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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2)

통감절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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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巳]五年이라
원삭元朔 5년(정사 B.C.124)
公孫弘 爲丞相하야 封平津侯注+[釋義]平津 鄕名이니 在南郡高成縣이라 正義曰 弘所封平津 在滄州鹽山縣南이라하니 丞相封侯 自弘始러라
공손홍公孫弘이 승상이 되어서 평진후平津侯에 봉해지니,注+[釋義]평진平津의 이름이니, 남군南郡 고성현高成縣에 있었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이르기를 “공손홍公孫弘이 봉해진 평진平津창주滄州 염산현鹽山縣 남쪽에 있었다.” 하였다. 승상이 에 봉해진 것이 공손홍公孫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方興功業이라 於是 開東閤하야 以延賢人하야 與參謀議注+[釋義] 小門也 東向開之하니 避當庭門而引接賓客하야 以別於掾吏官屬이라하다
이때 이 막 공업功業을 일으키려 하였으므로 공손홍公孫弘이 이에 동합東閤(동쪽 협문)을 열어서 어진 사람을 맞이하여 모의에 참여하게 하였다.注+[釋義]은 작은 문이다. 동향東向하여 열어 놓으니, 뜰과 문을 피하여 빈객들을 들어오게 하여 대접해서 아전 등의 관속과 구별한 것이다.
性意(疑)忌하야 外寬內深注+[釋義]外寬內深 言其中心刻剝하야 意多忌害人也 王氏曰 按杜周外寬內深次骨이라한대 至也 其用法深刻至骨이라하야 諸常與弘有隙이면 無近遠 雖陽與善注+[釋義] 與佯通이니 詐也이나 竟報其過러라
공손홍公孫弘은 성질이 의심하고 시기하여 겉으로는 너그러우나 속으로는 각박하여,注+[釋義]외관내심外寬內深심중心中이 각박하여 마음에 사람을 시기하고 해침이 많음을 말한 것이다. 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살펴보건대 두주杜周가 겉으로는 너그러우나 속으로는 각박하여 뼈에 사무쳤다.” 하였는데, 에 “는 이름이니, 법을 적용함이 각박하여 뼈에까지 이른 것이다.” 하였다. 항상 자신과 틈이 있으면 가까운 자와 먼 자를 구분하지 않고 비록 겉으로는 좋은 척하였으나注+[釋義]과 통하니, 거짓이다. 뒤에는 끝내 그 허물을 보복하였다.
〈出弘本傳〉
- 《사기史記 공손홍전公孫弘傳》에 나옴 -
董仲舒 爲人 廉直하야 以弘爲從諛라하니 嫉之러니
동중서董仲舒는 사람됨이 청렴하고 정직하여 공손홍公孫弘더러 군주의 비위를 맞추어 아첨한다고 하니, 공손홍公孫弘이 그를 미워하였다.
膠西王端 驕恣하야 數犯法하고 所殺傷 甚衆이어늘 乃薦仲舒하야 爲膠西相하니 仲舒以病免하다
교서왕膠西王 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자주 법을 범하였고, 죽이거나 다치게 한 이천석二千石(國相)이 매우 많았는데, 공손홍公孫弘이 마침내 동중서董仲舒를 천거하여 교서왕膠西王으로 삼으니, 동중서董仲舒가 병으로 면직하였다.
〈出仲舒本傳〉
- 《사기史記 동중서전董仲舒傳》에 나옴 -
班固贊曰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에 말하였다.
劉向 稱董仲舒有王佐之材하니 雖伊呂라도 亡(無)以加
유향劉向동중서董仲舒를 칭찬하여 ‘왕좌王佐의 재주가 있으니, 비록 이윤伊尹여상呂尙이라도 그보다 더할 수가 없다.
筦(管)晏之屬 伯(霸)者之佐 殆不及也라하니라
관중管仲안영晏嬰의 무리는 패자霸者의 보좌이니, 자못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至向子歆하야는 以爲伊呂 乃聖人之耦 王者不得則不興이라
그런데 유향劉向의 아들 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이윤伊尹여상呂尙은 바로 성인聖人의 짝이니, 왕자王者가 이러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일어나지 못한다.
顔淵死 孔子曰 噫 天喪予라하시니
그러므로 안연顔淵이 죽자 공자孔子께서 「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唯此一人 爲能當之 自宰我子贛(貢)子游子夏 不與焉이라
오직 이 안연顔淵 한 사람만이 해당될 수 있으니, 재아宰我로부터 자공子贛자유子游자하子夏는 끼지 못한다.
仲舒 遭漢하야 承秦滅學之後하야 六經離析이러니 하야 令後學者 有所統壹하야 爲群儒首
동중서董仲舒나라 때를 당하여, 학문이 망한 나라의 뒤를 이어서 육경六經이 흩어졌는데 휘장을 내리고 발분發憤하며 큰 사업에 마음을 두어 후세의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통일된 바가 있게 하여 여러 학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나 考其師友淵源所漸하면 猶未及乎游夏어늘 而曰 筦晏弗及, 伊呂不加 過矣라하더니
그러나 그 스승과 벗의 연원淵源에 내려온 바를 상고해 보면 오히려 자유子游자하子夏에게 미치지 못하는데, 관중管仲안영晏嬰은 그에게 미치지 못하고 이윤伊尹여상呂尙도 그보다 낫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라고 하였다.
至向曾孫龔하야는 篤論君子也 以歆之言爲然하니라
유향劉向증손曾孫 에 이르러서는 의논을 잘하는 군자君子였는데, 유흠劉歆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汲黯 常毁儒하야 面觸弘한대 欲誅之以事하야 乃言上曰 右內史注+[釋義]地志 秦京師爲〈內〉史 師古曰 秦幷天下하고 改立郡縣할새 而京畿所統 時號內史하니 言在內以別於諸郡守也 百官表 內史掌京師 景帝分置左右러니 武帝更名京兆尹하고 左內史 更名左馮翊이라 主爵中尉掌列侯러니 武帝更名右扶風하고 治內史右地하니 與左馮翊, 京兆尹으로 是爲三輔界部中 多貴人宗室하야 難治하니 非素重臣이면 不能任이니
급암汲黯이 항상 유자儒者들을 훼방하여 공손홍公孫弘을 면전에서 배척하니, 공손홍公孫弘이 그를 일로써 죽이고자 하여 마침내 에게 말하기를 “우내사右內史注+[釋義]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나라 경사京師내사內史라 한다.” 하였다.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나라가 천하를 겸병하고 군현郡縣을 고쳐 만들 적에 경기京畿에서 통솔하는 곳을 당시에 내사內史라 이름하였으니, 안에 있어서 여러 군수와 구별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한서漢書》 〈백관표百官表〉에 “내사內史경사京師를 관장한다. 경제景帝좌내사左內史우내사右內史를 나누어 두었는데, 무제武帝가 이름을 고쳐 경조윤京兆尹이라 하고 좌내사左內史를 이름을 고쳐 좌풍익左馮翊이라 하였다. 주작중위主爵中尉열후列侯를 관장하였는데, 무제武帝가 이름을 고쳐 우부풍右扶風이라 하고, 내사內史의 오른쪽 지역을 다스리게 하니, 좌풍익左馮翊경조윤京兆尹과 더불어 이것을 삼보三輔라 한다.” 하였다. 계부界部(구역) 안에는 귀인貴人종실宗室이 많아서 다스리기 어려우니, 평소 중신重臣이 아니면 맡길 수가 없습니다.
請徙黯爲右內史하노이다 從之하다
급암汲黯을 옮겨 우내사右內史로 삼기를 청합니다.” 하자, 이 그 말을 따랐다.
〈出黯本傳〉
- 《사기史記 급암전汲黯傳》에 나옴 -
○ 匈奴 數侵擾朔方이어늘 天子令將軍衛靑等으로 出右北平擊之하야 得右賢裨王注+[釋義]師古曰 裨王 小王也 若裨將然이라 索隱曰 裨 王之偏副也十餘人衆 男女萬五千餘人 畜數十百萬하야 引還至塞하다
흉노匈奴우현왕右賢王이 자주 삭방朔方을 침략하여 소요하자, 천자天子장군將軍 위청衛靑 등으로 하여금 우북평右北平으로 나가서 공격하게 하여 우현왕右賢王비장裨將注+[釋義]안사고顔師古가 말하였다. “비왕裨王은 작은 왕이니, 비장裨將과 같은 것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는 왕의 편부偏副이다.” 하였다. 10여 명과 남녀 1만 5천여 명과 가축 수십, 수백만을 잡아서 이들을 이끌고 돌아와 변방에 이르렀다.
天子使使者하야 持大將軍印하고 卽軍中하야 拜衛靑爲大將軍하고 諸將 皆屬焉하니 尊寵 於群臣 無二注+[釋義]王氏曰 言尊寵之至하야 比於群臣 止一人耳
천자天子사자使者를 시켜서 대장군의 인수를 가지고 군중軍中에 나아가 위청衛靑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여러 장수들을 모두 그에게 소속하게 하니, 높이고 총애함이 여러 신하들 중에 둘도 없었다.注+[釋義]尊寵……無二: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높이고 총애함이 지극해서 여러 신하에게 견줌에 오직 한 사람뿐임을 말한 것이다.”
公卿以下 皆卑奉之호대 獨汲黯 與亢(抗)禮어늘
공경公卿 이하가 모두 자신을 낮추어 그를 받들었으나 유독 급암汲黯만은 그와 대등한 를 행하였다.
人或說黯曰 大將軍 尊重하니 不可以不拜니라 黯曰 以大將軍으로 有揖客이면 反不重耶注+[通鑑要解]言能降貴以禮士 反最爲重也아하니
어떤 사람이 혹 급암汲黯에게 말하기를 “대장군이 높고 귀중하니, 그대는 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니, 급암汲黯이 말하기를 “대장군으로서 읍하는 객이 있다면 도리어 귀중해지지 않겠는가.”注+[通鑑要解]有揖客 반부중야反不重耶:자신의 귀한 신분을 낮추어 선비를 예우하면 자신이 도리어 중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大將軍하고 愈賢黯하야 數請問國家朝廷所疑하고 遇黯 加於平日이러라
대장군이 이 말을 듣고 급암汲黯을 더욱 어질게 여겨서 자주 국가와 조정의 의심스러운 바를 청하여 묻고, 급암汲黯을 대우하기를 평소보다 더하였다.
[新增] 東萊曰
동래東萊(呂祖謙)가 말하였다.
〈先漢 有節義之實而亡其名하니〉 伏節死義之士 何世無之리오마는 顧上之所以養之如何耳
선한先漢(前漢)은 절의節義의 실제는 있었으나 그 이름은 없었으니, 충절을 지키고 의리義理에 죽는 선비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는가마는 윗사람이 이들을 기르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高祖之初 丁公 不忠於項羽어늘 而戮之以徇衆하고 하고 田横 不肯歸漢而自殺이면 則壯其節而爲之流涕하고 魯不下漢이면 則歎其守禮義之國而不忍屠之以兵하야
고조高祖는 초년에 정공丁公항우項羽에게 충성하지 않자 죽여서 여러 사람들에게 조리돌려 보였고, 한신韓信이 스스로 장사壯士라고 칭하자 용서하여 세상 사람들을 격려하였으며, 전횡田横나라에 돌아오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자살하자 그의 절개를 장하게 여겨 눈물을 흘렸고, 나라가 나라에 항복하지 않자 예의禮義를 지키는 나라라고 감탄하여 차마 군대로써 도륙하지 못하였다.
所以培養氣節하고 〈保護風俗하야 以爲後世憑藉之計者 不淺矣
그리하여 기개와 절의를 배양하고 풍속을 보호하여 후세後世에 의지할 계책으로 삼은 것이 적지 않았다.
其後 士大夫皆知節〉自守하야 不爲一時氣焰之所屈이라
그러므로 그 후에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절개를 알고 스스로 지켜서 한때의 대단한 기세에 굴복당하지 않은 것이다.
雋不疑之不肯解劍注+[附註]雋不疑傳 暴勝之請與相見이어늘 不疑佩劍盛服하고 至門下 欲使解劍한대 不疑曰 劍者 君子武備 所以衛身이니 不可解 請退하노라 吏白勝之한대 開閤延請하고 望見不疑하니 容貌尊嚴하고 衣冠甚偉 勝之躧履起迎이라하니 躧履 謂足跟不正納履也 貢禹之不肯脫冠注+[附註]貢禹擧賢良하야 爲河南令이러니 歲餘 以職事 爲府官所責하야 當免冠謝한대 禹曰 冠一免이면 安可復着也리오하고 遂去하니라 不受卒徒唾背注+[附註]昭帝之喪 僦民車러니 延年 增僦直(値)라가 爲怨家所告 延年曰 何面目入牢獄하야 使卒徒唾吾背乎아하고 遂自刎死하니라 以物質之而贖出이라 異時 於母錢之外 復還子錢 謂之僦如田延年 不聽兩吏挾持注+[附註]光旣誅桀後 出入自備하야 吏民當見者 露索去刀兵하야 兩吏挾持호되 望之獨不聽하고 自引出閤이라 聞之하고 告吏勿持하니라如蕭望之 不拜大將軍如汲黯 不屈節於單于如蘇武 其凜凜英風 使人激懦而增氣
준불의雋不疑는 검을 풀려注+[附註]준불의전雋不疑傳〉에 포승지暴勝之가 서로 만나 볼 것을 청하자, 준불의雋不疑가 검을 차고 성복盛服을 입고는 문하門下에 이르렀다. 그에게 을 풀어놓게 하자 준불의雋不疑가 말하기를 “은 군자의 무비武備이다. 몸을 보호하는 것이니, 을 풀 수 없다. 물러갈 것을 청한다.” 하였다. 관리가 포승지暴勝之에게 아뢰자, 합문閤門을 열고 맞이하여 청하고는 준불의雋不疑를 바라보니, 용모가 준엄하고 의관衣冠이 매우 거룩하였다. 포승지暴勝之사리躧履로 일어나 맞이했다 하였으니, 사리躧履는 발에 신을 제대로 신지 못함을 이른다. 하지 않았고 공우貢禹는 관을 벗으려注+[附註]공우貢禹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하남령河南令이 되었는데, 한 해 남짓 만에 직무의 일로 부관府官에게 꾸짖음을 받아 을 벗고 사죄해야 하자, 공우貢禹는 말하기를 “을 한 번 벗으면 어찌 다시 쓸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떠나갔다. 하지 않았으며 병졸들의 업신여김을注+[附註]소제昭帝에 백성들의 수레를 세내었는데, 전연년田延年이 세내는 값을 올렸다가 원한이 있는 집에 의해 고발당하였다. 전연년田延年은 말하기를 “무슨 면목으로 감옥에 들어가서 졸도卒徒들로 하여금 내 등에 침을 뱉게 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는 물건을 빌려 쓰고 그 대신에 돈을 내는 것이다. 후일에 본전本錢 외에 다시 자전子錢(이자)을 갚는 것을 라 하였다. 받지 않은 전연년田延年과 두 아전이 좌우에서 붙잡는 것을注+[附註]곽광霍光상관걸上官桀을 죽인 다음 출입할 때에 스스로 신변을 보호하여, 당연히 뵈어야 할 관리와 백성들도 몸을 드러내고 수색해서 칼과 병기를 제거하게 하였는데, 두 관리가 양쪽에서 붙잡았으나 소망지蕭望之만은 홀로 이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으로 나왔다. 곽광霍光이 이 말을 듣고는 관리에게 지시하여 붙잡아 수색하지 않게 하였다. 따르지 않은 소망지蕭望之대장군大將軍에게 절하지 않은 급암汲黯선우單于에게 절개를 굽히지 않은 소무蘇武는 그 늠름한 풍모가 사람들로 하여금 나약한 자를 격려하고 기개를 더하게 한다.
以至田甲注+[頭註]雖賈人이나 有賢操 始湯爲小吏 與甲爲財錢之交러니 及爲太史하야 而甲責湯行義하니라 賈人也로되 責張湯行義하야 有烈士之風하고 樓護注+[附註]爲人 精辨하고 議論 常依名節하니 聽之者皆竦이라 與谷永으로 俱爲五侯上客하야 皆得驩心하니 長安號曰筆札이요 樓君卿唇舌이라하니 言其見信用也 俠徒也로되 議論常依名節하야 而聽之者 皆竦하니 則其他 可知矣
전갑田甲注+[頭註]전갑田甲은 비록 장사하는 사람이었으나 훌륭한 지조가 있었다. 처음에 장탕張湯이 낮은 관리였을 때에 전갑田甲과 재물을 함께 나누는 친구가 되었는데, 장탕張湯태사太史가 되자 전갑田甲장탕張湯에게 의로운 일을 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장사꾼이었으나 장탕張湯의 행실을 꾸짖어 열사烈士의 풍모가 있었고 누호樓護注+[附註]누호樓護는 사람됨이 정밀하게 분변하고 의논이 항상 명절名節을 따르니,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곡영谷永과 함께 오후五侯상객上客이 되어서 모두 환심을 얻으니, 장안長安에서 이름하기를 “곡자운谷子雲필찰筆札이요 누군경樓君卿의 입술과 혀이다.” 하였는 바, 그들이 신임받음을 말한 것이다. 협객의 무리였으나 의론議論이 항상 명절名節을 따라 그 말을 듣는 자들이 모두 송연竦然하였으니, 그 나머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惟漢世之君 陰有以養其氣하야 不沮不挫로되 而自有以銷其犯上難制之銳
오직 한대漢代의 군주들은 속으로는 그 기개를 길러서 막지 않고 꺾지 않았으나 스스로 그 윗사람을 범하고 제재하기 어려운 날카로운 기세를 사라지게 하였다.
其人亦不以所長自矜하야 而無矯激之名하야
그러므로 그 사람 또한 재능을 스스로 자랑하지 아니하여 과격한 이름이 없었다.
忠而不訐하고 剛而不暴하야 有伏節死義之士어늘
그리하여 충성하면서도 대들지 않고 하면서도 포악하지 아니하여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는 선비가 있었다.
而後世獨以節義之名으로 歸之東京者 葢東京 以節義爲尙故也
그런데 후세에 절의節義의 이름을 오직 동경東京(後漢)에만 돌리는 것은 동경東京절의節義를 숭상하였기 때문이다.
〈惟其所尙者在是 士大夫相尙成風하야 而未免有詭激之患이라
오직 그 숭상한 것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사대부士大夫들이 서로 숭상하여 풍속을 이루어서 괴이하고 과격한 병폐가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
要之컨대 東漢尙節義 不若西漢蓋其實有而名亡也니라
요컨대 동한東漢(後漢)의 절의를 숭상한 것이 서한西漢(前漢)에 실제가 있고 그 이름이 없는 것만 못하다.”
○ 大將軍靑 雖貴 有時侍中 踞厠而視之注+[釋義]王氏曰 厠 音側이니 謂床邊厠耳 或云溷厠이라하니 非也 胡氏曰 亦猶文帝 謂山岸也 仲馮曰 古者 見大臣이면 則御坐爲起하니 然則踞厠者 輕之也하고 丞相弘注+[通鑑要解] 安也 謂閑燕之時也 賢遍切이니 下同이라 或時不冠호되 至如汲黯見하야는 不冠不見也러라
대장군 위청衛靑이 비록 귀하였으나 때로 궁중에서 모실 적에 이 평상가에 걸터앉아서 만나 보았고,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은 음이 측이니, 평상의 가를 이른다. 혹자는 말하기를 측간이라 하니, 잘못이다. 호씨胡氏는 말하기를 ‘또한 문제文帝가 가에 임한 것[臨厠]을 산 언덕이라고 이른 것과 같다.’ 하였다. 중풍仲馮은 말하기를 ‘옛날에 대신大臣을 만나려면 군주가 어좌御座에서 일어났으니, 그렇다면 평상 가에 걸터앉은 것은 가볍게 여긴 것이다.’ 하였다.” 승상 공손홍公孫弘이 사사로이 뵐 적에注+[通鑑要解]은 편안함이니 한가롭고 편안할 때를 이른다. 현편賢遍이니, 아래도 같다. 이 혹 때로 을 쓰지 않았으나, 급암汲黯이 나와서 뵘에 이르러는 을 쓰지 않으면 만나 보지 않았다.
嘗坐武帳注+[釋義]織成帳爲武士之象也 一云置兵하고於帳中이라이러니 前奏事어늘 不冠이라가 望見黯하고 避帷中하야 使人可其奏라하니 其見敬禮如此러라
이 일찍이 무장武帳注+[釋義]장막을 짜서 무사武士의 형상으로 만든 것이다. 일설一說에는 “병사를 설치하고 다섯 가지 병기를 장막 안에 늘어놓는 것이다.” 하였다. 가운데에 앉아 있었는데, 급암汲黯이 앞으로 나와 일을 아뢰려 하자, 을 쓰지 않고 있다가 급암汲黯을 바라보고는 장막 안으로 피하여 사람을 시켜 그가 아뢴 것을 허락한다 하였으니, 공경과 예우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出衛靑, 汲黯傳〉
- 《사기史記 위청전衛靑傳, 급암전汲黯傳》에 나옴 -
東萊呂氏曰
동래여씨東萊呂氏가 말하였다.
漢武帝踞厠見衛靑하고 不冠見公孫弘호되 惟於汲黯 不冠則不敢見하니 其胸中涇渭注+[頭註]涇濁渭淸이라 亦明矣
한무제漢武帝가 평상에 걸터앉아서 위청衛靑을 만나 보았고 을 쓰지 않고 공손홍公孫弘을 만나 보았으나, 오직 급암汲黯만은 을 쓰지 않으면 감히 만나 보지 않았으니, 그 가슴속의 경위涇渭注+[頭註]경수涇水는 탁하고, 위수渭水는 맑다. 또한 분명하였다.
이나 其所尊 非所任이요 所任 非所尊이니 此所以有尊賢之名而無尊賢之效也
그러나 높인 바가 맡긴 바가 아니었고, 맡긴 바가 높인 바가 아니었으니, 이 때문에 현자賢者를 높였다는 이름이 있었으나 현자賢者를 높인 실효가 없는 것이다.
人之常情 愈敬則愈疎하고 愈狎則愈親이라
사람의 일반적인 심정은 공경하면 할수록 더욱 소원해지고 가까이하면 할수록 더욱 친해진다.
武帝之於君子 外合而中離하고 武帝之於小人 外薄而中厚어늘 世反謂武帝能尊汲黯而賤弘靑이라하니 亦過矣
무제武帝군자君子에 대해서 겉으로는 좋아하였으나 마음은 괴리되었고 소인小人에 대해서 겉으로는 박대하였으나 속으로는 친하였는데, 세상에서는 도리어 무제武帝급암汲黯은 높이고 공손홍公孫弘위청衛靑을 천히 여겼다고 말하니, 또한 잘못이다.
雖然이나 君子之交 淡若水하니 始雖疎而終必親이요 小人之交 甘若醴하니 始雖親而終必疎
그러나 군자君子의 사귐은 담박하기가 물과 같으니 처음에는 비록 소원하나 끝에는 반드시 친해지고, 소인小人의 사귐은 달기가 단술과 같으니 처음에는 비록 친하나 끝에는 반드시 소원해진다.
小人之事君 未言而唯唯하고 旣言而諾諾하니 固足以深結人主之驩이라
소인小人이 군주를 섬길 적에 군주가 말하기 전에는 ‘예예’ 하고, 이미 말한 뒤에는 ‘옳소 옳소’ 하고 찬동하니, 진실로 군주의 환심을 깊이 맺을 수가 있다.
이나 權利相激이면 情見詐明하야 其不爲人君所窺者 鮮矣
그러나 권세와 이해관계가 서로 격돌하면 실정實情이 나타나고 속임수가 드러나서 군주에게 간파당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
君子 正言格論하야 初若落落而難合이나 至於臨大節, 蒙大難하야 終始不渝然後 人主始知其可親也
군자君子는 바른말을 하고 바른 의논을 하여 처음에는 낙락落落(남과 서로 어울리지 않음)해서 부합하기 어려울 듯하나, 큰일에 임하고 큰 어려움을 당하여 시종 변치 않음에 이른 뒤에야 군주가 비로소 그가 친할 만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武帝腹心帷幄之臣 未可一二數로되 及論社稷臣하야는 獨許汲黯而不許弘靑輩하니 豈非厭諂諛之容悅而悟純朴之士終可信歟
무제武帝심복心腹으로 유악帷幄에서 계책을 세우던 신하가 많아서 한두 명으로 셀 수 없었으나 사직社稷의 신하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오직 급암汲黯만을 허여하고 공손홍公孫弘위청衛靑 등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이는 어찌 아첨하여 군주를 기쁘게 하는 것을 싫어하고 순박한 선비가 끝내 믿을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 아니겠는가.
使其天假之年이면 吾知 不以賜霍光而賜汲黯矣로라
만일 하늘이 급암汲黯의 수명을 연장해 주었다면 무제武帝주공周公을 그린 그림을 곽광霍光에게 주지 않고 급암汲黯에게 주었을 것임을 나는 믿는다.”
○ 夏六月 詔曰 蓋聞導民以禮하고 風之以樂注+[釋義]王氏曰 風如字하니 風也, 敎也 風以動之하고 敎以化之 是也이라하니
여름 6월에 조서를 내리기를 “내 들으니 백성을 로 인도하고 으로 교화한다고 하였다.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본자本字와 같이 읽으니, 은 바람이고 가르침이니, 바람으로 움직이게 하고 가르침으로 교화시키는 것이 이것이다.”
今禮壞樂崩이라 朕甚閔焉이로라
지금 이 붕괴되었으니, 짐이 매우 안타깝게 여기노라.
其令禮官으로 勸學興禮注+[頭註]謂擧遺逸之文而興禮樂이라하야 以爲天下先하라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학문을 권장하고 를 일으켜서注+[頭註]산일散逸된 글을 들고 예악禮樂을 일으킴을 이른다. 천하에 솔선이 되게 하라.” 하였다.
於是 丞相弘等 奏請호되 爲博士官하야 置弟子五十人하야 復其身하고
이에 승상 공손홍公孫弘 등이 주청하기를 “박사관博士官을 만들어서 제자 50명을 두어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고,
太常 擇民年十八已上儀狀端正者하야 補博士弟子하고 詣太常受業호되
태상太常이 백성 중에 나이 18세 이상으로서 의장儀狀(용모)이 단정한 자를 가려서 박사博士제자弟子보임補任하여 태상太常에게 나아가 수업을 받게 하되
能通一藝以上이어든 補文學掌故注+[釋義]掌故 治禮之官이니 主故事者 以有文學習禮儀者爲之 故曰文學掌故하고 卽有秀才異等이어든 輒以名聞하소서
한 가지 경서經書 이상에 능통한 자가 있으면 문학장고文學掌故注+[釋義]장고掌故를 다스리는 관원이니, 고사故事를 주관하는 자이다. 문학文學이 있고 예의禮儀를 익힌 자로 하였기 때문에 문학장고文學掌故라 한 것이다. 보임하고, 만약 뛰어난 재주로 남달리 특이한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이름을 보고하게 하소서.” 하였다.
從之하니 自此 公卿大夫士吏 彬彬多文學之士矣러라
이 그 말을 따르니, 이로부터 대부大夫와 관리들이 빈빈彬彬하게 문학文學하는 선비가 많았다.
〈出儒林傳序〉
- 《한서漢書 유림전서儒林傳序》에 나옴 -
역주
역주1 公孫弘……封平津侯 : 漢나라 초기에는 侯에 봉해진 사람이 아니면 승상에 임명하지 않았는데, 승상이 된 뒤에 侯에 봉해진 것은 公孫弘이 처음이었다.
역주2 性意忌 : 意는 疑와 통하는 바, 뒤에 ‘意多忌害人’이라 한 것을 보면 意자를 ‘뜻’으로 해석해야 할 듯하나 앞에 性자가 있으므로 ‘의심’으로 해석하였다.
역주3 二千石 : 漢나라의 제도에 郡守와 國相을 모두 二千石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膠西王의 國相을 가리킨다.
역주4 下帷發憤 潛心大業 : 董仲舒는 휘장을 내리고 분발하여 큰 사업에 마음을 두어서 3년 동안 園圃를 내다보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역주5 右賢王 : 匈奴의 관명으로 左賢王과 右賢王이 있는데, 左賢王의 다음이다.
역주6 韓信……貸之以激世 : 韓信에 대한 기록은 분명치 않다. 《通鑑諺解》와 《群書考索續集》에는 ‘鄭衆不奉詔名籍’으로 되어 있으나 鄭衆 역시 後漢 사람으로 高祖와는 시대가 맞지 않는다. 鄭衆의 일은 《韻府群玉》에는 ‘不肯名籍’이라는 제목 아래에 鄭當時의 선조인 鄭君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鄭君은 일찍이 項羽를 섬겼는데, 高祖는 예전의 項羽의 신하였던 자들에게 모두 명단을 써내게 하였으나 鄭君만은 홀로 따르지 않자, 그 후 명단을 써낸 자들은 모두 大夫를 삼아주었으나 鄭君은 축출하였다. 이 내용이 《漢書》 〈鄭當時傳〉에 보이는 바, 이 역시 뒷구의 내용과 맞지 않으므로 원본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주7 : 子雲은 谷永의 字이고 君卿은 樓護의 字이다.
역주8 臨厠 : 《史記》 〈張釋之傳〉에 ‘從行至霜陵 居北臨厠’이라고 보이는데, 강 언덕의 기슭을 厠이라 하는 바, 곧 ‘가’임을 이른 것이다.
역주9 : 현
역주10 五兵 : 다섯 가지 병기는 矛, 戟, 弓, 劍, 戈를 이른다.
역주11 : 현
역주12 涇渭 : 涇水는 탁하고 渭水는 맑다 하여 옳고 그름과 淸濁에 대한 분별이 엄격함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역주13 周公之圖 : 武帝는 鉤弋夫人의 아들인 弗陵을 사랑하여 마음속으로 그를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나이가 어리고 어미가 젊다 하여 오랫동안 주저하였는데, 여러 신하들 중에 霍光만이 충성스럽고 후중하여 큰일을 맡길 수 있다 하여 宦官을 시켜 周公이 成王을 업고 제후들에게 조회받는 그림을 그리게 하여 霍光에게 주었는 바, 이 내용은 뒤의 後元 元年(B.C.88)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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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사]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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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사] 5년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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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사] 5년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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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사] 5년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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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사] 5년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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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사] 5년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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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사]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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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사] 5년 315

통감절요(2)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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