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巳] 〈宋主子業景和元이요 太宗泰始元年이요 魏和平六年이라〉
初
에 魏世祖
注+[頭註]太武帝燾라經營四方
하니 國頗虛耗
하고 重以內難
注+[頭註]內難은 謂見弑也니 在上壬辰年이라[通鑑要解]內難은 라하야 朝野楚楚注+[頭註]苦楚不安之貌라러니 高宗
注+[頭註]文成帝濬이라이 嗣之
하야 與時消息하야 靜以鎭之하야 懷集中外하니 民心이 復安이라
顯祖弘
注+[原註]高宗長子也니 是爲顯祖獻文皇帝라이 卽位
하니 時年十二
라
○ 宋沈慶之 復啓聽民私鑄錢하니 由是로 錢貨亂敗하야
千錢
이 長不盈三寸
이요 大小稱此
하니 謂之
鵝眼錢이라하고 劣於此者
는 謂之
環錢注+[通鑑要解]綖與線同하니 私箭切이라 貫之綖하면 其狀如環故로 曰綖環이라이라
貫之以縷
하야 入水不沈
하고 隨手破碎
하니 市井
이 不復料數
注+[頭註]料는 計也라라
十萬錢
이 不盈一掬
注+[通鑑要解]今俗謂兩手所捧을 爲一掬이니 則數合耳라하고 斗米一萬
이라 商貨不行
이러라
○ 宋主子業이 殘暴日甚하니 宗室百官이 濫被誅殺이라
壽寂之
注+[頭註]子業之左右라弑之
하고 迎湘東王彧
하야 卽位
하고 罷
하고 禁鵝眼, 綖環錢
하고 餘皆通用
하다
廢帝之立에 凶悖轉甚하야 誅殺無度하야 內外反目이라
假使中才之君이 有一于此라도 足殞其軀온 況兼此衆惡하니 不亡其何待乎아
을사(465) - 송주宋主 유자업劉子業의 경화景和 원년元年이고, 태종太宗(劉彧)의 태시泰始 원년元年이며, 위魏나라 화평和平 6년이다. -
처음에
위魏나라
세조世祖注+[頭註]세조世祖는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이다. 가
사방四方을 경영하니, 나라가 자못 허약해지고 내란까지 겹쳐서
注+[頭註]內難은 시해당한 것을 이르니, 앞의 임진년조壬辰年條(452)에 보인다. [通鑑要解]內難은 종애宗愛가 이미 세조世祖를 시해하고, 또다시 남안왕南安王 탁발여拓跋余를 시해한 것이다. 조야朝野가 고통으로 신음하였는데,
注+[頭註]초초楚楚는 고생하여 편안하지 않은 모양이다. 고종高宗注+[頭註]고종高宗은 문성제文成帝 탁발준拓跋濬이다. 이 왕위를 이어받은 뒤에는
시세時世에 따라 변화하여 고요함으로 국가를 진정시켜
중외中外를 회유하고 편안하게 하니,
민심民心이 다시 안정되었다.
현조顯祖 탁발홍拓跋弘注+[原註]탁발홍拓跋弘은 고종高宗의 장자長子이니, 이가 바로 현조顯祖 헌문황제獻文皇帝이다. 이 즉위하니 이때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풍태후馮太后가 조정에 임어臨御하여 제制를 칭하였다.
○ 송宋나라 심경지沈慶之가 다시 아뢰어 백성들이 사사로이 돈을 주조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니, 이로 말미암아 화폐가 문란해지고 조악해졌다.
천전千錢을 꿴 길이가 채 세 치가 못 되고 돈의 크기가 이와 서로 걸맞으니, 이것을
아안전鵝眼錢이라 일렀으며 이보다 못한 것은
연환전綖環錢注+[通鑑要解]연綖은 선線과 같으니, 음이 私箭切(선)이다. 돈을 끈으로 꿰면 돈을 꿴 모양이 고리와 같으므로 연환綖環이라고 한 것이다. 이라 일렀다.
이것을 끈으로 꿰어 물속에 넣으면 가라앉지 않고 손으로 만지면 부서지니,
시정市井에서 돈을 사용할 때 다시는
다소多少의
수數를 헤아리지
注+[頭註]요料는 계산하는 것이다. 않았다.
십만 전이 한 줌
注+[通鑑要解]지금 풍속에 양손으로 받는 것을 한 움큼[一掬]이라 하니, 몇 홉일 뿐이다. 이 못 되고 쌀 한 말의 값이 1만 전이니, 장사와 무역이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였다.
○ 송주宋主 유자업劉子業이 잔인하고 포악함이 날로 심하니, 종실宗室과 백관百官들이 〈죄가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고〉 함부로 주살당하였다.
수적지壽寂之注+[頭註]수적지壽寂之는 유자업劉子業의 근신近臣이다. 가
송주宋主를 시해하고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을 맞이하여 즉위하게 하고는
이수전二銖錢을 없애고
아안전鵝眼錢과
연환전綖環錢을 금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통용하였다.
“폐제廢帝(劉子業)가 즉위하자 흉악함과 패역함이 더욱 심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한도가 없어서 내외內外가 반목하였다.
가령 중등의 재주를 지닌 군주가 이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족히 목숨을 잃을 터인데, 하물며 이 여러 가지 악惡을 겸하였으니, 망하지 않고 무엇을 기대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