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辰]三年이라 〈燕光始四요 秦弘始六이요 魏天賜元年이라〉
劉裕從桓脩
注+[頭註]徐兗州刺史, 安成王이라入朝
어늘 玄謂王
注+[頭註]司徒니 爲玄佐命元臣이라曰 裕
風骨不常하니 蓋人傑也
라하더라
玄后劉氏 有智鑑이라 謂玄曰 劉裕龍行虎步하고 視瞻不凡하니 恐終不爲人下하노니 不如早除之라한대
玄曰 我方平蕩
注+[頭註]蕩은 滌也라中原
호니 非裕
면 莫可用者
라
○ 裕與何無忌
注+[頭註]琅琊內史라로 同舟還京口
하야 密謀復興晉室
하다
劉毅家於京口
하야 亦與無忌
로 謀討玄
이러니 無忌曰 天下草澤之中
에 非無英雄也
니라 毅曰 所見
에 唯有劉下邳
注+[原註]裕爲下邳太守하니라니라
○ 二月乙卯에 裕託以遊獵하고 與無忌로 收合徒衆하야 得百餘人하다
詰旦
注+[頭註]平旦也라에 京口城開
어늘 無忌
傳詔服
하고 稱勅居前
하니 徒衆
이 隨之齊入
하야 卽斬桓脩以
注+[釋義]行示也라하다
或曰 劉裕等
은 烏合
注+[頭註]如烏之聚散이니 言無定也라微弱
하야 勢必無成
하리니 陛下何慮之深
이니잇고
玄曰 劉裕
는 足爲一世之雄
이요 劉毅
는 家無
石之
注+[釋義]襜은 齊人이 名小爲襜이라 石은 斗石也라로되 樗蒲에 一百萬하고 何無忌
는 酷似其舅
注+[頭註]酷은 甚也라 舅는 謂劉牢之라어늘
○ 三月에 裕與劉毅等으로 分爲數隊하야 竝進할새 裕以身先之하니 將士皆殊死戰하야 無不一當百이요 呼聲이 動天地라
時
에 東北風
이 急
이어늘 因縱火焚之
하니 煙火
注+[釋義]火飛也라天
하고 鼓譟之音
이 震動京邑
하니 諸軍
이 大潰
라
玄이 帥親信數千人하고 走趨石頭하니 裕入建康하야 帥百官하야 奉迎乘輿하고 誅玄宗族在建康者하다
○ 裕始至建康
하야 諸大處分
注+[釋義]處는 區處也요 分은 分別也라을 皆委於劉穆之
注+[頭註]裕召爲主簿라하니 倉猝立定에 無不允이라
裕遂託以心腹하야 動止를 諮焉하니 穆之亦竭節盡誠하야 無所遺隱이러라
時
에 晉政寬弛
하야 綱紀不立하고 豪族陵縱
하야 小民窮蹙
하며 重以司馬元顯
의 政令違
注+[釋義]舛은 錯謬也라하니 桓玄
이 雖欲釐整
이나 而科條繁密
하야 衆莫之從
이러니
穆之斟酌時宜
하야 隨方矯正
注+[頭註]揉曲爲矯니 言隨事矯揉하야 使歸於正이라하고 裕
以身範物하야 先以威禁
하니 內外百官
이 皆肅然奉職
하야 不盈旬日
에 風俗
이 頓改
러라
桓玄이 挾帝하고 單舸西走하야 入江陵이어늘 遂斬之하다
○ 魏主珪 置六謁官
하니 準古六卿
이요 又官名
을 多不用漢, 魏之舊
하고 倣上古龍官, 鳥官
注+[附註]伏羲氏受命時에 有龍瑞故로 以龍紀事하야 百官師長을 皆以龍爲名號하고 少昊氏之時에 鳳鳥適至故로 以鳥紀事하야 百官師長을 皆以鳥爲名號하니라하야 謂諸曹之使
하야 爲鳧鴨
이라하니 取其飛之迅疾也
요 謂候官伺察者
하야 爲白鷺
라하니 取其延頸遠望也
라
원흥元興 3년(갑진 404) - 연燕나라 광시光始 4년이고, 진秦나라 홍시弘始 6년이고, 위魏나라 천사天賜 원년元年이다. -
유유劉裕가
환수桓脩注+[頭註]환수桓脩는 서주연주자사徐州兗州刺史‧안성왕安成王으로 있었다. 를 따라
입조入朝하자,
환현桓玄이
왕밀王謐注+[頭註]왕밀王謐은 사도司徒이니, 환현桓玄의 좌명원신佐命元臣이다. 에게 이르기를 “
유유劉裕는 풍채와 골격이 비범하니, 인걸이다.” 하였다.
환현桓玄의 아내인 유씨劉氏는 지모智謀와 식감識鑑이 있었는데, 환현桓玄에게 이르기를 “유유劉裕는 걸음을 걷는 모양이 용과 범 같고 눈초리가 비범하여 끝내 남의 아랫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니, 일찌감치 제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환현桓玄이 말하기를 “내가 막 중원을 평정
注+[頭註]탕蕩은 씻어내는 것이다. 하려 하니,
유유劉裕가 아니면 쓸 만한 자가 없다.
관중關中과 황하黃河 지방이 평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별도로 의논하겠다.” 하였다.
○
유유劉裕가
하무기何無忌注+[頭註]하무기何無忌는 낭야내사琅琊內史이다. 와 함께 배를 같이 타고
경구京口로 돌아와 은밀히
진晉나라 황실을 부흥할 것을 모의하였다.
유의劉毅가
경구京口에 거주하여 또한
하무기何無忌와 함께
환현桓玄을 토벌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하무기何無忌가 말하기를 “천하의 초야 가운데에 영웅이 없지 않다.” 하니,
유의劉毅가 말하기를 “내가 본 바로는 오직
유하비劉下邳(劉裕)
注+[原註]유유劉裕가 이때 하비태수下邳太守로 있었다. 가 있을 뿐이다.” 하였다.
하무기何無忌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고서 돌아가 이것을 유유劉裕에게 고하고 마침내 유의劉毅와 함께 계책을 정하였다.
○ 2월 을묘일乙卯日(27일)에 유유劉裕가 사냥을 나간다고 칭탁하고서 하무기何無忌와 함께 무리를 수합하여 백여 명을 얻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注+[頭註]힐단詰旦은 평단平旦(동틀 때)이다. 경구京口의 성문이 열리자,
하무기何無忌가
전조傳詔(詔令을 전달하는 관원)의 옷을 입고
칙사勅使라 칭하고 앞에 있으니, 무리가 뒤를 따라 일제히
성城에 들어가서 곧바로
환수桓脩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에게 조리돌려 보였다.
注+[釋義]순徇은 다니면서 보이는 것이다.
무리가 유유劉裕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으니, 환현桓玄이 근심하고 두려워함이 특히 심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
유유劉裕 등은
오합지졸烏合之卒注+[頭註]오합烏合은 까마귀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일정함이 없음을 말한다. 이라 역량이 미약하여 형세를 살펴보건대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폐하께서는 어찌 깊이 염려하십니까?” 하니,
환현桓玄이 말하기를 “
유유劉裕는 한 시대의 영웅이 될 만하고,
유의劉毅는 집안에 한 말과 한 섬의 저축
注+[釋義]첨襜은 제齊나라 사람들이 작은 술단지를 이름하여 첨襜이라 한다. 석石은 말[斗]과 섬[石]이다. 도 없었으나
저포樗蒲 놀이할 때에 한 번에 백만 전을 걸었으며,
하무기何無忌는 모습이 그의 외삼촌(劉牢之)과 매우 흡사한데,
注+[頭註]혹酷은 매우이다. 외숙外叔은 유뇌지劉牢之를 이른다.
이들이 함께 대사大事를 일으켰으니, 어찌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하였다.
○ 3월에 유유劉裕가 유의劉毅 등과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함께 진군할 적에 유유劉裕가 앞장서서 솔선하니, 장병들이 모두 결사적으로 싸워서 일당백一當百의 기세로 싸우지 않는 자가 없었고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때 동북풍이 맹렬히 불자, 이 틈을 타서 불을 놓아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까지 치솟고
注+[釋義]표熛는 불똥이 튀는 것이다. 북소리와 고함 소리가
경읍京邑을 진동하여 〈
환겸桓謙 등의〉 여러 군대가 크게 무너졌다.
환현桓玄이 친애하고 신임하는 자 수천 명을 거느리고 달아나 석두성石頭城으로 향하니, 유유劉裕가 건강建康에 들어가 백관을 거느리고 심양尋陽에서 승여乘輿(황제)를 맞이하고 건강建康에 있는 환현桓玄의 종족宗族들을 죽였다.
○
유유劉裕가 처음
건강建康에 이르러서 모든 중대사의 처분
注+[釋義]처處는 구분하여 처리하는 것이고, 분分은 분별分別이다. 을
유목지劉穆之注+[頭註]유목지劉穆之는 유유劉裕가 불러서 주부主簿를 삼았다. 에게 다 맡기니, 창졸간에 신속하게 결정함에 사람들이 지당하게 생각하고 흡족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유유劉裕가 마침내 그를 심복心腹으로 삼아 어떤 일이든 막론하고 그에게 자문하니, 유목지劉穆之 또한 충절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빠뜨리거나 숨기는 바가 없었다.
이때
진晉나라의 정사가 해이해져
기강紀綱이 서지 않고
호족豪族들이 교만하고 방자해서
서민庶民들이 곤궁하였으며 여기에
사마원현司馬元顯의 정사와 명령이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니,
注+[釋義]重以司馬元顯 정령위천政令違舛:천舛은 어그러지고 잘못됨이다. 환현桓玄이 비록 정리하여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법조문法條文이 번거롭고 세밀하여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었다.
유목지劉穆之가
시의時宜를 참작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바로잡고
注+[頭註]휘어서 구부리는 것을 교矯라 하니, 일에 따라 바로잡아서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유유劉裕가 앞장서서 남들에게 모범이 되어 먼저 위엄으로 금지시키니, 내외의 백관들이 모두 숙연히 직책에 종사해서 열흘이 못 되어 풍속이 크게 바뀌었다.
○ 4월에 유의劉毅와 하무기何無忌 등이 심양성尋陽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환현桓玄이 황제를 끼고 한 척의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도망하여 강릉江陵으로 들어가자, 〈익주독호益州督護 풍천馮遷이〉 마침내 환현桓玄을 목 베었다.
승여乘輿(황제)가 강릉에서 반정反正(復位)하였다.
○
위주魏主 탁발규拓跋珪가 여섯 명의
알관謁官을 두니 옛날의
육경六卿을 따른 것이요, 또 관직명에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때의 옛 명칭을 대부분 사용하지 않고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용관龍官과
조관鳥官注+[附註]복희씨伏羲氏가 천명天命을 받았을 때에 용龍의 상서가 있었으므로 용龍으로써 일을 기록하여 백관百官의 사장師長을 모두 용龍으로써 명칭을 삼았고, 소호씨少昊氏 때에 봉조鳳鳥가 마침 이르렀으므로 새로써 일을 기록하여 백관百官의 사장師長을 모두 새로써 명칭을 삼았다. 을 따라서 여러
조曹의
사자使者를 일러
부압鳧鴨(오리)이라 하였으니
부압鳧鴨은 나는 것이 신속한 뜻을 취한 것이요,
척후斥候와
사찰伺察을 맡은 자를 일러
백로白鷺라 하였으니
백로白鷺는 목을 늘여 멀리 바라보는 뜻을 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