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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5)

통감절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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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辛巳]四年이라 〈趙光初四年이요 後趙三年이라
七月 以戴淵으로 爲征西將軍, 都督司, 兗, 豫, 幷, 幽, 冀六州諸軍事하고 鎭合肥하다
豫州刺史祖逖 以戴淵吳士注+[頭註] 廣陵人이니 廣陵 故吳王所都 雖有才望이나 無弘致遠識하고 且己剪荊棘注+[頭註]猶亂也하고 收河南地어늘 而淵 雍容一旦來統之라하야 意甚하고 又聞王敦 與劉, 刁注+[頭註]劉隗, 刁協이라構隙하야 將有內難하야 知大功不遂하고 感激發病하야 九月 卒於雍丘하니 豫州士女 若喪父母
王敦 久懷異志러니 聞逖卒하고 益無所憚이러라
十月 以逖弟約으로 爲西平將軍, 豫州刺史하야 領逖之衆하다
[新增]胡氏曰
祖士雅注+[頭註]士雅 祖逖字 傳作士稚慷慨忠義하고 有智略以行之하니 豈惟晉臣이리오
亦自古難得之才也
惜其未聞道也
易曰 知進而不知退하고 知存而不知亡하고 知得而不知喪하나니 其惟聖人이라야 知之而不失其正乎인저하니
戴淵 可與共事者 同心協力하야 以圖終功 可也 不可與共事而朝廷無用我之意者 歸納印符하고 南山之南 北山之北 何往而不適哉
又況王敦所以隱而未叛 徒以豫州爲虞 士雅知內難將作인댄 尤當訓明軍旅하고 張皇義聲하야 使奸人懾息하야 不敢動이요 如其事擧 不妄投軀 豈不善哉
道二而已 儻以全身爲賢이면 則由前所陳이요 儻以許國爲重이면 則由後所論이니
於義皆得이라
若夫功之成否 皆天也 又何必怏怏發病而喪其軀哉
謂之不聞大道 不亦宜乎
○ 十一月 以慕容 爲都督幽, 平二州諸軍事하고 封遼東公하니 廆立子하야 爲世子하다


태흥太興 4년(신사 321) - 나라 광초光初 4년이고, 후조後趙 3년이다. -
7월에 대연戴淵정서장군征西將軍도독사주연주예주병주유주기주제군사都督司州兗州豫州幷州幽州冀州諸軍事로 삼고 합비合肥진주鎭駐하게 하였다.
예주자사豫州刺史 조적祖逖대연戴淵나라 사람注+[頭註]대연戴淵광릉廣陵 사람이니, 광릉廣陵은 옛날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도읍했던 곳이다. 으로 비록 재주와 명망이 있으나 원대한 지취志趣와 고원한 식견識見이 없고, 또 자신이 온갖 고난注+[頭註]형극荊棘과 같다. 을 제거하고 하남河南 지역을 수복하였는데 대연戴淵이 한가롭게 하루아침에 와서 통솔한다 하여 마음에 몹시 불쾌해 하였으며, 또 왕돈王敦유외劉隗조협刁協注+[頭註], 유외劉隗조협刁協이다. 과 틈이 생겨서 장차 내란內亂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큰 공이 이루어지지 못할 줄 알고 감개感慨하고 격분激憤하여 병이 나서 9월에 옹구雍丘에서 죽으니, 예주豫州의 남녀 백성들이 마치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였다.
왕돈王敦이 오랫동안 딴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조적祖逖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더욱 기탄하는 바가 없게 되었다.
10월에 조적祖逖의 아우 조약祖約서평장군西平將軍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아서 조적祖逖의 무리를 거느리게 하였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조사아祖士雅(祖逖)注+[頭註]사아士雅조적祖逖이니, 《진서晉書》 〈조적전祖逖傳〉에는 ‘사치士稚’로 되어 있다.는 강개하고 충의심이 있으며 지략이 있어 이로써 행하였으니, 어찌 나라의 신하일 뿐이겠는가.
또한 예로부터 얻기 어려운 인재였다.
그러나 그가 를 듣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주역周易건괘乾卦에 이르기를 ‘나아감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며, 보존함만 알고 망할 줄을 모르며, 얻음만 알고 잃을 줄을 모르니, 오직 성인聖人이라야 진퇴進退존망存亡의 이치를 알아 정도正道를 잃지 않는다.’ 하였다.
대연戴淵이 함께 일할 만한 자였다면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쳐서 종말의 공을 도모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요, 함께 일할 수가 없고 조정에서 자신을 써줄 마음이 없으면 인부印符를 반납하고 각건角巾을 쓰고 동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어야 할 것이니, 남산南山의 남쪽과 북산北山의 북쪽이 어디를 간들 마땅하지 않았겠는가.
또 더구나 왕돈王敦역심逆心을 숨기고 배반하지 않은 까닭은 한갓 예주豫州를 걱정해서였으니, 사아士雅가 장차 내란內亂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더욱 마땅히 군대를 훈명訓明(훈련)시키고 의로운 명성을 넓혀서 간사한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했어야 할 것이요, 만일 그 일이 거행되었다면 망령되이 투신하지 않았어야 하니, 이렇게 하면 어찌 좋지 않았겠는가.
방법은 두 가지일 뿐이니, 진실로 몸을 온전히 하는 것을 어질게 여긴다면 앞에 말한 것을 따랐어야 할 것이요, 만일 나라에 몸을 허락하는 것을 중하게 여긴다면 뒤에 논한 것을 따랐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모두 의리에 맞았을 것이다.
공을 이루고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말하면 모두 천운天運이니, 또 어찌 굳이 앙앙怏怏하여 병이 나서 자기 몸을 잃는단 말인가.
이를 일러 대도大道를 듣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 11월에 모용외慕容廆도독유주평주제군사都督幽州平州諸軍事로 삼고 요동공遼東公에 봉하니, 모용외慕容廆가 아들 모용황慕容皝을 세워 세자로 삼았다.


역주
역주1 : 비
역주2 : 앙
역주3 角巾東路 : 각건은 處士나 隱者가 쓰는 두건을 이르고, 東路는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하여 동쪽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으로, 《晉書》 〈羊祜傳〉에 羊祜가 일찍이 從弟인 羊琇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이미 변방을 평정한 뒤에는 마땅히 角巾을 쓰고 동쪽으로 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棺이 들어갈 구덩이를 만들겠다.[旣定邊事 當角巾東路 歸故里 爲容棺之墟]”라고 하였는 바, 후에는 돌아가 은거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역주4 : 외
역주5 : 황

통감절요(5)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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