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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7)

통감절요(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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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己巳]十七年이라
宇文融 性精敏하야 應對辯給注+[頭註]口捷也 이러니 以治財賦 得幸於上 始廣置諸使注+[釋義]王氏曰 時置立括田等使二十九人하니라 하야 競爲聚斂이라
由是 百官 寖失其職하고 而上心益侈하니 百姓 皆怨苦之러라
爲人 疎躁多言하고 好自矜伐하야
在相位 謂人曰 使吾居此數月이면 則海內無事矣라하더니 凡爲相百日而罷하다
是後 言財利以取貴仕者 皆祖於融하니라
〈出本傳〉


개원開元 17년(기사 729)
우문융宇文融이 성질이 정밀하고 민첩하여 응대할 적에 말을 잘하였는데,注+[頭註]변급辯給은 말을 잘하는 것이다. 재정財政부세賦稅를 잘 다스려 에게 총애를 받게 되자, 비로소 여러 使를 널리 두어서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우문융宇文融이 이 당시에 괄전사括田使 등 29명의 使를 두었다.” 다투어 취렴聚斂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관들이 점차 그 직책을 잃고 의 마음이 더욱 사치해지니,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괴로워하였다.
우문융宇文融은 사람됨이 엉성하고 조급하고 말이 많으며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기를 좋아하였다.
정승의 지위에 있을 적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약 이 직책을 몇 달만 맡으면 온 천하가 무사태평할 것이다.” 하였는데, 정승이 된 지 100일 만에 파면되었다.
이후로 재리財利를 말하여 귀한 벼슬을 취하는 것이 모두 우문융宇文融에게서 비롯되었다.
- 《신당서新唐書우문융전宇文融傳》에 나옴 -



통감절요(7) 책은 2022.01.1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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