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申]〈魏咸熙元年
이요 吳主
元興元年
이니 凡二國
이라〉
正月
에 魏詔以檻車
注+[頭註]車上에 着板四周하고 載囚其中이라로 徵艾赴京師
하다
會所憚
은 惟艾
러니 艾父子
注+[頭註]父子는 惠及忠也라旣禽
에 會獨統大衆
하니 威震西土
라 遂
決意謀反하다
丁丑
에 矯太后遺詔
注+[頭註]矯는 托也라하야 使會起兵
하야 廢司馬昭
하다
姜維欲使會로 盡殺北來諸將하고 已因殺會하고 盡坑魏兵하야 復立故漢帝러니 會衆兵이 作亂하야 格斬姜維하고 爭前殺會하니 鄧艾本營將士 追出艾於檻車하야 迎還이어늘
夫恃强凌弱하야 奪人土地하야 使不得有其臣民하고 毁人宗廟하야 使不得奉其祭祀는 非至不仁者면 莫之忍爲라
劉禪庸愚하야 不能死國하고 貪生苟免하니 固可深責이어니와
鍾鄧은 臣事弑逆之人하야 呑滅蜀漢하야 以成晉簒하니 有功於昭 大矣나 其如漢祀何哉오
思昔昭烈君臣
이 間關隴蜀
注+[頭註]間關은 猶艱難이라하야 仗義討賊
이러니 不幸天不祚漢
하야 逆賊逋誅
라
其子承襲一方
하야 어늘 鍾鄧
이 設謀動衆
하야 戕民鋒鏑之下
하고 自謂不世之功
이러니
未及受賞에 皆赤其族하니 然後에 知天道昭昭하야 特假手誅夷하야 以償滅漢之罪爾라
西漢은 自高祖而下로 有文有武有宣이요 東漢은 自光武以下로 有明, 章이요 其餘는 無稱焉이라
反覆兩漢之世컨대 大抵仁義公恕하고 役簡刑淸하야 如七制之盛者는 兩漢之所以興也요 母后擅權하고 戚宦用事하야 如七制以下者는 兩漢之所以亡也라
迨曹氏簒漢而爲魏에 昭烈이 以帝裔로 卽位于蜀하고 孫權이 亦自王於吳하야 而天下遂分於三矣라
雖以昭烈孔明으로 戮力興復이나 而死灰難燃하야 不能復振하니 譬於人家컨대 家道陵夷하고 生業已盡하야 豪奴悍僕이 或潛據於內하고 或竊處於外하고 而其家之故子遺孫이 伶仃漂泊하야 其氣奄奄殆盡이어늘 而方區區在外하야 收拾寸土하야 以爲興復計하니 亦已難矣로다
由是論之
컨대 民心思漢
엔 以
而有餘
하고 民心去漢
엔 以孔明留之而不可
하니 吁可嘆哉
인저
○ 吳主休殂
하니 皓卽皇帝位
注+[頭註]皓는 權之孫이요 和之子也라하다
갑신(264) - 위魏나라 함희咸熙 원년元年이고, 오주吳主 손호孫皓 원흥元興 원년元年이니, 모두 두 나라이다. -
정월에
위魏나라가 명령을 내려
함거檻車注+[頭註]함거檻車는 수레 위에 판자를 붙여 사방을 에워싸고 그 안에 죄수를 태운다. 로
등애鄧艾를 불러
경사京師로 오게 하였다.
종회鍾會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등애鄧艾뿐이었는데,
등애鄧艾 부자父子注+[頭註]등애鄧艾 부자父子는 등애鄧艾와 그의 아들 등혜鄧惠와 등충鄧忠이다. 가 사로잡힌 뒤에
종회鍾會가 홀로
대군大軍을 통솔하여 위엄이 서쪽 지방에 진동하니, 마침내 모반하기로 결심하였다.
정축일(16일)에
태후太后의
유조遺詔를 사칭
注+[頭註]교矯는 칭탁함이다. 하여 ‘
종회鍾會로 하여금 군대를 일으켜
사마소司馬昭를 폐하게 한다.’ 하였다.
강유姜維가 종회鍾會로 하여금 북쪽에서 온 여러 장수를 다 죽이게 한 다음, 스스로 이 기회를 틈타 종회鍾會를 죽이고 위魏나라 군사들을 다 묻어 죽이고서 다시 옛 한漢나라 황제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종회鍾會의 병사들이 난을 일으켜 강유姜維를 쳐 죽이고 앞 다투어 종회鍾會를 죽이니, 등애鄧艾 본영本營의 장병들이 쫓아가 함거檻車에서 등애鄧艾를 꺼내어 맞이하여 돌아왔다.
위관衛瓘이 군대를 보내어 등애鄧艾를 습격해서 등애鄧艾 부자父子를 목 베었다.
“강한 힘을 믿고 약한 자를 능멸하여, 남의 토지를 빼앗아서 신하와 백성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고 남의 종묘宗廟를 헐어서 제사를 받들지 못하게 함은, 지극히 불인不仁한 자가 아니면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선劉禪은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나라를 위해 죽지 못하고 살기를 꾀하여 구차히 죽음을 면하였으니, 진실로 깊이 책망할 만하다.
그러나 종회鍾會와 등애鄧艾는 시역弑逆한 사람을 신하가 되어 섬겨서 촉한蜀漢을 병탄倂呑하여 멸망시켜 진晉나라의 찬탈을 도와 이루었으니, 사마소司馬昭에게 공功을 세움이 크지만 한漢나라 제사를 어찌한단 말인고.
생각건대 옛날
소열제昭烈帝는 군주와 신하가
농촉隴蜀에서
간관間關(어려움)
注+[頭註]간관間關은 간난艱難과 같다. 을 겪으면서
대의大義를 따라 역적을 토벌하였는데, 불행히도 하늘이
한漢나라를 도와주지 않아 역적이 죽음을 면하였다.
그 아들 유선劉禪이 한쪽 지방에서 왕위를 물려받아 적제자赤帝子의 제사를 조금 이어 갔는데, 종회鍾會와 등애鄧艾가 꾀를 내고 병력을 동원하여 칼날 아래에서 백성들을 해치고 스스로 좀처럼 보기 드문 훌륭한 공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미처 상을 받기도 전에 일족一族이 다 죽었으니, 그런 뒤에야 천도天道가 밝아서 다만 딴 사람의 손을 빌려 그들을 죽여 촉한蜀漢을 멸망시킨 죄를 갚았음을 알 수 있다.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멸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대를 이어 주자, 천하의 민심民心이 돌아왔다.’ 하였으니, 후세에 남의 집안과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자들은 이것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위魏나라가 옛 한漢나라 황제인 유선劉禪을 봉하여 안악공安樂公으로 삼았다.
“서한西漢은 고조高祖 이하로 문제文帝‧무제武帝‧선제宣帝가 있었고, 동한東漢은 광무제光武帝 이하로 명제明帝‧장제章帝가 있었으며, 그 나머지는 칭할 만한 자가 없다.
하분河汾의 왕통王通이 칠제七制로 결단하였으니, 참으로 옳다.
양한兩漢의 세대를 반복해 보건대 대체로 인의仁義와 공서公恕를 행하며 부역이 간략하고 형벌이 맑아져서 칠제七制의 전성기와 같았던 것은 양한兩漢이 흥성한 이유이고, 모후母后가 권력을 독단하고 외척과 환관들이 용사用事하여 칠제七制 이후와 같았던 것은 양한兩漢이 멸망한 이유이다.
조씨曹氏가 한漢나라를 찬탈하여 위魏나라가 되자 소열제昭烈帝는 황제의 후손으로 촉蜀에서 즉위하였고, 손권孫權 또한 오吳나라에서 스스로 왕 노릇하여 천하가 마침내 셋으로 나뉘었다.
비록 소열제昭烈帝와 제갈공명諸葛孔明으로서 힘을 다하여 흥복興復하였으나 꺼진 재를 다시 타오르게 하기 어려워 다시 떨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을 집안에 비유하면 가도家道가 침체되고 생업生業이 이미 다하여 호방하고 사나운 노복奴僕들이 혹은 안에서 몰래 점거하고 혹은 밖에 몰래 숨어 있고, 그 집안의 옛 주인의 아들과 남은 손자들이 외롭게 표박漂泊하여 간신히 숨만 붙어 있어 거의 다 망하게 되었는데, 구구하게 밖에서 한 치 되는 땅을 수습하여 흥복興復할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으니, 또한 너무나도 어렵다.
이로 말미암아 논해 보건대 민심이 한漢나라(西漢)를 그리워할 때에는 왕랑王郞이 유씨劉氏라고 사칭하기만 해도 충분했고, 민심이 한漢나라(蜀漢)를 떠난 뒤에는 공명孔明이 부지하려고 해도 되지 않았으니, 아! 탄식할 만하다.”
○
오주吳主 손휴孫休가 죽으니
손호孫皓注+[頭註]손호孫皓는 손권孫權의 손자이고 손화孫和의 아들이다. 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 진왕晉王이 사마염司馬炎을 세워 세자世子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