冬十月
에 漢王
이 追項羽至固陵
注+[釋義]縣名이라 括地志에 在陳州宛丘西北四十二里라 一云卽光州固始是라하야 與齊王信
과 魏相國越
注+[頭註]初에 越收魏地十餘城하고 將兵歸漢하야 請立魏後漢王曰 西魏豹는 眞魏後라하니 乃以越爲魏相하야 使將兵略定魏地하니라 越은 魏人이라로 期會擊楚
러니 信, 越
이 不至
라
楚擊漢軍大破之하니 漢王이 堅壁自守하고 謂張良曰 諸侯不從하니 奈何오
君王이 能與共天下하시면 可立致也리니 今能取睢陽以北至穀城은 皆以王彭越하고 從陳以東傅海는 與齊王信하소서
能出捐此地하야 以許兩人하야 使各自爲戰이면 則楚를 易破也리이다 漢王이 從之하니
十二月
에 項王
이 至
下
注+[釋義]聚邑名이니 在沛之縣이요 又堤名이라 正義云 垓是高岡絶巖이니 今猶高三四丈이라 其聚邑及堤 在垓之側일새 因名垓下하니 今在亳州眞源東十里라하니 兵少食盡
이라
與漢戰不勝하야 入壁이어늘 漢軍及諸侯兵이 圍之數重하다
項羽夜聞漢軍四面이 皆楚歌하고 乃大驚曰 漢이 皆已得楚乎아
是何楚人之多也
注+[釋義]楚人之歌니 猶言吳謳越吟也라 九江兵歸漢이라 故로 多楚聲이라오 乃夜起
하야 飮帳中
하고
乃悲歌慷慨하야 自爲歌詩하니 曰 力拔山兮氣蓋世로다
於是에 項王이 乘其駿馬하니 麾下壯士騎從者八百餘人이라
直(値)夜
注+[釋義]直는 當也니 古字例以直爲値라하야 潰圍南出馳走
러니 平明
에 漢軍
이 乃覺之
하고 令騎將灌嬰
으로 以五千騎追之
하다
至陰陵
注+[釋義]地志에 九江郡陰陵縣은 今無爲州是라 方輿勝覽에 和州烏江縣西北四十五里에 有陰陵山하니 卽項羽迷失道處라 括地志에 陰陵故城이 在濠州定遠西北六十里라하야 迷失道
하야 問一田父
한대 田父紿曰 左
注+[釋義]王氏曰 紿曰左句絶이라 紿는 欺言也니 欺令向左去라하라
項王
이 乃復引兵至東城
注+[釋義]地志에 九江(卽)[郡]東城縣이라 括地志에 故城이 在濠州定遠東南五十里라하니 乃有二十八騎
라
項王
이 自
不得脫
하고 謂其騎曰 吾起兵至今八歲矣
라
身七十餘戰에 未嘗敗北러니 今卒困이 如此하니 此는 天之亡我요 非戰之罪也라
今日에 固決死로니 願斬將刈旗三勝之하야 令諸君으로 知天亡我요 非戰之罪호리라하고
斬漢一將, 一都尉하고 殺數十百人하니 諸騎皆伏이러라
於是
에 項王
이 欲東渡烏江
이러니 烏江亭長
注+[釋義]括地志에 卽和州烏江縣이라 方輿勝覽에 烏江縣東四里에 有烏江浦하니 卽亭長檥船待項王處라이 檥船
注+[原註]檥는 音蟻니 附也라 整船向岸曰檥라待
라가 謂項王曰 江東
이 雖小
나 地方千里
라
且籍이 與江東子弟八千人으로 渡江而西러니 今無一人還하니
縱江東父兄이 憐而王我인들 我何面目見之며 縱彼不言이나 籍獨不愧於心乎아하고
乃令騎로 皆下馬步行하야 持短兵接戰하니 獨籍의 所殺漢軍이 數百人이요 身亦數十餘創이라
乃曰 吾聞漢購我頭千金, 邑萬戶
라하니이라하고 乃自刎而死
하다
漢王이 欲屠之하야 至其城下러니 猶聞弦誦之聲이어늘
謂其守禮義之國
이 爲主死節
注+[通鑑要解]懷王이 初封羽爲魯公故也라 葬項王穀城東하니 去縣十五里에 有塚이라이라하고 乃持項王頭示之
하니 魯乃降
하다
〈出漢書本紀及儒林傳〉 漢以魯公禮
로 葬項王
하고 封項伯
하야 爲列侯
注+[頭註]項伯은 羽之季父니 名纏이요 字伯陵이라 項氏支屬을 皆不誅하고 封項伯等四人하야 爲列侯하니라하다
羽起隴畮(畝)之中하야 三年에 遂將五諸侯兵하고 滅秦하야 分裂天下而封王侯하고 政由羽出하니 位雖不終이나 近古以來에 未嘗有也라
及羽背關懷楚하고 放逐義帝而自立하야 怨王侯叛己면 難矣라
自矜功伐하고 奮其私智而不師古하야 謂霸王之業을 欲以力征하야 經營天下五年에 卒亡其國하고 身死東城이로되
尙不覺悟而自責하고 乃引天亡我, 非用兵之罪也하니 豈不謬哉아
或問楚敗垓下
하야 方死曰 天也
라하니 諒乎
注+[原註]信如羽之言否아아 曰漢屈群策
注+[釋義]王氏曰 按揚子註解에 漢能屈己以用群臣之策이라하니 謂群策이 無能出漢之右者라하야 群策屈群力
注+[釋義]王氏曰 群力이 皆爲群策所制라 故曰屈群力이라하니라하고 楚憞群策
하야 而自屈其力
注+[釋義]憞는 廢也라 言楚旣廢群策而不能用하니 是自屈其力也라 宋咸曰 憞는 惡也라 項羽有一范增이로되 而不能用하니 其惡群策을 可知矣니라이라
屈人者克
하고 自屈者負
하나니 天曷故焉
注+[釋義]言天豈故爲之哉리오 亦人事也라이리오
智可以來天下로되 不可以留天下며 力可以得天下로되 不可以有天下하니 有天下者는 忘天下者也라
嬴秦이 取天下於六國分裂之餘하야 百戰百勝하야 僅能得之하니 得之艱難일새 惟恐去之或速하야 凡可以制民之死命者를 無不可爲而彊擧之하야 雖翦滅屠戮이라도 有所不恤하니 天下不勝嬴秦之猜疑하야 相率而跳於刑法之外라
項氏見民之易叛하고 恐今日之於吾에 猶昔日之於秦也하야 擧一城則坑之하고 攻一邑則屠之하니 嗟乎라
疑民之叛하야 而求以殺戮止之하니 乃所以速其叛也라
帝之入關엔 約法三章하고 羽之入關엔 烽火三月하며 帝之所過엔 秋毫無犯하고 羽之所過엔 噍類不遺하니 嗟乎라
相率而歸之어늘 從而殺之면 何苦歸之하야 以求殺哉아
帝不取天下於秦項之手하고 而取於吾民之心하야 信其自來하고 聽其自至하니 非寬仁大度者면 有所不能也니라
○ 漢王이 還至定陶하야 馳入齊王信壁하야 奪其軍하다
春正月
에 更立齊王信
하야 爲楚王
하고 王淮北
하야 都下
하고 封魏相國彭越
하야 爲梁王
하고 王魏故地
하야 都定陶
하다
○ 韓信이 至楚하야 召漂母하야 賜千金하고 召辱己少年하야 以爲中尉하고 告諸將相曰 此는 壯士也라
方辱我時
에 寧不能殺之耶
리오마는 殺之無名
이라 故
로 忍而就此
注+[通鑑要解]就는 成也니 成今日之功也라로라
○ 夏五月
에 帝置酒洛陽南宮
注+[釋義]括地志에 南宮은 在洛州洛陽縣東北二十六里洛陽故城中이라하다
上曰 徹侯
注+[原註]舊曰徹侯러니 避武帝諱하야 曰通侯라[釋義] 徹은 通也니 言其上通王室也라諸將
은 毋敢隱朕
하고 皆言其情
하라
吾所以有天下者
는 何
며 項氏之所以失天下者
는 何
오王陵
이 對曰 陛下
는 嫚而侮人
하시고 項羽
는 仁而愛人
이나
然陛下는 使人攻城略地면 因以與之하사 與天下同其利하시고
項羽는 妬賢嫉能하야 有功者를 害之하고 賢者를 疑之하니 此其所以失天下也니이다
夫運籌帷幄之中
하야 決勝千里之外
는 吾不如子房
이요 鎭國家, 撫百姓
하고 給餉餽
注+[釋義]餉은 通作饟이요 餽는 通作饋라하야 不絶糧道
는 吾不如蕭何
요 連百萬之衆
하야 戰必勝, 攻必取
는 吾不如韓信
이니
三者는 皆人傑이어늘 吾能用之하니 此所以取天下者也요
項羽는 有一范增이로되 而不能用하니 此所以爲我禽(擒)也니라 群臣이 悅服이러라
高祖謂項羽有一范增而不能用故로 爲我禽이라하니 初以爲信然이러니 及觀增之所以佐羽者然後에 知羽雖用增이나 無益於敗亡也로라
項籍이 以閭閻匹夫之資로 首天下諸侯하야 西向而幷爭이러니 視秦車之覆이로되 曾不知戒하고 猶蹈其故轍하야 欲以力制天下하야 屠咸陽하고 殺子嬰하고 燒秦宮室하며 所過에 無不殘滅하니 是는 以秦攻秦也라
范增이 曾無一言及此하고 乃汲汲於殺沛公하니 假令沛公死라도 天下에 其無沛公乎아
吾觀不如之論은 固帝之誠이나 然不如는 亦足以見帝於君臣之間에 無復有猜忌之謀하야 而有以安慰臣下之心也라
風雲霜露가 無一氣而非天이요 芽甲根荄가 無一物而非地니 天下之善이 誰非人主之善乎아
小夫窶人이 借隙光以自飾하고 竊勺水以自多로되 要不出範圍之內라
○ 項羽已滅
에 田橫
注+[原註]齊王儋死에 橫自立爲齊王하다이 懼誅
注+[頭註]齊王田榮死에 子廣立하고 田橫相之러니 韓信이 虜齊王田廣한대 橫收散兵하야 自立爲王하고 與灌嬰戰敗而走彭越하다 及羽滅에 而越爲漢梁王하니 橫懼誅하니라하야 與其徒五百餘人
으로 入居海島中
이러니
帝恐其爲亂하야 乃使人赦橫罪하고 而召之曰 橫아 來하라
大者면 王이요 小者면 侯어니와 不來면 且擧兵加誅호리라
橫
이 乃與其客二人
으로 乘傳詣洛陽
注+[釋義]蘇鶚〈演義〉曰 傳은 以木爲之하니 長尺五寸이니 書符其上하고 又以一板으로 偕封以御史印章하니 所以爲信이라 乘傳者는 依乘符傳而行이니 若今使者持節耳라 師古曰 傳者는 若今之驛也라 古者에 以車謂之傳車러니 其後에 又置單馬하고 謂之驛騎라 洛陽은 注見前하니라이러니 未至三十里
하야 自殺
이어늘
帝聞之大驚하야 聞其餘尙五百人이 在海中하고 使使召之러니 至則聞橫死하고 亦皆自殺하다
項籍滅에 帝購求布千金호되 敢舍匿이면 罪三族호리라
布乃
注+[釋義]髡은 髮也라 鉗은 以鐵束頸也라爲奴
하야 自賣於魯朱家
注+[釋義]朱家는 魯人也라 季布先匿濮陽周氏러니 周氏曰 漢求將軍急하야 (邇)[迹]且至臣家하리니 臣敢獻計라하고 乃髡鉗布하야 衣하고 置廣柳車中하고 幷與其家僮數十人으로 至朱家賣之하니라 案廣柳車는 喪車也라[頭註] 朱家는 所藏活豪士以百數요 其餘庸人을 不可勝數로되 終不伐功하고 諸所賞施를 猶恐人見之하니라러니
朱家心知其季布也하고 買置田舍하고 身之洛陽하야 見滕公하고 說曰 季布何罪오
今上이 始得天下하야 而以私怨으로 求一人하시니 何示不廣也오
且以季布之賢으로 漢이 求之急하니 此不北走胡면 南走越耳라
君은 何不從容爲上言之오 滕公이 待間(閒)하야 言於上호되 如朱家指한대
○ 布
의 母弟丁公
注+[釋義]薛人也니 名固라[通鑑要解] 名固니 與布로 異父同母弟라이 亦爲項羽將
하야 逐窘帝彭城西
하야 短兵接
注+[釋義]王氏曰 短兵接爲句라 楚辭九歌篇에 車錯轂兮短兵接이라한대 朱子註云 短兵은 刀劍也라 言戎車相迫에 輪轂相錯하야 長兵不施라 故用刀劍以相接擊也라이러니
帝急하야 顧謂丁公曰 兩賢이 豈相戹(厄)哉아하니 丁公이 引兵而還하다
及項王滅에 丁公이 謁見이어늘 帝以丁公으로 徇軍中曰 丁公이 爲項王臣不忠하야 使項王失天下라하고
高祖起豐沛以來로 罔(網)羅豪傑하야 招亡納叛이 亦已多矣러니
當群雄角逐之際하야 民無定主하니 來者受之 固其宜也어니와
及貴爲天子
하야는 四海之內 無不爲臣
하니 苟不明禮義以示之
하야 使爲臣者
로 人懷貳心
하야 以
大利
면 則國家其能久安乎
아
是故로 斷以大義하야 使天下曉然皆知爲臣不忠者無所自容하야 而懷私結恩者는 雖至於活己라도 猶以義不與也라
齊人婁敬
이 戍隴西
할새 過洛陽
이라가 脫
注+[釋義]輅者는 一木橫遮車前하야 二人輓之하고 一人推之니 所謂輓輅라, 衣羊裘
하고 因虞將軍
하야 見上曰 陛下都洛陽
하시니 豈欲與周室比隆哉
잇가 上曰 然
하다
婁敬曰 洛邑은 天下之中이라 有德則易以王이요 無德則易以亡이어니와
夫秦地
는 被山帶河
하야 四塞以爲固
하고 卒然有急
이면 百萬之衆
을 可具
하니 此亦扼天下之吭而拊其背也
注+[釋義]扼은 音厄이니 捉持也라 吭은 音剛이니 咽喉也니 以喩關中이라 拊는 擊也니 以背脊으로 喩天下라니이다
帝問群臣한대 群臣이 皆山東人이라 爭言 周는 王數百年하고 秦은 二世卽亡하니이다
洛陽
은 東有成皐
하고 西有殽,
하고 倍(背)河向洛
하니 其固
를 足恃也
니이다
上問張良한대 良曰 洛陽이 雖有此固나 四面受敵하니 非用武之國也라
關中
은 左殽, 函
注+[釋義]殽는 與崤字通이라 括地志에 殽山은 一名嶔岑山이니 在洛州永寧縣西北하니 卽古之殽道也라 函은 謂函谷이니 在陝西桃林縣南十二里하니 有洪溜澗水하고 山形如函이라 故稱函이요 關路在谷口라 故名函谷이라이요 右隴, 蜀
이요 沃野千里
注+[釋義]沃은 灌沃也니 言其土壤廣遠하고 有灌漑之利라며 阻三面而固守
하고 獨以一面
으로 東制諸侯
하니
此
는 所謂金城千里
요 天府之國
注+[釋義]財物所聚曰府라 關中物産饒多하야 可備贍給이라 故稱天府하니 天所造也라이니 婁敬說
이 是也
니이다
上
이 卽日
注+[頭註]蓋其日卽定計요 非卽日遂行也라에 車駕
注+[頭註]謂天子乘車而行이니 不敢指斥也라西都長安
하고 號婁敬
하야 爲奉春君
注+[頭註]春은 歲之始也니 以婁敬首謀都關中故로 號奉春君이라하고 賜姓劉氏
하다
高帝起兵八年에 歲無寧居러니 至是에 天下平定하니 當亦少思安逸之時也어늘 而敏於用言하야 不自遑暇如此하니 其成帝業이 宜哉인저
光武下隴하고 歸才(纔)六日에 潁川盜起而往征之하니 可謂能繩祖武矣로다
張良
이 素多病
이러니 從上入關
하야 卽道(導)引
하야 不食穀
注+[釋義]服辟穀藥而不食하고 靜居行氣以學道라 莊子刻意篇에 道(導)引之士라한대 注에 導氣令其和하고 引體令其柔라 華陀傳曰 古僊(仙)人道引之事는 熊經, 鴟顧하야 引接要(腰)體하고 動諸關節하야 以求難老라하고 曰
家世相韓이러니 及韓滅에 不愛萬金之資하고 爲韓報讐彊秦하야 天下振動이라
今以三寸舌로 爲帝者師하야 封萬戶侯하니 此는 布衣之極이라
於良에 足矣니 願棄人間事하고 欲從赤松子遊耳라하더라
夫生之有死는 譬猶夜旦之必然이니 自古及今히 固未嘗有超然而獨存者也라
如高帝所稱者는 三傑而已로되 淮陰誅夷하고 蕭何繫獄은 非以履盛滿而不止耶아
故로 子房이 託於神仙하고 遺棄人間하야 等功名於外物하고 置榮利而不顧하니 所謂明哲保身者를 子房이 有焉이로다
[新增] 愚按 尹氏曰 神仙詭誕之說은 先儒論之詳矣요 有如張良欲從赤松子遊는 司馬公亦旣及之矣라
綱目에 前書張良謝病辟穀하야 疑若眞有導引長年之事러니
至壬子六年하야 書留侯張良卒하니 則知子房託於神仙之意를 昭然可見이니 而詭誕之說을 不攻自破矣로다
겨울 10월에
한왕漢王이
항우項羽를 추격하여
고릉固陵에
注+[釋義]고릉固陵 : 고릉固陵은 현縣의 이름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진주陳州완구현宛丘縣 서북쪽 42리 지점에 있다.” 하였고, 일본一本(《漢書》 진작晉灼의 주註)에는 “광주光州의 고시현固始縣이 이곳이다.” 하였다. 이르러서
제왕齊王한신韓信과
위魏나라
상국相國팽월彭越과
注+[頭註]처음에 팽월彭越이 위魏나라 땅의 10여 개 성을 수복한 다음 군대를 거느리고 한漢나라로 돌아와 한왕漢王에게 위魏나라 후손을 세워줄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서위西魏의 왕王표豹는 참으로 위魏나라 후손입니다.” 하니, 마침내 팽월彭越을 위魏나라 정승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위魏나라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팽월彭越은 위魏나라 사람이다. 함께 모여
초楚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는데,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이 오지 않았다.
초楚나라가 한군漢軍을 공격하여 대파하니, 한왕漢王이 성벽을 굳게 하여 스스로 지키고 장량張良에게 이르기를 “제후들이 따르지 않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장량張良이 대답하기를 “초楚나라 군대가 장차 격파될 터인데 이 두 사람에게 땅을 나누어 준 것이 있지 않으니, 그들이 오지 않는 것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군왕께서 이들과 천하를 함께 하시면 당장 오게 할 수가 있으니, 이제 수양睢陽이북以北으로부터 곡성穀城까지는 모두 팽월彭越에게 왕 노릇 하게 하시고, 진陳으로부터 이동以東으로 동해東海까지는 제왕齊王한신韓信에게 주소서.
능히 이 땅을 출연出捐하여 두 사람에게 허락해서 각각 따로 전투하게 하시면 초楚나라를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한왕漢王이 그의 말을 따랐다.
이에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이 모두 병력을 인솔하고 왔다.
12월에
항왕項王이
해하垓下에
注+[釋義]해하垓下는 취읍聚邑(작은 고을) 이름이니 패주沛州의 효현洨縣에 있고, 또 제방의 이름이기도 하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이르기를 “해垓는 높은 산등성이의 가파른 바위이니, 지금도 높이가 서너 길이나 된다. 취읍聚邑과 제방이 해垓의 곁에 있기 때문에 인하여 해하垓下라고 이름하였으니, 지금 박주亳州진원眞源의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이르니, 병력이 적고 식량이 다하였다.
한漢나라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성벽으로 들어가자, 한군漢軍과 제후의 군사들이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항우項羽는 밤에 한군漢軍이 사면에서 모두 초楚나라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마침내 크게 놀라 말하기를 “한漢나라가 이미 초楚나라를 모두 얻었는가?
어찌하여
초楚나라 사람이 이토록 많은가?”
注+[釋義]項羽夜聞……楚人之多也 : 초가楚歌는 초楚나라 사람의 노래이니 ‘오吳나라의 노래’, ‘월越나라의 시’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구강九江의 병사들이 한漢나라에 귀순하였기 때문에 초楚나라 노랫소리가 많은 것이다. 하고, 마침내 밤에 일어나
장중帳中에서 술을 마셨다.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이르기를 “미인美人이 있으니 이름이 우虞요, 준마가 있으니 이름이 추騅였다.
마침내 슬피 노래하고 강개慷慨하여 스스로 시가詩歌를 지으니, 이르기를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온 세상을 뒤덮도다.
우미인虞美人이여, 우미인虞美人이여, 어찌한단 말인가.’ 했다.” 하였다.
- 인하여 눈물을 흘리니, 좌우가 모두 울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이에 항왕項王이 준마를 타니 휘하의 장사로서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8백여 명이었다.
밤을 당하여
注+[釋義]직直는 당함이니, 고자古字에는 으레 치値를 로 썼다.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나가 도망하였는데,
평명平明(새벽)에야
한漢나라 군대에서 비로소 이를 깨닫고 기병장
관영灌嬰으로 하여금 5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게 하였다.
항왕項王이 회수淮水를 건널 적에 기병으로서 소속된 자가 겨우 백여 명이었다.
음릉陰陵에
注+[釋義]음릉陰陵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구강군九江郡음릉현陰陵縣은 지금의 무위주無爲州가 바로 이곳이다.” 하였고, 《방여승람方輿勝覽》에 “화주和州오강현烏江縣 서북쪽 45리 지점에 음릉산陰陵山이 있으니, 곧 항우項羽가 길을 잃었던 곳이다.” 하였고, 《괄지지括地志》에 “음릉陰陵의 옛 성城이 호주濠州정원현定遠縣 서북쪽 6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이르러 혼미하여 길을 잃고 한 농부에게 물으니, 농부가 속여 말하기를 “왼쪽으로 가라.”
注+[釋義]田父紿曰 좌左 : 왕씨王氏가 말하였다. “태왈좌紿曰左에서 구句를 떼어야 한다. 태紿는 속여서 말하는 것이니, 속여서 왼쪽으로 향하여 가게 한 것이다.” 하였다.
왼쪽으로 갔다가 마침내 큰 늪 가운데에 빠지니, 한漢나라 군사들이 이 때문에 추격하여 따라잡았다.
항왕項王이 이에 다시 병력을 이끌고
동성東城에
注+[釋義]동성東城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구강군九江郡동성현東城縣이다.” 하였고, 《괄지지括地志》에 “옛 성城이 호주濠州정원현定遠縣 동남쪽 5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이르니, 마침내 28명의 기병만 있었다.
항왕項王이 스스로 탈출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는 그 기병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군사를 일으킨 지 지금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를 싸웠으나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마침내 곤궁함이 이와 같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전투를 잘못한 죄가 아니다.
오늘 진실로 결사전을 하겠으니, 적장을 목 베고 적의 깃발을 베어 세 번 이겨서 제군諸君들로 하여금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전투를 잘못한 죄가 아님을 알게 하겠다.” 하고는
한漢나라의 장수 한 명과 도위都尉 한 명을 목 베고 수십 명에서 백 명을 죽이니, 모든 기병이 모두 탄복하였다.
이에
항왕項王이 동쪽으로
오강烏江을 건너려 하니,
오강烏江의
정장亭長이
注+[釋義]오강정烏江亭은 《괄지지括地志》에 “바로 화주和州오강현烏江縣이다.” 하였고, 《방여승람方輿勝覽》에 “오강현烏江縣 동쪽 4리 지점에 오강포烏江浦가 있으니, 바로 정장亭長이 배를 대고 항왕項王을 기다렸던 곳이다.” 하였다. 배를 대고
注+[原註]의檥는 음이 의이니, 붙이는 것이다. 배를 정돈하여 강안江岸으로 향하는 것을 의檥라고 한다. 기다리다가
항왕項王에게 이르기를 “
강동江東이 비록 작으나 땅의 넓이가 천 리입니다.
또한 충분히 왕 노릇 할 수 있으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급히 건너소서.” 하였다.
이에 항왕項王이 웃으며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데 내 어찌 이 강을 건너겠는가?
또 내가 강동江東의 자제子弟 8천 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왔는데 이제 한 사람도 돌아가는 자가 없으니,
비록 강동江東의 부형父兄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 노릇 하게 한다 한들 내 무슨 면목으로 이들을 볼 것이며, 비록 저들이 말하지 않으나 내가 홀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항우項羽가 마침내 기병들로 하여금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단병短兵을 잡고 접전하게 하였는데, 항적項籍이 홀로 죽인 한군漢軍이 수백 명이고 자신도 또한 수십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이에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한漢나라에서 내 머리에 천금千金과 만호萬戶의 고을을 현상하였다 하니,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풀겠다.”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초楚나라 땅이 모두 평정되었으나 노魯 지방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한왕漢王이 노魯 지방을 도륙하고자 하였는데, 그 성 아래에 이르니 아직도 현악기를 타고 시詩를 외는 소리가 들렸다.
한왕漢王이 이르기를 “
예의禮義를 지키는 나라가 군주를 위하여 죽음으로 충절을 지키는 것이다.”
注+[通鑑要解]회왕懷王이 처음에 항우項羽를 노공魯公으로 봉하였기 때문에 군주를 위하여 충절을 지켰다고 한 것이다. 항왕項王을 곡성穀城 동쪽에 장사 지내니, 현縣에서 15리 떨어진 곳에 무덤이 있다. 하고 마침내
항왕項王의 머리를 가지고 가서 보여주니,
노魯 지방이 그제서야 항복하였다.
- 《
한서漢書》 〈
고제기高帝紀〉와 〈
유림전儒林傳〉에 나옴 -
한漢나라가
항왕項王을
노공魯公의
예禮로 장례하고
항백項伯을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았다.
注+[頭註]封項伯 위열후爲列侯 : 항백項伯은 항우項羽의 계부季父이니, 이름이 전纏이고 자字가 백릉伯陵이다. 항씨項氏의 친족들을 모두 죽이지 않고, 항백項伯 등 네 사람을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았다.
“항우項羽가 밭두둑 가운데서 일어나 3년 만에 마침내 다섯 제후의 군대를 거느리고 진秦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천하를 나누어 왕후王侯를 봉하고 정사政事를 자기 뜻대로 하였으니, 지위가 비록 끝까지 가지 못하였으나 근고近古 이래에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이다.
항우項羽가 관중關中의 약속을 저버리고 초楚나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으며 의제義帝를 추방하고 스스로 왕위에 서고는 왕후王侯들이 자신을 배반한 것을 원망한다면 곤란하다.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사사로운 지혜를 뽐내어 옛 도리를 본받지 않고서 패왕霸王의 업業을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천하를 경영한 지 5년 만에 마침내 나라를 잃고 자신은 동쪽 성城에서 죽었다.
그런데도 깨달아 자책하지 못하고, 마침내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용병을 잘못한 죄가 아니라고 말하였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
혹자或者가 묻기를
초楚나라
항우項羽가
해하垓下에서 패전하여 막 죽을 때에 말하기를 ‘하늘(天運)이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항우項羽의 말과 같이 하늘이 있습니까?
注+[原註]‘진실로 항우項羽의 말과 같은가?’라고 물은 것이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
한漢나라는 여러 계책을 다 받아들여서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양자법언揚子法言》의 주해註解에 ‘한漢나라는 자기 몸을 굽혀 여러 신하의 계책을 썼다.’고 하였으니, 여러 사람의 계책을 쓴 것은 한漢나라보다 뛰어난 자가 없는 것이다.” 여러 계책이 여러 힘을 굴복시켰고,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여러 힘이 모두 여러 계책에 제어를 받았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여러 힘을 굴복시켰다.’고 한 것이다.”초楚나라는 여러 계책을 폐하여 스스로 그 힘을 굽혔다.
注+[釋義]돈憞는 폐함이다. 초楚나라가 이미 여러 계책을 폐하여 쓰지 못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그 힘을 굽힌 것이다. 송함宋咸이 말하기를 “돈憞는 미워함이다. 항우項羽는 범증范增 한 사람이 있었으나 그의 말을 쓰지 못하였으니, 여러 계책을 미워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남에게 굽히는 자는 이기고 스스로 굽히는 자는 지니, 하늘이 무슨 연고가 있겠는가.”
注+[釋義]하늘이 무슨 연고가 되겠는가. 또한 사람의 일임을 말한 것이다.
“지혜는 천하 사람을 오게 할 수 있으나 천하 사람을 머물게 할 수는 없으며, 힘은 천하를 얻을 수 있으나 천하를 소유할 수는 없으니, 천하를 소유하는 자는 천하를 잊는 자이다.
영진嬴秦이 육국六國이 분열된 뒤에 천하를 취하여 백 번 싸워 백 번 이겨서 겨우 얻었으니, 얻기를 어렵게 하였기 때문에 행여 떠나감이 혹 빠를까 염려하여, 백성의 목숨을 제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할 만하다고 여겨 억지로 들지 않음이 없어서 비록 백성들을 베어 죽이고 도륙하는 것도 돌아보지 않는 바가 있었으니, 천하 사람들이 영진嬴秦의 시기와 의심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 거느리고 형법刑法의 밖에서 날뛰었다.
항씨項氏는 백성들이 쉽게 배반하는 것을 보고는 오늘날 자신에게 있어서도 옛날 진秦나라에 있어서와 같을까 염려하여 한 성城을 함락하면 백성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한 읍邑을 공격하면 백성들을 도륙하였으니, 아!
항우項羽도 또한 사람이니 살려주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함이 누군들 이런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백성들을 베어 죽이고 한 치의 애석함도 없었던 까닭은 또한 의심이 깊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살륙으로써 저지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반란을 재촉한 것이다.
고제高帝가 관중關中에 들어갔을 때에는 삼장三章의 법法을 약속하였고 항우項羽가 관중關中에 들어갔을 때에는 봉화가 3개월 동안 이어졌으며, 고제高帝가 지나간 곳에는 추호秋毫도 범함이 없었고 항우項羽가 지나간 곳에는 백성의 무리가 살아남지 못하였으니, 아!
백성들이 군주에게 돌아가는 것은 자신을 살려주기를 바라서이겠는가.
서로 이끌고서 돌아갔는데 따라서 죽인다면 어찌 괴롭게 그에게 돌아가서 자기를 죽이기를 바라겠는가.
고제高帝는 천하를 진秦나라와 항우項羽의 손에서 취하지 않고 우리 백성들의 마음에서 취하여, 스스로 오도록 내버려 두고 스스로 이르도록 하였으니, 관대하고 인자하고 도량이 큰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한왕漢王이 돌아와 정도定陶에 이르러서 제왕齊王한신韓信의 성벽으로 달려 들어가 그의 병력을 빼앗았다.
봄 정월에 제왕齊王한신韓信을 바꾸어 세워 초왕楚王으로 삼고 회북淮北에 왕 노릇 하여 하비下邳에 도읍하게 하였으며, 위魏나라 상국相國팽월彭越을 봉하여 양왕梁王을 삼고 위魏나라의 옛 땅에 왕 노릇 하여 정도定陶에 도읍하게 하였다.
한신韓信이 초楚나라에 이르러 표모漂母를 불러 천금千金을 주고, 자기를 욕보였던 소년을 불러 중위中尉로 삼고, 여러 장상將相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장사壯士이다.
막 나를 욕보일 때에 내 어찌 이 사람을 죽일 수 없었겠는가마는 죽이는 것이 명분이 없기 때문에 참아서 이를 이루었다.”
注+[通鑑要解]취就는 이룸이니, 금일今日의 공功을 이룬 것이다. 하였다.
제후왕들이 모두 글을 올려 한왕漢王에게 황제皇帝가 될 것을 청하였다.
2월 갑오甲午에 왕이 사수汜水의 북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여름 5월에 황제가
낙양洛陽의
남궁南宮에서
注+[釋義]낙양洛陽의 남궁南宮은 《괄지지括地志》에 “남궁南宮은 낙주洛州낙양현洛陽縣 동북쪽 26리 되는 낙양洛陽의 옛 성城 가운데에 있다.” 하였다. 술자리를 베풀었다.
상上이 말하기를 “
철후徹侯와
注+[原註] 옛날에는 철후徹侯라고 하였는데, 무제武帝의 휘諱를 피하여 통후通侯라고 하였다. [釋義]철徹은 통通함이니 위로 왕실王室과 통함을 말한다. 여러 장수들은 감히
짐朕에게 숨기지 말고, 모두 각기 그 실정을 말하라.
내가 천하를 소유하게 된 까닭은 무엇이며, 항씨項氏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인가?” 하니,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대답하기를 “폐하는 거만하여 사람을 업신여기시고 항우項羽는 인자하여 사람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폐하는 사람을 시켜 성을 공격하고 땅을 공략하면 인하여 그들에게 주어서 천하와 그 이익을 함께 하셨고,
항우項羽는 현자를 투기하고 재능이 있는 자를 미워하여 공이 있는 자를 해치고 어진 자를 의심하였으니, 이 때문에 천하를 잃은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上이 말하기를 “공은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는구나.
유악帷幄의 가운데에서 궁리하고 계획하여 천 리의 밖에서 승리를 결단함은 내가
자방子房(張良)만 못하고, 국가를 진정시키고 백성을 어루만지며 군량을 공급하여
注+[釋義]향餉은 향饟과 통용되고, 궤餽는 궤饋와 통용된다.양도糧道를 끊어지지 않게 함은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고,
백만百萬의 무리를 연합하여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함은 내가
한신韓信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인데, 내가 이들을 등용하였으니 이 때문에 내가 천하를 취한 것이요,
항우項羽는 범증范增 한 사람이 있었으나 쓰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나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기뻐하여 복종하였다.
“고조高祖가 이르기를 ‘항우項羽는 범증范增 한 사람이 있었으나 쓰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에게 사로잡혔다.’ 하였으니, 내가 처음에는 그 말을 옳게 여겼는데, 범증范增이 항우項羽를 보좌한 것을 살펴본 뒤에야 항우項羽가 비록 범증范增의 말을 따랐더라도 패망함에 유익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항적項籍은 여염閭閻의 필부匹夫의 자질로 천하 제후들 중에 으뜸이 되어서 서쪽을 향하여 함께 다투었는데, 진秦나라 수레가 전복된 것을 보고도 일찍이 경계할 줄 모르고 오히려 그 전철前轍을 밟아서 힘으로써 천하를 제압하고자 하여, 함양咸陽을 도륙하고 자영子嬰을 죽이고 진秦나라 궁실을 불태웠으며 지나가는 곳마다 해치고 멸망시키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진秦나라로써 진秦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범증范增은 일찍이 한 마디도 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고 도리어 패공沛公을 죽이는 데에 급급하였으니, 가령 패공沛公이 죽었더라도 천하에 어찌 또 다른 패공沛公이 없겠는가.
더구나 범증范增은 패공沛公이 천자의 기운이 있음을 알았는데 또 그를 죽일 수 있었겠는가.”
“내가 살펴보건대 ‘그만 못하다’는 의논은 진실로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성심이었으나 ‘그만 못하다’는 것에서 또한 고제高帝가 군신간君臣間에 다시는 시기하는 계책이 있지 아니하여 신하들의 마음을 위안할 수 있었음을 충분히 볼 수 있다.
바람과 구름과 서리와 이슬이 한 기운도 하늘 아님이 없으며 싹과 껍질과 뿌리가 한 물건도 땅 아님이 없으니, 천하의 선善이 어느 것인들 인주人主의 선善이 아니겠는가.
작은 지아비와 가난한 사람들이 틈 사이의 빛을 빌려 스스로 꾸미고 한 잔의 물을 도둑질하여 스스로 많은 체하나 요컨대 천지天地와 일월日月의 범위 안을 벗어나지 않는다.
만물을 덮어주는 하늘과 만물을 실어주는 땅이 어찌 이 자질구레한 것들과 다투겠는가.
항우項羽가 이미 멸망하자,
전횡田橫이
注+[原註]제왕齊王전담田儋이 죽자 전횡田橫이 스스로 서서 제왕齊王이 되었다. 주벌을 두려워하여
注+[頭註]제왕齊王전영田榮이 죽자 아들 광廣이 즉위하고 전횡田橫이 정승이 되어 그를 도왔는데, 한신韓信이 제왕齊王전광田廣을 사로잡자 전횡田橫이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여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고, 관영灌嬰과 싸워 패전하고 팽월彭越에게 달려가 귀의하였다. 항우項羽가 멸망하자 팽월彭越이 한漢나라의 양왕梁王이 되니, 전횡田橫이 주벌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 무리 5백여 명과
해도海島 가운데로 들어가 거주하였다.
황제는 이들이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사람을 보내 전횡田橫의 죄를 사면하고 부르기를 “전횡田橫아, 오너라.
크게는 왕王을 시킬 것이고 작게는 후侯를 시킬 것이며, 오지 않으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주벌을 가하겠다.” 하였다.
전횡田橫이 마침내 그 문객 두 사람과 역말을 타고 낙양에 왔는데,
注+[釋義]《소악연의蘇鶚演義》에 이르기를 “전傳은 나무로 만드니 길이가 1척尺 5촌寸이다. 그 위에 부符(신표)를 쓰고 또 한 판자를 어사御史의 인장印章과 함께 봉하니, 이를 신표信標로 삼는 것이다. 승전乘傳은 신표에 따라 역마를 타고 가는 것이니, 지금 사자使者가 부절을 가지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傳은 지금의 역마驛馬(파발마)와 같은 것이다. 옛날에 수레를 일러 전거傳車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또 필마匹馬를 두고 이를 일러 역기驛騎라고 했다.” 하였다. 낙양洛陽은 주注가 앞에 보인다. 30리 못 미친 곳에서 자살하였다.
황제가 두 문객을 임명하여 도위都尉로 삼고 왕王의 예禮로 전횡田橫을 장례 하였다.
전횡田橫을 장례 지내자, 두 문객이 그 무덤 옆을 뚫고 모두 스스로 목을 찔러 따라 죽었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그 나머지 5백 명이 아직도 해중海中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불렀는데, 이들이 와서는 전횡田橫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또한 모두 자살하였다.
계포季布가 항적項籍의 장수가 되어 여러 번 황제를 곤궁하게 하고 욕보였다.
항적項籍이 멸망하자 황제가 계포季布를 찾되 천금을 현상으로 걸고 ‘감히 집에 숨겨주면 삼족三族을 멸하겠다.’고 하였다.
계포季布가 마침내 머리를 깎고 목에
항쇄項鎖를 차고 노예가 되어서
注+[釋義]곤髡은 머리를 깎는 것이고, 겸鉗은 쇠로 목을 묶는 것이다. 스스로
노魯 땅의
주가朱家에
注+[釋義]주가朱家는 노魯나라 사람이다. 계포季布가 먼저 복양濮陽의 주씨周氏 집에 숨었는데, 주씨周氏가 말하기를 “한漢나라에서 장군을 급히 찾아 추적하는 자가 장차 신의 집에 이를 것이니, 신이 감히 계책을 바치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계포季布의 머리를 깎고 목에 항쇄項鎖를 채워 창의裮衣를 입히고 광류거廣柳車 속에 넣은 다음, 그 집의 종 수십 명과 함께 주가朱家에 이르러서 팔았다. 살펴보건대 광류거廣柳車는 상거喪車이다. [頭註]주가朱家는 호걸스러운 선비들을 숨겨 살려준 것이 백 명으로 헤아릴 정도이고 그 나머지 용렬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나, 끝내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모든 상을 주고 은혜를 베푼 것을 행여 남들이 알까 두려워하였다. 팔려갔다.
주가朱家는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계포季布임을 알고 밭과 집을 사서 주고는 몸소 낙양洛陽에 가서 등공滕公(夏侯嬰)을 만나보고 말하기를 “계포季布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신하가 각각 군주를 위하여 쓰여지는 것이 당연한 직분입니다.
注+[釋義]용직用職은 신하의 직분에 당연한 것일 뿐임을 이른다.
지금 상上께서 처음으로 천하를 얻고서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한 사람을 찾으시니, 어찌 도량이 넓지 못함을 보이신단 말입니까.
또 계포季布의 어짊으로 한漢나라가 그를 급하게 찾으니, 이 사람이 북쪽으로 호胡로 달아나지 않으면 남쪽으로 월越나라로 달아날 뿐입니다.
군君께서는 어찌하여 조용히 상上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하니, 등공滕公이 한가한 틈을 기다려 상上에게 아뢰기를 주가朱家가 지시한 대로 하였다.
상上은 마침내 계포季布를 사면하고 불러 낭중郎中을 제수하였다.
계포季布의
동모제同母弟인
정공丁公이
注+[釋義]정공丁公은 설薛 땅 사람이니, 이름이 고固이다. [通鑑要解]정공丁公은 이름이 고固이니, 계포季布와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아우이다. 또한
항우項羽의 장수가 되어서 황제를
팽성彭城의 서쪽에서 추격하여 곤궁하게 하여
단병短兵으로 접전하였다.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단병접短兵接에서 구句를 뗀다. 《초사楚辭》 〈구가편九歌篇〉에 ‘거착곡혜단병접車錯轂兮短兵接’이라 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주註에 ‘단병短兵은 도검刀劍이다. 전거戰車가 바싹 서로 붙어있어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쳐서 긴 병기를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도검刀劍을 사용해서 서로 접근하여 공격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황제가 다급하여 정공丁公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두 현자가 어찌 서로 곤궁하게 하는가?” 하니, 정공丁公이 군대를 이끌고 그대로 돌아갔다.
항왕項王이 멸망하자 정공丁公이 찾아와 뵈니, 황제가 정공丁公을 군중에 돌려 보이며 말하기를 “정공丁公이 항왕項王의 신하가 되어 불충해서 항왕項王으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했다.” 하고는
마침내 그의 목을 베고 말하기를 “후세의 인신人臣이 된 자로 하여금 정공丁公을 본받지 말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고조高祖가 풍패豐沛에서 기병起兵한 이래로 호걸들을 망라하여 도망한 자들을 불러오고 배반한 자들을 받아들인 것이 또한 이미 많았다.
그런데 제위帝位에 오르자 정공丁公이 홀로 불충하다고 하여 죽임을 당함은 어째서인가?
진취進取와 수성守成은 그 형세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