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戊午]十四年이라 〈魏泰常三年이요 夏昌武元年이라〉
田子與王鎭惡으로 素有相圖之志러니 俱出北地하야 以拒夏兵할새 田子請鎭惡至傅弘之營하야 計事라가
田子求屛人語
하고 使其宗人
注+[頭註]官名이라 周禮에 有都宗人, 家宗人하니 家宗人은 掌家禮라 此는 猶田單宗人이니 乃田子之族人이라沈敬仁斬之
하다 弘之奔告劉義眞
한대
義眞
이 與王脩
로 被甲登
門
注+[頭註]撗은 音光이니 長安城門名也라하야 以察其變
이러니
○ 六月
에 宋公裕 始受相國, 九錫之命
注+[頭註]太尉裕 始受相國, 宋公, 九錫之命이라하다
○ 十月
에 夏王勃勃
이 進據咸陽
注+[頭註]山南曰陽이요 水北曰陽이니 在渭水北, 九峻諸山之南이라 故로 名咸陽이라하니 長安樵采路絶
이라
裕聞之하고 召義眞東歸하고 以朱齡石으로 代鎭長安하다
赫連璝
衆三萬
하고 追義眞
하야 力戰連日
에 晉兵大敗
라
○ 十一月
에 齡石
注+[頭註]相國右司馬라이 奔潼關
이라가 爲人執送長安
하니 勃勃
이 殺之
하다
勃勃
이 卽皇帝位于灞上
하고 都統萬
注+[頭註]勃勃이 築城於朔方郡北黑水之南하고 曰 朕方統一天下하야 君臨萬邦하니 新城宜名統萬이라하다하다
○ 宋公裕 以讖
注+[頭註]符命之書니 說文에 驗也라 凡讖, 緯는 皆言將來之驗이니 釋名曰 纖也니 其義纖微라云
昌明注+[頭註]簡文帝子武帝曜之字라[通鑑要解]晉書帝紀曰 初에 簡文帝見讖하니 云 晉祚盡於昌明이라 及孝武帝之在孕也하야 李太后夢神人謂之曰 汝生男하리니 以昌明爲名하라 及産에 東方始明하니 因以爲名이라 簡文이 後悟流涕하니라之後에 尙有二帝라하야
乃使中書侍郞王韶之하야 與帝左右로 密謀弑帝하고 而立琅琊王德文하니 戊寅에 德文이 卽皇帝位하다
安帝弗辨寒燠하고 口不能言이어늘 道子, 元顯이 幷傾朝政하야 納賄窮奢가 不知紀極하니 主昏臣亂이 莫熾於斯라
桓玄乘釁하야 遂行簒奪이어늘 劉裕擧兵誅玄하고 再安宗社라
自時厥後로 伐南燕, 斬盧循, 滅姚泓하야 晉之威令이 雖伸이나 而裕之權勢 駸駸乎非復前日劉下邳矣니 晉欲安이나 可得乎아
의희義熙 14년(무오 418) - 위魏나라 태상泰常 3년이고, 하夏나라 창무昌武 원년元年이다. -
정월正月에 하夏나라 혁련괴赫連璝가 위수渭水에 이르니, 관중關中의 백성들 중에 항복하는 자가 길에 이어졌다.
심전자沈田子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들을 막았다.
심전자沈田子는 왕진악王鎭惡과 평소에 서로 상대방을 도모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함께 북쪽 지방에 나가서 하夏나라 군대를 막게 되자 왕진악王鎭惡에게 부홍지傅弘之의 진영에 이르러 일을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가
〈
왕진악王鎭惡이 이르자〉 사람을 물리치고 조용히 말할 것을 요구하고는
종인宗人注+[頭註]종인宗人은 관명官名이다. 《주례周禮》에 도종인都宗人과 가종인家宗人이 있으니, 가종인家宗人은 가례家禮를 맡는다. 이것은 전단종인田單宗人과 같으니, 바로 심전자沈田子의 족인族人이다. 인
심경인沈敬仁으로 하여금
왕진악王鎭惡의 목을 베게 하였다.
부홍지傅弘之가
유의진劉義眞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유의진劉義眞이
왕수王脩와 함께 갑옷을 입고
광문撗門注+[頭註]광撗은 음音이 광이니, 광문撗門은 장안長安의 성문城門 이름이다. 에 올라서 사태의 변화를 관찰하였다.
왕수王脩가 심전자沈田子를 잡아서 장령將領을 제멋대로 죽인 죄를 물어 목을 베었다.
부홍지傅弘之가 혁련괴赫連璝를 대파하니, 하夏나라 군대가 마침내 후퇴하였다.
○ 6월에
송공宋公 유유劉裕가 비로소
상국相國과
구석九錫의
명命을 받았다.
注+[頭註]태위太尉 유유劉裕가 비로소 상국相國‧송공宋公‧구석九錫의 명을 받은 것이다.
○ 10월에
하왕夏王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전진하여
함양咸陽注+[頭註]산山의 남쪽을 양陽이라 하고 물의 북쪽을 양陽이라 하니, 함양咸陽(長安)은 위수渭水의 북쪽과 구준산九峻山 등 제산諸山의 남쪽에 있으므로 함양咸陽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을 점거하니,
장안長安의 나무 채취하는 길이 끊겼다.
유유劉裕가 이 말을 듣고 유의진劉義眞을 불러 동쪽으로 돌아오게 하고 주령석朱齡石을 장안長安에 대신 진주하게 하였다.
혁련괴赫連璝가 군대 3만 명을 거느리고 유의진劉義眞을 추격하여 연일 힘써 싸우니, 진晉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
○ 11월에
주령석朱齡石注+[頭註]주령석朱齡石은 상국相國 유유劉裕의 우사마右司馬이다. 이
동관潼關으로 도망했다가 사람에게 사로잡혀
장안長安으로 보내지니,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그를 죽였다.
혁련발발赫連勃勃이
파상灞上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통만統萬注+[頭註]혁련발발赫連勃勃이 삭방군朔方郡 북쪽과 흑수黑水 남쪽에 도성都城을 쌓고 말하기를 “짐朕이 비로소 천하天下를 통일하여 만방萬邦에 군림하였으니, 새로 쌓은 성城은 마땅히 통만統萬이라 이름해야 한다.” 하였다. 에 도읍하였다.
○
송공宋公 유유劉裕가
도참서圖讖書注+[頭註]참讖은 부명符命의 글이니,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징험(예언)하는 것이다.” 하였다. 무릇 참讖과 위緯는 모두 장래의 일을 징험하는 것이니, 《석명釋名》에 이르기를 “참讖은 섬세함이니 그 뜻이 섬미纖微한 것이다.” 하였다. 에 “
창명昌明(司馬曜)
注+[頭註]昌明은 간문제簡文帝의 아들인 무제武帝 사마요司馬曜의 자字이다. [通鑑要解]《진서晉書》 〈효무제기孝武帝紀〉에 이르기를 “처음에 간문제簡文帝가 도참서圖讖書를 보니, 도참서에 ‘진晉나라의 국통이 창명昌明에서 다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어 있을 때에 이태후李太后의 꿈에 신인神人이 이르기를 ‘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니, 창명昌明으로 이름을 삼으라.’ 하였다. 해산할 때에 동방東方이 비로소 밝아오니, 인하여 창명昌明이라고 이름하였다. 간문제簡文帝가 뒤에 깨닫고는 눈물을 흘렸다.” 하였다. 의 뒤에 아직도 두 황제가 있다.”고 말했다 하여
마침내 중서시랑中書侍郞 왕소지王韶之를 시켜서 황제의 좌우 사람들과 함께 은밀히 모의하여 황제를 시해하고 낭야왕琅琊王 사마덕문司馬德文을 세우니, 무인일戊寅日(12월 17일)에 사마덕문司馬德文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안제安帝는 추위와 더위도 분별하지 못하고 입으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는데, 사마도자司馬道子와 사마원현司馬元顯이 함께 조정朝廷의 정사를 위태롭게 하여 뇌물을 받고 극도로 사치하여 끝을 알지 못하였으니, 군주가 어리석고 신하가 어지러움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
환현桓玄이 이 틈을 타서 찬탈하자, 유유劉裕가 군대를 일으켜 환현桓玄을 주벌하고 다시 종묘사직을 안정시켰다.
이 뒤로부터 남연南燕(慕容超)을 정벌하고 노순盧循을 목 베고 요홍姚泓(後秦)을 멸망시켜 진晉나라의 위엄과 명령이 비록 베풀어졌으나 유유劉裕의 권세가 점점 더해져 더 이상 전날의 하비태수下邳太守인 유유劉裕가 아니었으니, 진晉나라가 편안하고자 하나 될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