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丑]建元元年
注+[原註]自古帝王이 未有年號러니 始起於此하니라이라
〈本紀云 丞相奏호되 所擧賢良이 或治申, 商, 韓非, 蘇, 張之言하야 亂國政하니 請皆罷라하야늘 奏可라하다〉
自非太亡(無)道之世면 天이 盡欲扶持全安之하나니 事在彊勉而已라
彊勉學問이면 則聞見博而智益明하고 彊勉行道면 則德日起而大有功이니이다
道者는 所繇(由)適於治之路也니 仁義禮樂이 皆其具也라
故로 聖王已沒이로되 而子孫長久하야 安寧數百歲하니 此는 皆禮樂敎化之功也니이다
夫周道衰於幽, 厲하니 非道亡也요 幽, 厲不繇也라
至於宣王하야 思昔先王之德하고 興滯補敝하야 明文, 武之功業하야 周道粲然復興하니 此는 夙夜不懈行善之所致也니이다
爲人君者 正心以正朝廷하고 正朝廷以正百官하고 正百官以正萬民하고 正萬民以正四方이니 四方正이면 遠近이 莫敢不壹於正하야 而亡(無)有邪氣奸其間者라
是以로 陰陽調而風雨時하고 群生和而萬民殖하야 諸福之物과 可致之祥이 莫不畢至하야 而王道終矣니이다
今陛下貴爲天子하시고 富有四海하사 居得致之位하고 操可致之勢하시고 又有能致之資하사 行高而恩厚하고 知(智)明而意美하고 愛民而好士하시니 可謂誼主矣로되
夫萬民之趨利也는 如水之走下하야 不以敎化隄防之면 不能止也라
古之王者는 明於此故로 南面而治天下에 莫不以敎化爲大務하야
立太學하야 以敎於國하고 設庠序하야 以化於邑하야 漸民以仁하고 摩民以誼(義)하고 節民以禮라
故로 其刑罰輕而禁不犯者는 敎化行而習俗美也니이다
聖王之繼亂世也
에 掃除其迹而悉去之
하나니 竊譬之
컨대 琴瑟不調甚者
는 必解而
張之
라야 乃可鼓也
요 爲政而不行甚者
는 必變而更化
注+[通鑑要解]謂權時之宜하야 以質代忠하고 以忠代文하야 以更化之라之
라야 乃可理也
라
故로 漢이 得天下以來로 常欲治로되 而至今不可善治者는 失之於當更化而不更化也니이다
古人有言曰 臨淵羨魚는 不如退而結網이라하니 今臨政願治는 不如退而更化라
更化則可善治요 善治則災害日去하고 福祿日來하리이다
臣聞聖王之治天下也에 爵祿以養其德하고 刑罰以威其惡이라
武王
이 行大誼
하야 平殘賊
하시고 周公
이 作禮樂以文之
러시니 至於成, 康之隆
하야 注+[釋義]王氏曰 囹圄는 秦獄名이니 囹은 令之使聆也요 圄는 語之使悟也라空虛 四十餘年
하니 此亦敎化之漸而仁義之流也
니이다
今陛下幷有天下로되 而功不加於百姓者는 殆王心未加焉이로소이다
曾子曰 尊(遵)其所聞則高明矣요 行其所知則光大矣라
高明光大 不在乎他
요 在乎加之意
注+[通鑑要解]文章正宗註에 武帝徒聞而不尊(遵)하고 徒知而不行하니 此其受病之本이라 故로 仲舒箴之하니라而已
라하시니 願陛下設誠於內而致行之
하시면 則三王何異哉
리잇고
養士之大者는 莫大乎太學하니 太學者는 賢士之所關也라
考問
하야 以盡其材
하시면 則英俊
을 宜可得矣
니 徧得天下之賢人
이면 則三王之盛
을 易爲
요 而堯舜之名
을 可及也
리이다
是以로 禹繼舜하시고 舜繼堯하사 三聖相授而守一道하야 亡救敝之政이라
故로 不言其所損益也니 繇是觀之컨대 繼治世者는 其道同하고 繼亂世者는 其道變이니이다
今漢
이 繼大亂之後
하니 若宜少損周之文
하고 致用夏之忠者
注+[釋義]致는 至極也라 或讀致屬上句하니 非라[通鑑要解] 愚按 致字는 當屬下句하니 蓋周文을 不可盡變故로 宜小損之요 夏忠則當極其用故로 致也라니이다
春秋大一統
注+[釋義]王氏曰 公羊傳에 隱元年春王正月을 何言乎아 王正月은 大一統也라한대 註에 統은 始也니 王者始受命改制하야 以統天下하야 令萬物無不一一皆奉承之以爲始라 故言大一統이라하니라者
는 天地之常經
이요 古今之通誼(義)也
어늘 今師異道
하고 人異論
하야 百家殊方
하야 指意不同
이라 是以
로 上無以持一統
하니
臣愚
는 以爲諸不在
之科, 孔子之術者
를 皆絶其道
하야 勿使竝進
이니 然後
에야 統紀可一
하고 而法度可明
하야 民知所從矣
리이다
○ 及爲江都相
하야 事
王
注+[頭註]易은 音亦이라 名非니 武帝兄이라 諡法에 好改更舊曰易이라하니라하니 王
은 帝兄
이라 素驕好勇
이러니
嘗問之曰 粤(越)王句踐
이 與大夫
庸, 種
注+[頭註]名也니 姓文이요 字子禽이라, 蠡
로 伐吳滅之
하니 寡人
은 以爲越有三仁
이라하노니 何如
오
仲舒對曰 夫仁人者는 正其誼(義)하고 不謀其利하며 明其道하고 不計其功하나니
是以
로 仲尼之門
에 五尺之童
이 羞稱五
하니 爲其先詐力而後仁義也
니이다
仁人者는 正其誼하고 不謀其利하며 明其道하고 不計其功이라하니 此董子所以卓越諸子也歟인저
然이나 始終全德하고 表表在人者는 亦未易多得이라
禹湯文武는 皆創業之君이로되 至其子孫하여 不過啓, 少康, 太甲, 盤庚, 武丁, 成, 康, 宣王 此數君而已라
太甲은 初年에 顚覆典刑하고 宣王은 未免詩人之刺라
漢世開基
에 再傳而有文景
하니 文帝
는 固盛德之主
요 至景
하얀 已有慙德
注+[頭註]景帝刻薄任數하야 以詐力馭天下하야 平居則誅賞肆行하고 緩急則惴懼失錯(措)也라이러니 武帝繼之
하여 傑然有立
이라
觀其卽位之始에 他務未遑하고 首擧賢良方正하여 親策於廷하고 又得一代大儒하여 爲之擧首라
於是에 罷黜百家하여 俾世之學者로 知尊孔氏하니 此皆漢世之所未發明者라
方是時也
하여 如水未波
하고 如鑑未塵
하니 使帝每事若此
런들 其盛德
이 可少訾
注+[頭註]訾는 量也니 漢書 註에 無訾量可以比之也라 又毁之也라哉
아
夫何數年之後에 遊宴奢慾하야 宮室神仙과 聚斂征伐之事가 紛紛交擧오
觀其初年所書淸淨
注+[頭註]老氏無爲之學이라簡寡
하면 與後來擾擾多事
로 相去遠甚
하니 然後
에 知人主資稟之高者 未必不有進銳退速之患
이요 而始終全德之君
은 在三代而下
론 益不易得也
라
詩曰 靡不有初나 鮮克有終이라하니 觀此면 可不謹終如始云이리오
○ 上
이 雅向儒術
하니 丞相竇嬰
과 太尉田蚡
이 俱好儒術
하야 轂
注+[原註]言薦擧人을 如車轂之推轉이라趙綰
하야 爲御史大夫
하고 王臧爲郞中令
하다
綰
이 請立明堂
注+[釋義]王氏曰 夏曰世室이요 商曰重屋이요 周曰明堂이니 後世皆因之라 明堂者는 所以明諸侯之尊卑하고 制禮作樂하고 頒度量而天下服이니 此古制也라 三輔黃圖云 明堂者는 大道之堂이니 所以順四時, 行月令하고 宗祀先王, 祭五帝也라 孝經援神契曰 布政之宮은 在國之陽하니 上圓下方이라 八牕은 法八風이요 四闥은 法四時요 九室은 法九州요 十二(重)[房]은 法十二月이요 三十六戶는 法三十六(兩)[旬]이요 七十二牖는 法七十二候라 元封二年에 公玉帶上黃帝時明堂圖라 胡氏管見曰 其制作之詳을 不可得而聞矣라 孝經은 以爲宗祀之所라하고 孟子는 以爲王政之堂이라하니 然則是天子之外朝니 猶後世大朝會之正衙也라하야 以朝諸侯
하고 且薦其師申公
하니 天子使使束帛加璧
注+[釋義]王氏曰 記禮器에 束帛加璧은 尊德也라하니 謂下設束帛하고 上加以璧이라 鄭玄曰 貢享所執致命者니 君子於玉比德焉이라 尙書玉帛圖에 璧은 玉也니 肉倍於好하니 其形圜이요 其中虛라 束帛者는 十端帛也라 古者制帛에 其長丈八이요 其束十端이니 或素, 或玄纁하야 其色不同이라 韓詩外傳에 謂卷五匹이라하니 遂見十端也라 羅璧識遺曰 大祀用幣는 皆一丈八尺爲度라하니라 按 一象陽하고 八象陰하니 寓陰陽不測也요 禮聘束帛은 用二丈爲端하니 則寓偶數라 色尙玄纁하니 玄은 天色이요 纁은 地色이니 天地偶合也라하고 安車
注+[釋義]一本에 作安車蒲輪이라 王氏曰 用蒲裹車輪이니 取其安也라 索隱曰 以蒲裹輪은 恐傷草木也라 且蒲是草之美者라 故로 禮有蒲璧하니 蓋或畫之하야 以爲榮飾이라駟馬
로 以迎申公
하다
對曰 爲治者
는 不在多言
이요 顧力行
注+[釋義]顧는 念也요 力行은 謂勉力而行也라何如耳
니이다
然已招致
라 則以爲太中大夫
하야 舍魯邸
하야 議明堂巡狩改
服色事
하다
申公은 開端而未告하고 武帝는 咈意而不問하니 惜哉라
然이나 明堂巡狩와 改曆服色이 豈力行之急務哉리오
對旣不合이어늘 又留不去하니 其不逮穆公을 又可見矣라
건원建元원년元年(신축 B.C.140)
注+[原註]예로부터 제왕帝王들이 연호가 있지 않았는데, 이때에 처음 시작되었다.
겨울 10월에 조서를 내려 현량賢良하고 방정方正하여 직언直言하고 지극히 간할 수 있는 선비를 천거하게 하였는데,
- 《한서漢書무제기武帝紀》에 “승상이 아뢰기를 ‘현량賢良으로 천거된 자들이 혹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 한비자韓非子와 소진蘇秦, 장의張儀의 말을 공부하여 국정國政을 어지럽히니, 모두 파하소서.’ 하자, ‘아뢴대로 하라.’ 했다.” 하였다. -
상上이 친히 고금古今의 정치하는 방도로써 책문策問하니, 광천廣川동중서董仲舒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신이 하늘과 사람이 서로 관여하는 사이를 살펴보니, 매우 두려울 만합니다.
만일 크게 무도한 세상이 아니면 하늘이 모두 붙들어 주고 잡아 주어 온전히 하고 편안히 하고자 하니, 일은 힘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학문을 힘쓰면 견문이 넓어져서 지혜가 더욱 밝아지고, 도道를 행함을 힘쓰면 덕德이 날로 일어나서 크게 공이 있게 됩니다.
도道라는 것은 말미암아 다스림에 나아가게 하는 길이니, 인의仁義와 예악禮樂이 모두 그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성왕聖王이 이미 별세하였으나 자손이 장구하여 수백 년을 편안하게 지냈으니, 이는 모두 예악禮樂으로 교화한 공입니다.
주周나라의 도道가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에게서 쇠하였으니, 도道가 망한 것이 아니고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이 도道를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선왕宣王에 이르러서 옛날 선왕先王의 덕德을 생각하여 침체한 것을 일으키고 해진 것을 보충하여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공업功業을 밝혀서 주周나라의 도道가 찬란하게 다시 일어났으니, 이는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선善을 행한 소치입니다.
인군人君이 된 자가 마음을 바루어서 조정을 바로잡고, 조정을 바루어서 백관百官을 바로잡고, 백관百官을 바루어서 만민萬民을 바로잡고, 만민萬民을 바루어서 사방四方을 바로잡아야 하니, 사방이 바루어지면 멀고 가까운 곳이 감히 바름에 한결같지 않을 수가 없어서 간사한 기운이 그 사이에 침범함이 없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음양陰陽이 조화로워 비바람이 제때에 내리고, 여러 생물이 조화로워 만민萬民이 불어나서 여러 복福된 물건과 이룰 수 있는 상서가 다 이르지 않음이 없어 왕도王道가 끝마쳐지는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귀함은 천자天子가 되시고 부富는 사해四海를 소유하시어 상서로움을 이룰 수 있는 지위에 계시고 상서로움을 이룰 수 있는 권세를 잡으시고, 또 이룰 수 있는 자질을 소유하시어 행실이 높고 은혜가 두터우며 지혜가 밝고 뜻이 아름다우며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를 좋아하시니, 의로운 군주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런데도 천지天地가 응하지 아니하여 아름다운 상서가 이르지 않음은 어째서입니까?
이는 모두 교화가 확립되지 못해서 만민萬民이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민萬民이 이익에 달려가는 것은 물이 아래로 달려감과 같아서, 교화敎化로써 이를 막지 않으면 그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 왕자王者들은 이것을 밝게 알았기 때문에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릴 적에 교화敎化를 큰 일로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태학太學을 세워 국도國都에서 가르치고 상서庠序를 설치하여 읍邑에서 교화하여, 백성을 인仁으로 젖어 들게 하고 백성을 의義로 연마시키고 백성을 예禮로써 절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벌이 가벼워도 법금法禁을 범하지 않은 것은 교화가 행해져 습속習俗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성왕聖王이
난세亂世를 이을 때에는 그 자취를 깨끗이 쓸어 모두 제거하니, 삼가 비유하건대 거문고와 비파가 고르지 않음이 심한 경우에는 반드시 줄을 풀어서 고쳐 매야 비로소 탈 수가 있고, 정사를 하되 행해지지 않음이 심한 경우에는 반드시 변경하여 다시 교화하여야
注+[通鑑要解]경화更化는 때의 마땅함을 저울질하여 질質로써 충忠을 대신하고, 충忠으로써 문文을 대신하여 바꾸어 교화함을 이른다. 비로소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가 천하를 얻은 이래로 항상 잘 다스려지기를 바랐으나 지금까지 잘 다스릴 수 없었던 것은 마땅히 변경하여 다시 교화하여야만 하는데 변경하여 다시 교화하지 않은 데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못에 임하여 물고기를 부러워함은 물러가서 그물을 짜는 것만 못하다.’ 하였으니, 이제 정사에 임하여 다스려지기를 원함은 물러가서 다시 교화하는 것만 못합니다.
다시 교화하면 잘 다스릴 수 있고, 잘 다스리면 재해災害가 날로 사라지고 복록福祿이 날로 올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성왕聖王이 천하를 다스릴 적에는 관작과 녹봉으로써 덕 있는 이를 기르고, 형벌로써 악한 이를 두렵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예의禮義를 밝게 알아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무왕武王이
대의大義를 행하여
잔적殘賊한 자를 평정하시고,
주공周公이
예악禮樂을 만들어 이를 문채나게 하셨는데,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의 융성함에 이르러
영어囹圄가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영어囹圄는 진秦나라 감옥의 이름이니, 영囹은 명령하여 듣게 하는 것이요, 어圄는 말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다.” 텅 빈 것이 40여 년이었으니, 이 또한 교화가 젖어 들고
인의仁義가 유행한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천하를 모두 소유하셨으나 공功이 백성에게 더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왕자王者의 마음을 가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증자曾子가 말씀하기를 ‘들은 바를 따르면 고명高明해지고 아는 바를 행하면 광대光大해진다.
고명高明함과
광대光大함은 다른 데 있지 않고 뜻을 가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注+[通鑑要解]《문장정종文章正宗》의 주註에 “무제武帝는 한갓 듣기만 하고 따르지 않으며 한갓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병통이 생겨나게 된 근본이므로 동중서董仲舒가 경계한 것이다.” 하였다. 하였으니, 원컨대 폐하께서
성의誠意를 안에 간직하시어 지극히 행하신다면
삼왕三王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평소에 선비를 기르지 않고 어진 이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유하건대 옥을 다듬지 않고 문채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비를 기르는 것 중에 큰 것은 태학太學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태학太學은 어진 선비의 관문關門입니다.
자주 살펴 물으시어 그 재능을 다하게 하신다면 영재英才와 준걸俊傑들을 마땅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천하의 어진 사람을 두루 얻는다면 삼왕三王의 융성함을 이루기가 쉽고 요순堯舜의 명성에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도道라는 것은 만세토록 폐단이 없으니, 폐단이라는 것은 도道를 잃은 것입니다.
하夏나라가 충忠을 숭상하고, 은殷나라가 경敬을 숭상하고, 주周나라가 문文을 숭상한 것은 계승한 바의 폐단을 바로잡음에 마땅히 이것을 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도道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으니, 하늘이 변하지 않으면 도道 또한 변치 않습니다.
이 때문에 우禹임금은 순舜임금을 이으시고 순舜임금은 요堯임금을 이으셔서, 세 성인聖人이 서로 전수하여 한 도道를 지켜서 폐단을 바로잡는 정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덜하고 더한 바를 말하지 않은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다스려지는 세상을 이은 자는 그 도道가 똑같고, 어지러운 세상을 이은 자는 그 도道가 변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漢나라는 크게 어지러운 뒤를 이었으니, 마땅히
주周나라의
문文을 다소 덜고
하夏나라의
충忠을 지극히 써야 할 듯합니다.
注+[釋義]少損周之文 치용하지충자致用夏之忠者:[釋義]치致는 지극함이다. 혹은 치자致字를 윗구에 붙여 읽으니 잘못이다. [通鑑要解] 내가 살펴보건대 치致자는 아랫구에 속해야 하니, 주周나라의 문文은 다 바꿀 수 없으므로 조금 줄여야 하고, 하夏나라의 충忠은 그 씀을 지극히 해야 하므로 치致라고 한 것이다.
《
춘추春秋》의
대일통大一統은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은공隱公원년元年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어찌하여 말했는가? 왕정월王正月은 일통一統을 크게 한 것이다.’ 하였는데, 주註에 ‘통統은 시작이니, 왕자王者가 처음 천명天命을 받고 제도를 고쳐서 천하를 통일하여 만물萬物로 하여금 일일이 모두 받들어서 시작으로 삼지 않음이 없게 한다. 그러므로 대일통大一統이라고 말한다.’ 하였다.” 천지天地의 떳떳한 법이고
고금古今의 공통된
의義인데, 지금 스승은
도道를 달리하고 사람들은 의논을 달리해서,
백가百家가 방법을 달리하여 가리키는 뜻이 똑같지 않으니, 이 때문에 위에서
일통一統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생각하건대 모든 육예六藝의 과목과 공자孔子의 학술學術에 들어있지 않은 것들은 모두 그 길을 끊어서 함께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한 뒤에야 통기統紀를 하나로 할 수 있고 법도法度를 밝힐 수가 있어서 백성들이 따를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
동중서董仲舒가〉
강도국江都國의
상相이 되어
역왕易王을
注+[頭註]역왕易王의 역易은 음이 역이다. 이름이 비非이니 무제武帝의 형이다. 시호를 짓는 법에 “옛것을 고치기를 좋아하는 것을 역易이라 한다.” 하였다. 섬기니,
역왕易王은 황제의 형으로서 평소 교만하고 용맹을 좋아하였다.
동중서董仲舒가 예禮로써 바로잡으니, 역왕易王이 공경하고 소중히 여겼다.
역왕易王이 일찍이
동중서董仲舒에게 묻기를 “
월왕越王구천句踐이
대부大夫인
설용泄庸과
문종文種,
注+[頭註]종種은 이름이니, 성이 문文이요 자字가 자금子禽이다. 범려范蠡와 함께
오吳나라를 정벌하여 멸망시켰으니, 과인은
월越나라에 세
인자仁者가 있다고 여기노니, 어떠한가?” 하였다.
동중서董仲舒가 대답하기를 “인仁한 사람은 그 의리를 바르게 하고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그 도道를 밝히고 그 공功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중니仲尼의 문하에는 오척五尺의 동자童子도 오패五霸를 일컫는 것을 부끄러워하였으니, 이는 속임수와 무력을 먼저하고 인의仁義를 뒤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월越나라에는 일찍이 한 사람의 인인仁人도 있지 않습니다.” 하였다.
“‘인仁한 사람은 그 의義를 바르게 하고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그 도道를 밝히고 그 공功을 따지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동자董子가 제자諸子들보다 월등히 나은 이유일 것이다.”
“한漢나라의 여러 유자儒者 중에 오직 동자董子가 유자儒者의 기상氣像이 있었다.”
“삼대三代가 일어날 적에 명철明哲한 왕王이 대대로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덕德을 온전히 유지하고 두드러지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남아 있는 자는 또한 많지 않다.
우왕禹王, 탕왕湯王, 문왕文王‧무왕武王은 모두 창업創業한 군주였으나 그 자손子孫에 이르러서는 계啓와 소강少康, 태갑太甲과 반경盤庚‧무정武丁,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선왕宣王의 몇 명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태갑太甲은 초년에 국가의 전형典型을 전복하였고, 선왕宣王은 시인詩人의 풍자를 면치 못하였다.
삼대시대三代時代 천 8백 년 동안 어진 군주가 겨우 이와 같음에 그쳤으니, 하물며 후세後世에 있어서랴.
한漢나라는 개국하자 두 번 전하여
문제文帝와
경제景帝가 있었으니,
문제文帝는 진실로
덕德이 훌륭한 군주였고,
경제景帝에 이르러서는 이미 부끄러운
덕德(마음)이
注+[頭註]경제景帝가 각박하여 술수術數에 맡겨서 속임수와 무력으로 천하를 어거하여, 평소에는 상벌을 멋대로 행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두려워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있었는데,
무제武帝가 뒤를 이어 우뚝이 성립하였다.
즉위하던 초기에 딴 일은 미처 하지 않고 첫 번째로 현량賢良하고 방정方正한 사람을 천거하여 조정에서 친히 책문策問하고 또 한 시대의 큰 학자인 동중서董仲舒를 얻어서 천거된 자들의 으뜸으로 삼았다.
이에 백가百家를 내쳐서 세상의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공씨孔氏를 높일 줄 알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 한대漢代에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이때를 당해서 물이 아직 파도가 일지 않고 거울이 아직 먼지가 끼지 않은 것과 같았으니, 만약
무제武帝가 매사를 이와 같이 했더라면 그 훌륭한
덕德이 어찌 조금인들
注+[頭註]자訾는 헤아림이니, 《한서漢書》 주註에 “헤아려 견줄 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또 훼방하는 것이다. 비난할 것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몇 년 뒤에는 놀고 잔치함에 욕심을 부려서 궁실宮室을 짓고 신선술神仙術을 찾으며 세금을 많이 거두고 사방을 정벌征伐하는 일이 분분紛紛하게 서로 일어났단 말인가.
한漢나라가 진秦나라처럼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
초년初年에
청정淸淨하고
注+[頭註]청정淸淨은 노자老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학문이다. 간략하고 욕심이 적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후래後來에 분분히 일을 많이 일으킨 것과 거리가 매우 머니, 그런 뒤에야
자품資稟이 높은 군주도 반드시 나아감이 예리하면 후퇴가 신속한 병폐가 없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덕德이 온전한 군주는
삼대三代 이후에는 더욱 얻기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처음은 있지 않은 이가 없으나 끝이 있는 자는 적다.’ 하였으니, 이것을 살펴보아 끝을 삼가서 처음과 같이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상上이 평소
유술儒術을 숭상하니,
승상丞相두영竇嬰과
태위太尉전분田蚡이 모두
유술儒術을 좋아하여
조관趙綰을 추천해서
注+[原註]퇴곡推轂은 사람을 천거하기를 수레바퀴를 밀어 굴러 가게 하는 것과 같이 함을 말한다.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고
왕장王臧을
낭중령郎中令으로 삼았다.
조관趙綰이
명당明堂을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하夏나라에서는 세실世室이라 하고, 상商나라에서는 중옥重屋이라 하고, 주周나라에서는 명당明堂이라 하였으니, 후세에 모두 이것을 따랐다. 명당明堂이라는 것은 제후의 존비尊卑를 밝히고 예禮와 음악을 만들고 도량형을 반포하여 천하가 복종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옛날 제도이다. 《삼보황도三輔黃圖》에 이르기를 ‘명당明堂이라는 것은 대도大道를 밝히는 당堂이니, 사시四時를 순히 하여 월령月令을 행하고 선왕先王을 높여 제사하고 오제五帝에게 제사하는 것이다.’ 하였다. 《효경원신계孝經援神契》에 이르기를 ‘정사를 펴는 궁宮은 국도國都의 남쪽에 있으니,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나다. 8개의 창문은 팔풍八風을 본받았고, 4개의 문지방은 사시四時를 본받았고, 9개의 실室은 구주九州를 본받았고, 12개의 방房은 12개월을 본받았고, 36개의 호戶는 36순旬(360일)을 본받았고, 72개의 창문은 72절기節氣를 본받은 것이다.’ 하였다. 원봉元封 2년에 공옥대公玉帶가 황제黃帝 때의 명당도明堂圖를 올렸다. 호인胡寅의 《독사관견讀史管見》에 이르기를 ‘명당明堂을 제작한 자세한 내용은 들을 수가 없다. 《효경원신계孝經援神契》에는 선왕先王을 높여 제사하는 곳이라고 하였고, 《맹자孟子》에는 왕자王者가 정사를 펴는 당堂이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는 천자天子의 바깥 조정이니, 후세에 크게 조회하는 정아正衙(正殿)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세워 제후들에게 조회 받을 것을 청하고 또 그 스승
신공申公을 천거하니,
천자天子가
사자使者를 시켜
속백束帛에 구슬을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예기禮記》 〈예기禮器〉에 ‘속백가벽束帛加璧은 덕德을 높인 것이다.’ 하였으니, 아래에 속백束帛을 놓고 위에 옥玉을 더함을 이른다.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공물貢物을 바칠 때에 옥玉을 쥐고서 명命을 전달하는 것이니, 군자는 옥玉에 덕德을 견준다.’ 하였다. 《상서尙書》 옥백도玉帛圖에 ‘벽璧은 옥玉이니, 살이 구멍[好]보다 배나 되니 그 형체는 둥글고 그 가운데가 비었다. 속백束帛은 10끝의 비단이다. 옛날에 비단을 만들 때에 길이는 1장丈 8척尺이고 묶음은 10끝이니, 혹은 흰 비단이거나 혹은 현훈玄纁(검은색과 붉은색)이어서 그 색깔이 똑같지 않았다.’ 하였고,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다섯 필을 만다.’ 하였으니, 〈다섯 필을 말면〉 마침내 10끝을 볼 수 있다. 《나벽지유羅璧識遺》에 이르기를 ‘큰 제사에 쓰는 폐백은 모두 1장丈 8척尺을 도수로 삼는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1은 양陽을 상징하고 8은 음陰을 상징하는 바, 음양陰陽을 측량할 수 없음을 붙인 것이요, 예禮로 초빙할 때의 속백束帛은 2장丈을 사용하여 끝을 삼으니, 이는 우수偶數를 붙인 것이다. 색은 현훈玄纁을 숭상하니, 현玄은 하늘의 색이고 훈纁은 땅의 색이니, 천지天地가 만나는 것이다.” 더하고
안거安車와
注+[釋義]안거安車는 일본一本에 ‘안거포륜安車蒲輪’으로 되어 있다. 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부들을 사용하여 수레바퀴를 감싼 것이니, 그 편안함을 취한 것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부들로 수레바퀴를 감싼 것은 초목을 상할까 두려워해서이다. 또 부들은 풀 중의 아름다운 것이므로 예禮에 포벽蒲璧이 있으니, 혹은 수레바퀴에 부들을 그려서 영화롭게 꾸민 듯하다.’ 하였다.” 사마駟馬로
신공申公을 맞이하였다.
신공申公이 이르자, 천자天子가 치란治亂의 일을 물었는데 신공申公의 나이가 80세가 넘었다.
대답하기를 “정치를 하는 것은 많은 말에 있지 않고, 어떻게 힘써 행하느냐를
注+[釋義]고顧는 생각함이요, 역행力行은 힘을 써서 행함을 이른다. 생각할 뿐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천자天子가 막 문사文詞를 좋아하였는데, 신공申公의 대답을 듣고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침묵하였다.
그러나 이미 초치招致하였으므로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삼아 노魯나라 저택에 머물면서 명당明堂과 순수巡狩와 책력冊曆과 관복官服의 색깔을 바꾸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 《사기史記》 〈효무본기孝武本紀〉와 〈유림전儒林傳신공申公〉에 나옴 -
“신공申公의 말이 합당하나 다만 이른바 힘써 행한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신공申公은 단서만 열어놓고 고하지 않았고, 무제武帝는 마음에 들지 않아 묻지 않았으니, 애석하다.
그러나 명당明堂과 순수巡狩와 책력冊曆과 관복官服의 색깔을 바꾸는 일이 어찌 힘써 행할 일의 급선무急先務이겠는가.
대답이 이미 부합하지 않는데도 또 머물고 떠나가지 않았으니, 목공穆公(穆生)에 미치지 못함을 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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