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이 因光欲納之어늘 光이 以其幼라하야 不聽한대
安
이 遂因帝姊蓋長公主
注+[頭註]武帝女爲蓋侯妻하니라하야 內(納)入宮爲
라가 月餘
에 立爲皇后
하니 年甫六歲
라
知燕王旦이 以帝兄不得立하야 亦怨望하고 乃令人으로 詐爲燕王上書하야 欲共執退光이러라
上이 問大將軍安在오 桀이 對以燕王告其罪로 不敢入이니이다
有詔召大將軍한대 光이 入하야 免冠頓首어늘 上曰 將軍은 冠하라
將軍
이 이니 燕王
이 何以知之
리오하니 是時
에 帝年十四
라
尙書左右皆驚
하고 而上書者果亡
注+[頭註]捕之甚急하니 桀等懼하야 白小事不足遂라호되 上不聽하니라이러라
後에 桀黨與有譖光者면 上이 輒怒曰 大將軍은 忠臣이라
人君之德은 莫大於至明하니 明以照姦이면 則百邪不能蔽矣니 漢昭帝是也라
成王은 聞管蔡流言하고 遂使周公狼跋而東하고 漢高는 聞陳平去魏背楚하고 欲捨腹心臣하고 漢文은 惑季布使酒難近하야 罷歸股肱郡하고 疑賈生擅權紛亂하야 復踈賢士하고 景帝는 信誅晁錯兵解하야 遂戮三公하니 所謂執狐疑之心하야 來讒賊之口라
○ 上官桀等이 謀令長公主로 置酒請光하야 伏兵格殺之하고 因廢帝하야 迎立燕王爲天子하다
安은 又謀誘燕王하야 至而誅之하고 因廢帝立桀이러니 會에 蓋主舍人이 知其謀하고 以告한대 詔捕桀, 安等宗族하야 悉誅之하니 蓋主는 自殺하고 燕王은 自絞死하다
皇后
는 以年少
하야 不
謀
하고 亦霍光外孫故
로 得不廢
하다
孝昭在位에 霍光이 總政하니 雖不親萬機나 然其天性聰明하야 與高帝類라
觀其以童穉之年으로 而能辨光之忠하고 知上官燕蓋之詐하면 何其偉也오
始元元鳳之間에 匈奴和親하고 百姓充實하며 擧賢良文學하고 問民疾苦하야 遂貸貧民種食하고 除今年田租하며 鹽鐵榷酤를 悉從議罷하고 與民休息하야 善政이 如此하니 使天假之以年하고 又得伊呂之佐하야 以輔相之런들 周之成王이 不足過矣리니 尊號曰昭 不亦宜乎아
상관걸上官桀의 아들 안安에게 딸이 있으니, 바로 곽광霍光의 외손녀였다.
상관안上官安은 곽광霍光을 인하여 이 딸을 궁중에 들여보내고자 하였으나 곽광霍光이 어리다 하여 들어주지 않았다.
상관안上官安이 마침내 황제의 누님인 개장공주蓋長公主를 통하여 궁중에 들여보내, 첩여婕妤가 되었다가 한 달 남짓되자 황후皇后로 세우니, 나이가 겨우 여섯 살이었다.
이에
상관걸上官桀과
상관안上官安이
곽광霍光을 매우 원망하고
개장공주蓋長公主를
注+[頭註]무제武帝의 딸이 개후蓋侯의 아내가 되었으므로 개장공주蓋長公主라 한 것이다. 고맙게 여겼다.
상관안上官安은 연왕燕王단旦이 황제의 형으로서 즉위하지 못하여 또한 원망한다는 것을 알고는 이에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연왕燕王의 상서上書를 꾸며서 곽광霍光을 함께 붙잡아 물리치려고 하였다.
글을 아뢰자 곽광霍光이 이 말을 듣고 궁중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상上이 대장군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상관걸上官桀이 “연왕燕王이 그의 죄를 고발하였기 때문에 감히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명하여 대장군을 부르자, 곽광霍光이 들어와서 관冠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니, 상上이 말하기를 “장군은 관冠을 쓰라.
장군이 교위校尉를 선임한 지가 10일이 못 되었는데, 연왕燕王이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니, 이때 황제의 나이가 열네 살이었다.
상서尙書와
좌우左右 신하들이 모두 놀라고, 글을 올린 자는 과연 도망하였다.
注+[頭註]체포하기를 매우 급하게 하니, 상관걸上官桀 등이 두려워하여 하찮은 일이니 굳이 깊이 따질 것이 없다고 아뢰었으나 상上이 듣지 않았다.
뒤에 상관걸上官桀의 당여黨與(도당)로서 곽광霍光을 참소하는 자가 있으면 상上이 그때마다 노하여 말하기를 “대장군은 충신忠臣이다.
선제先帝께서 부탁하여 짐의 몸을 보필하게 한 사람이니, 그를 훼방하는 자가 있으면 죄로 처벌하겠다.” 하였다.
이로부터 상관걸上官桀 등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인군人君의 덕德은 지극히 밝은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으니, 밝음으로써 간사함을 비추면 온갖 간사함이 가려질 수 없으니, 한漢나라 소제昭帝가 바로 이것이다.
주周나라 성왕成王은 덕德에 부끄러움이 있었고 고조高祖와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는 모두 소제昭帝만 못하였다.
성왕成王은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유언비어流言飛語를 듣고는 마침내 주공周公으로 하여금 낭패하여 동쪽으로 가게 하였고, 한漢나라 고조高祖는 진평陳平이 위魏나라를 버리고 초楚나라를 배반했다는 말을 듣고는 심복心腹의 신하(蕭何)를 버리고자 하였으며,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계포季布가 술주정을 하여 가까이하기 어렵다는 말에 혹하여 고굉股肱의 군郡으로 돌려보냈고, 가생賈生(賈誼)이 권력을 마음대로 독점하여 분란紛亂을 일으키는가 의심해서 다시 어진 선비들을 소원히 하였으며, 경제景帝는 조조晁錯를 죽이면 병난兵難이 그칠 것이라는 말을 믿고서 마침내 삼공三公(晁錯)을 죽였으니, 이른바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참소하고 해치는 말을 오게 한다는 것이다.
만일 소제昭帝가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같은 보좌를 얻었다면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이 족히 비견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상관걸上官桀 등이 개장공주蓋長公主로 하여금 술자리를 베풀고 곽광霍光을 초청하여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그를 때려 죽이고 인하여 황제를 폐위하고 연왕燕王을 영입해서 천자天子로 삼을 것을 모의하였다.
상관안上官安은 또다시 연왕燕王을 유인하여 그가 오면 그를 죽이고 인하여 황제를 폐위시킨 다음 자신의 아버지인 상관걸上官桀을 세울 것을 모의하였는데, 마침 개장공주蓋長公主의 사인舍人이 그 계책을 알고 고발하자, 명하여 상관걸上官桀과 상관안上官安 등과 그의 종족을 체포하여 다 죽이니, 개장공주蓋長公主는 자살하고 연왕燕王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황후는 나이가 어려서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고, 또한 곽광霍光의 외손이었기 때문에 폐위하지 않았다.
“효소제孝昭帝가 재위在位했을 적에 곽광霍光이 정권을 총괄하였으니, 소제昭帝가 비록 만기萬機를 직접 다스리지는 않았으나 천성天性이 총명하여 고제高帝와 비슷하였다.
어린 나이로 곽광霍光의 충성을 분별하고, 상관걸上官桀과 연왕燕王과 개장공주蓋長公主의 속임수를 알았던 것을 보면 어쩌면 그리도 위대한가.
시원始元과 원봉元鳳 연간에 흉노匈奴가 화친하고 백성들이 충실(부유)하며,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을 등용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물어서 마침내 가난한 백성들에게 종자 곡식을 빌려주고 금년(당년)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염철鹽鐵과 각고榷酤를 건의에 따라 모두 중지하고 백성들과 휴식하여 선정善政이 이와 같았으니, 만일 하늘이 수명을 연장해 주고 또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같은 보좌를 얻어 그를 도와 다스리게 했더라면 주周나라의 성왕成王도 이보다 낫지 못하였을 것이니, 소昭라고 존호尊號를 올림이 당연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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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 원봉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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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 원봉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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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 원봉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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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 원봉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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