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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1)

통감절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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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周 自考王封其弟于河南하니 是爲桓公이라
동주東周고왕考王이 그 아우를 하남河南에 봉함으로부터 비롯되니, 이가 환공桓公이다.
以續周公官職이러니 桓公卒 子威公立하고 威公卒 子惠公立이라
주공周公관직官職을 이었는데, 환공桓公이 죽자 아들 위공威公이 서고, 위공威公이 죽자 아들 혜공惠公이 섰다.
惠公 乃封其少子於鞏하야 以奉王하고 號東周惠公이라하니라 〈出史記 ○ 東西周之稱 又起於此
혜공惠公은 마침내 그 소자少子(작은아들)를 땅에 봉하여 왕을 받들게 하고 이름을 동주東周 혜공惠公이라 하였다. - 《사기史記》에 나옴 ○ 동주東周서주西周의 칭호가 또 여기서 시작되었다.
索隱曰 惠公立長子하니 曰西周公이요 又封少子於鞏하야 仍襲父號하니 曰東周惠公이라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혜공惠公장자長子를 세우니 서주공西周公이라 하였고, 또 소자少子 땅에 봉하여 아버지의 칭호를 그대로 세습하니 동주東周 혜공惠公이라 하였다.
於是 又稱東西二周也하니라
이에 또 동주東周서주西周라고 칭하게 되었다.” 하였다.
按世本 西周桓公 名揭 居河南하고 東周惠公 名班이니 居洛陽 是也
살펴보건대 세본世本에 “서주西周환공桓公은 이름이 이니 하남河南에 거주하고, 동주東周혜공惠公은 이름이 이니 낙양洛陽에 거주하였다.” 하였다.
復齋胡氏曰 其後 揭沒而長子成公 襲有其地하고 少子班 專制洛陽하야 兄弟角立하니 史冊逸其世數名氏
복재호씨復齋胡氏가 말하기를 “그 뒤에 가 죽고 장자長子성공成公이 세습하여 하남河南을 소유하고 소자少子이 오로지 낙양洛陽을 점령하여 형제가 상대하고 있었는데, 역사책에는 그 세수世數명씨名氏를 잃었다.
至赧王三十四年하야 楚謀入寇어늘 王使東周君으로 諭止之하니 蓋班之後也
난왕赧王 34년에 이르러 나라가 나라를 침입할 것을 도모하자 난왕赧王동주군東周君으로 하여금 타일러서 중지하게 하였으니, 이 동주군東周君의 후손일 것이다.
至赧王入秦하야 秦遷西周君於𢠸狐聚하야 而河南亡하고 莊襄元年 遷東周君於陽人聚而洛陽之鞏亡하니라
난왕赧王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나라가 서주군西周君을 𢠸狐聚로 옮겨서 하남河南이 망하였고, 장양왕莊襄王 원년元年동주군東周君양인취陽人聚로 옮겨서 낙양洛陽이 망하게 되었다.” 하였다. -
남궁정일南宮靖一이 말하였다.
周自武王으로 至東周君滅而周始亡于秦하니 斯實錄也
나라는 무왕武王으로부터 동주군東周君이 멸망함에 이르러 나라가 비로소 나라에게 망하였으니, 이것이 진실한 기록이다.
後有秉春秋之筆者 盍改而正諸리오
뒤에 춘추春秋의 붓을 잡는 자(역사를 기술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이것을 고쳐서 바로잡지 않겠는가.”
- 살펴보건대 구본舊本에는 온공溫公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따라 난왕赧王나라로 들어간 뒤로부터 곧바로 나라 소양왕昭襄王나라의 계통을 이어받아 진기秦紀로 삼았는데, 내(劉剡)가 이미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를 따라서 바로잡았고,
今復得南宮氏之說이어늘 而雙湖胡氏深有取焉하니 極爲確論하니 眞所謂發先賢之所未發者也
이제 다시 남궁씨南宮氏을 얻었는데 쌍호호씨雙湖胡氏(胡一桂)가 이것을 깊이 취함이 있었으니, 지극히 확고한 논의가 되는 바, 진실로 이른바 ‘선현先賢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는 것이다.
舊本正之而未盡이어늘 今復正之于左하야 以俟質于이라
구본舊本에는 바로잡았으나 미진하였는데, 이제 다시 아래에 바로잡아서 고명高明사학선생史學先生을 기다려 질정하는 바이다. -
역주
역주1 [譯註]南宮氏靖一 : 南宮靖一은 南宋 말기 사람으로 字가 仲靖이다. 저서로 《小學史斷》 2권이 있다.
역주2 [譯註]按舊本……正之 : 《資治通鑑》에는 赧王이 항복하고 죽은 뒤에 周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보고 바로 〈秦紀〉 昭襄王 52년(丙午)으로 이었는데, 朱子의 《資治通鑑綱目》에는 秦나라를 列國과 함께 나열하여 雙行으로 分註하였고, 이 책에서는 南宮靖一의 말에 의거하여 東周를 正統으로 보아 7년을 더 연장한 다음 分註하였다. 그러나 이는 南宮靖一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으로 비판이 없지 않다. 여기에 대해 일찍이 金都鍊 氏는 그의 譯書에서 다음과 같은 按說을 붙인 바 있다.
“《資治通鑑》에서는 赧王 59年條에서 〈秦紀〉로 이어져 秦 昭襄王 52년으로 넘어간다. 《通鑑節要》의 舊本도 《資治通鑑》과 마찬가지로 昭襄王으로 周統을 이었는데, 후대에는 朱子의 《資治通鑑綱目》의 규례를 따라 秦의 정통을 인정하지 않고 ‘東周君’을 설정한 것이다. 위의 첫 대목은 《資治通鑑》에는 없고 《史記》에서 따온 것이다. 이 부분은 문맥이 어색하여 마치 桓公 이래로 惠公까지가 모두 東周君인 것처럼 보기 쉬우나 실제로는 桓公 이래로 惠公까지는 西周公인데, 惠公이 그 작은아들을 鞏에 보내어 東周君을 받들게 하였으므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東周의 惠公’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東周君은 실제로는 東周公이라야 옳다. 赧王의 죽음으로 周나라는 사실상 완전히 망하였으나 秦에 정통을 부여하지 않으려다 보니, 본래 실체도 없던 東周君을 《史記》에 의거하여 내세운 것이다. 南宮氏의 말 또한 후대에 《資治通鑑綱目》의 정통주의를 적용하면서 그 근거로 삽입한 것이다.”
역주3 [譯註]剡旣已遵朱子綱目之例……高明史學先生云 : 《通鑑節要》 통행본에는 이 부분이 약간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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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주는 자고왕봉기제우하남하니 시위환공이라 163

통감절요(1)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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