房玄齡等이 受詔하야 定律令할새 比古에 死刑을 除其太半하니 天下稱賴라
○ 三月에 上이 宴洛陽宮西苑하고 泛積翠池할새 顧謂侍臣曰
하고 結怨於民하야 今悉爲我有
하니 正由宇文述
注+[通鑑要解]라 , 虞世基, 裴蘊之徒
內爲諂諛하고 外蔽聰明故也
니
○ 魏徵이 上疏하야 以爲人主善始者多하고 克終者寡하니
蓋以
殷(
隱)
憂注+[頭註]殷은 讀曰隱이니 痛也라 則竭誠以盡下하고 安逸則驕恣而輕物이니
盡下則
胡,
越同心하고 輕物則
六親注+[頭註]父母兄弟妻子라離德하야 雖震之以威怒
나 亦皆貌從而心不服故也
니이다
人主誠能見可欲則思知足
하고 將興繕則思知止
하고 處高危則思謙降
하고 臨滿盈則思挹損
注+[頭註]挹은 貶也라하고 遇逸樂則思
節
注+[釋義]撙은 子本反이니 裁抑也라 記曲禮에 恭敬撙節退讓以明禮註에 라하니라 하고 在宴安則思後患
하고 防壅蔽則思延納
하고 疾讒邪則思正己
하고 行賞爵則思因喜而僭
하고 施刑罰則思因怒而濫
이니
兼是十思하야 而選賢任能이면 固可以無爲而治하리니 又何必勞神苦體하야 以代百司之任哉잇가
以爲陛下欲善之志不及於昔時
하고 聞過必改 少虧於曩日
하며 譴罰積多
하고 威怒微厲
하시니 乃知
貴不期驕,
富不期侈注+[通鑑要解]書曰 位不期驕하고 祿不期侈라한대 孔註에 貴不與驕期而驕自至하고 富不與侈期而侈自來라하니라非虛言也
니이다
昔隋之未亂也에 自謂必無亂이라하고 其未亡也에 自謂必無亡이라
故로 賦役無窮하고 征伐不息하야 以至禍將及身호되 而尙未之寤也니이다
伏願取鑒於隋하야 去奢從約하고 親忠遠佞하야 以當今之無事로 行疇昔之恭儉이면 則盡善盡美를 固無得而稱焉이리이다
夫取之實難이요 守之甚易어늘 陛下能得其所難하시니 豈不能保其所易乎잇가
○ 魏徵
이 上疏
하야 以爲文子
注+[通鑑要解]老子弟子요 范蠡師라 曰
自王道休明으로 十有餘年이나 然而德化未洽者는 由待下之情이 未盡誠信故也니이다
今에 立政致治는 必委之君子하고 事有得失은 或訪之小人하야 其待君子也에 敬而疎하고 遇小人也에 輕而狎하시니 狎則言無不盡이요 疎則情不上通이니이다
然
이나 才非經國이요 慮不及遠이면 雖竭力盡誠
이라도 猶未免有敗
어든 況內懷姦
면 其禍豈不深乎
잇가
夫雖君子라도 不能無小過니 苟不害於正道면 斯可略矣니이다
旣謂之君子하고 而復疑其不信이면 何異立直木而疑其影之曲乎잇가
陛下誠能愼選君子하야 以禮信用之하시면 何憂不治릿고
上
이 賜手詔褒美曰 昔
에 晉武帝平吳之後
에 志意驕怠
한대 何曾
이 位極台司
注+[附註]漢天文志에 下星이 兩兩而居하니 在人에 爲三公이요 在天에 爲三台라 三台色齊하면 君臣和라하고 大宗伯疏에 上台司命爲太尉요 中台司中爲司徒요 下台司祿爲司空이라하니라 하야 不能直諫
하고
得公之諫
하니 朕知過矣
라 當
置之几案하야 以比弦韋注+[釋義]三國魏劉曰 韋弦이 非能言之物이나 而聖賢이 引以自匡하니 臣願自比於韋弦하리이다 韓子曰 西門豹性急이라 故佩韋以自緩하고 董安于性緩이라 故佩弦以自急이라하니라 호리라
以爲三代及漢은 歷年이 多者八百이요 少者不減四百은 良以恩結人心하야 人不能忘故也니이다
自是以降으로 多者六十年이요 少者纔二十餘年은 皆無恩於人하야 本根不固故也니이다
陛下當隆禹, 湯, 文, 武之業하야 爲子孫하야 立萬代之基니 豈得但恃當年而已릿가
今之戶口 不及隋之什一
이어늘 而給役
注+[頭註]給은 謂供給이라 者 兄去弟還
하야 道路相繼
라
陛下雖加恩詔하야 使之裁損이나 然營繕不休하니 民安得息이릿가
臣觀自古以來로 百姓愁怨하야 聚爲盜賊이면 其國이 未有不亡者하니
蓋幽, 厲嘗笑桀, 紂矣
요 煬帝亦笑周, 齊
注+[頭註]周는 宇文氏요 齊는 高氏이니 皆北朝라 矣
니 不可使後之笑今
을 如今之笑煬帝也
니이다
貞觀之初
에 天下飢
注+[釋義]歉은 苦簟反이니 食不滿也라 하야 斗米直(値)匹絹
이로되 而百姓不怨者
는 知陛下憂念不忘故也
요
今
에 比年豐穰
注+[釋義]穰은 如羊反이니 豐也라 하야 匹絹
에 得粟十餘斛
이로되 而百姓怨咨者
는 知陛下不復念之
하고 多營不急之務故也
니이다
自古以來로 國之興亡이 不以畜積多少하고 在於百姓苦樂하니이다
且以近事驗之컨대 隋貯洛口倉而李密因之하고 東都積布帛而世充資之하고 西京府庫 亦爲國家之用하야 至今未盡하니
夫畜積이 固不可無나 要當人有餘力然後에 收之요 不可彊斂以資寇敵也니이다
夫儉以息人은 陛下已於貞觀之初에 親所履行하시니 在於今日하야 爲之固不難也니이다
陛下必欲爲長久之計인댄 不必遠求上古요 但如貞觀之初면 則天下幸甚이리이다
又百姓所以治安은 唯在刺史, 縣令하니 苟選用得人이면 則陛下可以端拱無爲하리이다
今朝廷이 唯重內官하고 而輕州縣之選하야 刺史를 多用武人하고 或京官不稱職이면 始補外任하며 邊遠之處엔 用人更輕하니 所以百姓未安은 殆由於此니이다
疏奏에 上稱善久之하고 謂侍臣曰 刺史는 朕當自選이요 縣令은 宜詔京官五品已上하야 各擧一人하라
방현령房玄齡 등이 조명詔命을 받아 율령律令을 정할 적에 옛날에 비해 사형死刑을 반수 이상 없애니, 천하 사람들이 칭찬하고 신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옥사를 결단하는 것이 공평하고 진실해졌다.
3월에 상上이 낙양궁洛陽宮의 서원西苑에서 연회하고 적취지積翠池에 배를 띄워 놀 적에 모시는 신하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
양제煬帝가 이 궁궐과 동산을 만들고는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서 지금 전부 나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바로
우문술宇文述‧
注+[通鑑要解]우문술宇文述의 술자述字는 마땅히 개愷가 되어야 한다. 虞世基‧
배온裴蘊의 무리가 안으로 아첨하고 밖으로
군주君主의 총명을 가렸기 때문이다.
위징魏徵이 상소上疏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인주人主가 시작을 잘하는 자는 많지만 끝을 잘하는 자는 적으니,
어찌 천하를 취하기가 쉽고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측은해 하고 걱정이 심할 때에는
注+[頭註]은殷은 은隱으로 읽으니, 가슴 아파하는 것이다. 정성을 다하여 아랫사람들을 대하고, 안락할 때에는 교만하고 방자하여 사물을 경시하기 때문이니,
정성을 다하여 아랫사람을 대하면
북호北胡와
남월南越이 한마음이 되지만 사물을 경시하면
육친六親들이
注+[頭註]육친六親은 부父‧모母‧형兄‧제弟‧처妻‧자子이다. 마음이 떠나서, 비록 위엄과 노여움으로 두려워 떨게 하더라도 모두 겉으로만 따르고 마음속으로는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군주가 진실로 욕심낼 만한 것을 보았을 때에는 만족할 줄 알아야 함을 생각하고, 건물을 새로 짓거나 수리하려 할 때에는 그칠 줄 알아야 함을 생각하고, 높은 자리에 처했을 때에는 겸손하게 낮출 것을 생각하고, 가득함에 임했을 때에는 덜어낼 것을 생각하고,
注+[頭註]읍挹은 덜어내는 것이다. 안일함과 즐거움을 만났을 때에는 절제할 것을 생각하고,
注+[釋義]존撙은 子本反(존)이니 제재하여 억제하는 것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의 “공경하고 절제하고 겸양하여 예禮를 밝힌다.”는 내용의 주註에 “준撙은 추趨와 같다.” 하였다. 안락하고 편안할 때에는
후환後患을 생각하고, 총명이 가려지는 것을 막으려 할 때에는 천하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것을 생각하고,
참소讒訴하는 자와 간사한 자를 미워할 때에는 자기 몸을 바로잡을 것을 생각하고,
상賞과
관작官爵을 내려 줄 때에는 기쁨으로 인하여 넘칠까 생각하고,
형벌刑罰을 시행할 때에는 노여움으로 인하여 지나칠까 생각해야 합니다.
이 열 가지 생각을 겸하고서 어진 이를 선발하고 유능한 자에게 맡기면 진실로 함이 없이 다스려질 것이니, 또 어찌 굳이 정신을 수고롭게 하고 육체를 괴롭게 하여 백사百司의 직임을 대신할 것이 있겠습니까.”
5월에 위징魏徵이 상소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폐하께서
선善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가 옛날에 미치지 못하고 허물을 들으면 반드시 고치려는 노력도 다소 예전만 못하며, 견책과 형벌이 많이 쌓이고 위엄과 노여움이 점점 엄해지시니, ‘귀하면 교만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교만해지고 부유하면 사치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사치스러워진다.’는
注+[通鑑要解]《서경書經》 〈주관周官〉에 “지위는 교만함을 기약하지 않아도 교만해지고 녹祿은 사치함을 기약하지 않아도 사치해진다.” 하였는데, 공영달孔穎達의 주註에 “귀함은 교만함과 기약하지 않아도 교만함이 저절로 이르고, 부유함은 사치함과 기약하지 않아도 사치함이 저절로 이른다.” 하였다. 것이 빈 말이 아님을 이제서야 알겠습니다.
옛날 수隋나라가 혼란해지기 전에는 스스로 반드시 혼란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망하기 전에는 스스로 반드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역이 끝이 없고 정벌을 쉬지 않아서 화禍가 장차 몸에 이르게 되었으나 오히려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모습을 비춰보는 것은 잔잔한 물만 한 것이 없고 실패를 비춰보는 것은 망한 나라만 한 것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수隋나라에서 거울을 취하여 사치를 버리고 검약을 따르시며 충신을 가까이하고 간신을 멀리해서 지금의 태평무사함으로 예전의 공손하고 검소함을 행하신다면 진선진미盡善盡美한 경지에 이를 것임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
천하를 취하기는 실로 어렵고 천하를 지키기는 매우 쉬운데, 폐하께서는 이미 그 어려운 것을 얻으셨으니, 어찌 그 쉬운 것을 보전하지 못하시겠습니까.”
“《
문자文子》에
注+[通鑑要解]노자老子의 제자이고 범려范蠡의 스승이다. ‘똑같은 말을 하는데도 믿어주는 것은 믿음이 말하기 전에 있기 때문이요, 똑같은 명령을 하는데도 행해지는 것은 정성이 명령 밖에 있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왕도王道가 아름답고 밝은 지가 10여 년이 되었지만 덕화德化가 아직 흡족하지 못한 것은 폐하께서 아랫사람을 대하는 심정이 정성과 믿음을 다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정책을 세우고 다스림을 지극히 하는 것은 반드시 군자에게 맡기고 일에 득실이 있는 것은 간혹 소인에게 물으시어, 군자를 대할 적에는 공경하여 소원하고 소인을 대할 적에는 경시하여 친압하시니, 친압하면 말을 다하지 않음이 없고 소원하면 정情이 위에 이르지 못합니다.
중등中等의 지혜를 가진 사람인들 어찌 작은 지혜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재주가 국가를 경영할 만하지 못하고 생각이 심원한 데에 미치지 못하면 비록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더라도 실패함을 면치 못하는데, 더구나 안에 간사한 마음을 품는다면 그 화가 어찌 깊지 않겠습니까.
비록 군자라도 작은 허물이 없을 수 없으니, 만일 정도正道에 해롭지 않다면 생략하고 따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그를 일러 군자라 칭하고서 다시 진실하지 않음을 의심한다면 곧은 나무를 세워놓고 그 그림자가 굽었다고 의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폐하께서 진실로 군자를 신중히 선발해서 그들을 예禮로써 믿고 등용하신다면 어찌 다스려지지 않음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위태롭고 멸망하는 시기를 보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상上이 손수 쓴
조서詔書를 내리고 칭찬하기를 “옛날
진晉나라
무제武帝가
오吳나라를 평정한 뒤에 의지가 교만하고 태만해지자,
하증何曾은 지위가
태사台司의 최고 자리에 이르렀으면서도
注+[附註]《전한서前漢書》 〈천문지天文志〉에 “북두성의 두괴斗魁 아래에 삼태성三台星이 둘씩 짝지어 있으니, 사람에 있어서는 삼공三公이 되고 하늘에 있어서는 삼태성三台星이 된다. 삼태성三台星의 색깔이 같으면 군신간君臣間이 화목하다.” 하였고, 《주례周禮》 〈대종백大宗伯〉의 소疏에 “상태上台는 사명司命으로 태위太尉가 되고, 중태中台는 사중司中으로 사도司徒가 되고, 하태下台는 사록司祿으로 사공司空이 된다.” 하였다. 직간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손들에게 은밀히 말하여 스스로 밝은 지혜를 자랑하였으니, 이는 크게 불충한 것이다.
공公의 간언을 얻고
짐朕은 나의 잘못을 알았으니, 마땅히 이것을
궤几와 책상 위에 두어서 가죽과 활줄에 견주겠다.” 하였다.
注+[釋義]삼국시대三國時代위魏나라 유익劉廙가 말하기를 “부드러운 가죽과 활줄은 말할 만한 물건은 아니지만 성현聖賢이 이것을 끌어다 자신을 바로잡았으니, 신은 저를 부드러운 가죽과 활줄에 견주기를 바랍니다.” 하였고, 《한비자韓非子》에 말하기를 “서문표西門豹는 성질이 급하였으므로 부드러운 가죽을 몸에 차서 스스로 느긋해지게 하였고, 동안우董安于는 성질이 느긋하였으므로 활줄을 차서 스스로 급해지게 했다.” 하였다.
시어사侍御史마주馬周가 상소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삼대三代와 한漢나라가 역년歷年이 많은 경우에는 800년이었고 적은 경우에도 400년보다 적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은혜가 사람들 마음에 맺혀서 사람들이 잊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이후로는 역년歷年이 많은 경우에는 60년이었고 적은 경우에는 겨우 20여 년이었으니, 이는 모두 백성들에게 은혜가 없어서 국가의 근본이 견고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우왕禹王‧탕왕湯王‧문왕文王‧무왕武王의 공업功業을 높여서 자손을 위하여 만대萬代의 기업基業을 세우셔야 할 것이니, 어찌 단지 당년當年의 공업功業만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호구戶口는
수隋나라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부역賦役을 하는 자들이
注+[頭註]급給은 공급함을 이른다. 형이 떠나면 아우가 돌아와서 도로에 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비록 은혜로운 조명詔命을 내려 부역賦役을 줄이게 하시나 영선營繕하는 일이 그치지 않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편안히 쉴 수 있겠습니까.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하여 모여서 도적이 되면 그 나라가 망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은 일찍이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을 비웃었고
수隋나라
양제煬帝 또한
북주北周와
북제北齊의
注+[頭註]주周는 우문씨宇文氏이고 제齊는 고씨高氏이니, 모두 북조北朝이다. 군주를 비웃었으니,
후대後代로 하여금 지금의 우리를 비웃기를 지금의 우리가
양제煬帝를 비웃는 것과 같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관貞觀 초기에 천하에 흉년이 들어서
注+[釋義]겸歉은 苦簟反(겸)이니, 음식이 양에 차지 않는 것이다. 쌀 한 말 값이 비단 한 필이었는데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았던 것은 폐하께서 백성들을 근심하고 염려하여 잊지 않으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해마다 풍년이 들어서
注+[釋義]양穰은 如羊反(양)이니, 풍년이다. 비단 한 필에 곡식 10여
곡斛을 얻을 수 있는데도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은 폐하께서 다시는 그들을 염려하지 않고 급하지 않은 일을 많이 경영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흥망은 저축의 많고 적음을 따르지 않고 백성들의 괴로움과 즐거움에 달려 있었습니다.
또 근래의 일을 가지고 징험하건대, 수隋나라가 낙구창洛口倉에 곡식을 많이 저축하였으나 이밀李密이 이것을 이용하였고, 동도東都에 베와 비단을 많이 쌓아두었으나 왕세충王世充이 이용하였고, 서경西京의 부고府庫 역시 우리나라에 이용당하여 지금까지도 다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저축은 진실로 없을 수 없으나 요컨대 백성들이 여력餘力이 있은 뒤에 거두어야 할 것이요, 강제로 거두어서 구적寇敵에게 이용당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절약하여 백성들을 쉬게 하는 것은 폐하께서 이미 정관貞觀 초기에 몸소 실천하셨으니, 오늘날에 행하시는 것은 진실로 어렵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반드시 장구한 계책을 세우고자 하신다면 굳이 멀리 상고시대上古時代에서 찾을 것 없이 다만 정관貞觀의 초기처럼만 하신다면 천하가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또 백성들이 다스려지고 편안함은 오직 자사刺史와 현령縣令에게 달려 있으니, 만일 자사刺史와 현령縣令을 선발하여 등용할 때에 적임자를 얻는다면 폐하께서는 단정히 앉아서 팔짱을 끼고 함이 없어도 천하가 다스려짐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에서는 오직 내관內官의 선발을 중히 여기고 주현州縣의 선발을 가볍게 여겨서, 자사刺史에 대부분 무인武人들을 등용하고 혹 경관京官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비로소 외임外任을 맡기며, 변방의 먼 곳에는 사람을 등용하는 것을 더욱 가볍게 여기니, 백성들이 편안하지 않은 것은 거의 이 때문입니다.”
마주馬周가 상소를 아뢰자, 상上이 칭찬하기를 마지않고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자사刺史는 짐朕이 직접 선발할 것이요, 현령縣令은 경관京官 5품 이상에게 명해서 각각 한 사람씩 천거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