야 而幕南無王庭
注+[釋義]單于無城郭하야 其穹廬前地 若庭이라 故云王庭也라이라
遭値文景玄黙
하야 養民五世
注+[頭註]五世는 高惠及呂后文景이라에 財力有餘
하고 士馬彊盛
이라
故
로 能睹犀布瑇瑁則建珠厓七郡
하고 感蒟醬竹杖則開牂牁越
하고 聞天馬葡萄則通大宛安息
이라
於是
에 開苑囿
注+[頭註]古謂之囿요 漢謂之苑이라, 廣宮室
하고 盛帷帳, 美服玩
하며 設酒池肉林
하야 以饗四夷之客
하고 作魚龍角抵(觝)之戲
注+[附註]魚龍者는 含利之獸니 先戲於庭이라가 乃入殿前激水하야 化成比目魚하고 躍水作霧하야 化黃龍하야 出水戲於庭이라 西京賦注에 角觝戲者는 兩兩相對하야 角力技藝射御라 故名角觝라 含利는 獸名이니 以其吐金이라 故名이라하야 以觀視之
하며 及賂遺贈送
을 萬里相奉
하야 師旅之費
를 不可勝計
라
至於用度不足하야 乃榷酒酤, 筦(管)鹽鐵하고 鑄白金, 造皮幣하며 算至車船하고 租及六畜하야 民力屈, 財用竭하고 因之以凶年하야 寇盜竝起하야 道路不通하니 直指之使가 衣繡杖斧하고 斷斬於郡國然後에 勝之라
是以로 末年에 遂棄輪臺之地하고 而下哀痛之詔하니 豈非仁聖之所悔哉아
建武以來
로 西域
이 思漢威德
하고 咸樂內屬
하야 數遣使置質于漢
하고 願請都護
어늘 聖上
이 遠覽古今
하고 因時之宜
하야 辭而未許
하니 雖大禹之序西戎
注+[釋義]書禹貢에 西戎卽敍라한대 註云 西方戎落이 皆就次序하니 美禹之功이 及戎狄也라하니라과 周公之讓白雉
注+[釋義]越裳氏獻白雉曰 天之無烈風淫雨하고 海不揚波三年矣니 意者컨대 中國有聖人乎인저 盍往朝之리오한대 周公謙讓(之)[而]歸之成王하니 稱先王神致라하야 薦于宗廟하니라와 太宗之卻(却)走馬
注+[釋義]太宗은 文帝也라 時有獻千里馬者어늘 帝曰 鸞旗在前하고 屬車在後하니 朕乘千里馬하고 獨先安之리오하니라라도 義兼之矣
니라
처음에 유곤劉昆이 강릉령江陵令이 되었는데 현縣에 화재火災가 있자, 유곤劉昆이 불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니 불이 얼마 후 꺼졌으며, 뒤에 홍농태수弘農太守가 되었는데 호랑이가 모두 새끼를 업고 하수河水(黃河)를 건너갔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유곤劉昆을 불러서
광록훈光祿勳注+[釋義]《한서漢書》 〈백관표百官表〉에 “낭중령郎中令은 진秦나라 관명이니, 한무제漢武帝가 광록훈光祿勳으로 이름을 고쳤다.” 하였다. 을 삼았다.
황제가 유곤劉昆에게 묻기를 “지난번 강릉江陵에 있을 때에는 바람이 거꾸로(반대방향으로) 불게 하여 불을 끄고, 뒤에 홍농弘農을 맡았을 때에는 호랑이가 북쪽으로 하수河水를 건너갔으니, 어떤 덕정德政을 행하였기에 이러한 일을 이루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연일 뿐입니다.” 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웃으니, 황제가 감탄하기를 “이는
장자長者의 말이다.” 하고,
사관史官을 돌아보며
사책史策에 쓰도록 명하였다.
注+[釋義]돌아보는 것을 고顧라 하고 죽간竹簡을 책策이라 하니, 사관史官을 돌아보고서 사책史策에 써넣게 한 것이다.
- 《후한서後漢書 유림전儒林傳 유곤劉昆》에 나옴 -
○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에서 보낸
시자侍子들이 오랫동안
돈황敦煌에 머무르니,
注+[附註]이보다 앞서 한漢나라 도호都護가 나오지 않고 시자侍子가 모두 돌아오니,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들이 크게 걱정하여 마침내 돈황태수敦煌太守와 상의하고는 시자侍子를 머물게 하여 사차왕莎車王에게 보이고, “시자侍子가 머물고 있으니 도호都護가 얼마 후에 이른다고 말하여 사차왕莎車王의 공격을 우선 중지시키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돈황태수敦煌太守 왕준王遵이 아뢰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모두 근심하여 도망쳐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다.
사차왕莎車王 현賢은
한漢나라
도호都護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는
선선국鄯善國을 격파하고
구자국龜玆國注+[釋義]구자龜玆는 서역西域의 작은 나라이니, 대완국大宛國의 서쪽 천축국天竺國의 동쪽에 있었다. 의
왕王을 쳐서 죽이니,
선선왕鄯善王 안安이 글을 올려 다시 아들을 보내어 입시하기를 원하고, 다시
도호都護가 와 주기를 청하되
도호都護가 나오지 않으면 진실로 흉노에게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황제가 답서를 보내기를 “지금
사자使者의
대병大兵이 나갈 수가 없으니, 만일 여러 나라가 힘이 마음을 따르지 못한다면 동서남북 따르고 싶은 대로
注+[頭註]자재自在는 따르고 싶은 대로 따르는 것이다. 하라.” 하였다.
이에 선선鄯善과 거사車師가 다시 흉노匈奴에 붙었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 찬贊에 말하였다.
“
효무제孝武帝 때에
흉노匈奴를 제어할 것을 도모할 때에
흉노匈奴가
서역西域을 겸병하여
합종合從注+[釋義]겸兼은 아우름이요 종從은 친함이니,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와 함께 겸병兼幷하고 합종合從함을 말한 것이다. 하고
남강南羌과
당黨을 맺는 것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하서河西의
구곡九曲을 표하여 4
군郡을 나열하고
注+[釋義]하서河西의 구곡九曲은 본래 서융西戎 땅이니, 하관현河關縣의 서쪽에 있었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이르기를 “황하黃河는 천 리에 한 번 굽어진다.’ 하였으니, 살펴보건대 곡曲은 그 굽이진 곳을 말한 것이다. 사군四郡은 주천군酒泉郡‧무위군武威郡‧장액군張掖郡‧돈황군敦煌郡을 이른다. 옥문관玉門關을 열어
서역西域을 통하여,
흉노匈奴의 오른쪽 팔을 자르고
남강南羌과
월지月氏를 두절시키니,
선우單于가 원조를 잃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선우單于가 멀리 도망하여
사막沙漠의 남쪽에
왕정王庭注+[釋義]선우單于는 성곽城郭이 없어서 높은 궁려穹廬 앞의 땅이 뜰과 같았으므로 이를 왕정王庭이라고 이른 것이다. 이 없게 되었다.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현묵玄黙을 만나서 백성을 기른 지 5대
注+[頭註]5세世는 고제高帝, 혜제惠帝 및 여후呂后, 문제文帝, 경제景帝이다.에 재력이 충분하고 군사와 말이 강성하였다.
그러므로 서포犀布와 대모瑇瑁를 보면 주애珠厓의 7군郡을 세우고, 구장蒟醬과 죽장竹杖에 감동되면 장가군牂牁郡과 월수군越嶲郡을 개통하고 천마天馬와 포도葡萄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대완군大宛郡과 안식군安息郡을 개통하였다.
이로부터 먼 지방의 색다른 물건이 사면에서 이르렀다.
이에
원유苑囿注+[頭註]옛날에는 유囿라 하였고, 한漢나라는 원苑이라 하였다. 를 열고
궁실宮室을 넓히고
유장帷帳을 성대하게 하고 복식과 노리개를 아름답게 하며,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어서 사방 오랑캐의 손님에게
연향宴饗을 베풀고,
어룡魚龍이 싸우는 놀이
注+[附註]어룡魚龍은 함리含利라는 짐승이니, 먼저는 뜰에서 놀다가 마침내 궁전 앞의 세차게 흐르는 물속으로 들어가서 비목어比目魚로 변하고, 물에서 뛰놀며 안개를 일으켜서 황룡黃龍으로 변하여, 마침내 물에서 나와 궁정宮庭에서 놀았다.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 주注에 “각저희角觝戲는 둘이 상대하여 기예와 활쏘기와 말타기를 겨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저角觝라고 이름한다.” 하였다. 함리含利는 짐승의 이름이니, 금金을 토해내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를 만들어서 보여 주고 구경시키며, 뇌물과 선물의
증송贈送을 만 리에 서로 받들어서 군대의 비용을 이루 계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용도用度가 부족함에 이르자 마침내 술의 판매를 독점하고 염철鹽鐵을 관장하며 백금白金을 주조하고 피폐皮幣를 만들며 세금이 배와 수레에까지 미치고 조세가 육축六畜에까지 미쳐서 백성의 힘이 꺾이고 재용이 고갈되었으며 인하여 흉년이 들어서 도둑들이 함께 일어나 도로가 통하지 못하니, 직지사자直指使者(暗行御史)가 수놓은 옷을 입고 도끼를 잡고서 군국郡國에서 베고 끊은 뒤에야 이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말년에 마침내 윤대輪臺의 땅을 버리고 애통해하는 조서詔書를 내린 것이니, 어찌 인성仁聖의 후회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건무建武 이래로
서역西域이
한漢나라의 위엄과
덕德을 사모하고 모두
내속內屬하는 것을 좋아해서 여러 번
사자使者를 보내어 인질을
한漢나라에 두고
도호都護를 보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성상聖上이 고금을 멀리 내다보고 때의 마땅함을 따라서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니, 비록
대우大禹가
서융西戎을 차례로 펴지게 하고
注+[釋義]《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서융西戎이 차례로 펴짐에 나아갔다.” 하였는데, 주註에 “서방西方의 오랑캐 부락이 모두 차례로 펴짐에 나아간 것이니, 우禹임금의 공이 융적戎狄에게까지 미침을 찬미한 것이다.” 하였다. 주공周公이 흰 꿩을 사양하고
注+[釋義]월상씨越裳氏가 흰 꿩을 바치며 말하기를 “하늘에 세찬 바람과 지나친 비가 없고 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은 지가 3년이니, 생각건대 중국中國에 성인聖人이 있을 것이다. 어찌 가서 조회하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주공周公이 겸양하여 이것을 성왕成王에게 돌리니, 선왕先王의 신神이 이룬 것이라고 칭하여 종묘宗廟에 제사를 올렸다.태종太宗(文帝)이 잘 달리는 말을 물리친
注+[釋義]태종太宗은 문제文帝이다. 당시에 천리마千里馬를 올리는 자가 있었는데, 황제가 물리치며 말하기를 “난기鸞旗가 앞에 있고 촉거屬車(뒤따라오는 수레)가 뒤에 있으니, 짐朕이 천리마千里馬를 타고 홀로 먼저 어디를 가겠는가.” 하였다. 것이라도 〈
광무제光武帝는〉 이러한 뜻을 모두 겸하였다.”
- 앞의 《후한서後漢書 서역전西域傳》 찬贊에 나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