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月에 大司馬溫이 來朝어늘 詔吏部尙書謝安과 侍中王坦之하야 迎于新亭하다
是時
에 都下人情
이 恟恟
注+[通鑑要解]恟은 音胸이니 懼也라하야 或云欲誅王, 謝
하고 因移晉室
이라하니 坦之
는 甚懼
호되 安
은 神色不變
하고 曰 晉祚存亡
이 決於此行
이라하니라
溫
이 旣至
에 百官
이 拜於道側
이어늘 溫
이 大陳兵衛
하고 延見朝士
하니 有位望者 皆戰
注+[頭註]慴은 與懾同하니 懼也라失色
이라
坦之는 流汗沾衣하고 倒執手版注+[頭註]手版은 笏也라호되 安은 從容就席하야 笑語移日이러라
安
이 與坦之見溫
할새 溫
이 使超臥帳中
注+[頭註]安謂溫曰 安聞이라하니 明公은 何須壁後置人耶아하니 溫笑曰 不能不爾라하고 命撤之하니라하야 聽其言
이러니 風動帳開
어늘 安笑曰 郗生
은 可謂
矣
로다
時에 天子幼弱하고 外有彊臣호되 安與坦之 盡忠輔衛하야 卒安晉室하니라
溫이 以世子熙才弱이라하야 使弟沖으로 領其衆하고 俄頃에 薨하다
沖이 稱溫遺命하고 以少子玄爲嗣하니 時에 方五歲라 襲封南郡公하다
或이 勸沖誅除時望하고 專執時權이로되 沖이 不從하다
영강寧康 원년元年(계유 373) - 진秦나라 건원建元 9년이다. -
2월에 대사마大司馬 환온桓溫이 조회 오자, 황제가 이부상서吏部尙書 사안謝安과 시중侍中 왕탄지王坦之에게 명하여 신정新亭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이때
도성都城의 민심이 흉흉
注+[通鑑要解]흉恟은 음音이 흉이니, 두려워하는 것이다. 해서 혹자가 말하기를 “
환온桓溫이
왕탄지王坦之와
사안謝安을 죽이고 인하여
진晉나라 황실을 차지하고자 한다.”고 하니,
왕탄지王坦之는 매우 두려워하였으나
사안謝安은 안색을 바꾸지 않고 말하기를 “
진晉나라 운명의 존망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다.” 하였다.
환온桓溫이 이르자 백관들이 길가에서 절하였는데,
환온桓溫이 호위하는 병사들을 대단히 많이 진열하고 조정의 관원들을 만나니, 지위와 명망 있는 자들이 모두들 두려워 벌벌 떨며
注+[頭註]습慴은 섭懾과 같으니,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색이 되었다.
이에
왕탄지王坦之는 땀이 흘러 옷을 적셨으며
수판手版(笏)을 거꾸로 쥐었는데,
注+[頭註]수판手版은 홀笏이다. 사안謝安은 조용히 자리에 나아가서
환온桓溫과 한참 동안 웃으며 말하였다.
치초郗超가 항상 환온桓溫의 주요主要 참모參謀 노릇을 하였다.
사안謝安이
왕탄지王坦之와 함께
환온桓溫을 만날 때에
환온桓溫이
치초郗超를 시켜 장막 안에 누워서
注+[頭註]사안謝安이 환온桓溫에게 이르기를 “제가 들으니 ‘제후諸侯에게 도道가 있으면 지키는 것이 사방의 이웃 나라에 있다.’고 하였는데, 명공明公은 어찌 굳이 벽 뒤에 사람을 두어 지키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환온桓溫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고, 벽 뒤의 치초郗超를 물러가도록 명하였다. 그의 말을 엿듣게 하였는데, 바람에 날려 장막이 걷히는 바람에 탄로가 나자
사안謝安이 웃으며 말하기를 “
치생郗生이야말로
입막빈入幕賓이라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이때 천자天子는 유약幼弱하고 밖에는 강대한 신하가 있었으나 사안謝安이 왕탄지王坦之와 함께 충성을 다해 보필하고 호위해서 끝내 진晉나라 황실을 편안하게 하였다.
○ 3월에 환온桓溫이 병이 나서 고숙姑孰으로 돌아갔다.
환온桓溫이 세자 환희桓熙가 재주가 부족하다 해서 자신의 아우인 환충桓沖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게 하고 얼마 후에 환온桓溫이 죽었다.
환충桓沖이 환온桓溫의 유명遺命이라 칭하고 환온桓溫의 어린 아들인 환현桓玄을 후계자로 삼으니, 이때 환현桓玄의 나이가 5세였는데 남군공南郡公의 봉작을 계승하였다.
환충桓沖이 이미 환온桓溫을 대신하여 임무를 맡게 되자, 왕실에 충성을 다하였다.
혹자가 환충桓沖에게 당시의 명망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고 혼자서 당시의 대권大權을 장악하라고 권하였으나 환충桓沖이 따르지 않았다.
○ 진秦나라 군대가 양주梁州와 익주益州로 쳐들어와 침략하고 마침내 성도成都를 점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