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淸儉하야 每曰 使我治天下十年이면 當使黃金으로 與土同價라하니라
人之慕儉而賤貨者 莫不有金玉同價之言이나 然無此理也라
顧可使貴賤有等
하야 人不妄用金玉
하야 不至踊貴
注+[頭註]踊은 刖足者屨也니 言刖足者多하야 屨無用故로 賤하고 踊有用故로 貴라焉耳
니 必欲與土同價
인댄 雖齊高帝在位百年
이라도 亦不能致也
리라
蕭道成
이 劉宋傾危
하니 蒼梧王暴虐
하야 百姓凜凜
하야 命懸朝夕
이라
當是時하야 道成이 果有忠宋之心이면 與袁粲等으로 協謀하야 廢黜異姓하고 建立宗藩하야 以隆宋祚하야 爲宋忠臣이 此上計也요 如其不然이면 正蒼梧之僞冒하고 明劉氏之已絶하야 播告中外하야 與天下放伐之然後에 王儉이 進易代之謀하고 太后下宋終之詔면 事機脗合하고 亦庶幾近正矣어늘
而乃自立順帝하야 北面事之하고 旣已委質爲臣이라가 又欲窺圖禪代하야 取國未幾에 復行弑逆하야 盡勦劉氏之族而殄其祀焉하니 鼯鼠鴟鴞 奸計百出이라
然이나 其簒國之後에 以身率下하고 以儉化民하야 不御精細之物하고 不好珠玉之玩하야 內殿에 施黃紗帳하고 宮人이 著紫皮履하며 珍奇異物을 棄毁不用하고 而又訪政術於劉讞하고 詢得失於群臣하니 亦足以爲一代之賢主矣로다
임술(482) - 제齊나라 건원建元 4년이고, 위魏나라 태화太和 6년이다. -
고제高帝는 침착하고 큰 도량이 있었으며 박학하고 문장을 잘하였다.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하여 매양 말하기를 “만일 내가 십 년 동안 천하를 다스린다면 황금을 흙과 같이 천해지게 만들 수 있다.” 하였다.
“물건이 똑같지 않은 것은 물건의 실정實情이다.
사람들 중에 검소함을 좋아하고 재물을 천하게 여기는 자들은 모두 금옥金玉을 흙과 같이 천해지게 하겠다는 말을 하나 이러한 이치는 없다.
다만
귀천貴賤이 차등이 있어서 사람들이
금옥金玉을 함부로 사용하지 아니하여 값이 뛰는
注+[頭註]용踊은 월형刖刑(발꿈치를 베는 형벌)을 당한 자의 신발이니, 월형刖刑을 당한 자가 많아서 보통 신발은 수요가 없기 때문에 싸고 용踊은 수요가 있기 때문에 비쌈을 말한다. 데에 이르지 않게 할 뿐이니, 반드시
금옥金玉을 흙과 같이 천해지게 하려 한다면 비록
제齊나라
고제高帝가 백 년 동안 재위한다 하더라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소도성蕭道成은 유송劉宋이 위태로울 때를 만났으니, 유송劉宋은 창오왕蒼梧王(劉昱)이 포학해서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운명이 조석에 달려 있었다.
이때를 당하여 소도성蕭道成이 과연 송宋나라에 충성할 마음이 있었다면 원찬袁粲 등과 함께 의논하여 이성異姓을 폐출廢黜하고 종실宗室의 번왕藩王을 세워서 송宋나라의 국운國運을 융성하게 하여 송宋나라의 충신忠臣이 되는 것이 상책上策이요, 만일 이와 같이 할 수 없다면 창오왕蒼梧王이 거짓으로 유씨성劉氏姓을 일컬은 것을 바로잡고 유씨劉氏의 대가 이미 끊어졌음을 밝혀서 중외中外에 선포하여 천하天下와 함께 그를 추방하고 정벌한 뒤에 왕검王儉이 왕조를 바꾸는 계책을 올리고 태후太后가 송宋나라가 끝났다는 조칙을 내리게 했다면 사기事機가 잘 부합되고 또한 거의 정도正道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스스로 순제順帝를 세워서 북향北向하여 섬기고, 이미 몸을 바쳐 신하가 되었다가 또 선양禪讓을 받아 대신할 것을 도모하고자 하여 나라를 취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시역弑逆을 행하여 유씨劉氏의 집안을 모두 죽이고 그 제사를 끊었으니, 박쥐와 올빼미와 같은 간사한 계책이 백 가지로 나왔다.
악행惡行을 쌓아 창업創業하였으니, 어떻게 후세에 전하겠는가.
제齊나라의 국운國運이 길지 못한 것이 육국六國에 비해 가장 심하였으니,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그러나 나라를 찬탈한 뒤에는 몸소 아랫사람에게 솔선을 보이고 검소함으로 백성을 교화시켜 정교한 물건을 사용하지 않고 주옥珠玉으로 꾸민 완호품玩好品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내전內殿에는 황색 비단 휘장을 치고 궁인宮人들은 자주색 가죽신을 신으며 진기하고 기이한 물건을 버리고 쓰지 않았으며, 또 정책을 유얼劉讞에게 묻고 득실得失을 여러 신하에게 물었으니, 또한 한 시대의 어진 군주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