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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9)

통감절요(9)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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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唐天祐四年이라 〈四月以後 梁太祖皇帝朱晃開平元年이요 西川稱唐天復七年하니라
○ 是歲 唐亡이라
梁, 晉, 岐, 淮南, 西川凡五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 福建, 嶺南凡五鎭이라
春三月 唐昭宣帝降御札하야 禪位于梁한대 梁王 名晃注+[釋義] 平聲이요 胡廣反이라 하고 卽皇帝位하야 國號이라하고 奉帝爲濟陰王注+[頭註]遷于曹州하야 圍之以棘하고 使甲士守之下라가 戊戌年 弑之하다하다
○ 是時 惟河東, 鳳翔, 淮南注+[頭註]河東 李克用이요 鳳翔 李茂貞이요 淮南 王偓이라 稱天祐하고 西川注+[頭註]王建이라 稱天復注+[通鑑要解]天祐, 天復 竝昭宗年號 先天復이요 後天祐 하니라 年號하고 餘皆禀梁正朔하야 稱臣奉貢이러라
○ 蜀王 遺晉王書云 請各帝一方하야 俟朱溫旣平하야 乃訪唐宗室立之하고 退歸藩服이어늘 晉王 復書不許曰 誓於此生 靡敢失節호리라
〈李克用 平黃巢하야 有大功하니 唐昭宗 封爲晉王이라
其子存勖 襲位하야 遂滅梁國하고 號唐하니 卽莊宗也
蜀王 王建이니 唐昭宗 封爲蜀王이러니 後爲唐莊宗所滅하고 孟知祥 復據其地라가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 岐王 治軍甚寬하고 待士卒簡易하니 由是 衆心悅服이라이나 御軍無紀律이러라
及聞唐亡이로되 以兵地蹙이라하야 不敢稱帝하다
〈岐王李茂貞 據鳳翔하니 本姓이요 文通이라
僖宗時 以功賜姓名하고 昭宗時 封岐王하고 唐莊宗 改封秦王이러니 至唐明宗時하야 國除하니라
○ 梁 以武安節度使馬殷으로 爲楚王하다
〈馬殷 據潭州하야 盡有湖南之地러니 至後周太祖朝하야 爲南唐所滅하니라
○ 以吳王 爲吳越王하다
〈錢鏐據杭州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 以淸海節度使劉隱으로 爲南海王하다
〈據廣州하야 盡有嶺表之地하고 後改號漢이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 以威武節度使王審知 爲閩王하다
〈黃巢亂 審知據福州하야 盡有閩嶺五州하고 王延政 居建州하야 號殷이러니 晉齊王時 南唐滅之하니라
以權知荊南留後高季昌으로 爲節度使하다
〈據江陵이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 九月 蜀王 卽皇帝位하야 國號 大蜀이라하다
○ 梁遣保平節度使康懷貞하야 將兵八萬하고 攻潞州하니 晉昭義節度使李嗣昭 閉城拒守어늘 懷貞 晝夜攻之호되 半月不拔이라
乃於潞州城下 更築重城하야 內以防奔突하고 外以拒援兵하고 謂之夾注+[頭註] 本作하니 木柵也 坑也 遶城水 而守之하다


정묘(907) 나라 천우天祐 4년 - 4월 이후는 나라 태조황제太祖皇帝 주황朱晃개평開平 원년元年이고, 서천西川나라 천복天復 7년을 칭하였다.
○ 이해에 나라가 망하였다.
회남淮南서천西川 등 모두 다섯 나라이고, 오월吳越호남湖南형남荊南복건福建영남嶺南 등 모두 다섯 이다. -
봄 3월에 나라 소선제昭宣帝어찰御札을 내려 나라에 황제의 지위를 선양禪讓하자, 양왕梁王이 이름을 으로 고치고注+[釋義]평성平聲(고침)이고, 호광반胡廣反(황)이다.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이라 하고 소선제昭宣帝를 받들어 제음왕濟陰王으로 삼았다.注+[頭註]소선제昭宣帝조주曹州로 옮겨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갑사甲士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다가 무술년戊戌年(938)에 시해하였다.
이때에 오직 하동河東, 봉상鳳翔, 회남淮南만이注+[頭註]하동河東, 봉상鳳翔, 회남淮南:하동河東이극용李克用이고, 봉상鳳翔이무정李茂貞이고, 회남淮南왕악王偓이다. 천우天祐의 연호를 칭하였고 서천西川注+[頭註]서천西川왕건王建이다. 천복天復의 연호를 칭하였으며,注+[通鑑要解]천우天祐천복天復은 모두 소종昭宗의 연호이니, 천복天復이 먼저이고 천우天祐가 뒤이다. 소선제昭宣帝연호年號가 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나라의 정삭正朔을 받아서 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쳤다.
촉왕蜀王(王建)이 진왕晉王(李克用)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청컨대 각각 한 지방의 황제가 되어 주온朱溫을 평정하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나라의 종실을 찾아 세우고 물러나 번신藩臣으로 돌아가자.” 하니, 진왕晉王이 답서에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 하였다.
- 이극용李克用황소黃巢를 평정하여 큰 공이 있으니, 나라 소종昭宗진왕晉王으로 봉하였다.
뒤에 그의 아들 존욱存勖이 왕위를 세습하여 마침내 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國號(後唐)이라고 하니, 바로 장종莊宗이다.
촉왕蜀王왕건王建이니, 나라 소종昭宗촉왕蜀王으로 봉하였는데 뒤에 후당後唐장종莊宗에게 멸망당하였으며, 맹지상孟知祥이 다시 이 땅을 점거했다가 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기왕岐王(李茂貞)이 군대를 다스리기를 매우 너그럽게 하고 사졸들을 대하기를 소탈하고 평이하게 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기뻐하고 복종하였으나 군대를 통솔함에 기율紀律이 없었다.
나라가 망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군대가 지치고 영토가 좁다 하여 감히 황제를 칭하지 못하였다.
- 기왕岐王 이무정李茂貞봉상鳳翔을 점거하니, 본성本姓이고 이름은 문통文通이다.
희종僖宗 때에 공을 세워 이무정李茂貞이라는 성명을 하사받았고, 소종昭宗 때에 기왕岐王에 봉해졌으며, 후당後唐장종莊宗진왕秦王으로 고쳐서 봉하였는데, 후당後唐 명종明宗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나라가 무안절도사武安節度使 마은馬殷초왕楚王으로 삼았다.
- 마은馬殷담주潭州를 점거하여 호남湖南 지역을 모두 소유하였는데, 후주後周 태조太祖 때에 이르러 남당南唐에게 멸망당하였다. -
오왕吳王 전류錢鏐오월왕吳越王으로 삼았다.
- 전류錢鏐항주杭州를 점거하였는데, 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청해절도사淸海節度使 유은劉隱남해왕南海王으로 삼았다.
- 유은劉隱광주廣州를 점거하여 영표嶺表(嶺外) 지역을 모두 소유하고 뒤에 국호國號이라고 고쳤는데, 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위무절도사威武節度使 왕심지王審知민왕閩王으로 삼았다.
- 황소黃巢의 난리에 왕심지王審知복주福州를 점거하여 민중閩中영남嶺南의 다섯 를 모두 소유하였고, 뒤에 왕연정王延政건주建州에 있으면서 이라고 이름하였는데, 후진後晉제왕齊王 때에 남당南唐이 멸망시켰다. -
권지형남유후權知荊南留後 고계창高季昌절도사節度使로 삼았다.
- 고계창高季昌강릉江陵을 점거하였는데, 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9월에 촉왕蜀王(王建)이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촉大蜀이라 하였다.
나라가 보평절도사保平節度使 강회정康懷貞을 보내어 8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노주潞州를 공격하게 하니, 나라 소의절도사昭義節度使 이사소李嗣昭가 성문을 닫고 항거하며 지켰는데, 강회정康懷貞이 밤낮으로 공격하였으나 보름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하였다.
이에 노주성潞州城 아래에 다시 겹성[重城]을 쌓아 안으로는 적이 달려와 충돌하는 것을 막고 밖으로는 구원병이 오는 것을 막고서 이것을 협채참夾寨塹이라 이르며注+[頭註]는 본래 로 쓰니, 목책이다. (참호)은 구덩이이니, 성 주위를 둘러싼 물이다. 지켰다.


역주
역주1 : 경
역주2 昭宣帝 未有年號 : 임금이 즉위하여 해를 넘기면 元年을 바꾸는 것이 禮이다. 昭宣帝(哀帝)가 천자의 자리를 이어서 이미 해를 넘겼는데도 오히려 天祐라고 칭하였으니, 이는 원년도 고치지 않고 연호도 바꾸지 않은 것이다. 이는 朱全忠이 昭宣帝를 임금으로 받들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改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역주3 : 리
역주4 : 류
역주5 : 채
역주6 : 채

통감절요(9)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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