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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3)

통감절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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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新莽三年〉
신미(11) - 신망新莽 3년 -
恃府庫之富하고 欲立威匈奴하야 乃遣孫(惠)[建]等하야 率十二將하고 分道竝出이어늘
왕망王莽부고府庫의 부유함을 믿고 흉노匈奴에게 위엄을 세우려고 하여 마침내 손건孫建 등을 보내어 12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함께 출격하게 하였다.
嚴尤諫曰
이에 엄우嚴尤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匈奴爲害 所從來久矣로되 未聞上世有必征之者也니이다
흉노匈奴중국中國의 폐해가 된 지 유래가 오래되었으나 상고시대上古時代에 반드시 정벌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後世三家周, 秦, 漢 征之 然而未有得上策者也 周得中策하고 漢得下策하고 秦無策焉이라
후세에 세 나라인 나라‧나라‧나라가 정벌하였으나 상책上策을 얻은 자가 있지 않았고, 나라는 중책中策을 얻었고 나라는 하책下策을 얻었으며 나라는 무책無策이었습니다.
周宣王時 注+[釋義]按匈奴之號 唐虞以上曰山戎이요 亦曰이요 夏曰淳維 殷曰鬼方이요 周曰玁狁이요 秦漢曰匈奴內侵하야 至于涇陽이어늘 命將征之하야 盡境而還하니 其視玁狁之侵 譬猶하야 敺之而已
나라 선왕宣王 때에 험윤玁狁(匈奴)注+[釋義]살펴보건대 흉노匈奴의 칭호는 이전에는 산융山戎이라 하고 또한 훈육獯鬻이라 하였으며, 나라는 순유淳維, 나라는 귀방鬼方, 나라는 험윤玁狁, 흉노匈奴라 하였다. 이 국내로 침입하여 경양涇陽에 이르자 장수를 명하여 정벌하게 해서 국경까지 내쫒고 돌아왔으니, 험윤玁狁의 침략을 보기를 비유하면 모기와 등에처럼 여겨서 몰아낼 뿐이었습니다.
天下稱明하니 是爲中策이니이다
그러므로 천하가 영명英明하다고 칭하였으니 이는 중책中策이 됩니다.
漢武帝 選將鍊兵하고 約齎輕糧하야 深入遠戍하야 雖有克獲之功이나 胡輒報之
나라 무제武帝는 장군을 선발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가벼운 군장軍裝과 양식을 휴대하고 깊숙이 쳐들어가고 멀리 수자리를 시켜 비록 적을 이기고 사로잡은 공이 있으나 오랑캐들이 번번이 보복하였습니다.
兵連禍結하야 三十餘年 中國疲弊하고 匈奴亦創艾(刈)而天下稱武하니 是爲下策이니이다
전란戰亂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 지 30여 년에 중국中國이 피폐해지고 흉노匈奴 또한 징계되고 두려워하여 천하가 무제武帝라고 일컬으니 이는 하책下策이 됩니다.
秦皇 不忍小恥而輕民力하야 築長城하니萬里
나라 시황始皇은 작은 수치를 참지 못하고 백성들의 힘을 하찮게 여겨 만리장성을 쌓으니 길이가 만 리에 뻗쳤습니다.
轉輸之行 起於負海하야 疆境旣全호되 中國內竭하야 以喪社稷하니 是爲無策이니이다
물자를 수송하는 행렬이 바닷가에서부터 시작되어 국경은 이미 온전하였으나 중국은 안으로 고갈되어서 사직社稷을 망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책無策이 됩니다.
今天下比年飢饉注+[頭註]穀不熟曰飢 菜不熟曰饉이라호되 北邊 尤甚하니 大用民力이라도 功不可必이니 臣伏憂之하노이다
지금 천하가 해마다 기근飢饉注+[頭註]곡식이 성숙하지 않은 것을 라 하고, 채소가 성숙하지 않은 것을 이라 한다. 이 들었는데 북쪽 변경이 더욱 심하니 백성의 힘을 크게 쓰더라도 을 기필할 수가 없으니, 신은 엎드려 이를 걱정합니다.”
不聽하다
그러나 왕망王莽이 듣지 않았다.
○ 北邊 自宣帝以來 數世 不見煙火之警하야 人民熾盛하고 牛馬布野러니 及莽 撓亂匈奴하야 與之構難 邊民 死亡係獲하니 數年之間 北邊 空虛하고 野有骨矣러라
○ 북쪽 변경邊境선제宣帝 이래로 여러 대 동안 봉화불을 올려 경계하는 것을 보지 못하여 인민人民들이 번성하고 소와 말이 들에 널려 있었는데, 왕망王莽이 흉노를 소란하게 하여 그들과 병란을 일으킴에 미쳐서는 변경의 백성들이 사망하고 포로로 잡히니, 몇 년 사이에 북쪽 변경이 텅 비고 들에는 버려진 해골이 있었다.
〈出匈奴傳〉
-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 나옴 -
○ 莽 遣使者하야 奉璽書印綬하고龔勝하니 稱病篤이라
왕망王莽사자使者를 보내어 새서璽書인수印綬를 받들고 가서 공승龔勝을 맞이하니, 공승龔勝은 병이 위독하다고 핑계 대었다.
使者以印綬 就加勝身한대不受하고 謂門人高暉等曰 吾受漢家厚恩하야 無以報 今年老矣
사자使者인수印綬를 가지고 가서 공승龔勝의 몸에 가하자 공승龔勝이 곧 물리치고 받지 않고, 문인門人 고휘高暉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나 보답하지 못하고 이제 나이가 늙었다.
豈以一身事二姓이리오하고 語畢 遂不復開口飮食하야 積十四日하니라
의리상 어찌 한 몸을 가지고 두 의 군주를 섬기겠는가.” 하고는 말을 마치자, 마침내 다시는 입을 벌려 음식을 먹지 않아서 14일 만에 죽었다.
〈出勝傳〉
- 《한서漢書 공승전龔勝傳》에 나옴 -
○ 是時 淸名之士 又有紀, 薛方, 越, 郇相, 唐林, 唐遵하니 皆以明經飭行으로 顯名於世
○ 이때 깨끗한 명성이 있는 선비 중에 또 기준紀逡설방薛方순월郇越순상郇相당림唐林당준唐遵이 있었는데, 모두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삼가는 것으로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
紀逡兩唐 皆仕莽하고 郇相 爲莽太子四友注+[頭註]莽爲太子하야 置師友各四人호되 秩以大夫하니 師疑傅丞阿輔保弼 是爲四師 胥附犇走先後禦侮是爲四友하다
기준紀逡당림唐林당준唐遵은 모두 왕망王莽에게 벼슬하였고, 순상郇相왕망王莽태자太子사우四友注+[頭註]왕망王莽태자太子를 위하여 를 각각 네 사람씩 두었는데 대부大夫의 품계로 하였는 바, 사의師疑부승傅丞아보阿輔보필保弼사사四師라 하고 서부胥附분주犇走선후先後어모禦侮사우四友라 하였다. 가 되었다.
以安車迎薛方한대 方謝曰 , 舜在上 下有巢, 注+[附註]巢父, 許由也 高士傳 許由 字武仲이니 聞堯治天下而讓焉하고 遁於潁水之陽, 箕山之下하니라 堯又召爲九州之長한대 由不欲聞之하야 洗耳於潁濱이러니 巢父牽犢欲飮之라가 見由洗耳하고 曰 汚吾犢口라하고 遂牽犢上流하야 飮之하니라
왕망王莽안거安車설방薛方을 맞이하자, 설방薛方은 사양하기를 “이 임금으로 계실 때에 아래에는 소보巢父허유許由注+[附註][附註]巢, :소보巢父허유許由이다. 《고사전高士傳》에 “허유許由는 자가 무중武仲이니, 임금이 천하를 다스리다가 그에게 사양한다는 말을 듣고는 영수潁水의 물가 기산箕山의 아래에 은둔하였다. 임금이 또다시 불러 구주九州으로 삼자, 허유許由는 그 말을 듣고자 하지 아니하여 영수潁水 가에서 귀를 씻었는데, 소보巢父가 송아지를 끌고 와서 이 물을 먹이려고 하다가 허유許由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는 말하기를 ‘내 송아지 입을 더럽힐 뻔 했다.’ 하고는 마침내 송아지를 끌고 상류上流로 가서 물을 먹였다.” 하였다. 가 있었습니다.
今明主方隆唐虞之德하시니 小臣 欲守하노이다 說其言하야 不彊致하니라
지금 현명한 군주께서 막 을 높이시니, 소신小臣기산箕山의 절개를 지키고자 합니다.” 하니, 왕망王莽이 그 말을 기뻐하여 억지로 데려가지 않았다.
班固贊曰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왕공양공포전王貢兩龔鮑傳에 말하였다.
春秋列國卿大夫 及至漢興將相名臣 懷祿耽寵以失其世者多矣
춘추시대春秋時代 열국列國경대부卿大夫로부터 나라가 일어난 뒤의 장상將相명신名臣들에 이르기까지 祿을 생각하고 은총을 탐하여 대대로 지켜 오는 문벌을 잃는 자가 많았다.
是故 淸節之士 於是爲貴
이 때문에 깨끗한 절개를 지키는 선비가 이에 귀하였다.
然大率多能自治而不能治人이라
그러나 깨끗한 절개가 있는 선비들은 대체로 자기 몸은 잘 다스리지만 남을 잘 다스리지는 못한다.
王貢之材注+[釋義]前漢王吉與貢禹 優於龔鮑로되 勝實蹈焉이요 貞而不諒注+[頭註] 正而固也 則不擇是非而必於信이라 薛方近之하고 하야 絶紀唐矣니라
왕길王吉공우貢禹注+[釋義]왕공王貢전한前漢 때의 왕길王吉공우貢禹이다. 의 재주가 공승龔勝포선鮑宣보다 나았지만 죽음으로 지키면서도 를 잘한 것은 공승龔勝이 실로 이를 행하였으며, 바르고 곧으며 작은 신의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注+[頭註]은 바르고 곧음이요, 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만 기필하는 것이다. 설방薛方이 이에 가까웠고, 곽흠郭欽장후蔣詡는 은둔하기를 좋아하고 몸을 더럽히지 않아 기준紀逡당림唐林당준唐遵보다 크게 뛰어났다.”
〈出鮑宣等傳〉
〈出鮑宣等傳〉
역주
역주1 玁狁 : 험윤
역주2 獯鬻 : 훈육
역주3 蟁(蚊)蝱 : 문맹
역주4 : 무
역주5 : 폭
역주6 : 퇴
역주7 : 준
역주8 : 순
역주9 箕山之節 : 堯임금 때의 隱士인 許由와 巢父가 이곳에 살았으므로 이들의 높은 절개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역주10 守死善道 : 이 내용은 《論語》 〈泰伯篇〉에 보인다.
역주11 郭欽蔣詡 好遯不汚 : 郭欽蔣詡는 莽居攝에 皆以病免歸鄕里하야 臥不出戶하고 卒於家하니라 郭欽과 蔣詡는 王莽이 居攝(섭정)할 때에 모두 병으로 면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고 집에서 죽었다.

통감절요(3)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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