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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5)

통감절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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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子]永興元年이라 〈漢高祖劉淵元熙元年이요 成太宗李雄建興元年이라
是歲 이라
以成都王穎으로 爲皇太弟하다
○ 初 太弟穎 表匈奴劉淵하야 爲冠軍將軍하다
子聰 勇絶人하고 博涉經史하고 善屬文注+[通鑑要解] 之六切이니 著也하고 彎弓三百斤이라
弱冠注+[頭註]去聲이니 二十曰弱冠이라 游京師하니 名士莫不與交러라
以聰爲積弩將軍하다
從祖右賢王宣 謂其族人曰 自漢亡以來 我單于徒有虛號하야 無復尺土하고 自餘王侯 降同編戶注+[釋義] 排也 編戶者 謂列次民籍也
今吾衆 雖衰 猶不減二萬이어늘 奈何斂手受役하야 奄過百年이리오
左賢王 英武超世하니 天苟不欲興匈奴인댄 必不虛生此人也리라
今司馬氏骨肉相殘하야 四海鼎沸하니之業 此其時也라하고 乃相與謀하야 推淵爲大單于하고 使其黨呼延攸注+[釋義]匈奴名也 複姓이라 呼延氏 本曰呼衍이러니 後入中國하야 語轉衍爲延耳[通鑑要解]北狄傳 匈奴四姓 有呼延氏, 卜氏, 蘭氏, 喬氏로되 而呼延氏最貴하니라 詣鄴告之하다
白穎請歸會葬이어늘 弗許러니
及王浚, 東嬴公騰注+[通鑑要解]王浚 幽州都督이요 東嬴公騰 幷州刺史 晉宗室之疎戚이라 起兵 說穎曰
請爲殿下하야 還說五部注+[通鑑要解]曹操分南匈奴하야 爲五部하고 以淵父豹 爲左部帥也하야 以赴國難하리니 二豎之首注+[通鑑要解]二豎 謂浚與騰也 可指日而懸也리이다
하야 拜淵爲北單于, 參丞相軍事하다
至左國城이어늘 劉宣等 上大單于之號하니 二旬之間 有衆五萬이라
遷都左國城注+[通鑑要解]匈奴左部所居城也하니 胡, 晉歸之者 愈衆이라
謂群臣曰 昔 漢有天下久長하야 恩結於民하니 漢氏之甥注+[通鑑要解]漢高以宗室女 爲公主하야 以妻冒頓하고 約爲兄弟 其子孫冒姓劉氏으로 約爲兄弟
兄亡弟紹 不亦可乎 乃建國號曰漢이라하고
卽漢王位하야 改元元熙하고 尊漢安樂公하야 爲孝懷皇帝하다
○ 十月 李雄注+[原註]李特子 前年 李特起蜀하니라[釋義]李雄 字仲雋이니 特之第三子也[附註〕初 隨流人入蜀하야 聚爲寇盜하고 自稱益州牧이러니 與益州刺史羅尙戰敗死하다 其子雄 攻走羅尙하고 遂入成都하야 自稱成都王하니라 卽成都王位하다
○ 帝旣還洛陽 張方注+[通鑑要解]河間王顒之將이라 擁兵하야 專制朝政하니 太弟穎 不得預事
詔太弟穎하야 以成都王으로 還第케하고 更立豫章王熾하야 爲皇太弟하다
○ 十一月 張方 劫帝하야 遷都長安하다


영흥永興 원년元年(갑자 304) - 나라 고조高祖 유연劉淵원희元熙 원년元年이요, 나라 태종太宗 이웅李雄건흥建興 원년元年이다.
이해에 참국僭國이 둘이니, 대국大國이 하나이고 소국小國이 하나이다. -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황태제皇太弟로 삼았다.
○ 처음에 태제太弟 사마영司馬穎표문表文을 올려 흉노匈奴 좌현왕左賢王 유연劉淵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 삼았다.
유연劉淵의 아들 유총劉聰은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경사經史를 널리 섭렵하고 문장文章을 잘 지었으며注+[通鑑要解]은 之六切(족)이니 저술하는 것이다. 무게가 300근이 나가는 활을 당겼다.
약관弱冠注+[頭註]거성去聲이니, 20세를 약관弱冠이라 한다. 시절에 경사京師에 유람하니, 명사名士들이 더불어 사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마영司馬穎유총劉聰적노장군積弩將軍으로 삼았다.
유연劉淵종조從祖우현왕右賢王 유선劉宣이 집안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나라가 망한 이래로 우리 선우單于가 단지 빈 이름만 소유하여 다시는 한 자 되는 땅도 없고 그 나머지 왕후王侯는 강등되어 일반 백성들과 똑같이 호적에 편입注+[釋義]은 배열함이니, 편호編戶평민平民의 호적에 차례로 나열함을 이른다. 되었다.
지금 우리 무리가 비록 쇠미해졌으나 그래도 2만 명을 밑돌지 않는데, 어찌 손을 놓고 사역당하여 이대로 백 년을 지낸단 말인가.
좌현왕左賢王영명英明함과 무용武勇이 세상에 뛰어나니, 하늘이 만일 우리 흉노匈奴를 일으키고자 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 사람을 헛되이 태어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사마씨司馬氏가 골육간에 서로 해쳐서 온 천하가 솥의 물이 끓는 듯하니,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왕업王業을 회복하려면 바로 지금이 기회이다.” 하고, 마침내 서로 모의하여 유연劉淵을 추대하여 대선우大單于로 삼고 그의 호연유呼延攸注+[釋義]呼延攸는 흉노匈奴의 이름이니 복성複姓이다. 호연씨呼延氏는 본래 호연呼衍이라고 하였는데, 뒤에 중국中國에 들어와 어음語音이 변하여 으로 쓴 것이다. [通鑑要解]《진서晉書》 〈북적전北狄傳〉에 “흉노匈奴의 네 호연씨呼延氏복씨卜氏난씨蘭氏교씨喬氏가 있는데, 호연씨呼延氏가 가장 귀하다.” 하였다. 로 하여금 땅에 나아가 이를 고하게 하였다.
유연劉淵사마영司馬穎에게 아뢰어 돌아가서 회장會葬할 것을 청하였으나 사마영司馬穎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왕준王浚동영공東嬴公 사마등司馬騰注+[通鑑要解]왕준王浚유주도독幽州都督이고 동영공東嬴公 사마등司馬騰병주자사幷州刺史이니, 나라 종실宗室의 먼 친척이다. 이 군대를 일으키자 유연劉淵사마영司馬穎을 설득하기를
“청컨대 전하를 위해서 돌아가서 오부五部注+[通鑑要解]조조曹操남흉노南匈奴를 나누어 오부五部로 만들고, 유연劉淵의 아버지 유표劉豹좌부수左部帥로 삼았다. 를 설득하여 국난國難에 달려오게 할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두 놈注+[通鑑要解]이수二豎왕준王浚사마등司馬騰을 이른다. 의 머리를 머지않아 매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마영司馬穎이 기뻐하여 유연劉淵북선우北單于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로 삼았다.
유연劉淵좌국성左國城에 이르자 유선劉宣 등이 대선우大單于의 칭호를 올리니, 20일 동안에 5만 명의 무리를 보유하게 되었다.
도읍을 좌국성左國城注+[通鑑要解]좌국성左國城흉노匈奴좌부左部가 거주하는 이다. 으로 옮기니, 오랑캐와 나라 사람들 중에 귀의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유연劉淵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옛날 나라는 천하를 오랫동안 보유하여 은혜가 백성들에게 베풀어졌으니, 우리는 나라의 외손外孫으로 나라와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다.注+[通鑑要解]나라 고조高祖가 종실의 딸을 공주公主라 하여 묵특冒頓에게 시집보내고 형제兄弟가 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그 자손들이 마침내 가탁하여 유씨劉氏으로 삼은 것이다.
형이 죽으면 아우가 계승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국호를 이라 하였다.
한왕漢王에 올라 원희元熙라 개원하고 나라 안악공安樂公 유선劉禪을 추존하여 효회황제孝懷皇帝라 하였다.
○ 10월에 〈나라〉 이웅李雄注+[原註]李雄은 이특李特의 아들이다. 전 해(303)에 이특李特에서 군대를 일으켰다.[釋義]李雄은 중준仲雋이니, 이특李特의 셋째 아들이다.[附註]처음에 이특李特이 유랑하는 사람을 따라 으로 들어가서 무리를 모아 도둑질을 하고 익주목益州牧이라고 자칭하였는데, 익주자사益州刺史 나상羅尙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으니, 그의 아들 이웅李雄나상羅尙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성도成都에 들어가 성도왕成都王이라고 자칭하였다. 성도왕成都王의 자리에 올랐다.
○ 황제가 낙양洛陽으로 돌아가자 장방張方注+[通鑑要解]장방張方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의 장수이다. 이 군대를 끼고 조정의 정사를 전제專制하니, 태제太弟 사마영司馬穎이 다시는 정사에 관여할 수가 없었다.
태제太弟 사마영司馬穎에게 명하여 성도왕成都王의 작위를 가지고 사가私家로 돌아가게 하고, 다시 예장왕豫章王 사마치司馬熾를 세워 황태제皇太弟로 삼았다.
○ 11월에 장방張方이 황제를 위협하여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였다.


역주
역주1 僭國二 : 이해 이후로는 僭國이 처음 建國하거나 뒤이어 卽位하거나 혹은 다시 改元했을 때에만 年度 아래에 分注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열하지 않았다.
역주2 是歲僭國二 大一小一 : 僭國이 둘이니, 大國 하나는 劉淵의 漢(前趙)이고, 小國 하나는 李雄의 成이다.
역주3 左賢王 : 匈奴 귀족의 최고위 封號로, 보통 太子나 單于의 후계자에게 주어진다. 大臣 중에 신분이 높은 자는 左賢王, 다음은 左谷蠡王, 그 다음은 右賢王, 그 다음은 右谷蠡王이니, 이들을 四角이라 불렀다.
역주4 : 효
역주5 呼韓邪 : 西漢 때 匈奴의 單于이다. 甘露 元年(B.C.53)에 兄인 郅支單于에게 패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漢나라에 귀화하여 南匈奴가 되었다. 元帝 竟寧 元年(B.C.33)에 入朝하여 王昭君을 아내로 맞이하여 흉노의 왕비인 閼氏로 삼았다. 南匈奴는 後漢 光武帝 建武 26年(50)부터 塞內로 들어와 塞內의 平民과 함께 호적에 편입되어 살았는데, 사람들이 그들의 번창을 두려워하자 魏王 曹操가 그를 鄴城에 억류하고 右賢王을 보내어 南匈奴를 관리하게 하였다. 單于의 봉호는 그의 자손들이 물려받았다.

통감절요(5)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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