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通鑑節要(8)

통감절요(8)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통감절요(8)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丁巳]十二年이라
대력大曆 12년(정사 777)
三月 中書侍郞同平章事元載專橫注+[頭註] 不順理也 이어늘 賜自盡注+[頭註] 終也 言自終其命也 하고 有司籍載家財하니 胡椒至八百石이요 他物 稱是러라
3월에 중서시랑中書侍郞 동평장사同平章事원재元載가 전횡하자,注+[頭註]은 이치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자진自盡하게 하고注+[頭註]은 마침이니, 스스로 자기 목숨을 마침을 말한 것이다. 유사有司원재元載의 집에 있는 재물을 적몰하니, 호초胡椒가 800석에 이르렀고 다른 물건도 이와 비슷하였다.
○ 四月 以楊綰爲中書侍郞하고 常袞爲門下侍郞하야 竝同平章事하다
4월에 양관楊綰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삼고 상곤常袞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삼아 모두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임명하였다.
淸簡儉素하니 制下之日 朝野相賀러라
양관楊綰은 성품이 청렴하고 소탈하고 검소하니, 제서制書(관작을 임명하는 조칙)가 내려지던 날에 조야朝野가 서로 축하하였다.
郭子儀 方宴客이라가 聞之하고 減坐中聲樂五分之四하고 京兆尹黎幹 騶從甚盛이러니 卽日省之하야 止存十騎하고 中丞崔寬 第舍宏侈러니 毁之하다
곽자의郭子儀는 막 손님들에게 잔치를 벌이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좌중의 음악에 5분의 4를 줄였고, 경조윤京兆尹 여간黎幹은 추종꾼이 매우 많았는데 당일로 줄여서 다만 10명의 기병만을 남겨두었고, 중승中丞최관崔寬은 집이 크고 화려하였는데 급히 헐어버렸다.
方倚楊綰하야 使釐革注+[頭註] 理也 弊政이러니 綰有疾하야 七月하니 悼痛之甚하야 謂群臣曰 天 不欲朕致太平
이 막 양관楊綰에게 의지하여 그로 하여금 정사의 폐단을 개혁하게 하였는데,注+[頭註]는 다스림이다. 마침 양관楊綰이 질병이 있어 7월에 죽으니, 이 심히 애통해 하여 군신群臣들에게 이르기를 “하늘은 짐이 태평세상을 이룩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가.
何奪朕楊綰之速고하니라
어찌하여 짐의 양관楊綰을 이리 빨리 빼앗아 가는가.” 하였다.
[史略 史評]范氏曰
[史略 사평史評]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楊綰以淸名儉德爲相 而天下從之如此하니 況人君能正己以先이면 海內其有不率者乎
양관楊綰청백淸白명성名聲검소儉素으로 재상이 되자 천하天下사람들이 따르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하물며 인군人君이 자기 몸을 바로잡아 솔선을 보인다면 해내海內에 어찌 따르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是以 先王 必正其心하고 修其身 而天下自治
이 때문에 선왕先王이 반드시 자기 마음을 바로잡고 자기 몸을 닦음에 천하天下가 스스로 다스려졌던 것이다.
孟子曰 一正君而國定矣라하시니 此之謂也니라
맹자孟子가 말씀하시기를 ‘한 번 인군을 바로잡으면 나라가 안정된다.’ 하셨으니,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史略 史評]胡氏曰
[史略 사평史評]胡氏(胡寅)가 말하였다.
郭公, 黎幹, 崔寬 事類而情殊
곽공郭公(郭子儀)과 여간黎幹최관崔寬은 일은 비슷하나 실정은 다르다.
郭公 成人之美者也 幹寬則畏之者也
곽공郭公은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준 자이고 여간黎幹최관崔寬은 그들을 두려워한 자이다.
謂幹寬有仰德化服之心者非也 謂子儀有惕威踧踖之態者 亦非也니라
여간黎幹최관崔寬을 우러러 사모하여 교화되고 복종한 마음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요, 곽자의郭子儀가 위험을 두려워하여 조심하는 태도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 平盧節度使李正己注+[附註]本名懷玉이니 高麗人이라 以平盧將으로 逐其節度使侯希逸한대 詔以懷玉爲留後하고 賜名正己하다 先有淄, 靑, 齊, 海, 登, 萊, 沂, 密, 德, 棣十州之地하고 後得曹, 濮, 徐, 兗, 鄆五州하야 因徙治鄆하고 使子納守靑州하다 德宗建中初 約田悅, 梁崇義, 李惟岳叛하야 河南騷然이러니 會發疽死하니라 擁兵十萬하고 雄據東方하니 隣藩 皆畏之러라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 이정기李正己注+[附註]이정기李正己는 본래 이름이 회옥懷玉이니, 고려高麗 사람이다. 평로平盧의 장수로 절도사節度使후희일侯希逸을 축출하였는데, 조칙을 내려 이회옥李懷玉유후留後로 삼고 정기正己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먼저는 치주淄州, 청주靑州, 제주齊州, 해주海州, 등주登州, 내주萊州, 기주沂州, 밀주密州, 덕주德州, 체주棣州 등 열 의 땅을 소유하였고, 뒤에는 조주曹州, 복주濮州, 서주徐州, 연주兗州, 운주鄆州 등 다섯 를 얻고는 인하여 치소治所운주鄆州로 옮기고 아들 으로 하여금 청주靑州를 지키게 하였다. 덕종德宗 건중建中 초년에 전열田悅, 양숭의梁崇義, 이유악李惟岳과 약속하고 반란을 일으켜 하남河南 지방이 소란하였는데, 마침 등창이 나서 죽었다. 1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동방東方에 웅거하니, 이웃 번진藩鎭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是時 田承嗣, 李寶臣, 梁崇義注+[附註]長安人이니 以羽林射生으로 從來瑱하야 鎭襄陽하고 累遷至右兵馬使하다 及瑱死 衆推爲帥하니 朝廷不能討하고 遂以爲襄州刺史한대 據襄, 鄧, 均, 房, 復, 郢六州하고 有衆二萬하니라 相與根據蟠結하야 雖奉事朝廷이나 而不用其法令하고 官爵甲兵租賦刑殺 皆自專之호되 寬仁하야 一聽其所爲하니 雖在中國하야 名藩臣이나 實如蠻貉(貊)注+[頭註] 與貊通하니 南蠻이요 北狄이라 異域이러라
이때 전승사田承嗣, 이보신李寶臣, 양숭의梁崇義注+[附註]양숭의梁崇義장안長安 사람이니, 우림군羽林軍사생射生으로 내진來瑱을 따라 양양襄陽에 진주하고 여러 번 승진하여 우병마사右兵馬使에 이르렀다. 내진來瑱이 죽자 여러 사람들이 그를 장수로 추대하니, 조정에서 토벌하지 못하고 마침내 양주자사襄州刺史로 임명하였는데, 양주襄州, 등주鄧州, 균주均州, 방주房州, 복주復州, 영주郢州의 여섯 를 점거하고 병력 2만 명을 보유하였다. 서로 뿌리를 박고 또아리를 틀어 비록 겉으로는 조정朝廷을 받들어 섬겼으나 조정의 법령을 따르지 않았으며, 관작官爵갑병甲兵조부租賦형살刑殺을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하였으나 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한결같이 그들이 하는대로 따르니, 비록 중국中國에 있어서 이름은 번진藩鎭의 신하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만맥蠻貊注+[頭註]은 통하니, 남만南蠻이고 북적北狄이다. 이역異域과 같았다.
兵志曰
신당서新唐書》 〈병지兵志〉에 말하였다.
唐立府兵之制 頗有足稱焉이라
나라가 부병府兵의 제도를 세운 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
蓋古者兵法 起於井田注+[附註]司馬法 六尺爲步 步百爲畝 畝百爲夫 夫三爲屋이요 屋二爲井이요 井十爲通이요 通十爲成이니 出革車一乘이라 甲士三人이니 左持弓하고 右持矛하고 中人御하며 步卒七十二人이요 將重車二十五人이라 又古者井田 方里爲井이요 十井爲乘이니 百里之國 通計萬井이면 則當有千乘矣 漢志 方一里爲井이니 井十爲通이요 通十爲成이니 成方十里 成十爲終이요 終十爲同이니 方百里 同十爲封이요 封十爲畿 方千里 有稅有賦 稅以足食하고 賦以足兵이라 故四井爲邑이요 四邑爲丘 十六井也 四丘爲甸이니 六十四井也 有戎馬四匹, 兵車一乘, 甲士二人, 卒七十二人하야 干戈備具하니 是爲乘馬之法이라 五國爲屬이니 屬有長이요 十國爲連이니 連有帥 三十國爲卒이니 卒有正이요 二百一十國爲州 州有牧이라 連帥 比歲簡車하고 卒正 三年簡徒하고 群牧 五年大簡車徒하니 此先王爲國立武足兵之大略也니라 이러니 自周衰 王制壞而不復이라
옛날에 병법이 정전井田에서 나왔는데,注+[附註]사마법司馬法》에 6을 1라 하니, 100라 하고 100라 하고 3이라 하고 2이라 하고 10이라 하고 10이라 하니, 에서 혁거革車 1을 낸다. 혁거革車 1에는 갑사甲士가 세 명이니, 왼쪽 사람은 활을 잡고 오른쪽 사람은 창을 잡고 가운데 사람은 말을 몰며, 보졸步卒이 72명이고 중거重車(짐수레)를 맡고 있는 자가 25명이다. 또 옛날 정전井田 1이라 하고 10이라 하니, 100의 나라는 만 을 통틀어 계산하면 마땅히 천승千乘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전한서前漢書》 〈형법지刑法志〉에 “ 1리를 이라 하니 10이라 하고 10이라 하니 10이며, 10이라 하고 10이라 하니 100이며, 10이라 하고 10라 하니 1000인데, 여기에는 가 있고 가 있다. 로써 양식을 풍족하게 하고 로써 군대를 풍족하게 한다. 그러므로 4이라 하고 4라 하니 는 16이다. 4이라 하니 은 64이다. 여기에는 융마戎馬 4필과 병거兵車 1갑사甲士 2명과 보병 72명이 있어서 창과 방패를 구비하니, 이것이 승마乘馬의 법이다. 5이라 하니 에는 이 있고, 10이라 하니 에는 가 있고, 30이라 하니 에는 이 있고, 210라 하니 에는 이 있다. 연수連帥는 해마다 전차를 사열하고 졸정卒正은 3년마다 보병을 사열하고 군목群牧은 5년마다 전차와 보병을 크게 사열하니, 이는 선왕이 나라를 만들어 를 세우고 군대를 풍족하게 한 대략이다.
나라가 쇠함으로부터 왕자王者의 제도가 파괴되어 회복되지 못하였다.
至於府兵하야 始一寓之於農하야 〈其〉居處敎養하고 畜材待事하고 動作休息 皆有節目이라
부병제府兵制에 이르러서 비로소 한결같이 군대를 농군에 붙여두어 평소 거처할 때에는 가르치고 기르며 재주를 쌓아 유사시에 대비하며 동작하고 휴식함이 모두 절목節目이 있었다.
雖不能盡合古法이나 蓋得其大意焉하니 此高祖太宗之所以盛也
비록 옛 법에 다 부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큰 뜻을 얻었으니, 이는 고조高祖태종太宗이 훌륭한 이유이다.
至其後世子孫하야는 驕弱하야 不能謹守하고 屢變其制
후세에 이르러서는 자손들이 교만하고 약해져서 그 법을 삼가 지키지 못하고 제도를 자주 변경하였다.
夫置兵 所以止亂이러니 及其弊也 適足爲亂이요 又其甚也 至困天下以養亂하야 而遂至於亡焉이라
군대를 설치함은 난을 그치게 하기 위한 것인데 병폐가 생겨나자 다만 난이 되었으며, 또 병폐가 심해지자 천하를 곤궁하게 하여 난을 양성함에 이르러서 마침내 멸망에 이르렀다.
蓋唐有天下(三百)[二百餘]年 而兵之大勢三變注+[頭註]唐兵三變이라 이라
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지 200여 년에 군대의 큰 형세가 세 번 바뀌었다.注+[頭註]나라 병제兵制가 세 번 변한 것이다.
其始盛時 有府兵하고 府兵後廢而爲하고 彍騎又廢 而方鎭之兵 盛矣
처음 성할 때에는 부병府兵이 있었고, 부병府兵이 뒤에 폐지되어 확기彍騎가 되었으며, 확기彍騎가 또 폐지됨에 방진方鎭의 군대가 성하게 되었다.
及其末也 彊臣悍將 兵布天下한대 而天子亦自置兵於京師하고 曰禁軍이러니 其後 天子弱하고 方鎭彊하야 而唐遂以亡滅者 措置之勢使然也
말기에 이르러서는 강한 신하와 사나운 장수가 천하에 널려 있자, 천자 또한 스스로 경사京師에 군대를 두고 금군禁軍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뒤에 천자가 약해지고 방진方鎭이 강해져서 나라가 마침내 멸망하게 된 것은 조치措置한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府兵之制 起自西魏, 後周하야 而備於隋하고 唐興 因之
부병府兵의 제도는 서위西魏후주後周로부터 시작되어 나라 때에 갖추어졌는데, 나라가 일어남에 이것을 인습하였다.
武德初注+[頭註]武德 高祖年號 始置軍府하고 以驃騎車騎兩將軍府 (鎭)[領]之하며 析關中하야 爲十二道注+[附註]初析關中爲十二道러니 後又更置爲十二軍하니 萬年道爲參旗軍이요 長安道爲鼓旗軍이요 富平道爲元戎軍이요 醴泉道爲井鉞軍이요 同州道爲羽林軍이요 華州道爲騎官軍이요 寧州道爲折威軍이요 岐州道爲平道軍이요 幽州道爲招搖軍이요 西麟道爲苑遊軍이요 涇州道爲天紀軍이요 宜州道爲天節軍이라하고 軍置將副各一人하야 以督耕戰하고 以車騎府統之하다
무덕武德 초기에注+[頭註]무덕武德고조高祖의 연호이다. 처음으로 군부軍府를 두고는 표기驃騎거기車騎장군부將軍府로 하여금 이들을 통솔하게 하였으며, 관중關中을 나누어 12를 만들고注+[附註]처음 관중關中을 나누어 12를 만들었는데 뒤에 또다시 12을 설치하니, 만년도萬年道참기군參旗軍, 장안도長安道고기군鼓旗軍, 부평도富平道원융군元戎軍, 예천도醴泉道정월군井鉞軍, 동주도同州道우림군羽林軍, 화주도華州道기관군騎官軍, 영주도寧州道절위군折威軍, 기주도岐州道평도군平道軍, 유주도幽州道초요군招搖軍, 서린도西麟道원유군苑遊軍, 경주도涇州道천기군天紀軍, 의주도宜州道천절군天節軍이라 하였다.마다 장수將帥부장副將 각각 한 명을 두어 농사와 전투하는 일을 감독하였으며, 거기부車騎府로 이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六年 〈以〉天下旣定이라하야 改驃騎曰統軍이라하고 車騎曰別駕라하다
6년에는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다 하여 표기부驃騎府를 고쳐 통군부統軍府라 하고 거기부車騎府를 고쳐 별가부別駕府라 하였다.
太宗貞觀十年 更號統軍하야 爲折衝都尉하고 別將爲果毅都尉하고 諸府 總曰折衝府라하다
태종太宗 정관貞觀 10년(636)에 다시 통군부統軍府절충도위折衝都尉로 개칭하고 별장別將과의도위果毅都尉로 개칭했으며 여러 를 모두 절충부折衝府라 하였다.
凡天下十道注+[頭註]十道 하니 見三十六卷丁亥年하니라 置府六百三十四하니 皆有名號하고 而關內二百六十有一 皆以隸諸衛하다
그리하여 무릇 천하의 10注+[頭註]10태종太宗이 천하를 나누어 10를 만들었으니, 36권 정해년조丁亥年條에 보인다. 634개의 를 두었는데 모두 명칭이 있었으며, 관내關內의 261곳은 모두 제위諸衛에 예속시켰다.
高宗武后時 天下久不用兵하니 府兵之法 寖壞하야 番役更代 多不以時하니 衛士稍稍亡匿이라
고종高宗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는 천하가 오랫동안 무력을 사용하지 않자, 부병府兵의 법이 점점 파괴되어 번역番役을 번갈아 교대하는 것을 대부분 제때에 하지 않으니, 위사衛士들이 점점 도망하여 숨었다.
至是 益耗散하야 宿衛不能給注+[頭註] 足也 하니 宰相張說 乃請一切募士宿衛하고 號曰彍騎라하다
이 때에 이르러 더욱 군사들이 손실되고 흩어져서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니,注+[頭註]은 만족함이다. 재상宰相 장열張說이 마침내 청하여 일체 군사를 모집해서 숙위宿衛하고 확기彍騎라 이름하였다.
天寶以後 彍騎之法 又稍變廢하야 六軍宿衛皆市人이니
그러다가 천보天寶 이후에는 확기彍騎의 법이 또 차츰 변하고 폐지되어 6군의 숙위宿衛하는 자들이 모두 시장 사람들이었다.
及祿山反 皆不能受甲矣
그리하여 안녹산安祿山이 배반하게 되자 모두 갑옷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初府兵之置 居無事時 耕於野하고 其番上者 宿衛京師而已
처음 부병府兵을 설치한 것은 평소 무사할 때에는 들에서 농사를 짓고, 번상番上하는 자는 경사京師에서 숙위宿衛할 뿐이었다.
若四方有事 則命將以出이라가 事解輒罷하야 兵散于府하고 (歸將)[將歸]于朝
만일 사방에 일이 있게 되면 장수를 임명하여 출동했다가 일이 해결되면 즉시 해산하여, 군사들은 로 흩어지고 장수들은 조정으로 돌아갔다.
故士不失業하고 而將帥無握兵之重하니 所以防微杜漸하야 絶禍亂之萌也
그러므로 병사들은 생업을 잃지 않고 장수들은 막중한 병권을 쥐지 못하니, 이는 은미함을 막고 조짐을 막아서 화와 난의 싹을 끊은 것이었다.
及府兵法壞 而方鎭盛하니 夫所謂方鎭者 節度使之兵也
그러다가 부병府兵이 무너지자 방진方鎭의 법이 성행하니, 이른바 방진方鎭이라는 것은 절도사節度使의 군대이다.
其始 起於邊將之屯防者
그 시초는 변방 장수가 주둔하고 방어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自高宗永徽以後 都督帶使持節者 始謂之節度使 然猶未以名官이러니 安祿山反 而武夫戰卒以功起行陣者 皆除節度使
고종高宗 영휘永徽 연간 이후로 使의 임무를 띠고 을 잡은 도독都督절도사節度使라 처음으로 불렀으나 오히려 관직의 이름으로 삼지는 않았는데, 안녹산安祿山이 배반하자 전공으로 행진行陣에서 일어난 무부武夫전졸戰卒들을 모두 절도사節度使에 제수하였다.
由是 方鎭 相望於內地하고 父子繼握其兵而不肯代하야 自擇將吏하고 號爲留後하야 以邀命於朝注+[頭註] 與要通하니 求也
이로 말미암아 방진方鎭내지內地에 서로 이어지고 부자父子가 계속하여 병권을 잡아서 〈다른 사람과〉교대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장수와 관리를 가려 뽑고 유후留後라 이름하여 조정에서 그대로 임명해 주기를 요구하였다.注+[頭註]와 통하니, 요구하는 것이다.
天子力不能制하니 則忍恥含垢하야 因而授之하고 謂之姑息之政이라
천자가 힘으로 제재하지 못하니, 치욕을 참고 더러움을 머금고는 그대로 관직을 제수하고 이것을 고식지정姑息之政이라 일렀다.
始爲朝廷患者 號河朔三鎭注+[頭註]相衛薛嵩 魏博田承嗣 盧龍李懷仙이라이러니 及朱全忠以梁兵注+[頭註]見四十八卷辛酉年하니라 昭帝封全忠하야 爲梁王하니 是爲後梁하니라 하고 李克用以晉兵注+[頭註]見四十八卷甲戌年하니라 昭帝封克用하야 爲晉王하니 克用子存勖 滅梁하고 復稱唐하니 是爲後唐이니라 으로 更犯京師하야 唐遂以亡하니라
처음 조정의 걱정거리가 된 것은 하삭河朔삼진三鎭이라고注+[頭註]하삭河朔삼진三鎭상위相衛설숭薛嵩위박魏博전승사田承嗣노룡盧龍이회선李懷仙이다. 이름났었는데, 주전충朱全忠 지방의 군대를 데리고,注+[頭註]이 내용은 48 신유년辛酉年(901)에 보인다. 소제昭帝주전충朱全忠을 봉하여 양왕梁王으로 삼으니, 이것이 후량後梁이다. 이극용李克用 지방의 군대를 데리고注+[頭註]이 내용은 48 갑술년甲戌年(854)에 보인다. 소제昭帝이극용李克用을 봉하여 진왕晉王으로 삼았는데, 이극용李克用의 아들 존욱存勖을 멸하고 다시 이라 칭하니, 이것이 바로 후당後唐이다. 다시 경사京師를 침범하자 나라가 마침내 멸망하였다.
역주
역주1 : 극
역주2 : 확
역주3 太宗分天下爲十道 : 貞觀 元年(627) 2월에 州縣을 크게 통합하여 줄일 적에 山川의 형세를 따라 10道로 나누니, 첫째는 關內, 둘째는 河南, 셋째는 河東, 넷째는 河北, 다섯 번째는 山南, 여섯 번째는 隴右, 일곱 번째는 淮南, 여덟 번째는 江南, 아홉 번째는 劒南, 열 번째는 嶺南이었다.

통감절요(8)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