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卯] 〈梁太淸元年이요 魏大統十三年이요 東魏武定五年이라〉
機權之際에 變化若神하고 制馭軍旅에 法令嚴肅하며 聽斷明察하니 不可欺犯이라
自念己與高氏有隙하고 內不自安하야 據河南叛하야 歸于魏하고
又遣丁和來
하야 上表言
호되 臣與高澄
注+[頭註]歡之子요 洋之兄이라有隙
하니 請擧十三州
하야 內附
하노이다 上
이 召群臣廷議
하니
尙書僕射謝擧等이 皆曰 頃歲에 與魏通和하야 邊境이 無事어늘
今納其叛臣이면 竊謂非宜라하노이다 上曰 得景則塞北을 可淸이니 機會難得이라
然
이나 意未決
하야 嘗獨言
호되 我國家如金甌注+[頭註]甌는 小盆也라하야 無一傷缺이어늘
脫致注+[頭註]脫은 或然之辭라紛紜이면 悔之何及이리오 朱
揣知上意하고 對曰 聖明御宇
에 南北歸仰
하니 拒而不內(納)이면 恐絶後來之望
하노이다
周弘正
注+[通鑑要解]時에 平西諮議也라이 善占候
러니
前此에 謂人曰 國家數年後에 當有兵起라하더니 及聞納景하고 曰 亂階在此矣라하니라
○ 東魏高澄
이 入朝于鄴
注+[頭註]東魏都鄴하니 見上甲寅年이라하다
○ 東魏(靖)[靜]帝
注+[頭註]靜字之誤라 美容儀
하고 膂力過人
하야 射無不中하고 好文學하야 從容沈雅하니 時人
이 以爲有孝文風烈
注+[頭註]靜帝善見은 乃文帝宏之孫이라이라
大將軍澄이 深忌之어늘 帝謀誅澄이라가 事覺하니 澄이 幽帝於含章堂하다
○ 東魏使軍司杜弼
로 作檄移梁
注+[頭註]魏侯景이 以河南降魏라가 又以河南으로 叛附于梁하니 梁封景爲河南王하고 遣兵援之하니라曰 侯景
이 自生貳하야 遠託關, 隴
하고
依憑奸僞
注+[頭註]關隴과 奸僞는 皆指西魏라하야 逆主注+[頭註]指魏主寶炬라로 定君臣之分하고 僞相注+[頭註]指宇文泰라으로 結兄弟之親하니 豈曰無恩
이리오마는 終成難養
이어늘
今乃
授之以利器注+[頭註]威權也라하고 하니 使其勢得容奸
하고 時堪乘便
이면 則必自據淮南
하야 亦欲稱帝
注+[頭註]用黥布事하니 見漢高乙巳年이라하리니
但恐
楚國亡猿에 禍延林木하고 城門失火에 殃及池魚注+[附註]池魚는 人姓名이라 風俗通에 有池仲魚러니 城門失火하야 仲魚燒死라 故로 諺曰 城門失火에 殃及池魚라하니라 一云汲池救火하야 患及於魚也라라하더니 其後
에 梁室禍敗 皆如弼言
하니라
정묘(547) - 양梁나라 태청太淸 원년元年이고, 위魏나라 대통大統 13년이고, 동위東魏 무정武定 5년이다. -
정월에 동위東魏 헌무왕獻武王 고환高歡이 죽었다.
고환高歡은 성품이 침착하고 과묵하여 종일토록 엄숙하니, 사람들이 그 깊이를 측량하지 못하였다.
임기응변할 때에는 변화함이 신출귀몰하고, 군대를 제어할 때에는 법령이 엄숙하며, 정사를 처단함에 분명히 살피니, 속이거나 범하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문무백관들이 모두 그를 위해 쓰여지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고환高歡이 죽자〉 자신과 고씨高氏가 틈이 있음을 염려하고 내심 스스로 불안해하여 하남河南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서위西魏에 귀부歸附하였으며,
또
정화丁和를 보내어
양梁나라에 와서
표문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고징高澄注+[頭註]고징高澄은 고환高歡의 아들이고, 고양高洋의 형이다. 과 틈이 있으니, 13
주州를 들어
내응內應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上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조정에서 의논하였다.
상서복야尙書僕射 사거謝擧 등이 모두 말하기를 “지난해 서위西魏와 화친하여 변경에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반역한 신하를 받아들이는 것은 삼가 생각건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上이 말하기를 “후경侯景을 얻으면 변방 북쪽을 깨끗이 평정할 수 있으니 이런 기회는 얻기 어렵다.
어찌 고지식하여 변통할 줄 모르는가.” 하였다.
그러나 마음에 아직 결정하지 못하여 일찍이 혼잣말로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금구金甌注+[頭註]구甌는 작은 동이이다.와 같아서 한 곳도 흠난 곳이 없다.
이제 갑자기 후경侯景의 땅을 받는다면 이것이 어찌 사리에 맞는 것이겠는가.
만일 이로 인하여 혼란을 야기한다면
注+[頭註]탈脫은 혹시 그럴까 의심하는 말이다.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주이朱异가 임금의 뜻을 미루어 헤아리고는 대답하기를 “
성명聖明하신 군주께서 천하를 다스리심에 남쪽과 북쪽에서
귀부歸附하여 우러러 사모하니, 이들을 막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후로
귀부歸附하려는 자들의 희망을 끊어버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이에 후경侯景을 받아들이기로 의론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후경侯景을 대장군으로 삼고 하남왕河南王에 봉하였다.
주홍정周弘正注+[通鑑要解]주홍정周弘正은 이 당시 평서자의참군平西諮議參軍이었다. 이
천상天象의 변화를 보고 길흉을 잘 점쳤다.
이 일에 앞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수년 뒤에 병란이 일어날 것이다.” 하였는데, 후경侯景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화란禍亂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 하였다.
○
동위東魏의
고징高澄이
업성鄴城에 들어가 조회하였다.
注+[頭註]동위東魏는 업성鄴城에 도읍하였으니, 앞의 갑인년조甲寅年條(534)에 보인다.
○
동위東魏의
정제靜帝注+[頭註]정靖은 정자靜字의 오자誤字이다. 는 용모가 아름답고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었으며,
문학文學을 좋아하여 행동거지가 조용하고 침착하며 고상하니, 당시 사람들이 “
효문제孝文帝의 풍채가 있다.”
注+[頭註]정제靜帝 원선견元善見은 바로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원굉元宏의 손자이다. 고 하였다.
대장군 고징高澄이 그를 매우 시기하였으므로 황제가 고징高澄을 도모하여 죽이고자 하다가 일이 발각되니, 고징高澄이 황제를 함장당含章堂에 유폐하였다.
○
동위東魏에서
군사軍司 두필杜弼을 시켜
격문檄文을 지어
양梁나라에 보내어
注+[頭註]동위東魏의 후경侯景이 하남河南을 가지고 서위西魏에 항복했다가 또 하남河南을 가지고 배반하여 양梁나라에 붙으니, 양梁나라가 후경侯景을 봉하여 하남왕河南王으로 삼고 군대를 보내어 구원하였다. 이르기를 “
후경侯景이 스스로 의심하여 두마음을 품어서 멀리
관중關中과
농隴 지방에 몸을 의탁하며
간사하고 참람한 조정(西魏)에 의지하여
注+[頭註]遠託關隴 의빙간위依憑奸僞:관關‧농隴과 간위奸僞는 모두 서위西魏를 가리킨다. 반역한 군주인
서위西魏의
문제文帝(元寶炬)
注+[頭註]반역한 군주는 위주魏主인 원보거元寶炬를 가리킨다. 와 군신간의 분수를 정하고 가짜 조정의 정승인
우문태宇文泰注+[頭註]가짜 재상은 우문태宇文泰를 가리킨다. 와 형제간의 친분을 맺었으니, 어찌 은혜가 없다고 말하겠는가마는 반역한
소인小人은 끝내 기르기가 어려운 법인데,
이제 도리어 저들에게 예리한 병기
注+[頭註]이기利器는 위세와 권력을 이른다. 를 주고 허술하게 관리하여
도심盜心을 불러일으키니, 만약 형세상 간교한 계책을 행할 수 있고 시기가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에 편리하다고 판단되면 반드시 스스로
회남淮南을 점거하여 또한 황제라 칭하고자 할 것이다.
注+[頭註]경포黥布의 고사故事를 인용한 것이니, 한漢나라 고조高祖 을사년조乙巳年條(B.C.196)에 보인다.
다만
초楚나라에서 원숭이를 잃자 화가 숲의 나무에 뻗치고, 성문에 불이 나자 재앙이
지어池魚에게 미칠까
注+[附註]지어池魚는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풍속통의風俗通義》에 “지중어池仲魚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성문城門에 불이 나서 지중어池仲魚가 불에 타 죽었다.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성문城門에 불이 나자 재앙이 지어池魚에게 미쳤다.’ 한다.” 하였다. 일설一說에는 “연못의 물을 길어다 불을 꺼서 재앙이 물고기에게 미쳤다.”고 한다. 두렵다.” 하였는데, 그 뒤에
양梁나라의
화패禍敗가 모두
두필杜弼의 말처럼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