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月
에 魏主嗣
注+[頭註]拓跋珪長子라問於崔浩曰 劉裕伐姚泓
하니 果能克乎
아 對曰 克之
니이다
垂는 藉父兄之資하야 修復舊業하니 國人歸之를 若夜蟲之就火하야 少加倚仗이면 易以立功이니이다
劉裕
는 奮起寒微
하야 不階尺土
하야 討滅桓玄
하고 興復晉室
하고 北禽慕容超
하고 南
盧循
하야 所向無前
하니 非其才之過人
이면 安能如是乎
잇가
關中
은 華, 戎雜錯
하야 風俗勁悍
하니 裕欲以荊, 揚之化
로 施之函秦
注+[釋義]秦地에 有函谷關하니 秦人恃之하야 以爲險固라 故曰函秦이라이면 此
는 無異
解衣包火하고 張羅捕虎니
雖留兵守之라도 人情未(治)[洽]하고 趨向不同하야 適足爲寇敵之資爾리니
願按兵
注+[頭註]按은 止也라息民
하야 以觀其變
이면 秦地
는 終爲國家之有
하야 可坐而守也
리이다
慕容恪之輔幼主
는 慕容暐之霍光也
요 劉裕之平禍亂
은 司馬德宗
注+[頭註]安帝之諱라之曹操也
니이다
○
辛丑
에 裕至潼關
하니 秦主泓
이 使姚丕
로 守渭橋
어늘
單馬로 還宮하야 癸亥에 將妻子群臣하고 詣王鎭惡壘門降이어늘
始
에 太尉裕 欲留長安
하야 經略
注+[頭註]疆理也라西北
이러니 而諸將士 皆久役思歸
라
會에 劉穆之卒이어늘 裕以根本無託이라하야 遂決意東還할새 乃以次子桂陽公義眞으로 爲都督雍, 梁, 秦三州諸軍事하니 義眞時年十二라
沈田子自以嶢柳之捷
注+[頭註]是年七月에 擊秦兵하야 斬萬餘級하야 泓奔還霸上하니 威振三輔하니라이라하야 與鎭惡爭功不平
이러니
裕將還할새 田子及傅弘之 屢言於裕曰 鎭惡이 家在關中하니 不可保信이니이다
裕曰 今留卿文武將士精兵萬人하노니 彼若欲爲不善이면 正足自滅爾니
裕私謂田子曰 鍾會不得遂其亂者
는 以有衛瓘
注+[頭註]鍾會, 衛瓘은 曹魏人이라故也
라
語曰 猛獸不如群狐라하니 卿等十餘人이 何懼王鎭惡이리오
古人有言호되 疑則勿任하고 任則勿疑라하니 裕旣委鎭惡以關中이어늘 而復與田子有後言은 是鬪之하야 使爲亂也라
百年之寇
와 千里之土
를 得之艱難
하고 失之造次
注+[頭註]急遽也라하야 使
로 復輸寇手
로다
荀子曰 兼幷은 易能也요 堅凝之難이라하니 信哉로다
父老 聞裕將還
하고 詣門流涕訴曰 殘民
이 不霑王化
가 於今百年
이러니 始覩衣冠
하니 人人相賀
라
長安十陵
은 是公家墳墓
요 咸陽宮殿
은 是公家室宅
이니 捨此欲何之乎
注+[附註]十陵은 漢高帝長陵, 惠帝安陵, 文帝霸陵, 景帝陽陵, 武帝茂陵, 昭帝平陵, 宣帝杜陵, 元帝渭陵, 成帝延陵, 哀帝義陵, 平帝康陵이니 皆在關中이라 凡十一陵이어늘 言十者는 擧大數也라 長安宮殿이 皆漢故跡이요 〈裕는〉 劉氏子孫이라 故父老以此爲言而留之하니라잇가
裕爲之愍然
注+[頭註]愍은 悲也, 憐也라하야 慰諭之曰 受命朝廷
하니 不得擅留
라
誠多諸君懷本之志
하야 今以次息
注+[頭註]義眞也니 長曰義符요 次曰義眞이요 次曰義隆이라與文武賢才
로 共鎭此境
하니 勉與之居
하라하다
十二月에 裕發長安하야 自洛入河할새 開汴渠以歸하다
○ 閏月에 夏王勃勃이 聞太尉裕東還하고 大喜하야 問王買德曰 朕欲取關中하노니 卿이 試言其方略하라
買德曰 關中은 形勢之地어늘 而裕以幼子守之하고 狼狽而歸하니 正欲急成簒事爾라
勃勃
이 乃使其子璝
注+[頭註]璝는 瑰라로 帥騎二萬
하야 向長安
하고 勃勃
은 自將大軍
하고 爲後繼
하다
의희義熙 13년(정사 417) - 진秦나라 영화永和 2년이고, 위魏나라 태상泰常 2년이다.
○ 서량공西涼公 이흠李歆의 가흥嘉興 원년元年이다.
대국大國이 하나이고 소국小國이 다섯이니, 참국僭國이 모두 여섯이다. -
5월에
위주魏主 탁발사拓跋嗣注+[頭註]위주魏主 탁발사拓跋嗣는 탁발규拓跋珪의 장자長子이다. 가
최호崔浩에게 묻기를 “
유유劉裕가
요홍姚泓(後秦)을 정벌하니, 과연 이길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하였다.
탁발사拓跋嗣가 말하기를 “유유劉裕의 재주는 모용수慕容垂(後燕)와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니, 최호崔浩가 대답하기를 “유유劉裕가 모용수慕容垂보다 낫습니다.
모용수慕容垂는 부형父兄의 힘을 빌려서 옛 기업基業을 회복하니, 백성들이 그에게 귀부歸附하는 것이 밤에 벌레들이 불빛에 달려드는 것과 같아서 그들에게 조금만 의뢰하면 쉽게 공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유劉裕는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에서 떨치고 일어나 한 자의 땅도 이용하지 않고서 환현桓玄을 토벌하고 진晉나라 황실을 부흥하였으며, 북쪽에서 모용초慕容超(南燕)를 사로잡고 남쪽에서 노순盧循을 효시하여 향하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으니, 그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유유劉裕가 진秦나라를 이기고 돌아가면 반드시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것입니다.
관중關中은
한족漢族과 오랑캐가 뒤섞여 살아서
풍속風俗이 굳세고 사나우니,
유유劉裕가
형주荊州와
양주揚州를 다스렸던 방법을
함곡관函谷關 안의
진秦나라 땅
注+[釋義]진秦나라 땅에 함곡관函谷關이 있으니, 진秦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믿고서 험고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함진函秦이라 한 것이다. 에 시행한다면 이는 옷을 벗어서 불을 싸고 새그물을 펼쳐 범을 잡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비록 병력을 남겨 두어 그곳을 지키게 하더라도 인심人心이 흡족해하지 않고 추향趨向이 똑같지 않아서 다만 외적에게 이용당하고 말 것입니다.
원컨대 전쟁을 중지하고
注+[頭註]안按은 중지하는 것이다. 백성들을 휴식하게 하고서 사태의 변화를 관찰하면
진秦나라 땅은 결국 우리나라 소유가 되어서 가만히 앉아서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탁발사拓跋嗣가 웃으며 말하기를 “경이 잘 헤아렸다.” 하였다.
최호崔浩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근세 장상將相의 신하를 사사로이 논하건대 왕맹王猛이 나라를 다스림은 부견苻堅(前秦)의 관중管仲이고,
모용각慕容恪이 어린 군주를 보필함은
모용위慕容暐(前燕)의
곽광霍光이고,
유유劉裕가
화란禍亂을 평정함은
사마덕종司馬德宗(安帝)
注+[頭註]사마덕종司馬德宗은 안제安帝의 휘諱이다. 의
조조曹操입니다.” 하였다.
○ 7월 신축일辛丑日(2일)에 유유劉裕가 동관潼關에 이르니, 진주秦主(後秦) 요홍姚泓이 요비姚丕로 하여금 위교渭橋를 지키게 하였다.
왕진악王鎭惡이 위교渭橋에서 요비姚丕를 대파하니, 요홍姚泓의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궤멸되었다.
요홍姚泓이 한 필의 말로 궁중에 돌아와서 계해일癸亥日(24일)에 처자와 군신들을 거느리고 왕진악王鎭惡의 군문軍門에 나와 항복하였다.
왕진악王鎭惡이 백성들을 위무하고 호령이 엄숙하니, 백성들이 안도하였다.
처음에
태위太尉 유유劉裕가
장안長安에 머물면서 서북 지역을 경략
注+[頭註]경략經略은 경계를 구획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하려 하였는데, 여러 장수와 장병들이 모두 오랫동안 부역하였으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다.
마침 유목지劉穆之가 죽자, 유유劉裕는 근본(후방)을 의탁할 곳이 없다 하여 마침내 결심하고 동쪽으로 돌아갈 적에 차자次子인 계양공桂陽公 유의진劉義眞을 도독옹都督雍‧양梁‧진삼주제군사秦三州諸軍事로 삼으니, 유의진劉義眞의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장안長安을 수복할 때〉 왕진악王鎭惡이 공이 많으니, 이로 말미암아 남쪽(東晉)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시기하였다.
심전자沈田子가 스스로
요류嶢柳의 승리
注+[頭註]이해 7월에 동진東晉의 군대가 진秦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만여 명의 수급首級을 베어서 요홍姚泓이 달아나 패상霸上으로 돌아가니, 위세가 삼보三輔 지방에 진동하였다. 에 공로가 있다 하여
왕진악王鎭惡과 공을 다투어 불평하였다.
유유劉裕가 장차 돌아가려 할 적에 심전자沈田子와 부홍지傅弘之가 여러 번 유유劉裕에게 말하기를 “왕진악王鎭惡은 집안이 관중關中에 있으니, 보장하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유유劉裕가 말하기를 “지금 경卿과 문무文武 관원과 정예병 만여 명을 남겨 두었으니, 저가 만일 나쁜 짓을 하고자 한다면 바로 자멸할 뿐이다.
유유劉裕가 은밀히
심전자沈田子에게 이르기를 “
종회鍾會가 난을 일으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위관衛瓘注+[頭註]鍾會不得遂其亂者 이유위관以有衛瓘:종회鍾會와 위관衛瓘은 조조曹操의 위魏나라 사람이다. 이 있었기 때문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맹수 한 마리가 여러 여우만 못하다.’ 하였으니, 경卿들 십여 명이 어찌 왕진악王鎭惡을 두려워하는가.” 하였다.
“옛사람의 말에 ‘의심하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 하였으니, 유유劉裕가 이미 왕진악王鎭惡에게 관중關中을 맡기고는 다시 심전자沈田子와 뒷말을 한 것은 이들을 싸우게 하여 난리를 일으키게 한 것이다.
백년을 끌어온 적과 천리의 땅을 어렵게 얻고 순식간에
注+[頭註]조차造次는 몹시 급작스러운 모양이다. 잃어서,
풍豐과
호鄗의 옛 도읍을 다시 적의 손아귀에 바치게 되었다.
순자荀子가 말하기를 ‘겸병하기는 쉽고 단단히 지키기는 어렵다.’ 하였으니, 그 말이 맞다.”
삼진三秦의 부로父老들이 유유劉裕가 돌아가려 한다는 말을 듣고 유유劉裕의 집 문 앞에 와서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기를 “유민遺民들이 조정의 교화를 입지 못한 지가 지금껏 백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중원中原의 의관衣冠을 보고는 사람들마다 서로 경하하였습니다.
장안長安의 열 개
능陵은
공公의 집안의
분묘墳墓이고
함양咸陽의
궁전宮殿은
공公의 집안의
주택住宅이니,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注+[附註][附註]長安十陵……捨此欲何之乎:십릉十陵은 한漢나라 고제高帝의 장릉長陵, 혜제惠帝의 안릉安陵, 문제文帝의 패릉霸陵, 경제景帝의 양릉陽陵, 무제武帝의 무릉茂陵, 소제昭帝의 평릉平陵, 선제宣帝의 두릉杜陵, 원제元帝의 위릉渭陵, 성제成帝의 연릉延陵, 애제哀帝의 의릉義陵, 평제平帝의 강릉康陵이니 모두 관중關中에 있다. 모두 11능陵인데 10이라고 말한 것은 큰 수를 든 것이다. 장안長安의 궁전宮殿이 모두 한漢나라의 고적故跡이었고 유유劉裕는 유씨劉氏의 자손이었다. 그러므로 부로父老들이 이것을 말하여 머물게 한 것이다. ” 하였다.
유유劉裕가 민망히 여겨
注+[頭註]민愍은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그들을 위로하고 타이르기를 “내 조정에서 명령을 받았으니, 마음대로 머물 수가 없다.
진실로
제군諸君들이 근본(조상의 뿌리)을 그리워하는 뜻을 고맙게 여겨서 이제 둘째 자식
注+[頭註]둘째 자식은 유의진劉義眞이니, 첫째는 유의부劉義符이고, 그 다음은 유의진劉義眞이고, 그 다음은 유의륭劉義隆이다. 과 어질고 재주 있는 문무 관원을 보내어 함께 이 지역을
진수鎭守하게 하였으니, 이들과 잘 지내기를 힘쓰라.” 하였다.
12월에 유유劉裕가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낙수洛水로부터 황하黃河로 들어올 적에 변거汴渠를 개통한 뒤에 돌아왔다.
○ 윤월閏月(윤12월)에 하왕夏王 혁련발발赫連勃勃이 태위太尉 유유劉裕가 동쪽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왕매덕王買德에게 묻기를 “짐朕이 관중關中 지방을 점령하고자 하니, 경卿이 한번 그 방략을 말해 보라.” 하니,
왕매덕王買德이 말하기를 “관중關中 지방은 지형이 뛰어난 곳인데, 유유劉裕가 어린 아들에게 이곳을 지키게 하고 바삐 서둘러 돌아갔으니, 바로 찬탈하는 일을 급히 이루고자 해서입니다.
다시는 중원中原에 뜻을 둘 겨를이 없을 것이니, 이는 하늘이 관중關中 지방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아들인
혁련괴赫連璝注+[頭註]괴璝는 괴瑰이다. 로 하여금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장안長安으로 향하게 하고, 자신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후계後繼(후원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