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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4)

통감절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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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十七年이라
건안建安 17년(임진 212)
孫權 作石頭城하야 徙治秣陵하고 改秣陵하야 爲建業하다
손권孫權석두성石頭城을 만들어 치소治所말릉秣陵으로 옮기고, 말릉秣陵을 고쳐 건업建業이라 하였다.
○ 董昭言於曹操曰 自古以來 人臣匡世 未有今日之功하니 有今日之功이요 未有久處人臣之勢者也
동소董昭조조曹操에게 말하기를 “예로부터 신하가 세상을 바로잡은 것은 오늘날과 같은 공훈이 있지 않았으니, 오늘날과 같은 공훈이 있으면서 신하의 지위에 오랫동안 있었던 자는 있지 않습니다.
今明公 恥有慙德하야 樂保名節이나 然處大臣之勢하야 使人以大事疑己하니 誠不可不重慮也라하고
지금 명공明公이 부끄러운 이 있음을 수치스럽게 여겨서 명예와 절개를 보존함을 즐거워하나 대신大臣의 지위에 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대사大事(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일)를 가지고 자신을 의심하게 하니, 진실로 거듭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乃與列侯諸將議하야 以丞相宜進爵國公하고 九錫注+[釋義]註見平帝元始五年하고 又見此下十八年하니 所註異同이라[附註]一輿馬 二衣服이요 三樂則이요 四朱戶 五納陛 六虎賁이요 七弓矢 八鈇鉞이요 九秬鬯이라 衣服 謂玄袞이요 樂則 謂軒懸之樂이요 朱戶 謂所居之室 朱其戶也 納陛 謂從中階而升也 虎賁 三百人也 秬鬯 謂秬鬯之酒 賜以祭祀也 詳見十四卷乙丑年하니라備物하야 以彰殊勳이라하니
마침내 열후列侯와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여 “승상丞相(曹操)에게 작위를 진봉進封하여 국공國公으로 삼고 구석九錫注+[釋義]九錫은 평제平帝 원시元始 5년조年條에 보이고, 또 이 아래 18년조年條에 보이니, 의 내용이 약간 다르다.[附註]九錫은 첫 번째는 여마輿馬, 두 번째는 의복, 세 번째는 악칙樂則, 네 번째는 주호朱戶, 다섯 번째는 납폐納陛, 여섯 번째는 호분虎賁, 일곱 번째는 궁시弓矢, 여덟 번째는 부월鈇鉞, 아홉 번째는 거창秬鬯이다. 의복은 검은색의 곤룡포를 이르고, 악칙樂則헌현軒懸의 음악을 이르고, 주호朱戶는 거주하는 방의 문에 붉은색 칠을 함을 이르고, 납폐納陛는 가운데 계단을 따라 오름을 이르고, 호분虎賁은 호위병 3백 명이고, 거창秬鬯은 검은 기장으로 빚은 술을 이르니, 이것을 하사하여 제사하게 한 것이다. 14권 을축년조乙丑年條에 자세히 보인다. 의 물건을 갖추어서 특별한 공훈을 표창해야 한다.” 하였다.
荀彧 以爲曹公 本興義兵하야 以匡朝寧國하야 秉忠貞之誠하고 守退讓之實하니 君子 愛人以德注+[通鑑要解]記檀弓 曾子曰 君子之愛人也 以德이요 小人之愛人也 以姑息이라하니라이니 不宜如此라한대 操由是不悅이러라
순욱荀彧이 말하기를 “조공曹公은 본래 의병義兵을 일으켜 조정을 바로잡고 나라를 안정시켜 충정忠貞한 정성을 간직하고 겸양의 실제를 지켰으니, 군자君子가 사람을 사랑함은 으로써 하는 바,注+[通鑑要解]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증자曾子가 말씀하기를 ‘군자君子가 사람을 사랑함은 으로써 하고, 소인小人이 사람을 사랑함은 고식적姑息的(당장 편한 것)인 것으로써 한다.’ 했다.” 하였다.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 하였는데, 조조曹操가 이 때문에 순욱荀彧을 좋아하지 않았다.
及擊孫權 表請彧하야 勞軍于譙하고 因輒留彧하야 參丞相軍事러니 操軍 向濡須 以疾留壽春이라가 飮藥而卒注+[頭註]彧傳 操饋之食한대 發視하니 乃空器也 於是 飮藥而卒이라하다
조조曹操손권孫權을 공격하게 되자, 표문表文을 올려 순욱荀彧을 청해서 초현譙縣에서 군사들을 위로하게 하고 인하여 번번이 순욱荀彧을 잡아 두어 승상丞相군사軍事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조조曹操의 군대가 유수濡須로 향할 때에 순욱荀彧은 병으로 수춘壽春에 남아 있다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注+[頭註]삼국지三國志》 〈순욱전荀彧傳〉에 “조조曹操순욱荀彧에게 음식을 보냈는데, 꺼내 보니 빈 그릇이었다. 순욱荀彧이 이에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하였다.
行義修整하고 而有智謀하며推賢進士
순욱荀彧은 행실이 의롭고 단정하고 지모가 있으며, 어진 이를 추존하고 선비를 등용하기를 좋아하였다.
時人 皆惜之러라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溫公曰
온공溫公이 말하였다.
孔子之言仁也重矣
공자孔子께서는 을 말씀하심에 신중하였다.
自子路, 冉有, 公西赤門人之高弟 令尹子文, 陳文子諸侯之賢大夫 皆不足以當之로되 而獨稱管仲之仁하시니 豈非以其輔佐齊桓하야 大濟生民乎
자로子路, 염유冉有, 공서적公西赤 등 문인 중의 훌륭한 제자와 영윤자문令尹子文, 진문자陳文子제후諸侯의 어진 대부大夫가 모두 을 감당할 수 없었으나 공자孔子께서 유독 관중管仲을 칭하였으니, 이는 어찌 관중管仲나라 환공桓公을 보좌하여 백성들을 크게 구제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齊桓之行若狗彘어늘 管仲不羞而相之하니 其志蓋以非桓公이면 則生民 不可得而濟也일새라
나라 환공桓公의 행실이 개돼지와 같았는데, 관중管仲이 이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를 도왔으니, 그의 뜻(생각)은 아마도 환공桓公이 아니면 백성들을 구제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漢末大亂하야 群生塗炭하니 自非高世之才 不能濟也
나라 말기에 크게 혼란해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만일 세상에 출중한 재주가 아니면 구제할 수가 없었다.
然則荀彧捨魏武하고 將誰事哉
그렇다면 순욱荀彧 무제武帝(曹操)를 버리고 장차 누구를 섬기겠는가?
齊桓之時 周室雖衰 未若建安注+[頭註]獻帝之初也
나라 환공桓公 때에 나라 황실이 비록 쇠하였으나 건안建安注+[頭註]건안建安헌제獻帝의 연호이다. 초기와 같지는 않았다.
建安之初 四海蕩覆하야 尺土一民 皆非漢有어늘 荀彧 佐魏武而興之하야 擧賢用能하고 訓卒厲兵하야 決機發策하야 征伐四克하야
건안建安 초기에는 온 천하가 전복되어 한 자의 영토와 한 명의 백성도 모두 나라 소유가 아니었는데, 순욱荀彧 무제武帝를 보좌하여 일으켜서 덕이 있는 현자賢者를 천거하고 유능한 자를 등용하며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병기를 가다듬어서 기회를 결정하고 계책을 내어 정벌하여 사방을 이겼다.
遂能以弱爲强하고 化亂爲治하야 十分天下而有其八하니 其功 豈在管仲之後乎
그리하여 마침내 약함을 강함으로 만들고 어지러움을 변화시켜 다스림으로 만들어 천하를 열로 나눔에 그 여덟을 소유하였으니, 그 이 어찌 관중管仲의 뒤에 있겠는가.
管仲 不死子糾로되 而荀彧 死漢室하니 其仁 復居管仲之先矣어늘
관중管仲공자公子 를 따라 죽지 않았지만 순욱荀彧나라 황실을 위하여 죽었으니, 그 이 또 관중管仲의 앞에 있는 것이다.
而杜牧 乃以爲彧之勸魏武取兗州 則比之高, 光하고
그런데 두목杜牧은 도리어 ‘순욱荀彧 무제武帝에게 연주兗州를 취할 것을 권할 적에 나라 고제高帝광무제光武帝에게 견주었고,
官渡不令還許注+[頭註]魏武軍官渡한대 袁紹進臨射營中하야 矢如雨下하니 衆大懼 公糧少하야 議欲還許러니 彧諭以不可하니라 則比之楚注+[頭註]項羽, 漢하고
관도官渡에서 허도許都로 돌아가지 말 것을 권할 적에注+[頭註] 무제武帝관도官渡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원소袁紹가 전진하여 와서 영중營中에 활을 쏘아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니, 군사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때 조공曹公(曹操)이 군량이 부족하므로 의논하여 허도許都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순욱荀彧이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注+[頭註]나라는 항우項羽이다. 에 견주었으며,
及事就功畢하야는 乃欲邀名於漢代하니
일이 이루어지고 공을 마침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나라 때에 충신이라는 명예를 얻고자 하였으니,
譬之敎盜穴墻發匱而不與同挈하니 得不爲盜乎아하니
비유하자면 도둑에게 담장에 구멍을 뚫고 궤를 꺼내 가도록 가르치고는 도둑질한 물건을 함께 갖지 않은 것과 같으니, 도둑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臣以爲孔子稱文勝質則史라하시니 凡爲史者 記人之言 必有以文之
내가 생각건대 공자孔子께서 ‘(아름다운 외관)이 (본바탕)을 이기면 겉치레만 잘하고 성실성이 부족한 사관史官(書記)과 같다.’고 말씀하셨으니, 무릇 사관史官이 된 자는 남의 말을 기록함에 반드시 문식文飾함이 있다.
然則比魏武於高, 光, 楚, 漢者 史氏之文也 豈皆彧口所言耶
그렇다면 무제武帝고제高帝광무제光武帝, 에 견준 것은 사씨史氏의 글이니, 어찌 모두 순욱荀彧의 입으로 말한 것이겠는가?
用是 貶荀彧 非其罪矣
이것을 가지고 순욱荀彧을 폄하함은 그의 죄가 아니다.
且使魏武爲帝 則彧爲佐命元功하야 與蕭何同賞矣어늘 彧不利此하고 而利於殺身以邀名 豈人情乎
또 만일 무제武帝가 황제가 되었다면 순욱荀彧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어서 소하蕭何와 똑같은 상을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순욱荀彧이 이것을 이롭게 여기지 않고 몸을 죽여 명예를 얻음을 이롭게 여기는 것이 어찌 인정人情이겠는가.”
[新增]胡氏曰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操自起兵으로 惟有奉迎獻帝하야 出於危迫하니 謂一時之功 可也
조조曹操는 군대를 일으킨 뒤로 오직 헌제獻帝를 받들어 맞이하여 위험하고 급박한 상황에서 나오게 하였으니, 한때의 공이 있다고 이르는 것이 가할 것이다.
其事雖順이나 其情則逆이요 自餘東征西伐하야 禽(擒)呂布, 破袁紹하고 下荊州, 定關中注+[頭註]荊州 劉表 關中 張魯 皆闢土討貳하야 以自封殖이니 何與於漢哉
그러나 그 일은 비록 하였으나 그 마음은 이었으며, 기타 동쪽을 정벌하고 서쪽을 정벌해서 여포呂布를 사로잡고 원소袁紹을 격파하고 형주荊州를 함락하고 관중關中을 평정한 것은注+[頭註]하형주下荊州 정관중定關中:형주荊州유표劉表요, 관중關中장로張魯이다. 모두 영토를 개척하고 자기를 배반한 자들을 토벌하여 자신의 세력을 북돋워 증식한 것이니, 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而司馬氏稱荀彧佐操하야 其功 不在管仲之後라하니
사마씨司馬氏(司馬溫公)는 순욱荀彧조조曹操를 보좌하여 그 공이 관중管仲의 뒤에 있지 않다고 칭찬하였다.
夫齊威注+[頭註]卽桓公이라 抑戎狄하고 事周室하야 仗正義以立襄王注+[附註]襄王 惠王子鄭也 大叔帶 襄王弟 惠后之子也 有寵於惠后하야 欲立之러니 惠王崩 襄王懼不得立하야 告難于齊한대 齊侯與王人率諸侯盟于洮하니 而後 襄王位定하니라하야 中國君臣父子之道 皆得焉하니
그러나 나라 환공桓公注+[頭註]제위齊威는 곧 나라 환공桓公이다. 융적戎狄을 억제하고 나라 왕실을 섬겨서 정의正義에 의거하여 양왕襄王을 세워서注+[附註]양왕襄王혜왕惠王의 아들 이고, 태숙대太叔帶양왕襄王의 아우로 혜후惠后의 아들이었는데, 혜후惠后에게 총애를 받았으니, 혜후惠后태숙대太叔帶를 세우고자 하였다. 혜왕惠王이 죽자 양왕襄王은 자신이 왕위王位에 서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나라에 난을 고하니, 제후齊侯(桓公)가 왕인王人(천자의 낮은 신하)과 더불어 제후를 거느리고 에서 맹약하였다. 그리하여 뒤에 양왕襄王의 지위가 안정되었다. 중국中國군신君臣부자父子가 모두 올바름을 얻었다.
孔子以爲一匡天下하야 民到于今 受其賜者 豈嘗陵迫君父하고 弑天下母注+[附註]董承女爲貴人이러니 操誅承하고 求貴人殺之한대 帝以有姙爲請호되 不得이라 皇后伏氏懼하야 令父完密圖之라가 事泄한대 操使郗慮勒兵入宮하야 收后牽出하니 時帝在外殿이라 后被髮徒跣하고 泣過訣曰 不能相活耶 帝曰 我亦不知命在何時로다 顧慮曰 郗公 天下寧有是耶 遂將后以幽死하고 所生二皇子 皆殺之하고 兄弟及宗族死者 百餘人이라 如操之所爲乎
공자께서 관중管仲을 일러 ‘한 번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에 이르도록 그 은혜를 입고 있다.’고 하셨는 바, 어찌 일찍이 군부君父를 능멸하고 핍박하며 천하의 어머니인 황후皇后를 시해하기를 조조曹操처럼 한 적이 있었는가.注+[附註]동승董承의 딸이 귀인貴人이 되었는데, 조조曹操동승董承을 죽이고 귀인貴人을 죽일 것을 요구하자, 황제가 귀인貴人이 임신하였음을 이유로 살려 줄 것을 청하였으나 조조曹操가 허락하지 않았다. 황후 복씨伏氏가 두려워하여 아버지 복완伏完으로 하여금 은밀히 도모하게 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자, 조조曹操치려郗慮로 하여금 군대를 무장하여 궁중으로 들어가서 황후를 잡아 끌고 나오니, 이때 황제가 외전外殿에 있었다. 황후가 산발을 한 채 맨발로 울면서 찾아가 영결하며 말하기를 “살려 줄 수 없습니까?”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나 또한 목숨이 언제까지 붙어 있을지 알 수 없다.” 하고는 치려郗慮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치공郗公아,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하였다. 마침내 황후를 데리고 가서 유폐하여 죽이고 그가 낳은 두 황자皇子를 모두 죽였으며 형제兄弟(오라비)와 종족宗族 중에 죽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五伯(霸)는 三王之罪人也 曹操 五伯之罪人也
오패五霸삼왕三王의 죄인이고, 조조曹操오패五霸의 죄인이다.
功非扶漢이요 志在簒君하니 直亂臣賊子之魁桀耳
그의 나라를 부지한 것이 아니요 뜻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함에 있었으니, 한갓 난신적자亂臣賊子괴수魁首일 뿐이다.
雖僞定一時 而不克混一하고 甫三世 曹芳, 髦, 璜 已在人掌握하야 呼來斥去하야 僅同奴隷하고 或乃死於錯(措)刃注+[頭註] 與措通이라 賈充與髦戰할새 太子舍人成濟 抽戈刺髦하니라하니 天之施報 疎而不失이라
비록 한 세상을 거짓으로(임시로) 평정하였으나 통일하지 못하였으며, 겨우 3 만에 조방曹芳조모曹髦조황曹璜이 이미 남의 손아귀에 들어가서 부르면 오고 배척하면 떠나가서 겨우 노예와 같았고 혹은 마침내 칼날을 쥔注+[頭註]와 통한다. 가충賈充조모曹髦와 싸울 때에 태자사인太子舍人 성제成濟가 창을 뽑아 조모曹髦를 찔러 죽였다. 자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하늘의 보시報施가 성글면서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이나 反道敗德之人 狃於姦宄하야 終不懲也로다
그러나 를 배반하고 을 무너뜨리는 사람들이 간사한 짓에 익숙하여 끝내 징계하지 못하였다.”
劉備在葭萌 龐統 勸備襲成都注+[頭註]劉璋이라하니 備遂進據涪城하다
유비劉備가맹현葭萌縣에 있을 때에 방통龐統유비劉備에게 성도成都注+[頭註]성도成都유장劉璋이다. 를 습격할 것을 권하니, 유비劉備가 마침내 전진하여 부성涪城을 점거하였다.

통감절요(4)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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