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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5)

통감절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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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丁巳]十三年이라 〈秦永和二 魏泰常二年이라
의희義熙 13년(정사 417) - 나라 영화永和 2년이고, 나라 태상泰常 2년이다.
○ 西涼公李歆嘉興元年이라
서량공西涼公 이흠李歆가흥嘉興 원년元年이다.
○ 是歲 秦亡하니
○ 이해에 (後秦)나라가 망하였다.
대국大國이 하나이고 소국小國이 다섯이니, 참국僭國이 모두 여섯이다. -
五月 魏主嗣注+[頭註]拓跋珪長子問於崔浩曰 劉裕伐姚泓하니 果能克乎 對曰 克之니이다
5월에 위주魏主 탁발사拓跋嗣注+[頭註]위주魏主 탁발사拓跋嗣탁발규拓跋珪장자長子이다. 최호崔浩에게 묻기를 “유유劉裕요홍姚泓(後秦)을 정벌하니, 과연 이길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하였다.
嗣曰 裕才何如慕容垂 對曰 勝之니이다
탁발사拓跋嗣가 말하기를 “유유劉裕의 재주는 모용수慕容垂(後燕)와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니, 최호崔浩가 대답하기를 “유유劉裕모용수慕容垂보다 낫습니다.
藉父兄之資하야 修復舊業하니 國人歸之 若夜蟲之就火하야 少加倚仗이면 易以立功이니이다
모용수慕容垂부형父兄의 힘을 빌려서 옛 기업基業을 회복하니, 백성들이 그에게 귀부歸附하는 것이 밤에 벌레들이 불빛에 달려드는 것과 같아서 그들에게 조금만 의뢰하면 쉽게 공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劉裕 奮起寒微하야 不階尺土하야 討滅桓玄하고 興復晉室하고 北禽慕容超하고盧循하야 所向無前하니 非其才之過人이면 安能如是乎잇가
그러나 유유劉裕는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에서 떨치고 일어나 한 자의 땅도 이용하지 않고서 환현桓玄을 토벌하고 나라 황실을 부흥하였으며, 북쪽에서 모용초慕容超(南燕)를 사로잡고 남쪽에서 노순盧循을 효시하여 향하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으니, 그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裕克秦而歸 必簒其主하리이다
유유劉裕나라를 이기고 돌아가면 반드시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것입니다.
關中 華, 戎雜錯하야 風俗勁悍하니 裕欲以荊, 揚之化 施之函秦注+[釋義]秦地 有函谷關하니 秦人恃之하야 以爲險固 故曰函秦이라이면 無異解衣包火하고 張羅捕虎
관중關中한족漢族과 오랑캐가 뒤섞여 살아서 풍속風俗이 굳세고 사나우니, 유유劉裕형주荊州양주揚州를 다스렸던 방법을 함곡관函谷關 안의 나라 땅注+[釋義]나라 땅에 함곡관函谷關이 있으니, 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믿고서 험고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함진函秦이라 한 것이다. 에 시행한다면 이는 옷을 벗어서 불을 싸고 새그물을 펼쳐 범을 잡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雖留兵守之라도 人情未(治)[洽]하고 趨向不同하야 適足爲寇敵之資爾리니
비록 병력을 남겨 두어 그곳을 지키게 하더라도 인심人心이 흡족해하지 않고 추향趨向이 똑같지 않아서 다만 외적에게 이용당하고 말 것입니다.
願按兵注+[頭註] 止也息民하야 以觀其變이면 秦地 終爲國家之有하야 可坐而守也리이다
원컨대 전쟁을 중지하고注+[頭註]은 중지하는 것이다. 백성들을 휴식하게 하고서 사태의 변화를 관찰하면 나라 땅은 결국 우리나라 소유가 되어서 가만히 앉아서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嗣笑曰 卿 料之審矣로다
탁발사拓跋嗣가 웃으며 말하기를 “경이 잘 헤아렸다.” 하였다.
浩曰 臣 嘗私論近世將相之臣컨대
최호崔浩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근세 장상將相의 신하를 사사로이 논하건대 왕맹王猛이 나라를 다스림은 부견苻堅(前秦)의 관중管仲이고,
慕容恪之輔幼主 慕容暐之霍光也 劉裕之平禍亂 司馬德宗注+[頭註]安帝之諱之曹操也니이다
모용각慕容恪이 어린 군주를 보필함은 모용위慕容暐(前燕)의 곽광霍光이고, 유유劉裕화란禍亂을 평정함은 사마덕종司馬德宗(安帝)注+[頭註]사마덕종司馬德宗안제安帝이다. 조조曹操입니다.” 하였다.
辛丑 裕至潼關하니 秦主泓 使姚丕 守渭橋어늘
○ 7월 신축일辛丑日(2일)에 유유劉裕동관潼關에 이르니, 진주秦主(後秦) 요홍姚泓요비姚丕로 하여금 위교渭橋를 지키게 하였다.
王鎭惡 大破丕於하니 泓兵 不戰而潰
왕진악王鎭惡위교渭橋에서 요비姚丕를 대파하니, 요홍姚泓의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궤멸되었다.
單馬 還宮하야 癸亥 將妻子群臣하고 詣王鎭惡壘門降이어늘
요홍姚泓이 한 필의 말로 궁중에 돌아와서 계해일癸亥日(24일)에 처자와 군신들을 거느리고 왕진악王鎭惡군문軍門에 나와 항복하였다.
鎭惡 撫慰하고 號令嚴肅하니 百姓 安堵러라
왕진악王鎭惡이 백성들을 위무하고 호령이 엄숙하니, 백성들이 안도하였다.
이라
○ 9월이다.
太尉裕 欲留長安하야 經略注+[頭註]疆理也西北이러니 而諸將士 皆久役思歸
처음에 태위太尉 유유劉裕장안長安에 머물면서 서북 지역을 경략注+[頭註]경략經略은 경계를 구획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하려 하였는데, 여러 장수와 장병들이 모두 오랫동안 부역하였으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다.
劉穆之卒이어늘 裕以根本無託이라하야 遂決意東還할새 乃以次子桂陽公義眞으로 爲都督雍, 梁, 秦三州諸軍事하니 義眞時年十二
마침 유목지劉穆之가 죽자, 유유劉裕는 근본(후방)을 의탁할 곳이 없다 하여 마침내 결심하고 동쪽으로 돌아갈 적에 차자次子계양공桂陽公 유의진劉義眞도독옹都督雍진삼주제군사秦三州諸軍事로 삼으니, 유의진劉義眞의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以王鎭惡으로 爲司馬하다
왕진악王鎭惡사마司馬로 삼았다.
鎭惡功多 由是 南人 皆忌之러라
장안長安을 수복할 때〉 왕진악王鎭惡이 공이 많으니, 이로 말미암아 남쪽(東晉)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시기하였다.
沈田子自以嶢柳之捷注+[頭註]是年七月 擊秦兵하야 斬萬餘級하야 泓奔還霸上하니 威振三輔하니라이라하야 與鎭惡爭功不平이러니
심전자沈田子가 스스로 요류嶢柳의 승리注+[頭註]이해 7월에 동진東晉의 군대가 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만여 명의 수급首級을 베어서 요홍姚泓이 달아나 패상霸上으로 돌아가니, 위세가 삼보三輔 지방에 진동하였다. 에 공로가 있다 하여 왕진악王鎭惡과 공을 다투어 불평하였다.
裕將還할새 田子及傅弘之 屢言於裕曰 鎭惡 家在關中하니 不可保信이니이다
유유劉裕가 장차 돌아가려 할 적에 심전자沈田子부홍지傅弘之가 여러 번 유유劉裕에게 말하기를 “왕진악王鎭惡은 집안이 관중關中에 있으니, 보장하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裕曰 今留卿文武將士精兵萬人하노니 彼若欲爲不善이면 正足自滅爾
유유劉裕가 말하기를 “지금 문무文武 관원과 정예병 만여 명을 남겨 두었으니, 저가 만일 나쁜 짓을 하고자 한다면 바로 자멸할 뿐이다.
勿復多言하라
다시 여러 말 하지 말라.” 하였다.
裕私謂田子曰 鍾會不得遂其亂者 以有衛瓘注+[頭註]鍾會, 衛瓘 曹魏人이라故也
유유劉裕가 은밀히 심전자沈田子에게 이르기를 “종회鍾會가 난을 일으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위관衛瓘注+[頭註]鍾會不得遂其亂者 이유위관以有衛瓘:종회鍾會위관衛瓘조조曹操나라 사람이다. 이 있었기 때문이다.
語曰 猛獸不如群狐라하니 卿等十餘人 何懼王鎭惡이리오
속담에 이르기를 ‘맹수 한 마리가 여러 여우만 못하다.’ 하였으니, 들 십여 명이 어찌 왕진악王鎭惡을 두려워하는가.” 하였다.
溫公曰
온공溫公이 말하였다.
古人有言호되 疑則勿任하고 任則勿疑라하니 裕旣委鎭惡以關中이어늘 而復與田子有後言 是鬪之하야 使爲亂也
“옛사람의 말에 ‘의심하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 하였으니, 유유劉裕가 이미 왕진악王鎭惡에게 관중關中을 맡기고는 다시 심전자沈田子와 뒷말을 한 것은 이들을 싸우게 하여 난리를 일으키게 한 것이다.
惜乎
애석하다.
百年之寇 千里之土 得之艱難하고 失之造次注+[頭註]急遽也하야 使 復輸寇手로다
백년을 끌어온 적과 천리의 땅을 어렵게 얻고 순식간에注+[頭註]조차造次는 몹시 급작스러운 모양이다. 잃어서, 의 옛 도읍을 다시 적의 손아귀에 바치게 되었다.
荀子曰 兼幷 易能也 堅凝之難이라하니 信哉로다
순자荀子가 말하기를 ‘겸병하기는 쉽고 단단히 지키기는 어렵다.’ 하였으니, 그 말이 맞다.”
父老 聞裕將還하고 詣門流涕訴曰 殘民 不霑王化 於今百年이러니 始覩衣冠하니 人人相賀
삼진三秦부로父老들이 유유劉裕가 돌아가려 한다는 말을 듣고 유유劉裕의 집 문 앞에 와서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기를 “유민遺民들이 조정의 교화를 입지 못한 지가 지금껏 백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중원中原의관衣冠을 보고는 사람들마다 서로 경하하였습니다.
長安十陵 是公家墳墓 咸陽宮殿 是公家室宅이니 捨此欲何之乎注+[附註]十陵 漢高帝長陵, 惠帝安陵, 文帝霸陵, 景帝陽陵, 武帝茂陵, 昭帝平陵, 宣帝杜陵, 元帝渭陵, 成帝延陵, 哀帝義陵, 平帝康陵이니 皆在關中이라 凡十一陵이어늘 言十者 擧大數也 長安宮殿 皆漢故跡이요 〈裕〉 劉氏子孫이라 故父老以此爲言而留之하니라잇가
장안長安의 열 개 의 집안의 분묘墳墓이고 함양咸陽궁전宮殿의 집안의 주택住宅이니,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注+[附註][附註]長安十陵……捨此欲何之乎:십릉十陵나라 고제高帝장릉長陵, 혜제惠帝안릉安陵, 문제文帝패릉霸陵, 경제景帝양릉陽陵, 무제武帝무릉茂陵, 소제昭帝평릉平陵, 선제宣帝두릉杜陵, 원제元帝위릉渭陵, 성제成帝연릉延陵, 애제哀帝의릉義陵, 평제平帝강릉康陵이니 모두 관중關中에 있다. 모두 11인데 10이라고 말한 것은 큰 수를 든 것이다. 장안長安궁전宮殿이 모두 나라의 고적故跡이었고 유유劉裕유씨劉氏의 자손이었다. 그러므로 부로父老들이 이것을 말하여 머물게 한 것이다. ” 하였다.
裕爲之愍然注+[頭註] 悲也, 憐也하야 慰諭之曰 受命朝廷하니 不得擅留
유유劉裕가 민망히 여겨注+[頭註]은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그들을 위로하고 타이르기를 “내 조정에서 명령을 받았으니, 마음대로 머물 수가 없다.
誠多諸君懷本之志하야 今以次息注+[頭註]義眞也 長曰義符 次曰義眞이요 次曰義隆이라與文武賢才 共鎭此境하니 勉與之居하라하다
진실로 제군諸君들이 근본(조상의 뿌리)을 그리워하는 뜻을 고맙게 여겨서 이제 둘째 자식注+[頭註]둘째 자식은 유의진劉義眞이니, 첫째는 유의부劉義符이고, 그 다음은 유의진劉義眞이고, 그 다음은 유의륭劉義隆이다. 과 어질고 재주 있는 문무 관원을 보내어 함께 이 지역을 진수鎭守하게 하였으니, 이들과 잘 지내기를 힘쓰라.” 하였다.
十二月 裕發長安하야 自洛入河할새 開汴渠以歸하다
12월에 유유劉裕장안長安을 출발하여 낙수洛水로부터 황하黃河로 들어올 적에 변거汴渠를 개통한 뒤에 돌아왔다.
○ 閏月 夏王勃勃 聞太尉裕東還하고 大喜하야 問王買德曰 朕欲取關中하노니 試言其方略하라
윤월閏月(윤12월)에 하왕夏王 혁련발발赫連勃勃태위太尉 유유劉裕가 동쪽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왕매덕王買德에게 묻기를 “관중關中 지방을 점령하고자 하니, 이 한번 그 방략을 말해 보라.” 하니,
買德曰 關中 形勢之地어늘 而裕以幼子守之하고 狼狽而歸하니 正欲急成簒事爾
왕매덕王買德이 말하기를 “관중關中 지방은 지형이 뛰어난 곳인데, 유유劉裕가 어린 아들에게 이곳을 지키게 하고 바삐 서둘러 돌아갔으니, 바로 찬탈하는 일을 급히 이루고자 해서입니다.
不暇復以中原爲意하리니 天以關中賜我
다시는 중원中原에 뜻을 둘 겨를이 없을 것이니, 이는 하늘이 관중關中 지방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不可失也니이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勃勃 乃使其子璝注+[頭註] 帥騎二萬하야 向長安하고 勃勃 自將大軍하고 爲後繼하다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아들인 혁련괴赫連璝注+[頭註]이다. 로 하여금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장안長安으로 향하게 하고, 자신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후계後繼(후원군)가 되었다.
역주
역주1 大一小五 凡六僭國 : 大國 하나는 拓跋嗣의 北魏이고, 小國 다섯은 沮渠蒙遜의 北涼, 李歆의 西涼, 馮跋의 北燕, 赫連勃勃의 夏, 乞伏熾磐의 西秦이다.
역주2 : 효
역주3 若王猛之治國……司馬德宗之曹操也 : 秦王 苻堅을 도와 잘 다스린 王猛은 春秋時代 齊나라 桓公의 명재상인 管仲과 같고, 燕나라의 어린 군주인 慕容暐를 보필한 慕容恪은 漢나라의 어린 군주인 昭帝를 보필한 霍光과 같으며, 현재 東晉의 安帝 밑에서 禍亂을 평정한 劉裕는 後漢 말기 獻帝 밑에서 반란한 자들을 평정한 曹操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즉 王猛과 慕容恪은 忠臣이었으나 劉裕는 그렇지 못하여 曹操와 같은 존재임을 예언한 것인데, 그의 말처럼 劉裕는 끝내 東晉을 멸망시키고 宋나라를 세워 皇帝가 되었다.
역주4 七月 : 《資治通鑑》에는 본 7月條의 내용이 8月條에 보인다.
역주5 渭橋 : 中渭橋라고도 부른다. 당시 長安城 북쪽의 渭水에 있었다.
역주6 九月 : 《資治通鑑》에는 본 9月條의 내용이 12月條에 보인다.
역주7 豐鄗(鎬)之都 : 豐은 周나라 文王이 도읍한 곳이고 鄗(鎬)는 武王이 도읍한 곳으로 모두 關中의 長安에 있었다.
역주8 三秦 : 秦나라가 망한 뒤에 項羽는 關中을 三分하여, 秦나라의 降將 章邯을 雍王으로, 司馬欣을 塞王으로, 董翳를 翟王으로 삼고 三秦이라 불렀는 바, 뒤에 陝西 일대를 가리키게 되었다.

통감절요(5)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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