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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7)

통감절요(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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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巳]十九年이라
正月 自將諸軍하고 發洛陽하다
○ 二月 至鄴하야 自爲文祭魏太祖注+[頭註]曹操 臨危制變하고 料敵設奇하니 一將之智 有餘하고 萬乘之才 不足이라하다
[新增]胡氏曰
知人則易하고 自知則難하나니 太宗之評魏武者 正所以自狀耳
或問漢高祖, 光武, 昭烈, 魏武, 唐文皇注+[頭註]文皇 太宗이니 諡曰文이라 人品如何
高祖 尙矣 光武, 昭烈 猶魯, 衛之政也
魏武, 太宗 竝驅中原이면 未知鹿死誰手하니 其所長短 蓋略相當이라
光武, 昭烈 才德俱優하고 魏武, 太宗 才優於德이라 然規模建立 皆在漢高範圍注+[頭註] 如鑄金之有模範이요 匡郭 之內耳니라
三月 車駕至定州하니 李世勣, 江夏王道宗 攻高麗蓋牟城하야 拔之하다
世勣 進至遼東城下하니 高麗大敗
自將數百騎하고 至遼東城下하야 見士卒負土塡塹하고 分其尤重者하야 於馬上 持之러니 及克高麗 以其城爲遼州하다
○ 進軍白巖城이러니 大將軍李思摩 中弩矢어늘
親爲之하니 將士聞之하고 莫不感動이러라
○ 丁未 車駕發遼東하야 丙辰 至安市城하야 進兵攻之하니 高麗北部延壽, 惠眞注+[釋義]하니라[通鑑要解] 高延壽, 高惠眞 高麗傳 云 延壽 北部大人이요 惠眞 南部大人也라하니라 兵十五萬하고 救安市어늘
勅諸軍하야 齊出奮擊하고 因命有司하야 張受降幕注+[頭註] 設也 平聲이라 於朝堂注+[頭註]行營備宮省之制 故亦有朝堂이라 之側하다
諸軍 鼓譟竝進할새 有龍門人薛仁貴注+[頭註]自編戶應募[通鑑要解] 名禮 以字行이라 安都之六世孫이라者 大呼陷陳하니 所向無敵이라
高麗兵披靡어늘 大軍 乘之하니 高麗兵 大潰하다
己未 延壽, 惠眞 帥其衆三萬六千八百人降하니 高麗擧國大駭
後黃城, 銀城注+[通鑑要解] 對前之後也 皆自拔遁去하니 數百里 無復人煙이러라
驛書報太子하고 仍與高士廉等書曰 朕 爲將如此하니 何如오하고 名所幸山하여駐驆山注+[頭註]本名 六山이라 이라하다
范祖禹曰
太宗之伐高麗 非獨恃其四海之富, 兵力之彊也 本其少時 奮於布衣하야 志氣英果하야 百戰百勝하야 以取天下
治安旣久 不能深居高拱하고 猶思所以逞志하야 扼腕注+[頭註] 握也 掌後節中이라 踴(踊)躍하야 喜於用兵이라
婦搏虎注+[釋義]王氏曰 馮婦搏虎 以喩太宗用兵不已也 馮婦 姓名이니 勇而有力하야 善搏虎 進以爲士러니 後於野外見虎하고 欲復搏之하니 其士之黨 笑其不知止也 見孟子盡心下하니라 하야 不能自止하니 非有禮義以養其心하고 中和以養其氣하야 始於勇敢하고 終於勇敢而已矣
記曰 所貴於勇敢彊有力者 貴其敢行禮義也
天下無事則用之於禮義하고 天下有事則用之於戰勝하나니 用之於戰勝則無敵이요 用之於禮義則順治라하니라
太宗 於天下無事 不知用之於禮義하고 而惟以戰勝爲美也
是故 以天子之尊으로 而較勝負於遠夷하야 一戰而克하고 自以爲功하야 矜其智能하야 夸(誇)示臣下하니 其器不亦小哉
以遼左早寒하야 草枯水凍하야 士馬難久留하고 且粮食將盡이라하야 勅班師注+[頭註]見三十四卷이라 하다
上謂薛仁貴曰 朕諸將 皆老하야 思得新進勇者하야 將之러니 無如卿者
不喜得遼東이요 喜得卿也로라
○ 上 以遼左不能成功이라하야 深悔之하야 歎曰 魏徵 若在 不使朕有是行라하고 乃馳驛하야 하고 復立所製碑하다
〈出本傳〉
[史略 史評]范氏曰
太宗 玩武不已하야 困於小夷하니 無異於煬帝
蓋不能愼終如始하야 日新其德하야 而欲功過五帝하고 地廣三王하니 是以失之
이나 見危而思直臣하고 知過而能自悔하니 此其所以爲賢也니라


정관貞觀 19년(을사 645)
정월에 이 직접 제군諸軍을 거느리고 낙양을 출발하였다.
2월에 업성鄴城에 이르러서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나라 태조太祖에게 제사하기를注+[頭註]나라 태조太祖조조曹操이다. “위기에 임하여 변통을 잘하고 적을 헤아려 기이한 계책을 썼으니, 한 장군으로서의 지혜는 유여하고 제왕帝王으로서의 재주는 부족하다.” 하였다.
[新增]胡氏(胡安國)가 말하였다.
“남을 알기는 쉽고 자신을 알기는 어려우니, 태종太宗나라 무제武帝를 평한 것은 바로 자신이 기록한 것이다.
혹인이 ‘나라 고조高祖광무제光武帝소열제昭烈帝나라 무제武帝나라 문황文皇注+[頭註]문황文皇태종太宗이니, 시호를 이라 하였다. 인품이 어떠한가?’ 하고 묻기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고조高祖는 훌륭하고, 광무제光武帝소열제昭烈帝나라와 나라의 정사와 같다.
나라 무제武帝나라 태종太宗중원中原에서 함께 겨루었다면 제왕帝王의 자리가 누구에게 돌아갔을지 알 수 없으니, 장점과 단점이 대략 서로 비슷하다.
광무제光武帝소열제昭烈帝는 재주와 덕이 모두 넉넉하였고 나라 무제武帝나라 태종太宗은 재주가 덕보다 나았지만 규모와 창업한 것은 모두 나라 고조高祖의 범위 안에 있을 뿐이다.’”注+[頭註]은 쇠를 주조할 때에 거푸집이 있는 것과 같고, 는 테두리이다.
3월에 거가車駕정주定州에 이르니, 이세적李世勣강하왕江夏王이도종李道宗이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이세적李世勣이 진격하여 요동성 아래에 이르니, 고구려 군대가 대패하였다.
이 직접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아래에 이르러서, 사졸들이 흙을 져다가 골짜기를 메우는 것을 보고는 이 그 중에 가장 무거운 것을 나누어 말 위에 실어 갖다 주었는데, 고구려를 이기자 그 성을 요주遼州로 삼았다.
백암성白巖城에 진군하였는데, 대장군 이사마李思摩가 쇠뇌로 발사한 화살을 맞았다.
이 직접 그를 위해 피를 빨아주니, 장병들이 이 말을 듣고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정미일丁未日(6월 11일)에 거가車駕요동遼東을 출발하여 병진일丙辰日(6월 20일)에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진군하여 공격하니, 고구려 북부의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注+[釋義]연수延壽혜진惠眞은 모두 고씨高氏이니, 고연수高延壽북부北部를 주관하고 고혜진高惠眞남부南部를 주관하였다. [通鑑要解]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은 《신당서新唐書》 〈고려전高麗傳〉에 “고연수高延壽북부대인北部大人이고 고혜진高惠眞남부대인南部大人이다.” 하였다. 15만의 병력을 인솔하고 안시성安市城을 구원하러 왔다.
제군諸軍에게 명해서 일제히 출동하여 분발해서 공격하게 하고, 이어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수항막受降幕(항복을 받는 장막)을注+[頭註]은 설치함이고, 평성平聲(항복함)이다. 조당朝堂注+[頭註]행영行營궁성宮省(궁중의 관서)의 제도를 갖추었기 때문에 또한 조당朝堂이 있는 것이다. 곁에 설치하게 하였다.
제군諸軍이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전진하였는데, 마침 용문龍門 사람 설인귀薛仁貴라는注+[頭註]설인귀薛仁貴편호編戶(일반 평민平民)로서 모집에 응하였다. [通鑑要解] 이름은 인데, (仁貴)로써 알려졌다. 설안도薛安都의 6세손이다. 자가 크게 함성을 지르며 적진으로 뛰어드니,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고구려 군사들이 이리저리 쓰러지자 대군大軍이 승세를 타니, 고구려의 군사가 크게 궤멸되었다.
기미일己未日(6월 23일)에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이 병력 3만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하니, 고구려의 온 나라가 크게 놀랐다.
후황성後黃城은성銀城注+[通鑑要解]후황성後黃城의 상대인 이다. 모두 스스로 군영을 거두어 도망하니, 수백리 이내에 다시는 밥 짓는 연기가 없었다.
이 파발을 띄워 태자에게 승전을 알리고, 인하여 고사렴高士廉 등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짐이 장수 노릇 함이 이와 같으니, 어떠한가?” 하고는 행차한 산의 이름을 바꾸어서 주필산駐驆山이라고 하였다.注+[頭註]본래 이름은 육산六山이다.
범조우范祖禹가 말하였다.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한 것은 다만 사해四海의 부유함과 병력의 강함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에 평민의 신분으로 떨치고 일어나 뜻과 기운이 영명英明하고 과단성이 있어서 백 번 싸워 백 번 이겨 천하를 취함에 근본을 둔 것이다.
나라가 다스려지고 편안한 지가 오래되자 깊숙이 궁중에 거하여 팔짱을 높이 끼고 있지 못하고, 오히려 야심을 펼 것을 생각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注+[頭註]은 쥐는 것이고, 은 손바닥 뒤의 관절 부분이다. 날뛰어서 용병用兵하기를 좋아하였다.
이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던 풍부馮婦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풍부馮婦가 호랑이를 잡는 것으로써 태종太宗이 무력을 끝없이 사용함을 비유하였다. 풍부馮婦성명姓名이니, 용감하고 힘이 세어서 호랑이를 잘 잡았다. 그러므로 나아가 선사善士가 되었는데, 뒤에 들에서 호랑이를 보고 다시 호랑이를 잡으려 하니, 의 무리들이 그의 그칠 줄 모름을 비웃었다. 《맹자孟子》 〈진심盡心〉에 보인다. 옛버릇을 스스로 버리지 못한 것과 같으니, 예의禮義로써 마음을 기르고 중화中和로써 기운을 기르지 못해서 용맹으로 시작하여 용맹으로 끝났을 뿐이다.
예기禮記》 〈빙의聘義〉에 이르기를 ‘용감하여 강하고 힘이 있음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예의禮義를 용감하게 행함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천하에 일이 없으면 이것을 예의禮義에 쓰고 천하에 일이 있으면 이것을 전승戰勝에 쓰니, 전승戰勝에 쓰면 상대할 자가 없고 예의禮義에 쓰면 순히 다스려진다.’ 하였다.
태종太宗은 천하에 일이 없을 때 이것을 예의禮義에 쓸 줄 모르고 오직 전승戰勝만을 아름답게 여겼다.
이 때문에 존귀한 천자天子의 몸으로 먼 오랑캐와 승부를 겨루어 한 번 싸워 승리하고는 스스로 공이라 여겨 그 지혜와 능력을 자랑하여 신하들에게 과시하였으니, 그 그릇이 또한 작지 않은가.”
요좌遼左(遼東) 지역은 날씨가 일찍 추워져 초목이 말라죽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가 어려우며, 또 양식이 다 떨어지려 한다 하여 반사班師(回軍)하도록 명하였다.注+[頭註]반사班師는 34권의 〈수기隋紀〉文帝 경술년조庚戌年條(590)에 보인다.
설인귀薛仁貴에게 이르기를 “제장諸將들이 다 늙어서 신진新進의 날래고 용감한 자를 얻어 장수로 삼을 것을 생각하였는데, 경만한 자가 없다.
짐은 요동遼東을 얻은 것을 기뻐하지 않고 경을 얻은 것을 기뻐하노라.” 하였다.
- 《신당서新唐書고려전高麗傳》에 나옴 -
요동遼東에서 공을 이루지 못했다 하여 깊이 뉘우치며 한탄하기를 “위징魏徵이 만약 살아있었다면 짐으로 하여금 이번에 출정出征하지 않게 했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파발을 보내어 위징魏徵소뢰少牢로 제사하고 자신이 지은 비석을 다시 세웠다.
- 《신당서新唐書위징전魏徵傳》에 나옴 -
[史略 사평史評]范氏가 말하였다.
태종太宗은 무력을 좋아하기를 마지않아서 약한 오랑캐에게 곤궁하였으니, 나라 양제煬帝와 다를 것이 없다.
이는 끝을 잘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 하여 날로 그 을 새롭게 하지 못하고서 오제五帝를 능가하고 영토는 삼왕三王보다 넓게 하고자 하였으니, 이 때문에 잃은 것이다.
그러나 위태로울 때에 충직한 신하를 생각하였고 허물을 알고 스스로 뉘우쳤으니, 이 때문에 어진 군주가 된 것이다.”


역주
역주1 : 연
역주2 延壽……主南部 : 《史記》에 “고구려는 內部(桂婁部)‧北部(絶奴部)‧東部(順奴部)‧南部(灌奴部)‧西部(消奴部) 등 5部로 나뉘며 각 部에는 褥薩이 있는데, 褥薩은 각 部의 우두머리로 중국의 都督에 해당한다.” 하였다.《資治通鑑》에 의하면 高延壽와 高惠眞는 모두 北部의 褥薩이다.
역주3 : 솔
역주4 : 항
역주5 : 경
역주6 : 풍
역주7 : 효
역주8 出高麗傳 : 《新唐書》 〈東夷傳〉의 高麗條에 보인다.
역주9 祀徵以少牢 : 나라에서 제사 지낼 때, 소와 양과 돼지 세 가지 희생을 올리는 것을 太牢라 하고, 양과 돼지만 올리는 것을 少牢라 한다.

통감절요(7) 책은 2022.01.1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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