袁紹擊公孫瓚
注+[附註]遼西人이라 拜降虜校尉하니 虜憚其勇하야 莫敢抗犯하고 遠竄塞外라 然恃其才力하야 不卹百姓하고 睚眦必報하며 州里善士에 名在其右者는 必以法害之하고 所在侵暴하니 百姓怨之하니라 上癸酉年에 殺劉虞하고 盡有幽州之地하니라하야 滅之
하다
○ 初
에 董承
注+[頭註]車騎將軍이니 獻帝后父라이 稱受帝
衣帶中密詔라하고 與劉備
로 謀誅曹操
하다
操從容謂備曰 今天下英雄
은 惟
與操耳
니 本初
注+[頭註]袁紹字라之徒
는 不足數也
라하니
備方食
이라가 失匕(匙)箸
注+[通鑑要解]匕는 匙也요 箸는 挾也라 備以操知其英雄하고 懼將圖己라 故로 驚失匕箸하니라러니 値雷震
이라 備因曰 聖人云 迅雷風烈
에 必變
이라하니 良有以也
로다
遂與承及
輯等
으로 同謀
러니 會
에 操遣備邀袁術
이어늘
備遂殺徐州刺史車冑하고 留關羽하야 守下邳하야 行太守事하고 身還小沛하니 郡縣이 多叛操爲備하야 備衆이 數萬人이라
董承이 以元舅之尊으로 親承密詔하야 與昭烈로 謀誅操而不克이라
然前史
에 未有書其討操者
요 獨范史
注+[頭註]范曄은 劉宋文帝時人이니 撰東漢史라에 載董承等受密詔誅操
하야 其立義頗精
이라
至陳壽志魏하야는 反謂董承等謀反伏誅하니 其謬妄無理가 莫甚於此러니
及其志蜀하야는 始於昭烈稱漢中王之下에 錄其與董承等同謀誅操之語하니
今朱子綱目이 於此에 特筆起義曰起兵徐州하야 討曹操者는
正所以扶三綱, 立人極하야 誅亂臣賊子於千百載之下하야 使古今大義로 無時而不明하야
要使逆亂之徒로 終無以自立於天下하니 其垂世敎也大矣라
원소袁紹가
공손찬公孫瓚注+[附註]공손찬公孫瓚은 요서遼西 사람이다. 강로교위降虜校尉에 제수되니, 오랑캐들이 그의 용맹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항거하거나 침범하지 못하고 멀리 변방 밖으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재주와 힘을 믿고서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고 눈을 흘기는 작은 원한에도 반드시 보복하였으며, 주리州里의 훌륭한 선비 중에 명망이 자신보다 위에 있는 자는 반드시 법으로써 옭아매어 해치고 있는 곳마다 침해하고 포학하니,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앞의 계유년조癸酉年條에 보면 ‘공손찬公孫瓚이 유우劉虞를 살해하고는 유주幽州의 땅을 다 소유했다.’ 하였다. 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 처음에
동승董承注+[頭註]동승董承은 거기장군車騎將軍이니 헌제獻帝의 후비后妃의 아버지이다. 이 황제(獻帝)에게서
의대衣帶 속에 있던
밀조密詔를 받았다고 칭하고는
유비劉備와 더불어
조조曹操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조조曹操가 조용히
유비劉備에게 이르기를 “이제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使君과 나뿐이니,
본초本初(袁紹)
注+[頭註]본초本初는 원소袁紹의 자字이다. 의 무리는 셀 것이 못 된다.” 하였다.
유비劉備가 막 밥을 먹다가 수저를 놓쳤는데
注+[通鑑要解]비匕는 숟가락이고 저箸는 젓가락이다. 유비劉備는 조조曹操가 자신이 영웅임을 알아보고 장차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우렛소리에 놀라 숟가락과 젓가락을 떨어뜨린 것처럼 하여 자신이 영웅이 아님을 보인 것이다.(영웅은 이처럼 작은 일에 절대로 놀라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 우레가 치니,
유비劉備가 인하여 말하기를 “
성인聖人이 말씀하기를 ‘빠른 우레와 거센 바람이 있으면 반드시 낯빛을 변한다.’ 하였으니, 참으로 이유가 있습니다.” 하였다.
유비劉備는 마침내 동승董承, 충집种輯 등과 함께 조조曹操를 살해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마침 조조曹操가 유비劉備를 보내어 원술袁術을 맞이하게 하였다.
유비劉備가 마침내 서주자사徐州刺史 차주車冑를 죽이고 관우關羽를 남겨 두어 하비下邳를 지키면서 태수太守의 일을 행하게 하고 자신은 소패小沛로 돌아가니, 군현郡縣들이 대부분 조조曹操를 배반하고 유비劉備의 편이 되어서 유비劉備의 병력이 수만 명이었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원소袁紹와 군대를 연합하였다.
“조조曹操가 천자天子를 위협하여 천도遷都한 이래로 천하가 이미 한漢나라의 소유가 아니었다.
동승董承이 원구元舅(國舅)의 높은 신분으로 직접 밀조密詔를 받들어 소열昭烈과 함께 조조曹操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소열昭烈이 서주徐州에 있으면서 인하여 마침내 군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역사책에는
소열昭烈이
조조曹操를 토벌한 내용을 쓴 것이 없고, 다만
범엽范曄의 《
후한서後漢書》
注+[頭註]범엽范曄은 유송劉宋(南朝 때 유유劉裕가 세운 송宋나라) 문제文帝 때 사람이니, 《후한서後漢書》를 지었다. 에
동승董承 등이
밀조密詔를 받고
조조曹操를 주벌했다고 기재하여
의義를 세움이 자못 정밀하였다.
그러나 소열昭烈이 조조曹操를 토벌한 일은 말하지 않았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에 위魏나라의 일을 기록함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동승董承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고 말하였으니 잘못되고 망령되어 이치에 맞지 않음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었는데,
촉한蜀漢의 일을 기록함에 미쳐 처음으로 소열昭烈이 한중왕漢中王을 칭한 내용 아래에 동승董承 등과 함께 조조曹操를 죽일 것을 모의했다는 말을 기록하였으니,
이는 실제 사실을 없애기가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굽혀 말한 것이다.(부득이 돌려서 말한 것이다.)
지금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이에 대하여 특별히 기록하여 의례義例를 세우고 ‘서주徐州에서 군대를 일으켜 조조曹操를 토벌했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바로 삼강三綱을 부지扶持하고 인극人極(사람의 도리)을 세워서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천백년 뒤에 토벌하여 고금古今의 대의大義로 하여금 밝혀지지 않을 때가 없어서
요컨대 역신逆臣과 난신亂臣의 무리로 하여금 끝내 천하에 설 수 없게 한 것이니, 세상에 가르침을 드리움이 크다.
그러므로 나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 만들어짐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했다고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