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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7)

통감절요(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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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卯]十七年이라
정관貞觀 17년(계묘 643)
正月 魏徵 寢疾注+[頭註] 益也 이어늘 遣使者問訊하고 賜以藥餌注+[頭註] 米餠也 하야 相望於道하다
정월正月위징魏徵이 병이 깊어지자,注+[頭註]은 더욱이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위문하고 약물을注+[頭註]는 쌀떡이다. 하사하여 서로 길에 이어졌다.
又遣中郞將李安儼하야 宿其第하야 動靜以聞케하고 復與太子 同至其第하야 指衡山公主注+[通鑑要解]皇女也 하야 欲以妻其子叔玉이러라
중랑장中郞將 이안엄李安儼을 보내어 위징魏徵의 집에 유숙하면서 동정을 살펴 아뢰게 하고, 이 다시 태자와 함께 위징魏徵의 집에 가서 형산공주衡山公主注+[通鑑要解]형산공주衡山公主는 황제의 딸이다. 가리키며 위징魏徵의 아들 숙옥叔玉의 아내로 삼게 하고자 하였다.
戊辰 徵薨이어늘 自製碑文하고 幷爲書石하다
무신일戊辰日(1월 17일)에 위징魏徵이 죽자, 은 직접 비문碑文을 짓고 아울러 이것을 비석에 썼다.
思徵不已하야 謂侍臣曰 人以銅爲鑑이면 可正衣冠이요 以古爲鑑이면 可知興替 以人爲鑑이면 可明得失이니
위징魏徵을 그리워하기를 마지않으며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사람이 구리로 거울을 삼으면 의관衣冠을 단정하게 할 수 있고, 옛 역사로 거울을 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고,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자신의 득실得失을 알 수 있다.
嘗保此三鑑하야 以防己過러니 今魏徵歿하니 朕亡一鑑로다
은 일찍이 이 세 거울을 보유하여 자신의 잘못을 방비했었는데, 이제 위징魏徵이 죽었으니 짐은 거울 하나를 잃었다.” 하였다.
〈出本傳이라
- 《신당서新唐書 위징전魏徵傳》에 나옴.
此改用本傳文하야 通鑑多不同이라
여기서는 본전本傳의 내용을 고쳐 써서 《자치통감資治通鑑》과 다른 내용이 많다. -
○ 二月 問諫議大夫褚遂良曰 舜造漆器 諫者十餘人이라하니 此何足諫 對曰 奢侈者 危亡之本이라
2월에 간의대부諫議大夫 저수량褚遂良에게 묻기를 “임금이 칠기漆器를 만들자, 이를 간하는 자가 10여 명이었다 하니, 이것이 어째서 간할 만한가?” 하니, 저수량褚遂良이 대답하기를 “사치라는 것은 국가가 위태롭고 멸망하게 되는 근본입니다.
漆器不已 將以金玉爲之하리니
칠기漆器에 그치지 않으면 장차 금옥金玉으로 기물器物을 만들 것입니다.
忠臣愛君 必防其漸하나니 若禍亂已成이면 無所復諫矣니이다
충신忠臣군주君主를 사랑함에 반드시 그 조짐을 막으니, 만약 화란禍亂이 이미 이루어지면 다시 간할 수가 없게 됩니다.” 하였다.
上曰 然하다
이 이르기를 “그러하다.
朕有過어든 卿亦當諫其漸하라
이 과실이 있거든 은 또한 화란禍亂이 싹트기 전에 간하라.
朕見前世帝王拒諫者하니 多云業已爲之라하고 或云業已許之라하야 終不爲改하니 如此 欲無危亡이나 得乎
이 보건대 전세前世제왕帝王 중에 간언을 거절한 자들이 대부분 말하기를 ‘이미 했다.’ 하고 혹은 ‘이미 허락했다.’ 하여 끝내 과실을 고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 한다면 위태롭고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나 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遂良傳〉
- 《신당서新唐書 저수량전褚遂良傳》에 나옴 -
○ 上曰 人主惟有一心이어늘 而攻之者甚衆하야 或以勇力하며 或以辯口하며 或以諂諛하며 或以奸詐하며 或以嗜慾하야 輻湊攻之하야 各求自售하야 以取寵祿하나니
이 이르기를 “군주는 오직 한 마음이 있을 뿐인데 마음을 공략하는 자는 매우 많아서, 혹은 용력勇力으로, 혹은 말재주로, 혹은 아첨으로, 혹은 간사함으로, 혹은 기욕嗜慾으로 공략하여 사면에서 모여들어 공략함으로써 각각 자신의 계책이 팔리기를 구하여 은총과 복록을 취하려 한다.
人主少懈而受其一이면 則危亡隨之 此其所以難也니라
군주가 조금 해이해져 그 중 하나라도 받아들이게 되면 국가의 위태롭고 멸망함이 뒤따르게 되니, 이 때문에 군주 노릇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 上 命圖畫功臣趙公長孫無忌, 趙郡元王孝恭, (萊)[蔡]成公注+[頭註]蔡, 褒, 蔣, 鄖, 譙, 邳, 郯, 永興, 渝, 胡 幷國名이라 書爵不書諡者 其人存이요 書爵書諡者 其人已死 杜如晦, , 梁公房玄齡, 申公高士廉, 鄂公遲敬德, 衛公李靖, 宋公蕭瑀, 褒忠壯公段志玄, 夔公劉弘基, 蔣忠公屈突通注+[頭註]屈突 複姓이라 , 節公殷開山, 譙襄公柴紹, 邳襄公長孫順德, 鄖公張亮, 陳公侯君集, 襄公張公謹, 盧公程知節, 永興文懿公虞世南, 襄公劉政會, 莒公唐儉, 英公李世勣, 胡壯公秦叔寶等於凌煙閣注+[頭註]在西內 閣中 凡設三隔하야 內一層 畫功高宰輔하고 外一層 〈寫功高侯王하고 又外一層〉次第功臣호되 皆北面하야 臣禮也 하다
공신功臣조공趙公 장손무기長孫無忌, 조군趙郡 원왕元王 이효공李孝恭, 채국蔡國 성공成公注+[頭註]영흥永興는 모두 봉국封國의 이름이다. 작위를 쓰고 시호를 쓰지 않은 것은 그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고, 작위를 쓰고 시호를 쓴 것은 그 사람이 이미 죽은 것이다. 두여회杜如晦, 정국鄭國 문정공文貞公 위징魏徵, 양공梁公 방현령房玄齡, 신공申公 고사렴高士廉, 악공鄂公 위지경덕尉遲敬德, 위공衛公 이정李靖, 송공宋公 소우蕭瑀, 포국褒國 충장공忠壯公 단지현段志玄, 기공夔公 유홍기劉弘基, 장국蔣國 충공忠公 굴돌통屈突通,注+[頭註]굴돌屈突복성複姓이다. 운국鄖國 절공節公 은개산殷開山, 초국譙國 양공襄公 시소柴紹, 비국邳國 양공襄公 장손순덕長孫順德, 운공鄖公 장량張亮, 진공陳公 후군집侯君集, 담국郯國 양공襄公 장공근張公謹, 노공盧公 정지절程知節, 영흥국永興國 문의공文懿公 우세남虞世南, 투국渝國 양공襄公 유정회劉政會, 거공莒公 당검唐儉, 영공英公 이세적李世勣, 호국胡國 장공壯公 진숙보秦叔寶 등을 능연각凌煙閣에 그리도록 명하였다.注+[頭註]능연각凌煙閣은 황궁 서쪽에 있다. 안에 세 개의 칸막이를 설치하여 안쪽의 한 층에는 공이 높은 재상을 그리고, 그 밖의 한 층에는 공이 높은 제후를 그리고, 또 그 밖의 한 층에는 공신들을 차례대로 그렸는데, 모두 북쪽을 향하여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出本紀及忠義傳〉
- 《신당서新唐書》의 〈태종본기太宗本紀〉와 〈충의전忠義傳〉에 나옴 -
[史略 史評]考索曰
[史略 사평史評]《群書考索》에 말하였다.
唐凌煙功臣 凡二十有四人焉이라
나라 능연각凌煙閣에 초상이 걸린 공신功臣은 모두 24명이다.
夫長孫無忌 非以其肺腑之恩也 以其數從征伐平大難하야 討突厥之功而預焉이요 趙郡王孝恭 非以其宗室之故也 以其徇巴蜀, 破夷陵하야 有方面之功而預焉이요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외척의 은혜 때문이 아니라 임금을 따라 자주 출정하여 큰 난리를 평정해서 돌궐突厥을 토벌한 공으로 참여되었고, 조군왕趙郡王 이효공李孝恭종실宗室이기 때문이 아니라 파촉巴蜀을 순행하고 이릉夷陵을 격파하여 방면方面을 맡은 공이 있었기 때문에 참여되었다.
房, 杜之謀謨帷幄하야 共定社稷 足以爲元功之首 英, 衛之料敵制勝하야 共平紛亂 足以爲元勳之次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유악帷幄에서 계책을 세워 함께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것은 충분히 원훈元勳의 우두머리가 될 만하고, 영공英公(李勣)과 위공衛公(李靖)이 적을 헤아려 승기勝機를 잡아서 함께 분란紛亂을 평정한 것은 원훈元勳의 다음이 될 만하다.
魏徵之忠貴重 世南之議論懇誠 蕭瑀之抑過繩違하야 曾無所憚 此皆以文而有功於社稷者也 屈突通之擧兵圍洛 張公謹之副李靖破虜 秦瓊之先鋒하야 前無堅對 此皆以武而有功於社稷者也
위징魏徵충건忠謇(直諫)의 귀중貴重함과 우세남虞世南의론議論의 간곡함과 소우蕭瑀가 군주의 과실을 억제하고 잘못을 바로잡아 일찍이 꺼리는 바가 없음은 이는 모두 문신文臣으로서 사직社稷에 공이 있는 자요, 굴돌통屈突通이 군대를 모두 동원하여 낙양洛陽을 포위한 것과 장공근張公謹이정李靖의 부사령관이 되어 오랑캐를 격파한 것과 진경秦瓊선봉先鋒에 서서 싸워 앞에 강한 적수가 없었던 것은 이는 모두 무신武臣으로서 사직社稷에 공이 있는 자이다.
其他如尉遲敬德等 亦皆崎嶇兵間하고 戮力王室하야 有功於開創大業者也 至於侯君集, 張亮하야는 雖不克終이나 而其初 亦豈無一戰之功焉이리오
기타 위지경덕尉遲敬德 같은 자들은 또한 모두 전쟁터에서 험난함을 겪고 왕실王室에 힘을 다하여 창업創業하는 큰 일에 공이 있는 자요, 후군집侯君集장량張亮에 이르러서는 비록 끝을 잘 마치지 못하였으나 처음에 또한 어찌 한 번 싸운 공이 없겠는가.
唐初功臣 可謂盛矣로다
나라 초기의 공신功臣은 거룩하다고 이를 만하다.”
○ 初 太子承乾 喜聲色及畋獵하고 所爲奢靡하며 魏王泰 多藝能하야 有寵於上하야 潛有奪嫡之志
처음에 태자 이승건李承乾은 음악과 여색 및 사냥을 좋아하고 하는 일이 사치하였으며, 위왕魏王 이태李泰는 기예와 재능이 많아 에게 총애를 받자 적자嫡子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마음을 몰래 품었다.
上意浸不懌이어늘 太子亦知之하고 陰養刺客紇干承基注+[附註]紇干 複姓也 乞伏國仁 其先遇一神龜하니 大如陵阜 殺馬祭之러니 俄不見이요 一小兒在焉이라 因養爲子하고 自以有所依憑이라하야 字曰紇干이라하고 遂以爲氏하니 紇干者 言依倚也 等及壯士百餘人하야 謀殺魏王泰러니
의 뜻이 점점 태자를 탐탁해하지 않자, 태자 또한 이것을 알고 은밀히 자객 흘간승기紇干承基注+[附註]흘간紇干복성複姓이다. 걸복국인乞伏國仁이 예전에 신귀神龜 한 마리를 만났는데, 크기가 구릉丘陵만 하였다. 말을 잡아서 제사하였는데 갑자기 사라져서 보이지 않고 어린아이 한 명이 그곳에 있었다. 인하여 아이를 길러 아들로 삼고는 스스로 의지할 곳이 있다 하여 흘간紇干이라 하고 마침내 이를 성씨姓氏로 삼았으니, 흘간紇干은 의지한다는 뜻이다. 등과 장사壯士 100여 명을 길러 위왕魏王 이태李泰를 죽일 것을 도모하였다.
承基坐事繫獄注+[頭註]齊王祐反事 連承基繫獄이라 하야 上變告注+[釋義] 太子謀反이어늘 하니
마침 흘간승기紇干承基가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注+[頭註]제왕齊王 이우李祐의 역모 사건에 흘간승기紇干承基가 연루되어 대리옥大理獄에 갇혔다. 태자가 모반하려 한다고 조정에 고변하니,注+[釋義]상변고上變告’는 《자치통감資治通鑑한기漢紀 고황제高皇帝 9년의 ‘관고원가지기모貫高怨家知其謀 상변고지上變告之’의 에 보인다.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에 칙령을 내려 국문鞠問에 참여하게 하였다.
反形已具 廢爲庶人하고 侯君集等 皆伏誅하다
모반의 형상이 이미 갖춰져 있었으므로 태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후군집侯君集 등이 모두 죄를 받아 죽었다.
承乾旣獲罪 魏王泰日入侍奉하니 面許立爲太子하고 岑文本, 劉洎亦勸之호되 長孫無忌 固請立晉王治注+[附註]上謂侍臣曰 昨 泰投我懷云 今日 始得爲陛下子로소이다 臣有一子하니 臣死之日 當爲陛下殺之하고 傳位晉王하리이다하니 朕甚憐之하노라 褚遂良諫曰 陛下萬歲後 魏王 據天下 肯殺其愛子하야 以授晉王哉잇가 願先措置晉王이라야 始得安全耳니이다 러라
이승건李承乾이 죄를 받은 뒤에 위왕魏王 이태李泰가 날마다 들어가 모시고 받드니, 이 면전에서 그를 세워 태자를 삼기로 허락하였고, 잠문본岑文本유계劉洎 또한 이를 권하였으나 장손무기長孫無忌는 굳이 진왕晉王 이치李治를 세울 것을 청하였다.注+[附註]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어제 이태李泰가 내 품속으로 뛰어들며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폐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신은 아들 한 명이 있으니, 신이 죽는 날에 마땅히 폐하를 위하여 그를 죽이고 진왕晉王에게 전위傳位할 것입니다.’ 하므로, 이 매우 가엾게 여겼노라.” 하니, 저수량褚遂良이 간하기를 “폐하께서 돌아가신 뒤에 위왕魏王(李泰)이 천하를 차지한다면 기꺼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고 진왕晉王(李治)에게 천하를 주겠습니까. 바라건대 먼저 진왕晉王을 조처하셔야만 비로소 안전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御兩儀殿하니 群臣 俱出하고 獨留長孫無忌, 房玄齡, 李世勣, 褚遂良이라
양의전兩儀殿에 납시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물러 나가고 오직 장손무기長孫無忌방현령房玄齡이세적李世勣저수량褚遂良만 남아있었다.
謂曰 我三子一弟注+[頭註]三子 承乾, 魏王泰, 齊王祐 一弟 漢王元昌也 元昌所爲多不法이어늘 上數譴責之하니 由是起怨이라 皇太子與之親善이러니 賜元昌自盡하니라 所爲如是하니 我心 誠無聊賴라하고 因自投于牀이어늘 無忌等 爭前扶抱
이 이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세 아들과 한 아우의注+[頭註]세 아들은 태자太子 이승건李承乾위왕魏王 이태李泰제왕齊王 이우李祐이며, 한 아우는 한왕漢王 이원창李元昌이다. 이원창李元昌이 하는 일이 법에 어긋난 것이 많아 이 자주 견책하니, 이로 말미암아 원망하게 되었다. 황태자가 그와 친하게 지냈는데 〈함께 반역을 도모하다 발각되자〉李元昌에게 〈사죄死罪를 면하고〉自盡하도록 명하였다. 소행이 이와 같으니, 나의 마음이 실로 의지할 곳이 없다.” 하고는, 인하여 스스로 침상에 몸을 던지자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이 다투어 의 앞으로 나아가 부축하였다.
又抽佩刀하야 欲自이어늘 遂良 奪刀하야 以授晉王治하다
이 또다시 패도佩刀를 뽑아 스스로 목을 찌르려고 하니, 저수량褚遂良이 칼을 빼앗아 진왕晉王 이치李治에게 주었다.
無忌等 請上所欲한대 上曰 我欲立晉王이로라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이 이 하고자 하는 바를 묻자, 이 이르기를 “나는 진왕晉王을 세우고자 한다.” 하였다.
無忌曰 謹奉詔호리이다 上悅하야 立晉王治하야 爲皇太子하다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아뢰기를 “삼가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하니, 이 기뻐하여 진왕晉王 이치李治를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
上謂侍臣曰 我若立泰 則是太子之位 可經營而得이니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만약 위왕魏王 이태李泰를 세운다면 이는 태자의 지위를 경영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된다.
自今으로 太子失道 藩王窺伺者 皆兩棄之호되 傳諸子孫하야 永爲後法하라하다
지금부터는 가령 태자가 덕망을 잃음에 번왕藩王으로서 태자의 자리를 넘본 경우에는 둘 다 모두 버리고 세우지 않되 이를 자손에게 전하여 영원히 후세의 법칙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 詔以長孫無忌爲하고 房玄齡爲太傅하고 蕭瑀爲太保注+[頭註]保者 保其身體 傅者 傅之德義 師者 導之敎訓이라 하고 李世勣爲詹事하다
이 명하여 장손무기長孫無忌태자태사太子太師로 삼고 방현령房玄齡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고注+[頭註]는 신체를 보호하는 것이고, 덕의德義로써 가르치는 것이고, 는 교훈으로써 인도하는 것이다. 소우蕭瑀태자태보太子太保로 삼고 이세적李世勣태자첨사太子詹事로 삼았다.
瑀, 世勣 竝同中書門下三品注+[附註]百官志 謂同侍中, (之)[中]書令也 高宗已後 爲宰相者 必加同中書門下三品하고 雖品高者라도 亦然이로되 惟三公, 中書令則否 하니 同中書門下三品 自此始러라
소우蕭瑀이세적李世勣이 모두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이 되었으니,注+[附註]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은 《신당서新唐書》 〈백관지百官志〉에 “동시중同侍中(門下省의 )이나 동중서령同中書令(中書省의 )을 이른다. 고종高宗 이후에 재상이 된 자는 반드시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을 가하고 비록 품계가 높은 자라도 이와 같이 하였으나 오직 삼공三公과 〈삼사三師와〉中書令만은 그렇지 않았다.” 하였다.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出本傳〉
- 《신당서新唐書 장손무기전長孫無忌傳》에 나옴 -
○ 李世勣 嘗得暴疾하니 方云鬚灰可療
이세적李世勣이 일찍이 폭질暴疾(갑작스럽게 앓는 급한 병)에 걸렸는데, 약방문에 이르기를 “수염을 태워 재를 만들어 먹으면 치료할 수 있다.” 하였다.
翦鬚하야 爲之和藥이어늘 世勣 頓首出血泣謝한대 上曰 爲社稷이요 非爲卿也 何謝之有리오
이 직접 자기 수염을 잘라 그를 위하여 약을 만들자, 이세적李世勣이 피가 나도록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사례하였는데, 이 이르기를 “사직社稷을 위한 것이요 을 위한 것이 아니니, 무슨 사례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世勣 常(嘗)侍宴할새 從容謂曰 朕求群臣可託幼孤者호되 無以踰公이라
이세적李世勣이 일찍이 을 모시고 잔치할 적에 이 조용히 이르기를 “이 여러 신하 중에 어린 고아를 의탁할 만한 자를 찾아보니 보다 나은 자가 없다.
往不負李密注+[頭註] 往日也 事在三十五卷戊寅年이라 하니 豈負朕哉 世勣 流涕辭謝하고 指出血이라
이 지난번 이밀李密을 저버리지 않았으니,注+[頭註]은 지난날이니, 이 일은 앞의 35권 무인년조戊寅年條(618)에 보인다. 어찌 을 저버리겠는가.” 하니, 이세적李世勣이 눈물을 흘리며 사례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이로써 맹세하였다.
因飮沈醉어늘 上解御服以하다
인하여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니, 어의御衣를 벗어서 덮어 주었다.
〈出勣本傳〉
- 《신당서新唐書 이적전李勣傳》에 나옴 -
○ 上謂侍臣曰 朕自立太子 遇物則誨之로라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태자太子를 세운 뒤로 일을 만날 때마다 가르친다.
見其飯이면 則曰 汝知稼穡之艱難이면 則常有斯飯矣라하고
태자가 밥을 먹는 것을 보게 되면 태자를 가르치기를 ‘네가 농사의 어려움을 알면 항상 이 밥을 먹을 수 있다.’ 하고,
見其乘馬 則曰 汝知其勞하야 不竭其力이면 則常得乘之注+[頭註]巧於使馬하야 不窮其馬力하니 是造父無佚馬也니라 라하고
말을 타는 것을 보게 되면 가르치기를 ‘네가 말의 수고로움을 알아서 말의 힘을 다 소모하지 않으면 항상 말을 탈 수 있다.’ 하고,注+[頭註]불갈기력不竭其力 즉상득승지則常得乘之:안연顔淵이 말하기를 “옛날에 조보造父는 말을 부리기를 잘하여 말의 힘을 다 고갈시키지 않았으니, 이것이 조보造父가 달아난 말이 없는 이유입니다.” 하였다.
배를 타는 것을 보게 되면 가르치기를 ‘물은 배를 실어주는 것이지만 또한 배를 뒤엎기도 하니, 백성은 물과 같고 임금은 배와 같다.’ 하고,
見其息於木下 則曰 이라호라
나무 아래에서 쉬는 것을 보게 되면 가르치기를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군주는 간언을 따르면 성군聖君이 된다.’ 했다.” 하였다.
〈出政要〉
-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나옴 -
○ 初 魏徵 嘗薦杜正倫及侯君集 有宰相材라하야 請以君集爲僕射러니하고 君集謀反誅하야는 始疑徵阿黨하고
처음에 위징魏徵이 일찍이 두정륜杜正倫후군집侯君集재상宰相의 재주가 있다 하여 천거하고 후군집侯君集복야僕射로 삼을 것을 청하였는데, 두정륜杜正倫이 죄로 쫓겨나고 후군집侯君集이 모반하다가 죽임을 당함에 이르자, 이 비로소 위징魏徵이 아당하였는가 하고 의심하였다.
又有言徵自錄前後諫辭하야 以示起居郞褚遂良者라하야늘 愈不悅하야 乃罷叔玉尙主注+[頭註]見上正月하니 先嘗許之라가 而今罷休之[通鑑要解] 叔玉 徵子也 하고注+[通鑑要解]仆也 所撰碑하다
위징魏徵이 전후로 간쟁한 말을 스스로 기록하여 기거랑起居郞 저수량褚遂良에게 보여주었다고 말하는 자가 있자, 더욱 탐탁하지 않게 여겨 마침내 위징魏徵의 아들 숙옥叔玉에게 공주를 시집보내려던 일을 파하고注+[頭註] 앞의 정월正月 기사에 보이니, 먼저는 허락했다가 지금 중지한 것이다. [通鑑要解]숙옥叔玉위징魏徵의 아들이다. 자신이 직접 지은 위징魏徵묘비墓碑를 쓰러뜨렸다.注+[通鑑要解]는 넘어뜨림이다.
〈出徵本傳〉
- 《신당서新唐書 위징전魏徵傳》에 나옴 -
贊曰注+[頭註] 贊美 贊述之辭
신당서新唐書》 〈위징열전魏徵列傳〉의 에 말하였다.注+[頭註]은 찬미함이니, 찬미하여 기술하는 말이다.
君臣之際固不難哉
군신간君臣間은 진실로 어렵지 않은가.
以徵之忠而太宗之睿注+[頭註] 深明也 身歿未幾 猜譖遽行이라
위징魏徵의 충성과 태종太宗의 밝음으로도注+[頭註]는 깊이 밝은 것이다. 위징魏徵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시기와 참언이 대번에 행해졌다.
徵之諫 累數十餘萬言이요 至君子小人하얀 未嘗不反復하야 爲帝言之하니 以佞邪之亂忠也어늘 身猶不免이라
처음에 위징魏徵이 간언한 것이 수십 여만 였고, 군자와 소인에 대해서는 일찍이 황제를 위하여 반복해서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는 간사한 자들이 충신을 어지럽히기 때문이었으나 자신도 오히려 화를 면치 못하였다.
故曰 皓皓者易汚 嶢者難全이라하니 自古所嘆云이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깨끗한 자는 더럽혀지기가 쉽고, 높고 강직한 자는 온전하기가 어렵다.’라고 한 것이니, 이는 예로부터 탄식한 바이다.
唐柳芳 稱徵死 知與不知 莫不恨惜하야 以爲三代遺直이라하니 諒哉로다
나라 유방柳芳이 이르기를 ‘위징魏徵이 죽자, 위징魏徵을 아는 자와 위징魏徵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한하고 애석히 여겨서 삼대三代유직遺直(옛사람의 풍도가 있는 곧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上謂監修國史房玄齡曰 前世 史官所記 皆不令人主見之 何也
처음에 국사國史감수監修하는 방현령房玄齡에게 이르기를 “전대前代사관史官들이 기록한 내용을 군주로 하여금 모두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對曰 史官 不虛美하고 不隱惡하나니 若人主見之 必怒 不敢獻也니이다
대답하기를 “사관史官은 헛되이 칭찬하지 않고 악을 숨기지 않으니, 만일 군주가 이것을 보게 되면 반드시 노여워할 것이기 때문에 감히 바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上曰 朕之爲心 異於前世
이 이르기를 “의 마음은 전대前代의 군주와 다르다.
帝王 欲自觀國史 知前日之惡하야 爲後來之戒 公可撰次以聞하라
제왕帝王이 스스로 국사國史를 보고자 하는 것은 전일의 악함을 알아 후일의 경계로 삼기 위해서이니, 은 편찬이 끝나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玄齡 乃與給事中許敬宗等으로 刪爲高祖, 今上實錄하야 書成 上之하다
방현령房玄齡이 이에 급사중給事中 허경종許敬宗 등과 함께 《고조실록高祖實錄》과 《금상실록今上實錄》을 산삭刪削하여 책을 만들어, 책이 완성되자 올렸다.
見書六月四日事注+[頭註]殺建成事也 見三十五卷丙戌年이라 하니 語多微隱이어늘
무덕武德 9년 6월 4일자의 일을注+[頭註]6월 4일의 일은 이건성李建成을 죽인 일을 말하니, 앞의 35권 병술년조丙戌年條(626)에 보인다. 기록한 것을 보니 내용이 은미한 것이 많았다.
謂玄齡曰 昔 하고 季友 鴆叔牙以存魯注+[附註]魯莊公有疾하야 問後於叔牙한대 對曰 慶父(林)[材]니이다 問於季友한대 對曰 臣以死奉般하리이다 莊公薨 般卽位한대 慶父弑之하다 季友奔陳이어늘 魯人立閔公한대 慶父又弑之하다 季友以僖公適邾러니 慶父奔莒어늘 友乃以僖公入하야 立之하고 求慶父於莒하야 遂殺慶父而鴆叔牙하니라하니
방현령房玄齡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주공周公관숙管叔채숙蔡叔을 죽여 나라를 안정시켰고, 계우季友숙아叔牙에게 짐독鴆毒을 먹여 나라를 보존하였으니,
朕之所爲 亦類是矣어늘 史官何諱焉고하고
注+[附註]나라 장공莊公이 병이 있어 숙아叔牙(莊公의 아우)에게 후사를 묻자, “경보慶父(莊公의 서형庶兄)가 임금 재목입니다.” 하고 대답하였고, 계우季友(莊公의 아우)에게 묻자, “은 죽음으로써 (莊公의 서자)을 받들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장공莊公이 죽자 이 즉위하였는데, 경보慶父가 그를 시해하였다. 계우季友나라로 달아나자 나라 사람들이 민공閔公(莊公의 아들)을 세웠는데 경보慶父가 또다시 그를 시해하였다. 계우季友희공僖公(閔公의 서형庶兄)을 모시고 나라로 갔는데 경보慶父가 〈민공閔公을 시해하고〉莒나라로 달아나니, 계우季友가 마침내 희공僖公을 모시고 나라로 들어가 그를 세우고, 나라에 경보慶父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여 마침내 경보慶父를 죽이고 숙아叔牙를 짐독을 먹여 죽였다. 이 행한 것도 이와 같거늘 사관史官은 어찌하여 숨겼는가?” 하고,
卽命削去浮辭하고 直書其事케하다
즉시 불필요한 말을 삭제해 버리고 곧바로 그 일을 쓰도록 명하였다.
○ 九月 新羅注+[釋義]東夷國이니 其先 辰韓種也 在高句麗東南하니라 遣使하야 言百濟與高麗連兵하야 謀絶新羅入朝之路라하고 乞兵救援하다
9월에 신라新羅注+[釋義]신라新羅동이국東夷國이니, 그 선조는 진한辰韓 종족이다. 고구려高句麗 동남쪽에 있었다. 사신을 보내어 백제百濟고구려高句麗와 군대를 연합하여 신라新羅가 당나라에 들어와 조회하는 길을 끊을 것을 도모한다고 말하고, 군대를 보내어 구원해줄 것을 청하였다.
역주
역주1 鄭文貞公魏徵 : 鄭 역시 封國의 이름으로, 梁公과 申公 등도 모두 梁國公과 申國公을 줄여서 쓴 것이다. 王과 公은 爵位이고, 文貞은 시호이다.
역주2 : 울
역주3 : 운
역주4 : 담
역주5 : 유
역주6 : 건
역주7 : 오
역주8 承基坐事繫獄 : 태자는 齊王 李祐가 齊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紇干承基 등에게 이르기를 “우리 궁은 서쪽에 있어 大內와는 20보 거리에 불과하다. 경들과 함께 擧事를 도모한다면 어찌 齊王에 비하겠는가.” 하였다. 마침 李祐의 역모 사건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紇干承基에게까지 연루되어 紇干承基가 大理獄에 갇혀 처형되었다.
역주9 漢高皇帝九年註 : 《資治通鑑》의 胡三省 註에 “變은 비상사태이니, 비상사태를 조정에 고발함을 이른다.[變 非常也 謂上告非常之事]” 하였다.
역주10 勅中書門下參鞫之 : 唐나라 제도에 국가의 큰 옥사는 三司가 심리하여 판결하였는데, 三司는 御史大夫‧中書省‧門下省이다. 三省을 국문에 참여하게 한 것은 그 일을 중시한 것이다.
역주11 : 척
역주12 太子太師 : 태자를 보좌하는 관직으로, 太子太師‧太子太傅‧太子太保를 총칭하여 東宮三師라 한다.
역주13 往不負李密 : 徐世勣이 唐나라에 귀순하려 할 적에 郭孝恪에게 이르기를 “이 민중과 토지는 모두 魏公(李密)의 소유이다. 내가 만약 表文을 올려 이것을 바친다면 이는 主君(李密)의 실패를 이용하여 자신의 공으로 삼아 富貴를 바라는 것이니, 내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이제 마땅히 郡縣의 戶口와 군사와 말의 숫자를 장부에 적어 魏公에게 아뢰어 그로 하여금 스스로 바치게 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郭孝恪을 보내어 長安에 이르러 李密로 하여금 바치게 하였다.
역주14 : 설
역주15 : 부
역주16 顔淵曰……是造父無佚馬也 : 《孔子家語》 〈顔淵〉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魯나라 定公이 顔回에게 묻기를 “전일에 과인이 그대에게 東野畢의 말 모는 법에 대해 묻자, 그대가 말하기를 ‘좋기는 좋으나 그 말이 장차 달아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알지 못하겠으나 그대는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가?” 하니, 顔回가 대답하기를 “정사를 가지고 알았습니다. 옛날에 舜임금은 백성을 부리기를 잘하였고 造父는 말을 부리기를 잘하였으니, 舜임금은 백성들의 힘을 고갈시키지 않았고 造父는 말의 힘을 고갈시키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舜임금은 달아난 백성이 없고 造父는 달아난 말이 없었습니다.[以政知之 昔者帝舜巧於使民 造父巧於使馬 舜不窮其民力 造父不窮其馬力 是以舜無佚民 造父無佚馬]” 하였다.
역주17 : 보
역주18 水所以載舟……君猶舟也 : 《荀子》 〈王制〉에 “임금은 배이고 庶人은 물이니, 물은 배를 싣기도 하고 배를 엎기도 한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라고 보인다.
역주19 木從繩則正 君從諫則聖 : 이 내용은 《書經》 〈說命 上〉에 보인다.
역주20 正倫以罪黜 : 太子 李承乾이 덕망을 잃자, 上이 조용히 太子左庶子인 杜正倫에게 말하기를 “내 자식이 발병이 있어 잘 걷지 못하는 것은 괜찮지만 어진 이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니, 경이 잘 살펴보라.” 하였다. 杜正倫이 누차 간하여도 太子가 듣지 않자, 杜正倫이 上이 했던 말을 그대로 고해 주었다. 太子가 곧 항의하는 表文을 올리자 上은 杜正倫이 기밀을 누설했다 하여 穀州刺史로 내쫓고, 뒤에 李承乾의 역모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交州都督으로 좌천시켰다.
역주21 : 부
역주22 : 요
역주23 周公誅管蔡以安周 : 西周 初에 周公이 섭정할 때 周公의 아우인 管叔과 蔡叔이 紂王의 아들 武庚을 끼고 반란을 일으키자, 周公이 이들을 죽여서 周나라 왕실을 안정시켰다.

통감절요(7)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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