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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亥]三年이라
3년(정해 B.C.154)
梁孝王 來朝하다
나라 효왕孝王이 조회를 왔다.
未置太子러니 與王宴飮이라가 從容言曰 千秋萬歲後 傳於王호리라 辭謝하니
이때 이 아직 태자를 세우지 않았는데, 왕(梁王)과 더불어 잔치하며 술을 마시다가 조용히 말하기를 “천추만세千秋萬歲 후에 왕에게 전위傳位하리라.” 하니, 왕이 사양하였다.
雖知非至言이나이나 心內喜하고 太后亦然之러니
왕은 비록 진담이 아닌 줄은 알았으나 마음속으로 기뻐하였고 태후太后 또한 그러하였는데,
詹事注+[頭註] 省也, 供也 皇后太子 各置詹事하니 隨其所在하야 以名官이라 秩二千石이라竇嬰酒進曰 天下者 高祖之天下 父子相傳 漢之約也어늘 何以得傳梁王이시닛고
첨사詹事注+[頭註]은 살핌이고 바침이다. 황후皇后태자太子가 각기 첨사詹事를 두었으니, 있는 곳에 따라 관명을 삼았다. 품계가 2천 석이다. 두영竇嬰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아뢰기를 “천하라는 것은 고조高祖의 천하이고 부자父子가 서로 전위傳位함은 나라의 약속인데, 께서 어떻게 양왕梁王에게 전위한단 말입니까?” 하니,
太后 由此憎嬰하니 以此益驕러라
태후太后가 이로 말미암아 두영竇嬰을 미워하니, 양왕梁王이 이 때문에 더욱 교만하였다.
○ 初 孝文時 吳太子入 得侍皇太子하고 飮博할새 吳太子博이라가 爭道注+[釋義]謂爭行棊之路不恭이어늘 皇太子引博局注+[釋義]猶今言棊盤(槃)이라하야 提殺之注+[釋義]徐廣曰 〈提音弟〉 史記周勃世家 太后以冒絮提文帝라한대 索隱曰 〈服虔云〉 提 音弟 或(音)[作]啼라하니 非也 蕭該 音底 擲也라하니 按蕭音爲是하니 吳王 由此 稍失藩臣之禮하야 稱疾不朝京師하고 始有反謀
처음 효문제孝文帝 때에 나라 태자가 들어와 뵐 때에 황태자를 모시고 술을 마시며 바둑을 두었는데, 나라 태자가 바둑을 두다가 길을 다투며注+[釋義]쟁도爭道는 장기를 두는 길을 다툼을 이른다. 불공不恭하자, 황태자가 바둑판을注+[釋義]박국博局은 지금 바둑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끌어다가 던져서 죽이니,注+[釋義]서광徐廣이 말하기를 “는 음이 이다.” 하였다. 《사기史記》 〈주발세가周勃世家〉에 “태후太后모서冒絮문제文帝에게 던졌다.” 하였는데,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복건服虔이 이르기를 ‘는 음이 이니 혹은 자로도 쓴다.’ 하였으니, 잘못이다. 소해蕭該는 ‘음이 저이고 는 던짐이다.’ 하였으니, 살펴보건대 소해蕭該의 음이 옳다.” 하였다. 오왕吳王이 이로 말미암아 차츰 제후왕의 를 잃어서 병을 핑계 대고 경사京師에 조회 오지 않다가 처음으로 배반할 계획을 두었다.
〈本傳無此句〉 文帝賜吳王几杖하고 老不朝라하니 吳得釋其罪하고 謀亦益解
- 《사기史記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에는 이 가 없음 - 문제文帝오왕吳王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늙었다 하여 조회하지 말라 하니, 나라가 그 죄를 풀게 되었고 배반하려던 계획도 더욱 해이해졌다.
이나 其居國 以銅鹽爲資注+[頭註]吳有銅山하니 招致天下亡命하야 以爲鑄錢하고 煮海水爲鹽이라 故無賦而國用足이라 百姓 無佗(他)賦하고 郡國吏欲來捕亡人者注+[釋義]捕亡人 謂避禍而逃亡者 討捕之也어든 公共禁弗予注+[釋義]史記吳王濞傳 公作訟하니 如淳曰 訟 公也 正義曰 訟 音容이니 言其相容하야 禁止不與也하니 如此者四十餘年이러라
그러나 오왕吳王이 소유한 나라는 구리와 소금을 밑천으로 삼았기注+[頭註]나라에 동산銅山이 있으니, 천하의 망명한 자들을 불러 모아 동산銅山에서 을 캐어 돈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달여 소금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세금이 없어 국가의 재정이 풍족한 것이다. 때문에 〈재정이 풍족하여〉 백성들이 딴 부세가 없었고, 군국郡國의 관리가 와서 도망한 사람을 체포하고자 하면注+[釋義]망인亡人을 체포한다는 것은 를 피하여 도망한 자를 토벌하여 체포함을 이른다. 공공연히 금하고 내주지 않으니,注+[釋義]사기史記》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에는 으로 되어 있는데, 여순如淳이 말하기를 “이다.” 하였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이르기를 “은 음이 용이니, 서로 용납하여 금지하고 주지 않음을 말한다.” 하였다. 이와 같이 한 것이 40여 년이었다.
鼂錯數上書言吳過可削이라호되 文帝寬不忍罰하니 以此 吳日益橫이러라
조조鼂錯가 자주 글을 올려 나라의 잘못은 영토를 떼어 낼 만하다고 말하였으나 문제文帝가 너그러워 차마 벌을 내리지 않으니, 이 때문에 나라가 날로 더욱 횡포를 부렸다.
及帝卽位 錯說上曰
경제景帝가 새로 즉위하자, 조조鼂錯을 설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高帝初定天下 昆弟少하고 諸子弱이라하사 大封同姓하시니 齊七十餘城이요 楚四十餘城이요 吳五十餘城이라
“옛날에 고제高帝가 처음 천하를 평정하시자 형제가 적고 여러 아들들이 약하다 하여 동성同姓을 크게 봉해주시니, 나라는 70여 성읍城邑이요, 나라는 40여 성읍이요, 나라는 50여 성읍이었습니다.
封三庶孼注+[釋義]王氏曰 正長曰嫡이요 其餘曰庶 妾隷之子曰孼이니 孼之言 蘖也 有罪之女 沒廢役之而已어늘 得幸於君하야 有所生이면 若木旣伐而生枿也 與蘖通이라하사 分天下半이러시니
그리하여 세 서얼庶孼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정처正妻장자長子이라 하고, 그 나머지를 라 하고, 첩과 노비의 자식을 이라 하니, 이라는 말은 나무의 옆에서 나온 싹이다. 죄가 있는 여자는 적몰籍沒하여 사역시킬 뿐인데, 군주에게 총애를 받아서 자식을 낳으면 나무가 이미 베어졌으나 움싹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과 통한다.” 봉하여 천하의 절반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今吳王 前有太子之郤(隙)이라하야 詐稱病不朝하니 於古法 當誅어늘 文帝不忍하사 因賜几杖하시니 德至厚也
지금 오왕吳王이 예전에 태자의 일로 틈이 있다 하여 거짓으로 병을 핑계 대고 조회 오지 않으니, 옛 법에 마땅히 죽여야 하는데 문제文帝가 차마 하지 못하시어 인하여 궤장几杖을 하사하시니, 덕이 지극히 후합니다.
當改過自新이어늘 反益驕溢하야 卽山鑄錢하고 煮海爲鹽하며 誘天下亡人하야 謀作亂하니
마땅히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져야 하는데 도리어 더욱 교만하고 넘쳐서, 산에 나아가 구리를 캐어 돈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달여 소금을 만들며 천하의 도망한 사람들을 유인하여 난을 일으킬 것을 도모합니다.
削之亦反이요 不削亦反이어니와 削之 反亟禍小하고 不削이면 反遲禍大하리이다
지금 나라의 영토를 떼어 내도 반란하고 떼어 내지 않더라도 또한 반란할 것이나 땅을 떼어 내면 반란은 빨라도 화가 작고 떼어 내지 않으면 반란은 더디나 화가 클 것입니다.”
〈以上 出史記吳王濞傳〉
- 이상은 《사기史記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에 나옴 -
令公卿列侯宗室雜議하니 莫敢難이러라
공경公卿, 열후列侯종실宗室들로 하여금 여럿이 모여 의논하게 하니, 〈조조鼂錯의 말에〉 감히 논란하는 자가 없었다.
〈出錯本傳〉
- 《사기史記 조조열전鼂錯列傳》에 나옴 -
○ 初 楚元王 好書하야 與魯申公注+[釋義]申公 魯人이라 史記云 言詩於魯則申培公이라한대 韋昭曰 培 申公之名이라, 穆生, 白生으로 俱受詩於浮丘伯注+[釋義]齊人이니 浮丘 複姓也 名也 索隱曰 呂后時 浮丘伯 在長安하니 申公 與元王子郢으로 俱卒學也하니라이러니 及王楚 以三人으로 爲中大夫하다
처음에 나라 원왕元王이 글을 좋아하여 나라 신공申公注+[釋義]신공申公나라 사람이다. 《사기史記》 〈유림전儒林傳〉에 이르기를 “로 말하면 나라에서는 신배공申培公이다.” 하였는데, 위소韋昭가 말하기를 “신공申公의 이름이다.” 하였다.목생穆生, 백생白生과 함께 부구백浮丘伯에게注+[釋義]부구백浮丘伯나라 사람이니, 부구浮丘는 복성이고 은 이름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여후呂后 때에 부구백浮丘伯장안長安에 있었는데, 신공申公원왕元王의 아들 과 함께 모두 《시경詩經》을 배웠다.” 하였다. 시경詩經》을 배웠는데, 나라에 왕 노릇 하게 되자 세 사람을 중대부中大夫로 삼았다.
穆生 不嗜酒어늘 元王 每置酒 常爲穆生設醴하고
목생穆生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원왕元王은 매번 술자리를 베풀 적에 항상 목생穆生을 위하여 단술을 진설하였다.
及子夷王, 孫王戊卽位하야도 常設이러니 後乃忘設焉이어늘
아들 이왕夷王과 손자 왕무王戊가 즉위함에 미쳐서도 항상 단술을 진설하였는데, 뒤에는 마침내 진설하는 것을 잊었다.
穆生 退曰 可以逝矣로다
목생穆生이 물러가며 말하기를 “떠나갈 만하다.
醴酒 不設하니 王之意怠
단술을 진설하지 않으니, 왕의 뜻이 태만해진 것이다.
不去 楚人 將鉗注+[附註]以鐵束頸也 元王傳 王戊淫暴어늘 申公, 白生호되 不聽하고 胥靡之하고 衣之赭衣하야 使杵臼雅舂於市 胥靡 聯繫하야 使隨而服役之 杵臼 爲木杵手舂이니 今謂步臼者 赭衣 罪人所服赤衣也 正身舂之曰雅舂이라我於市라하고 遂謝病去하다
떠나가지 않으면 나라 사람이 장차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시장에서 재갈을注+[附註]은 쇠사슬로 목을 묶는 것이다. 《사기史記》 〈원왕열전元王列傳〉에 “왕무王戊가 지나치게 포악하자, 신공申公백생白生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이들을 죄인으로 만들고는 죄인이 입는 붉은 옷을 입혀서 절구질하게 하여 시장에서 방아를 찧게 했다.” 하였다. 서미胥靡는 연결하여 묶어서 따라 다니며 복역하게 하는 것이다. 저구杵臼는 나무로 절구공이를 만들어 손으로 찧는 것이니, 지금 보구步臼하는 자를 이르고, 자의赭衣는 죄인이 입는 붉은 옷이다. 몸을 바로하여 방아찧는 것을 아용雅舂이라 한다. 물릴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병으로 사직하고 떠나갔다.
〈出漢書楚元王交傳〉
- 《한서漢書 초원왕교전楚元王交傳》에 나옴 -
○ 楚王戊注+[釋義]高帝弟楚王交孫이라 嗣二十一年하니 都彭城하니라來朝어늘 錯因言호되 戊往年 爲薄太后服할새 私奸服舍注+[頭註]爲奸於服舍也 服舍 喪服之次라하야 削東海郡하고
초왕楚王 注+[釋義]초왕楚王 고제高帝의 아우인 초왕楚王 의 손자이다. 왕위를 계승한 지 21년에 반란하였으니, 팽성彭城에 도읍하였다. 조회를 오자, 조조鼂錯가 인하여 말하기를 “가 지난해 박태후薄太后를 위하여 을 입을 적에 복 입는 곳에서 은밀히 간통했습니다.”注+[頭註]복사服舍에서 간음한 것이니, 복사服舍는 상복을 입는 장소이다. 라고 하여 동해군東海郡을 떼어 내고,
前年 趙王注+[釋義]名遂 高帝孫幽王友子 嗣二十六年하니 都邯鄲하니라 有罪라하야 削其常山郡하고
지난해에 조왕趙王注+[釋義]조왕趙王은 이름이 이니, 고제高帝의 손자인 유왕幽王 의 아들이다. 왕위를 계승한 지 26년에 반란하였는 바, 한단邯鄲에 도읍하였다. 죄가 있다 하여 상산군常山郡을 떼어 내고,
膠西王卬注+[釋義] 高帝孫齊悼惠王子 故〈平〉昌侯 〈立〉十〈一〉年하니 都密州高密縣이라 按高密 今屬膠州하니 膠州理膠西縣이라 以賣爵事 有奸이라하야 削其六縣하고
교서왕膠西王 注+[釋義]고제高帝의 손자인 나라 도혜왕悼惠王의 아들이니, 옛 평창후平昌侯이다. 왕위를 계승한 지 11년에 반란하였는 바, 밀주密州고밀현高密縣에 도읍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밀高密은 지금의 교주膠州에 속하니, 교주膠州치소治所교서현膠西縣이다. 관작을 팔아먹은 일로 간사(부정)함이 있다 하여 여섯 을 떼어 내었다.
廷臣 方議削吳러니 吳王注+[釋義]劉仲之子 索隱曰 澎 濞字也 〈正義曰〉 都吳 其實 在江都 恐削地無已하야 因發謀擧事할새 說膠西王하야 約齊, 菑川注+[釋義]菑川王 名賢이니 高帝孫齊悼惠王子 故武城侯 立十一年하니 都劇이라 按劇縣 屬菑川이라 菑川 隋置菑州하니 今盤陽 括地志 故劇城 在靑州壽光南三十里, 膠東注+[釋義]膠東王 雄渠 高帝孫齊悼惠王子 故(昌)[白]石侯 (五)[立]十一年하니 都卽墨이라 括地志 卽墨故城 在今登州膠水縣東六十里 故曰膠東이라, 濟南注+[釋義]濟南王 辟光이니 音壁이라 高帝孫齊悼惠王子 故(初)[朸]侯 立十一年하니 都濟南이라 括地志 濟南故城 在菑川長(止)[山]縣西北三十里하니 楚, 趙皆反이라
조정의 신하들이 막 나라의 땅을 떼어 낼 것을 의논하였는데, 오왕吳王注+[釋義]오왕吳王(濞)은 유중劉仲의 아들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이다.” 하였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이르기를 “에 도읍하였다고 하였으나 실제는 강도江都에 있었다.” 하였다. 제후들의 땅을 떼어 냄이 끝이 없을까 두려워해서 인하여 계책을 내어 거사擧事할 적에 교서왕膠西王을 설득하여 , 치천菑川,注+[釋義]치천왕菑川王은 이름이 이니, 고제高帝의 손자인 나라 도혜왕悼惠王의 아들로 옛 무성후武城侯이다. 즉위한 지 11년에 반란하였는 바, 에 도읍하였다. 살펴보건대 극현劇縣치천菑川에 속하였다. 치천菑川나라가 치주菑州를 두었으니, 지금의 반양盤陽이 이곳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옛 극성劇城청주靑州 수광현壽光縣 남쪽 30리 지점에 있었다.” 하였다. 교동膠東注+[釋義]교동왕膠東王은 이름이 웅거雄渠이니, 고제高帝의 손자인 나라 도혜왕悼惠王의 아들로 옛 백석후白石侯이다. 즉위한 지 11년에 반란하였는 바, 즉묵卽墨에 도읍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즉묵卽墨의 옛 성은 지금의 등주登州 교수현膠水縣 동쪽 60리 지점에 있었다. 그러므로 교동膠東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 제남濟南注+[釋義]제남왕濟南王은 이름이 벽광辟光이니, 은 음이 벽이다. 고제高帝의 손자인 나라 도혜왕悼惠王의 아들이니, 옛 역후朸侯이다. 즉위한 지 11년에 반란하였는 바, 제남濟南에 도읍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제남濟南의 옛 성은 치천菑川 장산현長山縣 서북쪽 30리 지점에 있었다.” 하였다. 약속하게 하니, 가 모두 반란하였다.
發使遺諸侯書하야 罪狀晁(鼂)錯注+[釋義] 〈形〉容之也 其書形狀鼂錯之罪 猶莊子自狀其過也하야 欲合兵誅之러라
사자使者를 내어 제후들에게 글을 보내어 조조鼂錯의 죄상을注+[釋義]은 형용함이다. 그 글에 조조鼂錯의 죄를 형용한 것이니, 《장자莊子》에 “스스로 그 과실을 기록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적어서 병력을 연합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出漢書吳王濞傳 無此二句〉
- 《한서漢書 오왕비전吳王濞傳》에는 이 두 가 없음 -
○ 初 文帝且崩 戒太子曰 卽有緩急이어든 周亞夫 眞可任將兵이라하더니
처음에 문제文帝하려 할 적에 태자에게 경계하기를 “만일 위급한 일이 있거든 주아부周亞夫는 참으로 군대를 거느리는 임무를 맡길 만하다.” 하였는데,
及七國反書聞 乃拜中尉周亞夫하야 爲太尉하야 將三十六將軍하야 往擊吳, 楚하고 遣酈寄擊趙하고 欒布擊齊하다
등 7국이 반란하였다는 글이 보고되자, 이 마침내 중위中尉주아부周亞夫를 임명하여 태위太尉로 삼아서 36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가서 를 공격하게 하고, 역기酈寄를 보내어 를 공격하게 하고, 난포欒布를 보내어 를 공격하게 하였다.
○ 錯素與吳相袁盎不善이러니
조조鼂錯는 본래 나라 정승 원앙袁盎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此句不同〉 盎 夜見竇嬰하고 爲言吳所以反하고 願至上前하야 口對狀注+[釋義]王氏曰 言不用奏章하고 願至主上前하야 口對說也이어늘
- 이 는 똑같지 않음 - 원앙袁盎이 밤에 두영竇嬰을 만나 나라가 배반한 이유를 말한 다음 의 앞에 가서 구두로 상황을 대답할 것을 원하였다.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장주章奏를 사용하지 않고 주상主上의 앞에 이르러서 입으로 대답하기를 원함을 이른다.”
入言한대 上乃召盎하니 入見하다
두영竇嬰이 궁중에 들어가 에게 말하자, 이 마침내 원앙袁盎을 부르니 원앙袁盎이 들어가 뵈었다.
〈出袁盎傳〉
- 《한서漢書 원앙전袁盎傳》에 나옴 -
方與錯 調兵食注+[頭註]調 計也 謂計發兵食也이러니 問盎호되 今吳, 楚反하니 於公意 何如 對曰 願屛左右하소서
이 이때 막 조조鼂錯와 군량 조달을 헤아리고 있었는데,注+[頭註]調는 계산함이니, 병식兵食(군량)을 계산해 냄을 이른다. 원앙袁盎에게 묻기를 “지금 가 배반하니, 의 뜻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좌우를 물리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錯趨避東廂하야 甚恨이러라
조조鼂錯가 종종걸음으로 동쪽 행랑으로 피하면서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卒問盎한대 對曰 吳, 楚相遺書하야 言高帝王子弟 各有分地어늘 今賊臣鼂錯 擅適(謫)諸侯하야 削奪其地
이 마침내 원앙袁盎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가 서로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고제高帝자제子弟를 왕 노릇 시킬 적에 각각 나누어 준 땅이 있었는데, 지금 적신賊臣조조鼂錯가 제멋대로 제후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그 땅을 깎아 빼앗았다.
以故하야 欲共誅錯하고 復故地而罷라하니 方今計 獨有斬錯하고 發使赦七國하야 復其故地 則兵可毋血刃而俱罷하리이다
이 때문에 반란하여 함께 조조鼂錯를 죽이고 옛 땅을 회복하고서 그만두고자 한다.’ 하니, 지금의 계책은 오직 조조鼂錯를 목 베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칠국七國을 용서하고 그 옛 땅을 회복해 주면 군대가 병기의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모두 중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黙然良久 曰 顧誠何如 吾不愛一人以謝天下라하니 錯殊不知러라
이 묵묵히 한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다만 진실로 어떠한가 할 뿐이니, 내가 한 사람을 아껴서 천하에 사죄하지는 않는다.” 하였는데, 조조鼂錯는 전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使中尉召錯하야 紿載行市하니 錯衣朝衣하고 斬東市하다
중위中尉로 하여금 조조鼂錯를 불러 속여서 수레를 태워 시장을 순행하게 하니, 조조鼂錯조복朝服을 입고 동쪽 시장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謁者僕鄧公注+[釋義]漢書 作鄧先이라 孔文祥曰 姓이요이라 上書言軍事曰 吳爲反計 數十歲矣
알자복야謁者僕射등공鄧公注+[釋義]등공鄧公은 《한서漢書》에 ‘등선鄧先’으로 되어 있다. 공문상孔文祥이 말하였다. “성은 이요 이름은 이다.” 상소하여 군사軍事에 대해 말하기를 “나라가 반란할 계획을 세운 지가 수십 년입니다.
發怒削地하야 以誅錯爲名이나 其意 不在錯也니이다
땅을 깎은 데 성을 내어 조조鼂錯를 죽이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으나 그 뜻은 조조鼂錯에게 있지 않습니다.
夫鼂錯患諸侯彊大하야 不可制 請削之하야 以尊京師하니 萬世之利也어늘
조조鼂錯는 제후들이 강대해져서 제재할 수 없음을 근심하였기 때문에 땅을 떼어 내어 경사京師를 높이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만대萬代의 이로움입니다.
計畫 始行 卒受大戮하야 內杜忠臣之口하고 外爲諸侯報仇하니 竊爲陛下不取也하노이다
그런데 계획이 처음 행해짐에 갑자기 큰 죽임을 당하여 안으로는 충신의 입을 막고 밖으로는 제후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주니, 신은 삼가 폐하를 위하여 취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帝喟然曰 吾亦恨之하노라
황제가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나 또한 한스럽게 여기노라.” 하였다.
〈出鼂錯傳〉
- 《한서漢書 조조전鼂錯傳》에 나옴 -
永嘉陳氏曰
영가진씨永嘉陳氏가 말하였다.
吳王 招納亡叛하야 反形已具하니 漢固不可不爲之慮也어니와 其他若楚, 趙, 常山, 膠西之徒 初曷嘗有反謀者哉리오
오왕吳王은 도망한 자와 배반한 자들을 불러들이고 받아들여 배반할 형세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나라가 진실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기타 나라와 나라, 상산常山, 교서膠西의 무리로 말하면 처음에 어찌 일찍이 모반하려는 자가 있었겠는가.
向使鼂錯之議 止於削吳 則其所反也 獨一吳耳리라
그때 만일 조조鼂錯의 의론이 나라의 땅을 깎는 데에 그쳤더라면 반란한 것이 다만 나라뿐이었을 것이다.
今也 削地之令 未加之謀反之吳하고 而先加之未反之國하야 使吳王得以藉口하야 誘諸侯爲左右手하야 幾於危劉氏之社稷하니
이제 땅을 깎으라는 명령이 모반한 나라에게 가해지지 않고 모반하지 않은 나라에 먼저 가해져서, 오왕吳王으로 하여금 이를 구실삼아 제후諸侯들을 유인하여 좌우左右수족手足으로 삼아서 유씨劉氏사직社稷을 거의 위태롭게 하였다.
然則揚子雲以錯爲愚라하니 誠可謂愚矣로다
그렇다면 양자운揚子雲조조鼂錯를 어리석다고 말하였으니, 진실로 어리석다고 이를 만하다.”
又曰
또 말하였다.
吳王濞之謀反也 其志蓋萌於太子博局之死하니 而停蓄含忍於文帝几杖之賜 西向之心 未嘗不欲逞也
오왕吳王 가 모반한 것은 그 뜻이 태자太子가 자기 아들을 장기판으로 쳐 죽인 데서 시작되었으니, 문제文帝궤장几杖을 하사해 줌으로 인해 분한 마음을 쌓아두고 참은 것이요, 서쪽(長安)을 향하여 공격하려는 마음은 〈분함을〉 풀고 싶어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景帝之立 濞之側目京師하야 狺然而噬者屢矣어늘
경제景帝가 즉위했을 때에 경사京師를 곁눈질하여 개처럼 으르렁거리고 물어뜯으려고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而鼂錯削地之策 適犯其怒하야 而泄其不逞注+[頭註]不快也 謂不得恣肆快意者也 一云 包藏禍心하고 不得逞者也之謀하야 卒死讒鋒하야 爲言事者戒하니 錯誠可悲也哉인저
그런데 조조鼂錯의 땅을 깎는 계책이 마침 그의 노여움을 건드려 〈마음속에 품고〉 풀지 못한注+[頭註]불령不逞불쾌不快함이니, 제멋대로 행동하여 뜻에 상쾌하지 못한 자를 이른다. 일설一說에는 “나쁜 마음을 마음속에 품고 이것을 풀지 못하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계책을 누설해서 끝내 참소하는 칼날에 죽음으로써 일을 말하는 자들의 경계가 되었으니, 조조鼂錯는 참으로 가련하다.”
○ 亞夫言於上曰 楚兵 剽輕注+[釋義] 亦輕也 不持重也하니 難與爭鋒이라
주아부周亞夫에게 말하기를 “나라 군대는 날래고 가벼우니,注+[釋義] 또한 가벼움이니, 몸가짐이 진중하지 못한 것이다. 더불어 예봉銳鋒을 다투기가 어렵습니다.
하야 絶其食道라야 乃可制也리이다 許之하다
원컨대 나라를 버려서 그 식량 수송로를 끊어야만 비로소 제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 이를 허락하였다.
亞夫乘傳하고 將會兵滎陽할새 發至霸上하니 趙涉亞夫曰 吳王 知將軍且行하고 必置人於殽, 注+[釋義] 山名이니 今陝縣 是也 東崤至西崤二十五里 在秦關之東, 漢關之西 通作崤 括地志 洛州永寧西北二十里 古殽道也 屬弘農하니 禹貢所屬河西郡이라 當作黽이니 俗作澠이라之間하리이다
주아부周亞夫가 역말을 타고 장차 군대를 형양滎陽에서 회합하려 하였는데, 출발하여 패상霸上에 이르니, 조섭趙涉이 길을 가로막고 주아부周亞夫를 설득하기를 “오왕吳王은 장군이 장차 이곳으로 갈 것을 알고는 반드시 복병伏兵효산殽山민수澠水注+[釋義]는 산 이름이니, 지금 섬현陝縣이 이곳이다. 동효東崤로부터 서효西崤에 이르기까지 25리이니, 진관秦關의 동쪽, 한관漢關의 서쪽에 있다. 와 통용한다. 《괄지지括地志》에 “낙주洛州 영녕현永寧縣 서북쪽 20리 지점이 옛날 효도殽道이다.” 하였다. 홍농弘農에 속하니, 《서경書經》 〈우공禹貢〉에는 하서군河西郡에 속하였다. 이 되어야 하니, 세속에서 으로 쓴다. 사이에 두었을 것입니다.
且兵事 尙神密이니 將軍 何不右去하야 走藍田注+[釋義]按漢地志 京兆有藍田縣이라 括地志云 藍田山 三皇舊居 在雍州東南八十里 從藍田關하야 西入縣이라, 出武關注+[釋義]秦之南關也 通南陽이라 括地志 故關 在商州商洛東하니 春秋時少習也, 抵洛陽하야 直入武庫注+[釋義]在未央宮하니 蕭何造하야 以藏兵器
또 군대의 일은 신속하고 은밀함을 숭상하니, 장군은 어찌하여 오른쪽으로 가서 남전藍田으로注+[釋義]남전藍田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경조京兆남전현藍田縣이 있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남전산藍田山삼황三皇이 옛날에 살던 곳이니, 옹주雍州의 동남쪽 80리 지점에 있다. 남전관藍田關을 따라 서쪽으로 에 들어간다.” 하였다. 달려가 무관武關注+[釋義]무관武關나라의 남쪽 관문이니, 남양南陽과 통한다. 《괄지지括地志》에 “옛 관문은 상주商州 상락현商洛縣 동쪽에 있었으니, 춘추春秋 때의 소습少習이다.” 하였다. 나와 낙양洛陽에 이르러 곧바로 무고武庫注+[釋義]무고武庫미앙궁未央宮에 있었으니, 소하蕭何가 만들어 병기를 보관하였다. 들어가지 않습니까?
諸侯聞之 以爲將軍 從天而下也라하리이다
〈이렇게 할 경우〉 제후들이 이것을 들으면 장군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였다.
太尉如其計러니 至洛陽하야 喜曰 今吾據滎陽하니 滎陽以東 無足憂者라하고 使使搜殽, 澠間이러니 果得吳伏兵하다
태위太尉가 그의 계책과 같이 하였는데, 낙양洛陽에 이르러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 이제 형양滎陽을 점거하였으니, 형양滎陽 이동은 굳이 근심할 것이 없다.” 하고, 사자使者를 시켜 효산殽山민수澠水의 사이를 수색하게 하였는데, 과연 나라의 복병伏兵을 찾아내었다.
吳攻梁急이어늘 亞夫堅壁不出하고 使輕騎 出淮泗口注+[釋義]在今淮安州北이라 水經注 淮水 在山陽北五里하니 淮水之會 卽城角也 左右兩川 夾翼二水以入하니 卽泗口也 自鼈山北으로 縈迴楚城하야 東入于海하야 絶吳, 楚兵後하고 塞其饟(餉)道하니 吳糧絶卒飢하야 數挑戰호되 終不出하다
나라가 나라를 맹렬히 공격하자, 주아부周亞夫가 성벽을 굳게 지키며 출전하지 않고, 경무장한 기병으로 하여금 회수淮水사수泗水의 어귀로注+[釋義]회사구淮泗口는 지금 회안주淮安州의 북쪽에 있다. 《수경주水經注》에 “회수淮水산양山陽 북쪽 5리 지점에 있으니, 회수淮水가 모이는 곳은 바로 모퉁이이다. 좌우의 두 냇물이 두 물을 나래처럼 끼고 들어오니, 바로 사구泗口이다. 별산鼈山 북쪽으로부터 초성楚城을 감돌아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나가 의 군대의 후미를 차단하고 식량 수송로를 막게 하니, 나라가 양식이 떨어져 군사들이 굶주려서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주아부周亞夫는 끝내 출전하지 않았다.
條侯軍中 夜驚하야 內相攻擊하야 擾亂至帳下로되 亞夫堅臥不起러니 頃之 復定하다
조후條侯(周亞夫)의 군중이 밤에 놀라서 안에서 서로 공격하여 소란함이 장막 아래까지 이르렀으나 주아부周亞夫가 꼼짝 않고 누워 일어나지 않았는데, 잠시 후 다시 진정되었다.
吳犇壁東南陬어늘 亞夫使備西北이러니 已而 果犇西北하야 不得入이라
나라 군대가 주아부周亞夫의 성벽 동남쪽 모퉁이로 달려오자, 주아부周亞夫는 서북쪽을 대비하게 하였는데, 얼마 후 과연 〈나라 군대가〉 서북쪽으로 달려왔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吳, 楚士卒 多飢死叛散하야 乃引去어늘 亞夫出精兵하야 追擊大破之하다
의 사졸들이 대부분 굶어 죽고 배반하여 흩어져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떠나가자, 주아부周亞夫가 정예병을 내어 추격해서 크게 격파하였다.
吳王 棄軍走度(渡)淮注+[釋義]王氏曰 度 與渡通하니 濟也 風俗通云 淮廟在唐州東二十里 廟前槐樹下 有一泉眼하니 淮水出焉이라 其源甚窄하야 可驀而踰라가 流至揚, 徐間하야 始大 禹貢蔡氏傳曰 淮水出南陽平氏縣胎簪山하야 北過桐柏山하야 東南入海 今唐州 有桐柏縣이라 疾趨也하야 保東越이러니 東越 殺之하다
오왕吳王이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 회수淮水를 건너서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와 통하니, 건넘이다. 《풍속통風俗通》에 이르기를 ‘회수淮水의 사당이 당주唐州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사당 앞 회화나무 아래에 한 샘구멍이 있으니, 여기에서 회수淮水가 나온다. 그 수원水源이 매우 좁아서 사람들이 뛰어넘어 건널 수 있을 정도인데, 물이 흘러 양주揚州서주徐州 사이에 이르러 비로소 커진다.’ 하였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의 채씨전蔡氏傳에 이르기를 ‘회수淮水남양南陽 평씨현平氏縣 태잠산胎簪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동백산桐柏山을 지나 동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지금 당주唐州동백현桐柏縣이 있다. 는 빨리 달림이다.” 동월東越을 확보하였는데, 동월東越이 그를 죽였다.
楚王 自殺하고 齊王 飮藥死하고 膠西王 自殺하고 膠東, 菑川, 濟南王 皆伏誅하다
초왕楚王은 자살하였고, 제왕齊王은 독약을 마시고 죽었고, 교서왕膠西王은 자살하였고, 교동왕膠東王치천왕菑川王제남왕濟南王은 모두 죄를 받고 죽었다.
〈出亞夫傳〉
- 《한서漢書 주아부전周亞夫傳》에 나옴 -
역주
역주1 : 치
역주2 : 현
역주3 : 야
역주4 以梁委之 : 委는 버리는 것이니, 梁나라를 내버려 두고 구원하지 않아 吳‧楚의 공격을 받게 함을 이른다.
역주5 : 세
역주6 :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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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2)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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