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月
에 詔簡甲卒五萬
注+[頭註]簡은 與揀通이라하야 給右將軍到彦之
하고 遣使告魏主曰 河南
은 舊是宋土
러니 이라
今當修復舊境
하리니 不關河北
이니라 魏主大怒曰 我生髮未燥
注+[釋義]燥는 乾也라하야 已聞河南是我地
어늘 此豈可得
이리오
必若進軍
인대 今當權斂戍
注+[通鑑要解]魏主大怒하야 欲擊之어늘 浩乃陳天時不利하야 하니 明君은 順三才而發之라 故萬全云云하니 當權斂戍也라하니라相避
라가 須冬寒地凍
注+[頭註]須는 待也라하고 河冰堅合
하야 自更取之
호리라
到彦之自淮入泗
하야 至須昌
하야 乃
河西上
注+[原註]逆流而上曰泝라한대
魏主以河南四鎭
注+[頭註]碻磝, 滑臺, 洛陽, 虎牢라兵少
라하야 命諸軍
하야 收衆北渡
하니 碻磝, 滑臺, 洛陽, 虎牢戍兵
이 皆棄城去
라
於是에 司兗이 旣平이어늘 諸軍이 皆喜호되 王仲德이 獨有憂色하야 曰 諸賢이 不諳北土情僞하니 必墮其計하리라
虜雖
仁義不足이나 而凶狡有餘注+[原註]狡는 狡獪也라하니 今斂戍北歸
는 必幷力完聚
라
王仲德이 身爲副帥하니 見可知難하야 進退在己者也라 知其不可면 則宜遍白諸將하고 悉以上聞이라
使之知彼己形勢하야 早爲善後之圖면 斯不負委寄之意矣어늘 乃私言之하고 而不告于上하야 知難而不退하야 竟以取敗하니 非忠臣也니라
十月에 宋到彦之等이 沿河置守어늘 魏河北諸軍이 會於七女津하야 進攻虎牢拔之하니 尹沖及滎陽太守崔模 降魏하다
○ 十一月에 宋이 加檀道濟都督征討諸軍事하야 帥衆伐魏하니 魏長孫道生等이 引兵而南이라
到彦之 聞洛陽, 虎牢不守하고 引兵還하니 靑, 兗이 大擾라
경오(430) - 송宋나라 원가元嘉 7년이고, 위魏나라 신가神䴥 3년이다. -
송주宋主가
하남河南 지방을 회복
注+[頭註]회恢는 큼이다. 할 뜻이 있었다.
3월에 명하여
갑졸甲卒 5만 명을 선발
注+[頭註]간자簡字는 간자揀字와 통한다. 하여
우장군右將軍 도언지到彦之에게 주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위주魏主에게 고하기를 “
하남河南은 예로부터
송宋나라 영토였는데 중간에 저들에게 침략을 당하였다.
이제 마땅히 옛 영토를 수복하려는 것일 뿐이니, 너희
하북河北의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니,
위주魏主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태어나서 머리털이 채 마르기
注+[釋義]조燥는 마름이다. 전부터 이미
하남河南은 우리 영토라고 들었는데, 이제 와서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만약 저들이 반드시 진군하여
공취攻取하려 한다면 이제 마땅히 우리는 잠시 지키는 병사들을 거두어
注+[通鑑要解]위魏나라 태무제太武帝가 크게 노하여 송宋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최호崔浩가 마침내 아뢰기를 “천시天時가 불리하여 진군進軍하면 다섯 가지 패할 징조가 있으니, 현명한 군주는 천天‧지地‧인人 삼재三才를 따라 행하므로 만전萬全한 것입니다. …… 이제 마땅히 지키는 병사들을 잠시 거두십시오.” 하였다. 피했다가 겨울철에 날씨가 추워져서 땅이 얼고
하수河水에 얼음이 단단히 얼기를 기다려
注+[頭註]수須는 기다림이다. 그때 다시
공취攻取하겠다.” 하였다.
도언지到彦之가
회수淮水로부터
사수泗水로 들어가
수창須昌에 이르러서 마침내
황하黃河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갔다.
注+[原註]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소泝라 한다.
위주魏主가
하남河南의 네 진영
注+[頭註]네 진鎭은 확오碻磝‧활대滑臺‧낙양洛陽‧호뢰虎牢이다. 에 병력이 적다고 해서
제군諸軍에 명하여 무리를 거두어 북쪽으로 건너오게 하니,
확오碻磝‧
활대滑臺‧
낙양洛陽‧
호뢰虎牢를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성城을 버리고 떠났다.
이에 사주司州와 연주兗州가 이미 평정되자 제군諸軍이 모두 기뻐하였으나 왕중덕王仲德만은 홀로 근심하는 기색을 띠며 말하기를 “제현諸賢은 북쪽 지방 사람의 진위眞僞(사정)를 알지 못하니, 반드시 그들의 계책에 넘어갈 것이다.
오랑캐들이
인의仁義는 부족하나 흉악하고 교활함
注+[原註]교狡는 교활함이다.은 충분하니, 이제 저들이 지키는 병사들을 거두어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은 반드시 힘을 합하고 한군데로 모이는 것이다.
만약 황하에 얼음이 얼고 나면 장차 다시 남쪽으로 내려올 것이니, 어찌 이것을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왕중덕王仲德은 부원수副元帥의 몸으로 가능함을 보면 전진하고 어려움을 알면 후퇴하여 전진하고 후퇴함이 자기에게 달려 있는 자였으니, 싸움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마땅히 여러 장수들에게 두루 아뢰고 모두 다 임금에게 보고했어야 한다.
문제文帝는 직접 만기萬機를 결단하였고 또 어두운 군주가 아니었으니, 진실로 충언忠言을 올릴 수 있는 자였다.
문제文帝로 하여금 피아彼我의 형세를 알게 해서 뒷갈망을 잘할 계책을 일찍 세우게 했더라면 임무를 맡기고 부탁한 뜻을 저버리지 않았을 터인데, 마침내 사사로이 말하고 군주에게는 아뢰지 않아 어려움을 알고도 후퇴하지 않아서 끝내 패망함을 취하였으니, 충신이 아니다.”
10월에 송宋나라 도언지到彦之 등이 황하黃河를 따라 수비하는 병력을 배치하였는데, 위魏나라 하북河北의 여러 군사들이 칠녀진七女津에 집결해서 호뢰虎牢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니, 윤충尹沖과 형양태수滎陽太守 최모崔模가 위魏나라에 항복하였다.
○ 11월에 송宋나라가 단도제檀道濟에게 도독정토제군사都督征討諸軍事를 가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위魏나라를 공격하게 하니, 위魏나라 장손도생長孫道生 등이 군대를 이끌고 황하黃河를 건너 남쪽으로 갔다.
도언지到彦之가 낙양洛陽과 호뢰虎牢가 지켜지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니, 청주靑州와 연주兗州가 크게 소요하였다.