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伐韓
하야 取陽城負黍
注+[釋義]徐廣曰 陽城에 有負黍聚라 括地志云 陽城은 洛州縣也요 負黍亭은 在陽城西南三十五里하니 故周之邑이라 左傳云 鄭伐周負黍 是也니 戰國屬韓이라 慈湖王氏曰 取者는 春秋傳例曰 克邑에 不用師徒曰取라 左傳昭四年에 取鄫하니 言易也라하니 是已라하니 斬首四萬
이요 伐趙
하야 取二十餘縣
하니 斬首九萬
이라
赧王
이 恐
하야 倍(背)秦
하고 與諸侯約從
하야 欲伐秦
이러니 秦
이 使將軍
注+[釋義]將軍之名也니 史失其姓이라 前漢百官表曰 前後左右將軍은 皆周末官이니 秦因之라 位上卿이요 漢不常置하니라로 攻西周
하니 赧王
이 入秦
하야 頓首
注+[頭註]下首也라 拜而額至手伏地久라가 方起를 謂之稽首니 稽는 遲也라 拜而額至手卽起를 謂之頓首요 拜而頭不至地卽起를 謂之控首라受罪
하고 盡獻其邑三十六
과 口三萬
이어늘
○ 先是
에 東, 西周分治
注+[釋義]雙湖胡氏曰 赧王微弱하야 東西周分王正理하야 各居一都라 故曰東西周라 高誘曰 西周王城은 今河南이요 東周鞏은 今成周洛陽也라러니 赧王
이 徙都西周
注+[釋義]自洛陽徙河南이라하니 〈出史記〉 蓋以微弱
하야 不能主盟
이라
진秦나라가
한韓나라를 정벌하여
양성陽城의
부서負黍를 점령하니
注+[釋義]서광徐廣이 말하기를 “양성陽城에 부서취負黍聚가 있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양성陽城은 낙주현洛州縣이고 부서정負黍亭은 양성陽城 서남쪽 35리 지점에 있으니, 옛날 주周나라 읍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정鄭나라가 주周나라 부서負黍를 쳤다.’는 것이 이곳이다.” 하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한韓나라에 속하였다. 자호왕씨慈湖王氏가 말하였다. “취取는 《춘추집전찬례春秋集傳纂例》에 이르기를 ‘읍邑을 점령할 적에 군대를 사용하지 않고 취하는 것을 취取라고 한다.’ 하였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소공昭公 4년年에 ‘증鄫을 취取하였으니, 쉬움을 말한 것이다.’ 한 것이 이것이다.” 수급首級을 벤 것이 4만이었고,
조趙나라를 정벌하여 20여
현縣을 점령하니
수급首級을 벤 것이 9만이었다.
난왕赧王이 두려워하여
진秦나라를 배반하고
제후諸侯들과
합종合從을 약속하여
진秦나라를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진秦나라가 장군
규樛를
注+[釋義]규樛는 장군의 이름이니, 성姓은 사책史策에 전해지지 않는다. 《한서漢書》 〈백관표百官表〉에 이르기를 “전후좌우前後左右의 장군將軍은 모두 주周나라의 말단 관직이니, 진秦나라가 이것을 따랐다. 지위는 상경上卿이고, 한漢나라 때에는 항상 설치하지는 않았다.” 하였다. 시켜
서주西周를 공격하니,
난왕赧王이
진秦나라에 들어가 머리를 조아려
注+[頭註]돈수頓首는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절하여 이마가 손에 닿아 오랫동안 엎드려 있다가 비로소 일어나는 것을 계수稽首라 이르니 계稽는 지체한다는 뜻이다. 절하여 이마가 손에 닿으면 즉시 일어나는 것을 돈수頓首라 이르고, 절하여 머리가 땅에 닿지 않고 즉시 일어나는 것을 공수控首라 이른다. 죄를 받고 고을 36개와
호구戶口 3만을 모두 바쳤다.
진秦나라가 그 바치는 것을 받고 난왕赧王을 주周나라로 돌려보냈는데, 이 해에 난왕赧王이 붕崩하였다.
이보다 앞서
주周나라가
동주東周와
서주西周로 나뉘어 다스려졌는데
注+[釋義]쌍호호씨雙湖胡氏(胡一桂)가 말하였다. “난왕赧王이 미약하여 주周나라가 동주東周와 서주西周로 나뉘어 다스려져서 각각 한 도읍에 거하였기 때문에 동서주東西周라 한 것이다. 고유高誘가 말하기를 ‘서주西周의 왕성王城은 지금의 하남河南이고, 동주東周의 공鞏은 지금의 성주成周 낙양洛陽이다.’ 하였다.” 난왕赧王이 도읍을
서주西周로 옮기니,
注+[釋義]난왕赧王이 도읍을 낙양洛陽으로부터 하남河南으로 옮긴 것이다. - 《
사기史記》에 나옴 - 이는 미약하여
맹약盟約을 주관할 수 없어서였다.
무공武公에게 의지하였다.
注+[釋義]무공武公은 서주西周의 임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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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 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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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 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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